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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사전 준비(2) (187/249)
  •  188화. 사전 준비(2)

     르우벤이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든 생각은, ‘기분이 상쾌하다’였다. 수면으로 피로를 풀어낸다는, 별달리 특별할 것도 없는 그 행위가 이토록 행복한 것인 줄 그는 몰랐다.

    “정신이 드셨군요.”

     르우벤이 고개를 돌리니, 침대 끄트머리에 엎드려 졸고 있던 밀리아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잠든 지 얼마나 지났어?”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계속 돌봐준 거야?”

    “네.”

     사실 르우벤의 몸 상태는 레인이 이미 한 차례 점검을 끝낸 뒤였다. 무리한 수련의 반동이 찾아온 것일 뿐, 그냥 놔두면 며칠 내로 알아서 회복하고 일어날 거라고.

     그럼에도 밀리아는 지난 일주일 동안 르우벤의 곁을 지켰다. 그야말로 지극정성이었다.

    “고마워.”

     르우벤이 슬쩍 웃었다.

     지난 수련의 여파로 인해 홀쭉하게 마르고 퀭해진 얼굴이었다. 수면 부족은 식욕 감퇴와 막대한 스트레스를 동반했으니까.

     밀리아가 안타까운 얼굴로 르우벤의 이마를 살짝 쓸었다. 르우벤이 그 손의 온기를 느끼며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잘게.”

    “예. 그동안 식사하실 것을 준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이내 다시 고른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밀리아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향했다. 우선 레인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다시 한번 진찰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세 시간 뒤.

     눈을 뜬 르우벤은 식사와 목욕을 마치고 레인과 마주했다.

    “기분이 어때?”

    “글세. 아직 잘 실감이 나질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렇겠지. 경지를 수습하기도 전에 쓰러져서 잠만 잤으니까.”

     르우벤이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좀이 쑤신 모양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기껏 그 고생을 해서 경지를 올렸는데, 그 힘을 한 번 써먹어 보지도 못하고 일주일이나 누워 있었으니까.

     혹시라도 기껏 올려둔 경지가 퇴보한 것은 아닌가 조바심이 들겠지. 휴식을 취하는 편이 좋다는 것을 알아도 괜히 마음이 들끓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정 몸이 쑤시면, 대련이라도 좀 해 보는 게 어때.”

    “대련? 누구랑?”

    “여기 검가잖아. 대련 상대야 차고 널렸지. 내 제자들도 지금 한참 도전자들을 맞이하고 있고.”

    “이 몸 상태로 괜찮을까.”

    “괜찮을 거다. 마검을 사용한다든지 격상의 존재와 대적한다든지 하지만 않는다면야 뭐.”

    “그런가.”

    “기력은 좀 떨어지겠지만 일단 몸 상태 자체는 정상이야. 내가 직접 돌봤으니까.”

    “그럼 그렇게 하자. 사실 지금 뭔가 굉장히 진정되지 않는 기분이거든.”

     두 사람은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검가의 명물 중 하나, ‘무한대련장’을 향해.

     * * *

     검가를 찾아오는 사람은 굉장히 다양하다. 그리고 그중 다수의 인간은 혈기가 왕성한 무예가들이다.

     그들은 검가 내에서 수없이 많은 비무를 벌이곤 한다. 금전을 지불하고 무력대의 일원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하지만, 같은 관광객, 빈객, 수련생끼리 대련을 펼치는 일 또한 비일비재하다.

     그런 무도가들이 열광하는 한 장소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무한대련장’.

     무한대련장은 간단히 말하자면 콜로세움이다. 칸테른 시의 ‘투기장’과 비슷한 건축물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만 이곳은 칸테른 시의 투기장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지닌 공간이다. 그곳이 화려한 쇼맨십으로 대중에게 어필하는 공간이라면, 이곳은 오로지 무인들만을 위한 공간.

     이곳의 전투에는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누구나 관람할 수도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일반인 관람자는 적다. 그야, 볼거리가 그리 많지 않으니까.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할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굳이 입장료를 지불해가며 콜로세움을 방문하는 일반인이 있겠는가.

     이곳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대련은 대체로 그리 화려하지 않다.

     그럴 수밖에. 이곳은 오로지 진짜배기 대련을, 그리고 그 대련을 관전하길 원하는 이들만이 모이는 공간이다.

     이곳의 규칙은 간단하다.

     초대형 콜로세움 곳곳에 세워진 단 위로 한 사람이 올라가면, 그 사람에게 누구든 도전장을 내민다. 승자는 단 위에 남고, 패자는 단에서 내려간다.

     먼저 단 위에 올라선 자는 도전을 거부할 수 없다. 대신 아예 대련을 포기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다수의 인물이 한꺼번에 도전해오는 것은 거부할 수 있다. 물론 자신이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그 본인의 실력에 따라 단 위에 언제까지고 남을 수도 있고, 순식간에 단 아래로 내려가야 할 수도 있다. 그것이야말로 이 무한대련장의 진정한 묘미.

     바로 그 무한대련장에 들어선 르우벤은 곧이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저게 뭐야.”

     눈앞에 펼쳐진 황당한 광경.

     전체적으로 인구가 드문드문 분포된 콜로세움 내부. 유독 두 단에만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바로 레이나와 셀린이 올라서 있는 단이었다.

    “다음은 내가 간다!”

     근육질 사내 하나가 호기롭게 단 위로 올라섰다. 가볍게 예를 취하고 격돌하는 사내와 레이나.

    “커헉!”

     사내는 채 1분을 버티지 못하고 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하하! 듣던 대로 강하고 아름답군! 삼선녀(三仙女)의 일인답소!”

     곧바로 제단 위로 뛰어오르는 또 다른 사내 하나. 그의 등장에 주위 사내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S등급 용병 라헨이다!”

    “라헨! 최근에 초일류의 경지에 올랐다는! 드디어 제대로 된 실력자가 나섰구나!”

    “드디어 삼선녀가 패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가!”

     참고로 삼선녀란 레인의 제자 세 사람에게 붙은 칭호였다. 바로 레이나, 셀린, 일리나.

     본래는 일리나에게만 붙었던 칭호였다. 그것이 그녀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레이나와 셀린에게도 적용된 것이었다. (일리나는 일전에 성녀로 불렸었는데, 진짜 성녀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선녀라는 새 칭호를 얻었다.)

     아쉽게도 루미아는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밀리아와 함께 숙소에서 개인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천살성인 그녀가 무한대련따윌 했다간, 반드시 참사가 일어난다.

    “이쪽에도 S등급 용병이다!”

    “바덴! 바덴이다!”

     마침 셀린이 있는 쪽에도 새로운 도전자가 등장했다. 관중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그 또한 초일류에 이른 실력자인 모양이었다.

    “시작 전에, 가벼운 내기를 제안하고 싶소.”

    “…….”

    “그쪽이 이기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 한 가지를 들어주지. 대신 내가 이기면 식사 한 끼를 함께했으면 싶은데, 어떻소?”

    ‘라헨’이라 불리던 사내가 레이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관중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이에 질세라 ‘바덴’이라는 용병 또한 셀린에게 비슷한 종류의 제안을 건넸다. 아주 시커먼 속내가 뻔히 보이다 못 해 줄줄 새어 나오는 모습이었다.

     레이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응해야 할 이유가 없군요.”

    “그러지 말고…… 헛?!”

     레이나는 굳이 오래 상대해줘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곧바로 신형을 날려 접근, 검격을 날렸다. 물론 검 표면엔 완연한 검강이 맺혀 있었다.

    “이, 이런!”

     사내가 금세 수세에 몰렸다. 설마 상대 또한 초일류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강자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는 게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셀린 쪽도 상황은 마찬가지. 그녀는 화살 없이 활만을 가지고 곡예와도 같은 전투를 벌였는데, 시종일관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상대 용병을 몰아붙이는 모습이었다.

     결국, 두 최상위 용병마저 단 위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관객들의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예상치 못한 두 여인의 승리에 열광하는 모습이었다.

    “진짜 강하구나! 저 나이에 저 실력이라니!”

    “그러나 포기는 없다! 다음은 나다!”

    “저 둘도 언젠간 지치겠지! 그때가 기회다!”

     아무래도 두 사람을 향한 도전은 끝이 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레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영약을 잔뜩 복용한 두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일은 절대 쉽지 않겠지만.

    “저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르우벤이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는 가운데, 레인이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신경 쓰지 말고 너도 적당히 도전하지그래? 저쪽에 있는 녀석이 좀 쓸만해 보이는데.”

     레인이 가리킨 곳에는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는 한 사내가 있었다. 단 위에 오연히 서서 도전자를 기다리는 그 사내의 허리춤에는, 무려 다섯 자루의 검이 매여져 있었다.

    “오. 카트넬 가의 일원인가. 무력대 대원인 것 같은데?”

    “아마 그렇겠지.”

     르우벤은 호승심을 불태우며 단 위로 성큼 올라섰다. 카트넬 가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사내가 눈을 빛내더니 자세를 다잡았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쪽이야말로.”

     가벼운 인사가 오가고, 곧바로 두 사람이 맞붙었다.

     * * *

    “굉장하다.”

     르우벤이 여기저기 깨지고 부서진 단을 둘러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경지가 올랐다지만, 자신이 이렇게까지 강해졌을 줄이야.

     르우벤은 검가 소속 초일류 검사로부터 승리를 따냈다. 그것도 그리 어렵지 않게.

     당연히 아티펙트의 도움 없이 이뤄낸 승리였다. 이전이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 그야말로 쾌거라고 할 수 있었다.

    “전부터 보통의 무예가 아니라고 생각하곤 있었지만.”

     새삼스레 느껴졌다. 자신이 배운 이 무공, ‘천마신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암만 자신이 초일류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해도 아직은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그런 자신이 이미 원숙하게 강기를 다루는 게 가능한 실력자를 쓰러뜨린 것은 절대 일반적인 결과라고 할 수 없었다.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무공 그 자체였다. 최상위 무공의 위력이, 좌공 특유의 다양한 선택지가 빛을 발한 것이다.

     두근두근.

     기분 좋은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르우벤은 가만히 숨을 골랐다. 워낙 주변이 처참하게 망가진 탓에, 콜로세움을 관리하는 하위 대지의 정령사가 나타나 단을 수리해줄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했다.

    “굉장하더군. 그 나이에 그 실력이라니 재능이 보통이 아니야. 부족하지만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 싶소이다.”

     단이 수리되자 곧바로 도전자가 나타났다. 품이 넉넉한 옷을 걸친 중년의 사내였다.

     르우벤이 어색하게 웃었다.

     재능이라니. 그만큼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

    “후우.”

     그가 잡념을 털어내고 자세를 다잡았다.

    ‘아직 부족해.’

     아까부터 무언가가 좀체 충족되질 않는 기분이었다.

     한 번의 대련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하고. 르우벤이 잠시 미간을 모으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일단, 활용할 수 있게 된 기술을 모조리 사용해 보자.

    “후읍!”

     르우벤이 진각을 밟았다. 천마군림보.

     투우우우웅!

     묵직한 파장이 단 위를 휩쓸었다. 중년 사내가 순간적으로 신형을 휘청였다.

     르우벤은 즐겁게 웃는 얼굴로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르우벤은 그 뒤로 무려 열 명이 넘는 상대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모두를 쓰러뜨렸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그가 서 있는 단을 기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레이나나 셀린처럼 특수한 이유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게 아닌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족해.’

     르우벤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을 했다. 이상하게도 갈증이 채워지질 않았다.

     열 번이 넘는 대련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대체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

     르우벤이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을 향해.

    “왜 그래?”

    “아니, 누가 날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뭐?”

     레인이 미간을 좁혔다.

     르우벤을 부르는 소리라니. 그런 건 듣지 못했다.

     누군가가 초월자인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르우벤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전달했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아마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또 들린다.”

     그런 와중, 르우벤이 재차 고개를 돌렸다. 마치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는 듯한 모습.

    “무슨 소리야.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는데.”

    “그럴 리가. 분명……. 아.”

     르우벤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인벤토리 툴.”

     그가 그 자신의 뒤쪽에 출현한 수납 선반으로부터 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물론 그것의 정체는 ‘마검’이었다.

    “그랬군.”

     르우벤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갈증이 풀리질 않았는지. 무언가가 부족하게 느껴졌는지. 마검을 손에 쥐는 순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가 무언가에 홀린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레인.”

    “응?”

    “오랜만에 나랑 대련 한 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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