205화. 전사의 시험(2)
레인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주위를 죽 둘러보았다.
‘이런 경험은 또 오랜만이군.’
주위 사방을 둘러싼 주술 전사들. 각각 자신의 위치를 점하고 주술 문신의 힘을 끌어올린 채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레인이 그림자로부터 검 한 자루를 뽑아 들며 생각했다.
‘진형의 축을 맡은 건 저 녀석인가.’
첫 번째 시험에서 상대했던 묘인족 창술사. 그가 어느새 부상을 회복하고 부족을 이끌고 있었다. 애초에 그렇게 큰 부상을 입지 않도록 조절했으니 당연하다고 할까.
‘진법에 완전히 갇힌 상황이라.’
전생에는 이런 상황을 많이 겪었다. 웬만해선 완벽하게 진형이 갖춰지기 전에 적들을 분쇄했지만, 상황이 잘 풀리지 않아 진형에 갇힌 채 안쪽에서 그것을 깨부숴야 했던 경험도 많았다.
“흠.”
이들의 진형을 보자마자 든 생각. 이 진법, 어째 중원에서 겪었던 것들과 상당히 흡사하다. 분명 다른 점도 많지만, 기본적인 토대는 같다.
오랜 훈련을 통해 유기적으로 맞물려 움직이는 게 가능한 전사의 집단. 진형을 이루는 구성원의 경지는 일류에서 초인까지 다양하지만, 그들의 힘이 조화됨으로써 생겨나는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일 터.
이 순간, 지금껏 해왔던 생각에 확신이 더해졌다.
‘처음 로난을 봤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역시 이 주술 전사라는 놈들에겐 동공보다 좌공을 익히게 하는 편이 효율적일 것 같다.’
그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대족장이 오라가 가득 실린 외침을 토해냈다.
“시작!”
둥둥둥둥둥둥!
요란한 북소리가 울렸다.
곧바로, 레인을 향해 진형이 몰아쳐 왔다. 정면으로 달려드는 이는 셋. 예의 그 창술사와 그 뒤를 보조하는 초일류 전사 둘이었다.
카카카카캉!
순식간에 수십 차례에 달하는 공방을 주고받았다.
레인이 검을 크게 휘둘러 상대를 물러나게 하려는 찰나, 뒤쪽에 불쑥 나타난 한 묘인족 여성이 단검으로 등을 노렸다.
촤악!
레인이 내딛던 발을 축으로 단숨에 신형을 띄웠다. 공중제비를 돌아 오히려 여인의 뒤편으로 안착, 팔꿈치를 휘둘러 여인의 뒷목을 가격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찔러 들어오는 병장기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신형을 띄워야만 했다.
“쯧.”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진형은 이게 귀찮다. 결정적인 공격을 가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큰 기술을 써서 단숨에 진형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저들의 견제를 떨치고 그만한 기술을 펼치려면 고생깨나 해야 할 것 같았다.
정령술을 이용해 아예 신형을 더욱 높이 띄울까 고민하던 레인은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어느새 공중으로 도약한 묘인족들이 사방에서 검격을 찔러오고 있었기에.
“흡.”
카카카카카카칵!
발 디딜 공간도 없는 허공에서 억지로 신형을 뒤틀어 모든 공격을 쳐낸 레인에게, 곧바로 아래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초인 창술사가 찌르기를 날려왔다. 레인은 발끝에 내력을 집중해 창날을 비스듬하게 올려 찼다.
카앙!
“!”
절묘하기 짝이 없는 받아치기. 창이 잠시 물러난 타이밍에 맞춰 레인이 천근추로 지면에 내려섰다.
레인은 창날이 밀려난 반동을 이용해 창대로 이쪽을 후려치려 드는 창술사에게 접근, 그의 간격 안쪽으로 단숨에 파고들었다.
촤악!
곧바로 주위 사방을 찔러 들어오는 초일류 전사들의 검격.
검강이 실린 것은 물론이고, 주술로 인해 위력이 증폭되기까지 했다. 설사 몸 전체에 기막을 두르는 게 가능한 초인일지라도 이 합격을 몸으로 때울 수는 없으리라.
레인이 한순간에 몸을 낮게 숙였다. 그리곤 손으로 바닥을 짚고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으로 추가 공격을 모조리 회피했다.
콰득!
물러남과 동시에 발길질을 날렸으나 창대에 가로막혔다. 레인은 미련 없이 그 반동으로 더욱 크게 뒤로 물러났다.
애초부터 타격을 입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진형의 축이 되는 묘인족 창술사와 일시적으로 거리를 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레인의 등이 막 뒤를 공격하려던 묘인족 여성의 상반신에 맞닿았다. 그녀가 갑작스러운 상대의 접근에 당황하던 때, 그가 오른발을 축으로 단숨에 신형을 뒤틀었다.
철산고.
쩌엉!
여인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레인이 곧바로 그 빈틈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진형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생각인지 묘인족 창술사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공격을 날려왔다. 퇴로를 가로막듯 초일류 전사들이 검강을 뿌렸다.
‘쯧.’
기껏 빈틈을 만들었건만, 금세 메워져 버렸다. 생각보다 진형이 훨씬 더 촘촘했다. 아무래도 이쪽 세계의 검성, 검존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진형이라 그런지 집요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큰 기술 두세 번이면 무너질 진형이건만, 도저히 틈을 낼 수가 없었다. 레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창술사의 공격을 받아냈다.
콰가가각!
‘억지로 위험을 감수하며 돌파구를 찾아낼 바에야, 차라리 이쪽에서 장기전으로 몰아간다.’
그가 지금껏 머릿속으로 세워 뒀던 전략을 전부 철회하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다. 누군가 들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며 타박했을 황당무계한 전략을.
오히려 이쪽에서 장기전으로 몰아가겠다니. 다 대 일 대련에서 개인 쪽이 할 법한 생각이 아니다.
애초에 이들이 구축한 진형 자체가 검성, 혹은 검존을 말려 죽이는 데 그 목적을 두는 종류의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맞불을 놓겠다고?
그 누구도 이런 황당무계한 계획을 세울 수는 없다. 레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어디 해보자. 누가 먼저 지치는지. 누가 먼저 무너지는지.’
레인이 사납게 웃으며 발을 굴렀다. 단숨에 공중으로 치솟은 그의 신형을 대기하고 있던 전사들이 주술 문신의 힘을 빌려 추격했다.
* * *
‘뭐지?’
흑묘족 최강의 전사, 창술사 ‘라그란’은 위화감을 느꼈다.
위화감의 원인은 금세 밝혀졌다. 눈앞의 사내의 움직임이 변했다. 공격적인 움직임에서, 수비적인 움직임으로.
‘진형을 무리해서 깨부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장기전을 택하겠다고?’
제정신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무모한 결정이었다.
문득 실망감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대단한 위압감을 내뿜던 사내가, 겨우 이 정도로 판단력이 흐려졌단 말인가?
눈앞의 사내가 몸에 기막을 두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어렴풋이 이렇게 될 거라는 생각은 했다. 그래도 상상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건만, 결국 이 정도의 인물이었던가.
‘이쪽이 급할 이유는 없다.’
그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기로 했다. 장기전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성을 차분하게 유지하고 실수를 최소화하면, 결국 상대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유리한 쪽은 이쪽이다.
현 대족장조차도 두 번째 시험을 끝까지 통과하지 못하고 세 부족을 격파하는 데에서 그쳤다. 체력적으로, 육체적으로 한계를 맞이한 것이다.
확실히 시험의 규칙에는 ‘일정 시간 이상 견디면 승리’라는 내용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내용에 불과했다. 그 ‘일정 시간’이 무려 10시간에 달했으니까.
놈은 기회를 노려 단숨에 승부를 봤어야 했다. 몰아치고 몰아쳐 억지로 진형에 빈틈을 만들어낸 뒤, 한순간에 가진 힘을 폭발시켰어야 했다. 저렇게 소극적인 자세를 보일 게 아니라.
라그란은 승리를 확신했다.
* * *
전투가 시작된 지 세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라그란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왜 안 지쳐?!’
아니, ‘저게’ 그렇게나 격렬한 전투를 세 시간 가까이 지속한 사람의 움직임이라고? 말이 되질 않지 않은가!
이쪽은 다수다. 서로 번갈아 상대를 압박하며 체력의 소모도 최소화해왔다. 딱히 누군가 큰 실수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먼저 지쳐가는 게 이쪽이란 말인가.
그로부터 두 시간이 더 지나,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몰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전사 중 일부가 결국 한계를 맞이했다. 한동안 그들의 공백으로 인한 빈틈을 다른 전사들이 메웠으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한순간에 상대의 움직임이 돌변했다. 수비적인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거친 공격성을 드러냈다.
거칠게 전사들을 몰아치는가 싶던 그가, 한순간의 빈틈을 틈타 높게 도약했다. 이어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줄기를 밟고 연속해서 도약, 도약, 도약.
‘끝장이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라그란이 숨을 들이켰다.
대지로 떨어져 내리는 사내의 발목을 휘감고 올라가는 백광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압도적인 힘의 여파가 대체 얼마나 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우와악!”
“커헉!”
대지가 통째로 뒤집어 졌다. 그 넓은 무대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단숨에 붕괴되는 진형. 라그란은 그 사이를 순식간에 주파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사내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곤 포효를 내지르며 마주 달려들었다.
콰드득!
오래지 않아, 결착이 났다.
* * *
“후우.”
레인이 가만히 서서 숨을 골랐다. 주위에선 쓰러진 묘인족 전사들을 들것으로 실어 나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는 가볍게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장기전이 옳은 선택이다.’
공간검이나 사슬낫 아티펙트의 활용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그 두 아티펙트는 이 시험에 적합하지 않았다.
만일 상대측이 진형을 갖추기도 전에 이쪽이 선수를 쳐서 쓸어버리는 상황이었다면, 두 아티펙트가 굉장히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 전사의 시험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지닌 종류의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미 진형에 갇힌 상태로 그 두 아티펙트를 활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단기 결전으로 몰아가 억지로 진형을 깨부수자니, 그건 불확실성이 너무 높은 방안이고.’
한두 부족을 상대하는 것으로 끝이라면 그 방안도 나쁘지 않을지 몰랐다. 그게 아니라서 문제지. 이후로 상대해야 할 부족이 여섯이나 더 남은 상황이었다.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승리할 방법이 있는데 그것을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레인의 목표는 대족장처럼 그저 적당히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체력의 소모가 크군. 내력만큼은 문제가 없지만.’
체력과 정신력이 고갈되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번 시험을 치르는 동안엔 주어진 휴식 시간을 활용해야겠어. 두 부족을 처리할 때마다 한 번씩.’
조금 빠듯하겠지만, 그 정도면 어떻게든 시험을 통과하는 게 가능할 듯했다.
그가 한참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 와중 대족장이 물어왔다.
“바로 이어서 시험을 치를 생각인가? 아니면 휴식을 취할 건가?”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지.”
“그렇다면 우선 자리를 옮기지. 그곳은 너무 파괴의 흔적이 심해서 연속해서 시험을 치르기엔 부적합하군.”
레인과 수인족 전사들이 이내 자리를 옮겼다. 앞서와 같이 레인이 무대의 중앙에 서고, 그 주위를 호인족 전사들이 포위하듯 둘러쌌다.
“시작!”
둥둥둥둥둥둥!
레인은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수십의 호인족 전사들을 둘러보며 차분히 검을 겨눴다.
두 번째 다 대 일 대련이 마무리되는 데엔 여섯 시간이 걸렸다.
* * *
두 번째 대련을 마무리한 레인은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는 곧바로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영약 하나를 삼키고 운기행공에 몰입했다.
주어진 휴식 시간은 세 시간. 레인은 그 시간을 꽉꽉 채워 컨디션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데에만 열중했다.
높은 경지와 영약, 그리고 최상위 심법이 빛을 발했다. 다시 시험을 재개하게 되었을 즈음엔, 그의 컨디션은 완전히 제 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세 번째로 나선 견인족 전사들도 장장 네 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물리쳤다. 네 번째로 나선 멧돼지 수인의 일족을 물리치는 데엔 여섯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런 뒤 다시 세 시간의 운기행공.
어느새 시험이 시작된 지도 벌써 27시간이 지났다. 제대로 된 수면도, 휴식도 취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시험에 임하는 레인의 모습에 주위 전사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다섯 번째엔 본래 리저드맨 일족이 나서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들이 나서기를 주저한 탓에 다른 부족이 대신해서 나섰다. 물론 레인은 그들도 순조롭게 격파했다. 여섯 번째 부족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일곱 번째 부족과의 대련마저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장장 45시간에 걸친 시험이 드디어 끝이 났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둥둥둥둥둥둥!
전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빠른 템포의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은 역사적인 순간을 마주하고 있었다. ‘수인왕’ 이후 처음으로 모든 시험을 통과한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후우.”
함성 소리를 뒤로 하며, 레인이 숨을 골랐다. 뚜둑 소리 나게 목을 꺾었다. 천천히 어깨를 풀었다.
모든 시험이 끝이 난 상황. 그런데, 레인의 투기는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다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함성이 잦아들고, 대족장이 입을 열었다. 감탄과 경외, 놀람과 씁쓸함, 그 외 온갖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굉장하군. 그대를 인정하겠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됐고.”
레인이 대족장의 말을 잘랐다. 여전히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으나, 이제는 그 누구도 그의 그런 태도에 반발하는 외침을 토해내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그가 사납게 웃는 얼굴로 대족장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이대로 끝나면 아쉽지. 안 그래?”
이미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임에도.
최소한의 수면도 취하지 못해 거뭇해진 눈가를 그대로 드러낸 채로.
주위 모든 이들이 설마설마하는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내려와라. 한 판 붙자.”
아주 시원스런 어조로, 레인은 대족장을 도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