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삼화(三花)(2)
“어째서!”
“안 됐다만, 난 이제 검술 그만뒀다.”
레인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
“복장 보면 알잖아. 나 행정학부 학생이다.”
“그, 그러고 보니.”
리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그래도 믿을 수 없어! 행정학부여도 실력은 계속 갈고닦았을 수도 있지! 오히려 그 이유로 검술을 그만뒀다는 게 더 이상하잖아!”
‘안 속네.’
레인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도 이젠 머리가 컸다는 것일까. 전에 봤을 땐 대충 아무렇게나 던져놓으면 잘 속을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하긴, 자신이라도 이런 거짓말엔 안 속을 것 같긴 했다. 그렇다고 거짓말임을 시인할 생각이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위험천만한 몬스터 사냥으로 먹고사는 게 환멸이 나서 진로를 바꿨을 뿐이야. 이젠 공부에만 집중할 거다.”
레인이 재차 태연하게 거짓부렁을 늘어놓자, 르우벤이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휙 돌리고 말았다. 눈곱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었다.
리나는 그런 르우벤에게 한 차례 시선을 주었다가 레인을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냥 가르쳐 주기 싫어서 그러는 거구나.”
“그럴 리가.”
일단 대답은 부정이었지만 목소리에 성의가 하나도 담기지 않았다.
레인은 그냥 뻔뻔하게 밀어붙일 결심을 굳혔다. 이러다 제풀에 지쳐서 나가떨어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저기.”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백호족 소녀, 로난이 손을 들고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선배는 강한가요?”
“응. 강해.”
대답은 레인 대신 리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는데. 리나는 상위 정령사잖아? 검술 실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령술만 놓고 봐도 동년배 중에 리나를 감당할 수 있는 실력자는 거의 없을 거라 생각되는데?”
“내가 배우고 싶은 건 검술이야.”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일단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청한다는 건 상대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거잖아? 그런데 그 스승이 자신보다 못하다면, 그건 좀 그렇지 않아?”
적어도 로난의 가치관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강자를 숭상하는 수인족의 사회에선,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리나는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레인 쪽을 슬쩍 곁눈질하며.
“아마 오빠는 나보다 훨씬 강할 거야. 5년 전, 그러니까 오빠가 13살이었던 시점에. 이미 오빠는 초일류의 영역에 이르러 있었으니까.”
“뭐?”
로난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13살에 초일류? 무슨 그런 농담이 있나. 역사에 이름 높은 대영웅조차 그 나이에 그 경지에 이르진 못했다.
“…….”
레인이 손바닥으로 턱을 괸 채 귀찮게 되었다는 얼굴을 했다.
그 당시 레인은 가진 힘을 전부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딱히 힘을 숨긴 것은 또 아니었다. 리나가 그 당시에 이쪽이 초일류였음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가 지금처럼 이쪽에 관한 이야기를 이곳저곳에 흘리고 다니면 조금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오래지 않아 드러낼 힘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숨겨야 하는데.’
최근 성자로서 크게 활동했으니 더더욱 보안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었다.
아마 지금의 자신은 르우벤과 같이 프레퍼의 최고 경계 대상 리스트에 올라 있을 터. 되도록 눈에 띄는 행보는 자제해야 했다.
“괜찮지 않아?”
미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와중, 카트란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냥 원하는 대로 무공을 전수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레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내면 지금껏 부정해온 리나의 말을 긍정하는 것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저기, 몇 가지 좀 묻고 싶은데.”
“네. 말씀하세요. 선배님.”
“우선, 굳이 레인에게 검술을 배우려는 이유가 뭐야? 특별한 목적이 있어?”
“아뇨? 그냥 ‘배우고 싶어서’ 가르침을 청한 것뿐인데요?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그렇구나. 그럼 레인에게 검술을 배우는 대신 특정한 세력에 속할 것을 요구받는다면, 받아들일 생각이 있어?”
“세력이요?”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라는 것을 느낀 리나가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잠시 후. 그녀가 한 차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을 내어놓았다.
“딱히 정해둔 진로가 있는 게 아니니 괜찮아요. 그 세력이 무슨 악의 조직 같은 것만 아니라면 웬만해선 긍정적으로 검토할 의사가 있어요.”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조금 사정이 있어서 한동안 이 녀석에 대한 것을 완전히 함구해 줬으면 하는데, 그래 줄 수 있겠어?”
“네. 어렵지 않죠.”
리나가 선선히 대답하자 카트란이 레인을 돌아보았다. 마치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해결 방법이 아니냐는 눈빛.
“…….”
레인이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지도 몰랐다. 어떻게 보면 무려 상위 정령사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일 기회가 아닌가.
보아하니 검술에 대한 의욕도 상당해 보이고, 자질로 쓸 만해 보인다. 잘 키워낼 수만 있다면 앞으로 창설될 무력대를 이끄는 리더로 삼아도 괜찮지 않을까.
당장 초일류까지만 경지를 끌어올릴 수 있다면 무력대 내 최상위의 실력자로 거듭날 수 있을 터였다. 상위 바람의 정령술은 검술과의 상성이 좋아 큰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니까.
확실히 끌어들일 수 있는 인재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게다가 영입을 통해 눈앞에 놓인 자잘한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괜찮은 메리트다.
점점 마음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져 갔다. 레인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진로를 그렇게 네 마음대로 결정해도 되겠어? 조부께서 반대하시진 않을까.”
그녀에겐 가족이, 그러니까 조부인 테미스가 있다.
테미스는 리나 본인과는 다르게 그녀가 안정적인 길을 걷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혹시 모를 가능성을 대비해 이 질문은 해둘 필요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어. 작년에.”
“괜한 걸 물었군. 미안하다.”
“아니야. 딱히 슬픈 일도 아닌걸. 수명을 다 누리고 편하게 가셨으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이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을. 괜히 분위기만 무거워졌다.
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리나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일어나. 우선 네 실력부터 좀 보자.”
“!”
그것이 승낙의 의미임을 알아듣지 못할 리나가 아니었다. 그녀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따라서 일어났다.
“…….”
한쪽에서 로난이 상황을 이해하질 못하겠다는 얼굴로 어색하게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런 그녀에게, 카트란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잠시 나와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네.”
이왕 이렇게 된 것, 이참에 눈앞의 여학생을 통해 수인족 대족장 일가와 연결점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카트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친절한 표정을 가장했다.
마치 로엘처럼.
* * *
레인은 일행과 함께 기사학부 내의 한 소형 연무장으로 향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아카데미 측에서 카트란에게 배정해준 개인 수련장이었다. 학년 최상위권 성적에 무투대회 우승자라는 실적까지 가진 카트란인지라 여러모로 우대받고 있었다.
“우선 덤벼봐.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연무장 한가운데서 리나와 마주한 레인이 그림자로부터 뽑아낸 검을 까딱이며 말했다.
“그럼.”
리나가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레인을 향해 짓쳐 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바람의 칼날들.
카앙!
검과 검이 충돌했다.
레인은 충돌과 동시에 검을 정밀하게 기울였다. 힘겨루기가 이뤄지기 전에 맞닿은 칼날을 부드럽게 끌어들였다가 밀어냈다.
“앗!”
삽시간에 균형이 무너진 리나가 다급히 뒤로 물러나며 바람의 칼날을 사출했다. 그러나…….
쉬익!
레인이 순간적으로 오히려 간격을 좁혀버리자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바람의 칼날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레인이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리나에게 딱밤을 먹였다.
“아얏!”
리나가 이마를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벼워 보이는 공격이었지만, 사실은 내력이 실려 있었다. 상당한 고통을 느끼고 있으리라.
“진짜 강하네요.”
한쪽 벤치에 앉아 두 사람을 지켜보던 로난이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방금의 대련은 언뜻 가볍고 장난스러워 보였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두 사람 사이의 압도적인 격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련이었다.
“조금 더 지켜봐.”
카트란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레인과 리나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더 대련을 벌였다.
딱!
딱!
딱!
물론 결과는 모두 레인의 압승.
리나는 똑같은 위치만 계속해서 때리는 레인을 심통 난 얼굴로 노려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레인은 그 무언의 항의엔 신경도 쓰지 않고 방금 전 대련에서 리나가 잘못한 점을 지적했다.
“저 정도 수준이라니.”
지켜보던 로난이 살짝 신음을 흘렸다.
정말로 웬만큼 두 사람 사이의 격차가 크지 않고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제야 레인이 열셋에 이미 초일류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는 리나의 말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라면 자신도 상대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일 듯했다. 나름 부족 내에서 천재 소리 들으며 실력을 갈고닦아온 그녀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눈앞의 선배를 상대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저 선배는 왜 행정학부에 입학한 거죠? 저만한 실력이면 기사학부에 입학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
“그건 저 녀석의 성적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
“저 녀석, 학년 전체 1등이야.”
“네?!”
로난은 다시 한번 놀랐다. 숨기고 있는 실력도 놀라운데, 학업 성취도마저 높다고? 무슨 그런 완벽한 사람이 다 있단 말인가.
“그런데, 아까 제게 할 말이 있으시다고 한 건.”
“그건 잠시만 기다려줘. 여기 찾아올 친구가 하나 있거든.”
“오래 기다려야 하나요?”
“금방 올 거야.”
카아아악!
마치 카트란의 답변을 긍정하듯 머리 위에서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로난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와이번 하나가 천천히 연무장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혹시 찾아올 친구란 게······.”
“어. 저기 타고 있는 녀석이지.”
카트란의 긍정과 동시에 세 명의 가면인이 와이번에서 내려섰다. 각각 일남이녀. 그중 남자로 보이는 가면인이 가까이 다가와 로난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로난 양. 케르티아 남작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아, 네.”
이번엔 제국의 귀족이란 말인가. 게다가 또 웬 가면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수인족 대족장의 손녀분이시라 들었습니다.”
“그, 그런데요.”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싶습니다만, 조금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카트넬의 호출로 바로 이곳까지 날아온 가면인, 로엘. 그는 굉장히 정중한 태도로 로난에게 그렇게 말했다.
‘일개 학생의 부름에 제국의 귀족이 찾아온다고?’
아무리 봐도 ‘아카데미의 숨은 실력자 집단’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이들이 아닌 듯했다. 수인족 최고 권력자의 핏줄로서의 감각이 그 사실을 계속해서 고하고 있었다.
‘대체, 이 사람들 정체가 뭐지?’
로난은 결국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 * *
바르베룸 왕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카크론. 그곳의 지하에는 거대한 미로가 형성되어 있다.
이곳의 존재는 일반인들에겐 알려지지 않았다. 이곳에 ‘프레퍼’라는 어둠의 세력의 조직원이 대거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 또한 당연하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이곳 지하 미로에 피바람이 몰아닥쳤다.
“크악!”
“대, 대체 네놈들은 누구냐!”
갑작스레 몰아닥친 괴인들.
각각 확연히 차이 나는 신장을 지닌 다른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가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아무런 무늬도 새겨지지 않은 흰색 무면탈을.
그들은 복잡한 미로를 능숙하게 누비며 프레퍼의 조직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손속에 거침이 없었다.
“크르륵! 너흰 대체 뭐냐! 이곳을 어떻게 알았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단 한 사람, 프레퍼의 최고 간부 중 하나인 ‘이바루단’이 자신을 포위한 괴인들을 둘러보며 신음성을 흘렸다.
그는 호인(虎人)족 출신의 주술전사. 실력을 놓고 보자면 가히 초인의 영역에 이르러 있는 강자였다.
그러나, 오늘은 상대가 좋지 못했다. 그를 둘러싼 가면인들은 하나하나가 그와 맞먹는 실력을 지닌 강자들이었다. 즉, 전원이 초인이라는 말이었다.
“크라아아아! 누구냐고 물었다!”
이바루단이 강렬한 포효를 토해냈지만, 가면인들 중 그에 동요를 보이는 이는 없었다. 대신 그들은 짧은 대답을 내어놓았다.
“우리는 0팀.”
“제국의 어둠에 속한 자들이다.”
말과 동시에 일제히 달려드는 가면인들. 이바루단이 괴성을 내지르며 마주 달려들었다.
승기는 금세 기울었다. 한 명씩도 상대하기 버거운 강자들이 한꺼번에 덤벼들자 이바루단으로선 버틸 도리가 없었다.
그가 거둔 최고 성과라고 해 봤자 전투 도중 한 가면인의 가면 일부를 갈라낸 정도였다.
촤악!
가면의 삼분지 일 정도가 소실된 탓에 괴인의 얼굴 한쪽이 순간적으로 노출되었다.
“다, 당신은!”
그 노출된 얼굴이 순간적으로 이바루단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바루단이 경악한 얼굴로 괴인의 얼굴을 손가락질했다. 그리고-퍼억!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훤칠한 키를 지닌 가면 괴인이, 검 손잡이로 그의 뒷목을 가격했다.
이바루단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그의 신형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훤칠한 신형의 가면 괴인은 이바루단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른 가면인들에게 말했다.
“돌아간다.”
그렇게, 프레퍼의 조직 거점 중 하나가 소리소문없이 지워졌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겨두지 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