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지옥수련(3)
검가에 도착한 일행은 먼저 가주와 대면했다.
“어서 와라,”
“오랜만입니다.”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군.”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그렇고 제 부탁은…….”
“부탁한 것들은 미리 준비해 뒀다.”
레인과 루바르덴이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지난 방학, 루바르덴은 레인에게 부탁했다. 다음 방학에 라미엔느를 가문까지 데려와 줄 것을. 다분히 그가 와이번을 길들인 테이머임을 염두에 둔 부탁이었다.
부탁의 이유야 물론 지극한 딸 사랑이었다. 그렇게 하면 그녀의 얼굴을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니까.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차기 가주로서 가문 내에서의 활동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아는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대신 레인은 검가에 체류하는 동안 여러모로 편의를 제공받기로 했다. 서로 윈-윈 하는 협약이었다.
기껏 가문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자취 생활을 구가하고 있던 라미엔느만 날벼락을 맞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루바르덴이고 레인이고 그녀의 의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뒤쪽은 네 제자들인가?”
“그렇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르우벤과 밀리아는 정식 제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주 틀리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 두 사람 또한 레인에게서 무공을 전수받긴 했으니까.
“놀랍군.”
루바르덴이 침음을 흘렸다. 대체로 어려 보이는데, 그들 모두 이룩한 경지가 상상 이상이었다.
무려 검가의 정식 후계자인 라미엔느나 오베른보다도 기량이 높아 보이는 이들이 꽤 되었다. 그 자신도 괴물인 성자가 제자도 괴물 같은 녀석들로만 모은 모양.
만일 제국과 밀약을 나누지 않았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저들을 적으로 맞이하게 되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피곤할 텐데, 이만 가서 쉬어도 좋다. 저쪽의 시녀가 숙소로 안내해 줄 거다.”
“감사합니다.”
레인이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을 끝으로, 일행은 집무실을 벗어났다.
* * *
르우벤 초일류 만들기 프로젝트.
수련 1일 차.
전날 레인의 지시에 따라 배정받은 숙소에서 충분한 휴식과 수면을 취한 르우벤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에 기분 좋게 눈을 떴다.
그가 의복을 갖춰 입고 시간에 맞춰 검가에서 제공해준 수련장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레인과 로엘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
“마침 바르베룸 왕국에서 움직이고 있었거든.”
바르베룸 왕국은 메르타와 국경을 마주한 나라였다. 북쪽으로는 제국과 맞닿아 있기도 했다. 그곳에서 와이번을 타고 날아왔다면 이곳까지 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으리라.
“여기 가주와 추가로 협상할 일이 좀 있기도 하고.”
뒷말을 덧붙이며 로엘이 후후, 하고 웃었다.
또 뭔가 악랄한 계획을 세운 모양이었다. 저 녀석이 적이 아닌 아군이라서 참 다행이라고, 르우벤은 생각했다.
르우벤은 사전에 이야기된 대로 인벤토리 툴을 로엘의 아공간에 맡겼다. 워낙 방대한 분량이라 아공간에 여유가 될까 싶었는데, 의외로 용량이 남아돌았다.
“아공간 증축은 시간이 될 때마다 받아뒀거든.”
살짝 놀란 얼굴의 르우벤에게 로엘은 그렇게 말했다. 그걸 위해 엘리제 파르테인에게 가져다 바친 뇌물이 보통 분량이 아니었다나.
로엘이 수련장을 떠나고, 본격적인 수련이 시작되었다.
“우선 운기행공부터 시작하자.”
레인의 지시에 르우벤이 고개를 끄덕이고 앉아 체내의 기운을 순환시켰다. 그사이에 다른 제자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아침이에요. 스승님.”
“일찍 일어났네. 사부.”
일행이 각자 수련장 곳곳에 자리 잡고 그 자신의 수련에 몰두했다. 레인은 아직 스승의 직접적인 지도가 필요한 루미아를 집중적으로 가르치며 시간을 보냈다.
두 시간가량이 흐르고, 르우벤이 운기행공을 마쳤다.
곧바로 이어지는, 검법, 보법을 비롯한 전반적인 무예 수련. 레인의 엄한 지도하에 르우벤은 구슬땀을 흘려가며 몸을 움직였다.
휴식은 최소화했다. 사실 휴식을 취한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5분에서 10분가량 가볍게 운기행공하는 것으로 대체했으니까.
그 뒤로는 레인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과 합을 겨뤘다.
사실상 루미아와 일리나를 제외한 모두가 르우벤보다 경지가 높았기에 승률이 처참했다. 르우벤이 새삼스럽게 좌절했다. 정확히는 그런 시늉을 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밤이 찾아왔다.
밀리아와 레인의 제자들이 하나둘씩 수련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되돌아갔다. 땀을 씻어내고 잘 준비를 하기 위해.
그런 그녀들을 힐끗 돌아보며, 르우벤이 물었다.
“오늘치 수련은 언제 끝나? 슬슬 나도 들어가서 쉬고 싶은데.”
“힘들어?”
“당연하지.”
르우벤이 후, 하고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이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르우벤의 검식 수련을 중단시켰다.
“따라와.”
“……?”
레인이 르우벤을 데리고 수련장 한쪽에 설치된 목제 칸막이 뒤편으로 이동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뒤따라온 르우벤은, 그곳에 놓인 커다란 목제 나무통을 보고 미간을 모았다.
“이건?”
“특별히 로엘에게 부탁해서 준비한 물건이다. 이번 수련에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냥 평범한 나무 목욕통으로 보이는데? 이걸로 뭘 하려고.”
덜컹.
레인이 목용통을 덮은 뚜껑을 치워냈다. 그러자 그 내부에 가득 찬 붉은 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 설마 이거.”
“어. 포션이다.”
“이 미친? 대체 이 목욕통 하나에 돈이 얼마나 들어간 거야.”
르우벤이 경악했다.
보통 포션은 딱 두세 모금 마실 분량이 하나의 용기에 보관된다. 절대 많다고 할 수 없는 분량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수준의 상처는 모두 치료가 가능하니까.
다만 그 양이 적다고 해서 가격도 낮으냐 하면, 그건 절대 그렇지가 않다. 타 직종에 비해 목돈 만질 기회가 많은 용병들이 겨우 포션 한 병 사는데 그렇게 벌벌 떠는 게 괜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저 커다란 목욕통을 가득 채우는 데에 들어간 포션은 대체 몇 병 분량일까.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 포션을 구입하는 데 들인 금액은 또 얼마일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일었다.
“대체 저걸 어디에 쓰려고?”
“어떻게 쓰긴.”
쉭!
갑작스레 레인이 신형을 이동하더니, 르우벤의 뒤에 나타나 그의 뒷덜미를 붙들었다.
“이렇게 쓸 생각이지.”
그가 르우벤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어푸어억!”
-목욕통 속으로 그를 무자비하게 처넣었다.
첨벙! 첨벙! 첨벙!
레인은 마치 빨랫감을 물에 적시듯 몇 번이고 르우벤을 목욕통에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그가 그 행위를 멈춘 것은, 버둥거리던 르우벤의 팔이 추욱 늘어질 때가 다 되어서였다.
쿨럭쿨럭!
겨우 레인의 손을 벗어나 땅에 발을 디딘 르우벤이 격렬하게 기침을 내뱉었다. 레인은 그사이에 유유히 목욕통의 뚜껑을 닫고, 젖은 르우벤의 몸을 열양지기로 말려 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좀 어때. 아직도 피로가 느껴져?”
“뭐?”
멍청한 얼굴로 반문하던 르우벤은, 이내 방금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피로가 말끔하게 풀렸다는 것을 인지했다.
“보아하니 완전히 제 컨디션을 되찾은 모양이네.”
“미친. 설마 저만한 분량의 포션을 준비해 둔 게, 겨우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풀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 거냐! 그게 무슨 돈지랄이야!”
“아니.”
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피로 회복용으로 가져다 둔 건 맞는데, 겨우 하루 쓰고 말건 아니야.”
“무슨 의미야.”
“앞으로 한 달간, 네게 수면은 없다.”
쿠궁!
르우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농담이지?”
“농담으로 들리냐?”
“야! 사람이 한 달간 잠을 안 자고 어떻게 버텨!”
“그래서 저 포션 목욕통이 있는 거잖아.”
레인의 담담한 대답에 르우벤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
“미친 것 아니냐! 아무리 포션의 힘을 빌려도 한계가 있는 법이야!”
“근성으로 버텨. 재능 없는 인간을 한 달 만에 초일류로 만드는 게, 평범한 방식으로 가능할 거라 생각했냐.”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인데!”
“원래 인간은 극한까지 내몰리면 어떤 식으로든 성장하는 법이지.”
르우벤의 턱이 툭, 하고 떨어졌다. 이 정신 나간 놈이?
눈빛을 보아하니 농담이 아니었다. 저 녀석은 진심으로 이쪽을 한 달간 재우지 않을 셈이었다!
“자고 싶으면 경지 올려. 그러면 돼.”
“그게 그렇게 쉽게 입에 담아도 좋을 내용이 아닌 것 같은데!?”
“뭘. 난 쉽던데.”
“빌어먹을 전생 금수저 같으니!”
레인은 길길이 날뛰는 르우벤을 수련장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그리곤 다시 검식 수련을 재개할 것을 ‘명령’했다.
“잘 거야!”
“그 실력에 잠이 오냐.”
이대로 말려들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르우벤이 반발했지만, 레인은 그것을 폭력으로 억눌렸다.
“억! 어억! 크억!”
“원망하지 마라. 계약서에 지장을 찍은 건 너야.”
수련을 재개하기도 전에 축 늘어진 르우벤. 레인은 그를 질질 끌고 가서 다시 목욕통에 처넣었다.
“푸허억!”
금세 회복되어 나온 르우벤이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코와 입으로 포션을 뱉어냈다. 레인은 가차 없이 그런 르우벤을 끌고 수련장으로 되돌아왔다.
“시작해.”
“악마 같은 새끼.”
르우벤이 울상을 지으며 검식 수련을 재개했다.
레인은 밤새 르우벤을 지켜보며 그의 단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수련 방법을 제시했다. 르우벤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어떻게든 그것을 전부 소화해냈다.
그렇게 르우벤 초일류 만들기 프로젝트가 이틀 차로 접어들었다.
* * *
수행 2일 차.
아침 해가 뜨자 레인이 르우벤에게 운기행공을 지시했다.
“피로를 극복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다.”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쥐여주는 영약.
르우벤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주 겁나게 고마웠다.
“운기 하는 척하면서 잠들지 마라. 보면 알 수 있으니까.”
레인의 삼엄한 감시하에 운기행공을 마친 르우벤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검술, 보법, 권각법 등의 수련에 힘을 쏟았다. 푹 숙면을 취하고 다시 수련장을 찾은 여성진이 측은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중간에 레인 또한 숙소로 돌아가 수면을 취했다. 레이나와 셀린에게 르우벤의 감시를 맡겨두고서.
높은 경지 덕에 두어 시간 숙면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피로를 풀어낼 수 있는 그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다시 수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해가 저물 무렵, 르우벤은 통감했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육신의 피로는 포션 목욕을 통해 어떻게든 풀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신력이 빠르게 고갈되다 못해 갈려 나가는 게 문제였다.
‘겨우 하루 못 잤다고 이 꼴인데, 이렇게 한 달을 버텨야 한다고?’
르우벤은 재차 레인에게 이것이 미친 짓임을 역설했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어푸어억!”
포션 목욕. 그리고 다시 수련.
르우벤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스쳤다.
* * *
수련 3일 차.
이날부터 르우벤의 수행에 변화가 일었다. 안타깝게도, 긍정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약발이 떨어지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
“당연한 거 아니냐!”
“어쩌겠냐. 그냥 그만큼 자주 입수해야지.”
“으아아아아!”
르우벤이 분노한 감정 가득 실린 참격을 허공에 날렸다. 레인이 느긋한 얼굴로 잘못된 자세를 지적했다.
이날, 르우벤은 총 네 번의 포션 목욕을 했다.
* * *
수련 6일 차.
이날, 르우벤은 결국 도주를 결심했다.
지난 시간 동안 르우벤은 수면을 취하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했다. 그러나 레인으로 인해 그 모든 시도가 좌절되었다.
결국 르우벤은 잘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총 일곱 번 포션 목욕을 한 5일 차에는, 바위에 머리를 박고 기절할 계획까지 세웠다.
물론 그 시도 또한 저지되었다. 다름 아닌 셀린에 의해서. 그 탓에 레인이 수면마저 수련장에서 취하게 되고 말았다.
‘그냥 도망치면 반드시 잡힌다.’
르우벤은 그 어느 때보다 맹렬히 머리를 회전시켰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혼자선 불가능하다. 조력자가 필요해.’
로엘에게 인벤토리 툴을 통째로 맡겨두었기에,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달아날 수가 없었다. 탈주를 도와줄 조력자가 절실했다.
‘나와 레인을 제외하고 이곳 수련장을 찾는 사람은 총 다섯. 그중 넷은 레인의 제자다. 사실상 조력을 요청할 수 없어. 역시 밀리아밖에 없다.’
르우벤은 레인이 수면을 취하고 있는 사이에 밀리아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아무리 수면 중이라 해도 놈은 초월자. 그 뛰어난 감각은 절대 자신을 놓치고 있지 않으리라. 목소리를 내서 도움을 청하는 건 엄금이었다.
밀리아는 르우벤과 오랜 시간 함께 해온 파트너. 그녀는 어렵지 않게 르우벤의 눈짓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냈다.
르우벤이 희망을 가졌다.
‘됐다! 그녀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레인 님. 르우벤 님께서 저에게 달아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저게 죽으려고.”
“?!”
희망을 품은 지 3초 만에 그것이 박살 나고 말았다. 설마 밀리아가 자신을 배신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르우벤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잠에서 깨어난 레인이 하품을 내뱉으며 말했다.
“이봐 낮이밤져. 좋게 말할 때 얌전히 수련해라.”
“…….”
르우벤은 보았다. 레인이 ‘낮이밤져’라는 단어를 언급하자 밀리아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가는 것을.
배신의 이유가 그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