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화. 서장 (200/249)
  •  201화. 서장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일상이 되돌아왔다.

     알테라 시는 파괴된 도시의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피해가 굉장히 컸지만, 제국 황실에서 막대한 지원금이 내려왔기에 오래지 않아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듯했다.

     졸지에 막대한 재산 피해를 입은 시민들을 위해 구호소가 생겨났다. 그들에겐 이후 도시복구사업이 완료되고 난 뒤 국가 차원에서 집과 재산을 배분해줄 예정이었다.

     레인의 제자인 일리나가 구호소를 돌아다니며 시민들에게 무료 봉사를 펼쳤다. 레인 휘하 무력대가 그녀를 호위했다.

     그녀의 명성이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녀가 과거 메르타 왕국에 모습을 드러냈던 ‘선녀’와 동일 인물임이 알려지면서 인기가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이번 시가전은 제국 전역에, 아니 대륙 전역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반란군의 결집. 거대 암흑조직 프레퍼와의 연수. 알테라 시로의 침공.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의 범주에 속했다. 그야 현 황제의 철혈 정치는 수많은 귀족의 반발을 불러왔으니까. 언젠가 한 번은 일어날 일이었다.

     문제가 된 건 그 반란의 진압 방식이었다. 현 황제에게 숨겨진 비밀 전력이 제국의 귀족, 각국의 권력자들이 생각한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다.

     압도적인 무위로 시민들에게 그 존재감을 강렬히 어필한 레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과거 메르타 왕국에 모습을 드러낸 ‘성자’와 동일 인물임이 차후 드러나면서 더욱 큰 파장이 일었다.

     르우벤에 관한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는 레인의 그것보다도 더욱 큰 화제가 되었다. 무려 ‘마검’이 대륙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 대사건이었으니까.

     카트란에 관한 이야기 또한 르우벤의 그것에 못지않았다. 300년 전 대륙제일인으로 추앙받았던 ‘그’와 굉장히 유사한 전투방식을 지녔다는 소문이었다.

     그 외에도 잔혹하기 짝이 없는 능력을 사용하는 백금발 사내의 이야기가.

     백금발 사내를 보조한 의문의 검존 사내에 대한 이야기가.

     현 대륙 최강자 중 하나인 로카인의 제자, 엘리제 파르테인의 공식적인 데뷔에 관한 이야기가.

     수수께끼의 가면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쏟아져 나온 실력자 집단에 대한 이야기가.

     그 모든 이야기가 대륙 전역을 뜨겁게 달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당장 제국이 보유한 초월자의 숫자는 일곱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번 일로 드러난 숨은 초월자만 해도 넷이나 되었다.

     초월자에 근접했거나, 제반 사항에 따라 초월자조차 능가할 힘을 보일 실력자들마저 꽤 되었다. 거기에 다수의 초인, 초일류, 특수병력까지 더해진 것이다.

     현시점의 제국이 가진 저력은 그야말로 상상 초월. 건국 이래 최고라는 평가였다. 심지어 숨은 전력이 대체 얼마나 더 있을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국내의 귀족도, 해외의 권력자들도 모두 긴장했다. 그들 모두가 무소불위의 권력자이자 최강의 무력을 보유한 황제의 다음 행보에 시선을 집중했다.

     정작 그 황제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함을 알지 못하고.

     * * *

     로엘은 오랜만에 엠페러 아이즈의 수장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다.

    “자. 부탁한 정보.”

    “감사합니다.”

     엠페러 아이즈의 수장이자 제국의 백작인 묘인족 여성, 라일리아가 로엘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로엘이 빙긋 웃으며 서류를 받아들었다.

    “바쁘실 텐데, 자꾸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라일리아가 피로한 얼굴로 로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몸을 깊숙이 묻었다.

     현재 제국에서 가장 바쁜 인물들을 뽑으라고 한다면, 그중 한 사람은 역시 라일리아였다.

     갑작스레 드러난 제국의 저력에 각국에서 세작을 무더기로 파견하고 있었다. 그 탓에 엠페러 아이즈에는 비상이 걸렸다. 국내에 파견된 세작을 모조리 색출해내기 위해 해외에 파견된 조직원들까지 다시 불러 모으고 있는 실정이었다.

    “······.”

     로엘이 찻잔을 기울이며 서류에 적힌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서류에는 한 인물에 대한 정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아가씨에 대한 정보는 왜 필요한 거야?”

    “차후 제국의 행보에 큰 방해물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라서요.”

    “그 아가씨가? 아무리 봐도 이른 나이에 부모를 잃고 졸지에 권력 암투에 휘말린 공작가 영애에 불과하던데.”

     라일리아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로엘은 묘한 미소로 그녀의 의문을 흘려 넘겼다.

     그녀로선 알 도리가 없겠지. 아무리 엠페러 아이즈의 수장이라고 해도 현시점의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는 건 무리가 있을 수밖에.

     이 별다른 특이점을 찾을 수 없는 아가씨가, 사실은 그 자신의 부모를 독살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모든 것이 자국을 썩게 하는 귀족의 선두주자인 ‘부르클린 공작’을 없애고, 그 빈자리에 그녀 자신이 앉기 위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녀가 몇 년 내로 모든 내부적인 문제와 외부적인 압박을 정리하고 공작위를 승계, 이후 소속 국가 ‘바트레인’을 쥐락펴락하는 철혈 재상으로 군림하게 된다는 것도.

     그 막대한 권력을 이용해 국내에 산재한 문제를 대부분 정리, 내부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주변 국가에 침략전쟁을 선포하게 되는 것도.

     그 탁월한 수완과 지략으로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고, 종내엔 그 칼끝을 제국에까지 들이밀게 된다는 것도.

     그 모두가 지금의 라일리아로선 알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야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위험한 인물이라면 사전에 회유하거나 제거하거나 압박을 넣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게, 전부 시도해 봤습니다. 모조리 무위로 돌아가서 그렇지.”

     로엘의 쓴웃음에 라일리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가 직접 손을 써서 그만한 작업을 했는데,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이 여자는 ‘진짜’더군요.”

     단순히 미래에 대한 것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쉬이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그래서 조금 우회해서 접근하긴 했지만.”

     그녀에게 직접 손을 쓰는 것이 힘들다면, 그녀의 주위에 영향을 끼치면 된다.

     지난 시간 동안, 로엘은 그녀를 직접 공략하는 대신 그녀가 소속된 국가를 상대로 공작을 펼쳤다. 아직 그녀가 공작위를 승계하지 못했고, 확실한 권력을 손에 넣지 못한 시점이었기에 오히려 그 일은 수월했다.

     차후 그녀가 국가 전체를 쥐락펴락할 권력을 손에 넣더라고, 그녀는 제국의 위협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힘이 되어야 할 ‘바트레인’이 그즈음이면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테니.

     기왕이면 그녀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녀에겐 유능한 권력자의, 지휘관의 자질이 있었다. 바트레인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영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백작님. 뤼엔입니다.”

     두 사람이 독대하고 있는 방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라일리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웬 노 집사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라일리아에게 정중하게 서류 하나를 건네곤 방을 나섰다. 라일리아가 그것을 빠르게 훑어보더니,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녀가 서류를 로엘에게 넘기며 말했다.

    “이것도 읽어봐. 방금 들어온 정보인데, 너도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으니까.”

    “네.”

     로엘이 읽던 서류를 내려놓고 라일리아가 건네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그것을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남부의 야만 민족이 준동할 가능성이라.”

     그가 미간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새로운 변수가 생겨났다. 지난번에 느꼈던 나비효과의 연장선이라고 할까.

     대륙 서남부 밀림 지대에 터를 잡은 야만 민족은 항상 박해받아왔다. 인간 외 아인종을 차별하는 대륙의 왕국들이 야만 민족은 차별하지 않았을 턱이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들 야만 주술 민족은 주변 왕국들에 대한 감정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그래도 원래 역사에선 그들이 프레퍼의 분탕질로 인해 괴멸적인 피해를 입어서 그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난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역사가 바뀌었지.’

     현 역사의 야만 민족은 원래 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수십 년 만에 ‘대족장’이 선출되고, 그 대족장을 중심으로 서남부 전역의 부족들이 집결해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위세가 심상치 않은 모양이었다.

    ‘잘못하면 정말로 주변 국가를 침략해 들어갈지도 모르겠는데?’

     조금 곤란했다. 그들의 영토와 인접한 세 국가 중 하나는 지난 시간 동안 로엘이 온갖 공작을 벌여 큰 성과를 거둬둔 곳이었다.

     혹시라도 놈들이 그 국가에 침략해 들어가 지금껏 해온 노력을 수포로 만들지 않으면 좋으련만.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선 하늘에 맡겨둬야 할 듯했다. 지금 당장은 그쪽 일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으니까. 최소한의 조치는 취해둬야겠지만.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한 로엘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잘 봤습니다. 생각해야 할 일이 여러모로 늘었네요.”

    “이제 가려고?”

    “예.”

    “너도 나 못지않게 바쁘구나.”

    “하하.”

     지난 시간 동안, 라일리아가 로엘을 대하는 태도는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그를 완전히 인정한 것이다. 이제는 서로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로 사이가 좋아졌다.

    “또 뵙겠습니다.”

    “잘 가.”

     로엘이 빙긋 웃으며 방을 나섰다. 혼자 방에 남게 된 라일리아는, 이내 자신의 책상으로 되돌아가 원래 살펴보고 있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초월자, 초인을 비롯한 실력자들에 대한 보고.]

     서류에는 이번 시가전을 통해 수면 위로 그 존재가 드러난 숨은 실력자들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무언가 감추고 계신 것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번 일에는 꽤 놀랐다. 이렇게나 많은 전력이 숨어 있었을 줄은.

     심지어 이들 신흥 강자의 한 축은 방금 전 이곳을 나간 케르티아 남작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음흉한 녀석인 건 알았지만, 그동안 이렇게나 강대한 무력 단체를 꿍쳐뒀을 줄이야.

     어째 요즘은 제국 최고의 정보단체라는 엠페러 아이즈라는 이름이 무색해진 느낌이다. 그야 황제가 작정하고 나서면 이쪽에서도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조금 분한 기분이었다.

    ‘현재 신흥 강자 중 제대로 행적이 파악된 인물은 겨우 한 사람.’

     메르타 왕국에서 ‘성자’라는 칭호를 얻어가며 활동했다는 그 인물이었다. 나머지는 죄다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인지 행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어디 보자. 현재 성자의 위치는 알테라 시. 하고 있는 일은…….’

     그녀가 읽던 서류의 페이지를 넘겼다.

     서류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그녀가, 의외라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제자, 수하 육성 및 개인 수련? 생각보다 훨씬 평범하네. 무언가 특별한 행보를 보이리라 생각했건만.”

     * * *

    “충심으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사부님!”

     대면과 동시에 갑자기 넙죽 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리는 리나. 갑작스레 태도가 돌변한 그녀의 모습에, 레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뭐야, 왜 이래.”

    “이 제자, 스승님의 진면목을 보고 굉장히 감격했습니다! 부디 부족한 제자를 앞으로 잘 지도해 주시길!”

    “소름 돋으니까 그쯤하고 일어나.”

    “넵!”

     리나가 곧바로 벌떡 일어나 차렷 자세로 섰다. 마치 오랜 시간 훈련받은 군인과도 같은 움직임.

     레인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를 뒤따라온 로난 또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뒤쪽의 두 분은?”

    “네 사형들이다. 인사해.”

    “사형?!”

     리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아직 사형제의 존재에 대해서까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 스승님께 이야기는 들었어. 레이나 하슨이라고 해.”

    “셀린이야.”

     두 여인이 인사를 건네오자 리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마주 인사했다. 그리곤 이내 두 사람의 압도적인 외모에 기가 죽었는지, 살짝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 녀석 데리고 가. 아직 기초밖에 익히지 않았으니까 데려가서 빡세게 훈련시켜. 사정 봐주지 말고. 검술을 배우고 싶어 하니 레이나 네가 맡으면 되겠지.”

    “네. 스승님.”

     레이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리나를 데리고 자리를 이동했다. 리나가 어어, 하고 당황하며 그녀에게 끌려갔다.

     아마 리나는 곧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무력대를 지도하면서, 레이나와 셀린은 ‘천사의 탈을 쓴 악마’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무자비한 조교로 거듭난 상태였으니까.

     이내 장내엔 세 사람만이 남았다. 레인과 셀린, 그리고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난.

    “그럼 전 이만.”

    “잠시만.”

     로난이 쓴웃음을 지으며 리나를 따라나서려는 것을 레인이 붙들었다. 로난이 의아한 얼굴로 레인을 돌아보았다.

    “……?”

    “조금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미안하긴 하다만, 부탁 하나 좀 하자.”

    “네? 부탁이요??”

    “이번에 내가 제국의 사자로서 대밀림을 방문하게 돼서. 동행을 좀 부탁할 수 있을까.”

    “네에?!”

     로난이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 것을 빤히 응시하며, 레인은 얼마 전 로엘과 나눴던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 * *

     로엘이 물었다.

    “너 이번 방학 동안 뭐 하고 지낼 생각이야?”

    “이번엔 다른 일정 없이 제자들과 무력대를 지도하는 데에만 집중하려고. 한 번쯤 그래야 하겠다고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레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제 웬만한 일은 다 처리된 만큼, 이번 방학만큼은 내실을 다지는 데 치중할 생각이었다.

    “이런 말을 하긴 좀 미안한데.”

    “왜?”

    “네가 수인족의 영토를 좀 방문해줬으면 싶다.”

    “대밀림을? 왜 이 시점에? 그리고 정말로 그 일을 나한테 맡겨도 되겠어?”

     대밀림에 사자를 파견하는 건 조금 나중의 일이 될 예정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사자’의 역할을 맡긴다니.

     레인은 그 자신의 성질머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다 보니 로엘이 이런 중대한 일을 자신에게 맡기려 한다는 것이 좀처럼 이해되질 않았다.

    “정보를 모으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인데, 올해 이 시기의 대밀림에 특별한 이벤트가 벌어진다고 하더라고.”

    “?”

     레인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는 가운데, 로엘이 재차 입을 열었다.

     이어진 그의 발언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던 레인의 얼굴에조차 일순 흥미가 어리게 만들 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전사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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