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삼화(三花)(3) (191/249)
  •  192화. 삼화(三花)(3)

    “유익한 시간이었어.”

     백호족 소녀, 로난과의 대화를 끝마친 로엘이 카트란과 함께 자리를 이동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괜찮아? 아무리 차후에 아군으로 끌어들일 이들이라지만, 그렇게 정보를 대거 제공해도?”

     카트란의 물음. 로엘이 가면을 살짝 고쳐 쓰며 대답했다.

    “괜찮을 거야. 처음 세웠던 계획과는 조금 다르게 됐지만.”

     원래 수인족을 끌어들이는 일에는 르우벤이 나서기로 되어 있었다. 차후 제국이 벨리아 왕국을 집어삼킨 뒤, 르우벤이 사신으로서 그들의 영토를 방문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수인족 대족장의 손녀와 연결점이 생겼다. 기분 좋은 변수가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이런 식으로 나비효과가 생겨날 줄은 몰랐지.”

     원래 역사에서 프레퍼는 굉장히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제국의 견제로 인해 크게 활동이 위축된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위세를 자랑했었다.

     그런 프레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을 뽑자면, 그들은 대밀림의 수인족, 그리고 서남부의 야만 민족이었다. 두 부족 국가가 입은 타격은 가히 괴멸적인 수준.

     당연하게도, 각성자들이 미래를 바꾼 지금 시점의 두 부족 국가는 건재했다. 그게 나비효과가 되어 원래 역사엔 없었던 ‘로난의 아카데미 유학’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

    “그렇지. 확실히 좋긴 한데, 계획을 좀 크게 수정해야 하다 보니 머리가 아프네.”

     카트란이 쓴웃음을 지었다.

     상황이 바뀌었으면 대처 방법도 바뀌어야 한다.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쪽으로 보낼 사신을 르우벤 대신 레인으로 할까.”

    “왜?”

    “아무래도 그쪽과의 연결점이 생각보다 빨리 생겨난 탓에 사신도 빨리 보내야 하니까. 르우벤보단 레인이 더 적합할 것 같아서.”

     본래 계획대로라면 벨리아 왕국을 먹어 치운 르우벤이 그대로 군세를 이끌고 수인족들의 영토로 진입해야 했다. 그런데 그 시기가 크게 앞당겨지는 바람에 한 가지 문제점이 생겼다.

    “아무래도 수인족은 강자를 숭상하는 경향이 있잖아?”

     원래 계획대로라면 수인족과의 화친은 몇 년 뒤에나 일어날 일이었다. 그러니까 르우벤이 가진 힘을 제대로 수습하고 그 본인의 세력 또한 제대로 일궈낸 뒤의 일일 예정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과 접촉할 시기가 앞당겨졌다. 그리고 현재 르우벤은 그 자신의 세력을 일구긴 고사하고, 본인이 가진 힘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하긴. 확실히 그런 관점이라면 수인족을 설득할 사신으로는 레인이 적합할지도 모르겠네.”

     카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본인의 성격이 사신으로는 영 적합하지 않다는 점만 빼고 본다면, 이라는 뒷말은 삼키기로 했다. 로엘 또한 그것을 아니까 저리 고민하는 얼굴을 하는 것일 테지.

    “뭐 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로엘은 한 차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그리곤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일단 너.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어딜?”

    “누구 좀 만나러. 왜인지는 가면서 설명해 줄게.”

     * * *

     웨이브진 풍성한 백금발 머리칼.

     오뚝한 콧날에 도톰한 입술.

     그린 것만 같은 짙은 속눈썹에 영롱하고 커다란 푸른색 눈동자.

     들어갈 곳 들어가고 나올 곳 나온 황금 비율 몸매에 새하얀 피부.

     마법학부 학생임을 증명하는 로브에 세련되고 값비싼 장신구들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레닐 카이엔. 현 제국의 황제 되는 이의 여동생, 즉 공주였다.

     올해 펜타트리움 아카데미 마법학부에 입학한 학생이면서, ‘삼화(三花)’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는 현재 교장실의 응접용 소파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정작 교장은 그곳에 자리하지 않았다.

    ‘누가 날 찾아온다는 거지?’

     그녀는 미간을 모으며 생각했다.

     방금 전, 황실의 직인이 찍힌 서신이 전해져 왔다. 그 서신대로 일단 교장실에 와서 기다리고 있긴 한데.

    ‘정작 이 공간의 주인인 교장은 자리에 없고, 찾아올 사람이 누구인지는 감도 잡히질 않고.’

     그녀가 한참 고민에 잠겨 있을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교장실 내부로 들어섰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목이 메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입에 침이 고였다.

    “아!”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표정에서 공포심이 엿보였다.

     이 자리에서 ‘그’를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건만.

    “…….”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총 셋이었다. 한 사내가 선두에 서 있고, 두 사내가 약간 뒤쪽에 서 있었다.

     이레닐의 시선은 그중 선두에 서 있는 백금발 머리칼 사내에게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힘겹게, 정말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바르바젠 오라버니.”

     * * *

     바르바젠, 로엘, 그리고 카트란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이레닐과 마주 보고 앉았다.

    “오랜만이구나. 이레닐.”

    “그간 잘 지내셨나요. 오라버니.”

     이레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현 황실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그 사정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내가 왜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궁금하겠지.”

    “네.”

    “별로 네게 해가 되는 일을 하려는 게 아니니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좋다.”

     바르바젠이 달래듯 이야기했으나, 이레닐은 좀처럼 안정을 찾질 못하는 모습이었다.

     바르바젠이 쓴웃음을 지었다.

     전생엔 스스로의 손으로 죽였던 이복동생이 현생에는 자신을 두려워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이대론 제대로 대화가 되질 않겠군. 이후의 이야기는 케르티아 남작이 이어서 하지.”

     바르바젠은 그렇게 말한 뒤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곧바로 로엘이 공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주 전하. 케르티아 남작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제게 맡겨진 역할이 역할인지라 가면을 벗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길.”

     로엘의 자기소개에 이레닐이 허둥지둥 인사를 받았다. 로엘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프레퍼의 알테라 시 침공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

     바르바젠을 비롯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일행이 그때를 대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침공을 역이용해 도리어 상대에게 큰 타격을 입힐 계획을 일행이 세우고 있다는 것까지.

     이레닐은 처음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땐 당황하는 얼굴이었다가 차차 평정심을 되찾아 갔다.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된 후, 그녀가 물었다.

    “그 이야기를 제게 하시는 이유는 뭐죠?”

    “간단합니다. 이 일에 공주께서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로엘이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그렇게 대답했다. 이레닐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이 뭐가 있다는 거죠?”

     그녀로선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녀는 일개 학생에 불과했다. 무언가 대단한 권력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그런 비상시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한정되어 있었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공주께선 그저 영향력만을 빌려주시면 됩니다.”

    “영향력?”

     로엘의 설명은 이러했다.

     프레퍼가 알테라 시 침공을 계획하고 있고, 그 사실을 미리 알아챈 황실에선 그것을 역이용해 그들에게 큰 타격을 입힐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큰 인명 피해가 날 것이라 예상된다는 점.

    “아직 세상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프레퍼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공중 병단을 보유한 세력입니다. 놈들이 작정하고 알테라 시를 침공해 오면 성벽이 무용지물이죠. 전쟁의 형태는 필연적으로 시가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래 마법사는 희귀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테이머는 그 마법사 중에서도 희귀한 존재들이다. 심지어 비행형 몬스터를 길들인 이들은 그 테이머 중에서도 희귀한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대륙 그 어느 왕국도, 심지어 제국조차도 공중 병단만큼은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인공적으로 마법사를 찍어내는 프레퍼만이, 그것을 보유하고 있다.

    “놈들도 꽤나 절박한 상황에 몰린지라 이번 일엔 여력을 남기지 않을 겁니다. 가진 전력을 아끼지 않고 동원하겠지요. 그것은 확실합니다.”

     현재 프레퍼가 활동할 수 있는 무대는 크게 줄어든 상황.

     그들은 ‘조직의 행보에 사사건건 제동을 거는 제국을 일시적이나마 혼란에 몰아넣지 않으면, 국외의 일에 신경 쓰지 못하도록 만들지 않으면, 앞으로 조직에 미래는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몰려 있는 상태였다.

    “시가전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두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선, 도시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대피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백성들이 빠르게 대피소로 이동할 수 있도록 그들을 미리 훈련시키는 과정.”

     대피 공간은 이미 확보 중이었다. 그 부분은 문제가 없었다.

     현재 도시 동서남북에 위치한 아카데미와 영주관에 세워지고 있는 첨탑들. 그리고 그 첨탑에 연동된 아티펙트를 이용해 결계사의 이능을 지닌 이들이 각자 거대한 결계를 펼칠 예정이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대피 훈련이었다.

     프레퍼에게 카운터를 먹이기 위해 놈들의 침공에 대한 정보는 통제되고 있는 중. 당연하게도 백성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훈련이 불가능하다면, 하다못해 그들을 확실하게 통제할 명령체계라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또한 문제지요.”

     말했듯, 프레퍼의 알테라 시 침공에 대한 정보는 통제되고 있다. 이곳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에게조차도.

     영주에게 정보를 알리고 협조를 구한다고 해도 문제였다. 알테라 시는 도시의 특성상 영주에게 백성들을 아우르는 절대적인 카리스마가 존재하지 않았다.

     강력한 명령권자의 존재가 가장 필요한 시점이건만, 명령권자를 확보할 수가 없다는 딜레마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공주께서 도움을 주실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금 전의 그 ‘영향력’이 필요하다는 말은.”

    “그렇습니다. 황실의 일원이라는, 비상시에 백성들에게 강렬하게 작용할 수 있는 타이틀을 빌려주셨으면 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숨기랴. 이번에 공주가 떠밀리듯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바르바젠과 로엘이 세운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공주께선 그저 그 상황이 닥쳤을 때 당황하지 않고 저희 측의 지시를 따라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

    “물론 위험을 동반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필시 프레퍼 놈들이 공주 전하를 노리고 달려들겠지요. 그렇지만 그 부분에 대한 것 또한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로엘은 카트란 쪽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그 누구도 공주께 해를 입힐 수 없도록, 강력한 호위를 붙여드릴 테니까요.”

     다섯 각성자 중에서 ‘인간의 습격’을 대비한 ‘호위 인력’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을 뽑는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카트란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번에 공주를 호위하는 역할을 도맡게 되었다.

    “카트란이라고 합니다. 놈들이 공주 전하께 털끝만큼도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지켜드리겠습니다.”

     카트란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

     이레닐이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바르바젠이 직접 찾아와 건네는 부탁을 거절하자니 뒷일이 두렵다. 그렇지만 부탁을 들어주면 위험한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녀로선 어느 쪽을 선택하든 걱정이 들 수밖에 없겠지.

    “이레닐.”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바르바젠이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예 쐐기를 박을 생각이었다.

    “네, 네. 오라버니.”

    “넌 이전부터 황실의 일원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지고 싶어 했었지.”

     이레닐은 예전부터 자신의 지위를 버리고 싶어 했다. 그 자신이 가진 마법적인 재능을 개화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황족이라는 신분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남들에겐 그 신분이 축복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녀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황족이라는 신분은, 그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 신분이 언제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는 원인으로 작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가지고 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이번에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겠다.”

    “……!”

     너무나도 달콤하기 그지없는 제안. 이레닐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황권 강화를 위해 어느 날 갑자기 소리소문없이 목숨을 잃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외교적인 이익을 위해 어딘가의 왕국에 팔려 가듯 시집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쓸데없이 주위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원하는 만큼 마법 수련에만 매진하면 된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단 한 번의 위험을 감수하기만 한다면.

    “…….”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여 승낙의 의사를 내비치고 말았다.

    “잘 생각했다.”

     바르바젠이 슬쩍 웃으며 손을 뻗어 이레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레닐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긴 했지만 바르바젠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자. 이것으로.’

     로엘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놈들을 맞이하기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가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패가 다 갖춰졌다.

     이제는, 정말로 놈들을 대륙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일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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