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전사의 축제(2)
“허.”
대족장, ‘칼투바란’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사람이 너무 황당하고 당황스러우면 당연히 일어야 할 분노조차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지금 칼투바란의 심정이 딱 그러했다.
“이……. 대족장님 앞에서 대체 무슨 망발이냐! 아무리 제국의 사자라지만, 네 발언은 도가 지나쳤다!”
마침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단상에서 한 전사가 내려오며 소리쳤다.
그의 이름은 바루스. 늑대 수인으로, 레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를 가진 거구의 사내였다.
경지는 초일류의 끝자락. 전사 중에서도 최상위로 평가받을 수준의 강자.
그가 레인의 코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그르렁거렸다.
“더 이상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레인은 그런 바루스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이내 킬킬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네가 증명해 보이겠다고?”
“말이 안 통하는군.”
“흠.”
레인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겨, 방금 전 바루스가 내려선 그 단상 위로 올라섰다. 그리곤 바루스를 향해 손짓했다. 마치 도발하듯이.
연이은 도발에 결국 바루스가 폭발했다.
“모든 것은 네가 자초한 일이다! 이 뒤에 일어날 일에 관해선, 날 원망하지 마라!”
그가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무릎에 새겨진 주술 문신이 살짝 빛나는가 싶더니, 이내 확 하고 광채를 뿜어냈다.
터엉!
그의 신형이 레인을 향해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레인이 반걸음 옆으로 물러나 그것을 가볍게 피해냈다.
바루스가 레인이 선 바로 옆자리에 급격히 신형을 바로 세우더니, 왼발을 축으로 빙글 회전하며 팔꿈치를 휘둘렀다. 단숨에 상대를 무력화시키려는 의지 가득 담긴, 회심의 일격!
그러나 그 공격이 레인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퍽.
레인의 발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바닥과 바루스의 턱을 왕복했다. 순간적으로 바루스의 시야가 빙글 돌아갔다.
퍼퍼퍼퍼퍼퍽.
레인이 바루스의 몸 곳곳을 빠른 속도로 두들겼다. 바루스의 몸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균형을 잃고 쓰러져 가는 바루스의 뒤통수를 발뒤꿈치로 찍어 바닥에 처박는 것으로 마무리.
콰앙!
순식간에 결판이 났다. 바루스는 단상 바닥에 엎드린 채 미약하게 몸을 떨 뿐, 일어서지 못했다.
“…….”
충격적인 결과였다. 주술 전사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실력자인 바루스가 이렇게 순식간에 제압당해 버리다니!
레인이 한 차례 어깨를 으쓱이더니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단상 위에서 내려섰다. 그 모습에 수인족들이 재차 분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놈! 내가 상대해 주겠다!”
“자만하지 마라! 이 몸은 다를 것이다!”
오래지 않아, 수인족 전사들이 너도나도 레인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안 그래도 축제의 열기가 한창인 와중에 전사의 투쟁심에 불을 지핀 공공의 적이 등장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레인은 전사들이 도전해오는 족족 순식간에 쓰러뜨려 버렸다. 남녀노소 도전자 전부를 평등하게, 일말의 자비도 없이.
* * *
그렇게 도전자의 숫자가 대충 스물 정도를 넘겼을 무렵.
“다음은 내가 나서겠다!”
“더는 못 봐주겠군.”
레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도전자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어디 등을 돌리는 거냐! 이제 와서 겁이라도 먹은 것이냐!”
“분명 말했을 텐데.”
레인이 도발성 짙은 외침을 내뱉은 수인족 사내를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의 가치를 보이라고.”
“……?”
“적어도 지금까지 너희들이 보여준 모습으로부턴 일말의 감흥도 못 느끼겠군. 이 뒤로도 마찬가지일 것 같고.”
레인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내가 왜 너희들을 일일이 상대해 주고 있어야 하지? 난 너희의 스승이 아니야.”
“……!”
“적어도 최소한의 격은 갖춘 자만 나서거나, 아니면 그 같잖은 전사의 자존심을 버리고 합격(合擊)이라도 해오거나. 뭐라도 하는 게 어떠냐.”
더럽게 재수 없는 발언이지만, 틀린 말은 또 아니었다. 도전자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그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대족장, 칼투바란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는군.’
어쩌다 보니 분위기가 완전히 저 인간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만일 저 사내가 축제 기간에 이곳 대밀림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모든 전사가 보는 앞에서 그런 도발을 걸어오지 않았다면, 분명 지금과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게, 뭐가 어찌 되었든 동맹을 제안하고자 하는 쪽은 제국이다. 만일 이쪽에서 도발을 그냥 무시했다면 상대측은 오히려 무관심 속에 자멸해버렸을 터.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라. 일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었다. 대밀림 전역에서 몰려든 전사들 사이에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졌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실리의 문제가 아닌 자존심의 문제가 되고 말았으니까.
‘굉장히 공교롭군.’
의심이 든다. 과연 저 사내가 이 시기에 이곳 대밀림을 방문한 것이, 갑작스레 전사들을 도발한 것이, 작금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 우연일까?
“대, 대족장님. 죄송합니다.”
“그리 떨 것 없다. 저것이 네가 의도한 상황이 아님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네 조부의 눈이 옹이구멍은 아니니까.”
“가, 감사합니다.”
한껏 당황하고 있는 로난을 달래준 칼투바란이 손을 들었다. 그리곤 오라 가득 실린 외침을 토해냈다.
“그만!”
웅성거리던 소음이 단숨에 잦아들었다. 좌중의 모든 인물의 시선이 칼투바란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네 이름조차 듣지 못했군.”
“레인이다.”
그의 물음에 레인이 답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상당했지만, 경지가 높은 그들에게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래, 일단 네 장단에 맞춰주마. 우선 ‘기준’을 확실히 세우도록 하지.”
그가 따지고 싶은 게 왜 없겠는가.
사자랍시고 찾아와서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나. 뜬금없이 이쪽을 시험하겠다는, 사자의 입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발언을 내뱉은 것이나. 지적하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을 지적한다고 해도 지금의 분위기는 해소되지 않을 터였다.
그것을 지적함으로써 이 상황을 흐지부지 무마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전사들이 납득하지 않겠지.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해도 감정적인 앙금이 남을 터다.
그러니 여기선 상황에 편승해야 했다. 다만 그 흐름을 조금 비틀 필요는 있었다.
“그대가 전사들의 역량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건 잘 알겠다. 게다가 무례하고 두서없고 황당한 태도를 보이고 있긴 하나, 그대가 제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것도 사실이지.”
“…….”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 이런 주먹구구식 결투 말고, 제대로 된 무대를 마련해주지. 전사의 축제 상위 입상자들이 네 상대가 될 것이다. 원한다면 각 부족 주술 전사들의 합격진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마.”
“괜찮은 이야기로군.”
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장에서도 이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미련한 결투의 연속보단 그편이 좋았다.
“그렇지만.”
그런데, 갑작스레 대족장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나?”
“형평성?”
“이쪽은 전사의 긍지를 모욕당했다. 그 많은 전사들이 네게 도전하려 하는 것도,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지. 즉,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을 ‘걸고’ 있는 것이다.”
“반면 내 쪽은 아무런 리스크도 지지 않고 있으니 형평성에 어긋난다. 그러니 합당한 조건을 내걸라. 그런 말을 하려는 건가?”
“그렇다.”
대족장, 칼투바란은 사나운 웃음을 흘렸다.
“그대가 스스로 내뱉은 광오한 발언에 합당한 실력을 보여준다면, 그래. 원하는 것을 들어주마. 제국과의 동맹이라고 했나? 설사 그것이 대밀림에 어느 정도 불리한 종류의 조건을 내포하고 있더라도 웬만해선 들어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도록 하지. 이곳의 모든 전사들이 공증인이 될 것이다.”
“흠.”
“대신 그대가 스스로 내뱉은 모욕조차 주워 담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는 사내라면, 이쪽이 준비한 ‘전사의 시험’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때는 만용의 대가로 목숨을 내어놓아야 할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듣던 로난이 숨을 삼켰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될 줄이야.
그녀가 시선을 힐끗 돌려 레인 쪽을 바라보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쪽의 속도 모르고!
레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려는 찰나, 갑자기 대족장이 말을 이었다.
“……라고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제국에서 보내온 사자는 그대가 유일하지. 그대가 죽으면 제국으로 돌아가 사정을 설명할 이가 없으니 외교적인 문제가 불거질 터. 그러니 이런 것은 어떤가.”
“……?”
“그대가 대밀림으로 귀순, 향후 30년간 수인족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짧은 시간 지켜봤을 뿐이지만 대족장은 레인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정확한 경지까진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자라는 것도, 일반적인 무술과는 궤를 달리하는 체계의 무술을 습득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보았다.
조금 손해 보는 장사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내기 조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레인이 거기에 한술 더 떴다.
“거기에 조금 더 얹지. 내가 그 ‘전사의 시험’이란 것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일족의 모든 전사들이 사용할 분량의 철제 무기와 방어구, 그리고 막대한 금전을 넘겨주마. 제국에서 생산된, 수인족 전체가 1년간 풍족하게 사용할 분량의 기호식품, 기호 물품도.”
대족장의 눈이 크게 떠졌다. 레인이 언급한 것들 모두가 대밀림에선 접하기 힘든 종류의 것들이었다.
“정말인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그 부분에 대해선 며칠 내로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해 줄 테니 걱정할 것 없다.”
“허.”
갑자기 판이 커졌다. 이런 상황은 생각지 못했는지, 대족장이 살짝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신 이쪽이 시험을 이겨내면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줬으면 싶군.”
“부탁?”
“들어보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싶으면 상호 간의 협의를 통해 내용을 조정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그 정도도 받아들이지 못하진 않겠지.”
“…….”
대족장이 잠시 신중한 얼굴로 고민했다.
이내, 그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대밀림 역사상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말도 안 되는 스케일의 내기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 * *
이후 레인은 로난의 안내에 따라 이동, 자신에게 배정된 천막으로 향했다.
“후우.”
로난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얼굴로 레인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끝내 레인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고 안내를 마치자마자 되돌아가고 말았다.
막사 내부는 넓고 쾌적하고 호화로웠다. 레인은 널찍한 침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귀걸이를 조작, 로엘에게 통신을 넣어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했다.
“그렇게 돼서. 네가 혹시 모를 추가 교섭을 위해 준비해둔 그 물건들, 좀 보내줬으면 하는데.”
[야 인마.]
귀걸이로부터 로엘의 황당해하는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상황이 그렇게 되는 거냐.]
“글쎄. 어쩌다 보니.”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구나, 넌.]
“훗.”
[빌어먹을. 칭찬하는 게 아니야, 이 웬수야.]
귀걸이 너머로부터 로엘이 푹푹 한숨을 내쉬는 것이 전해져왔다. 레인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래 뭐. 기왕 판을 크게 벌인 거, 제대로 해 봐라.]
결국, 로엘은 늘 그랬듯 레인의 부탁을 들어주고 말았다.
그로부터 이틀 뒤, 엘리제 파르테인이 공간 마법을 통해 대밀림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