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지옥수련(2)
쿠당탕!
리비아가 성대하게 바닥을 굴렀다.
“꺅!”
“리비아!”
그녀의 추종자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것도 잠시, 그들이 일제히 도끼눈을 뜨고 레인을 돌아보았다. 이어서 터져 나오는 욕설과 협박.
“너 이 새끼!”
“어디 근본도 없는 새끼가 백작 영애께 무례를!”
“죽고 싶은 거냐!”
그녀들이 일제히 레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두가 기사학부 학생인 만큼 상당한 실력자였다.
“…….”
모범생인 레인은 그날도 손에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레인은 잠시 그 책에 시선을 주었다가, 한 학생이 간격 내로 들어오자마자 그것을 휘둘러 버렸다.
짜악!
호쾌하게 뺨을 얻어맞은 여인이 단숨에 벽에 처박혀 혼절했다.
‘진짜 사람 패는 데도 쓸 만하네.’
아직 모범생이 아니었던 시절. 레인은 가끔 읽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 두꺼운 책들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이런 건 지식 함양보다 사람 팰 때 쓰는 흉기로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진짜였다.
“악!”
“켁!”
“크엑!”
겉표지로 이마 내려치기. 측면부로 목울대 가격. 모서리로 명치 찌르기. 나름 한 실력 하는 기사학부 학생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이거 도서관에서 빌린 거라 손상되면 안 되는데.’
문득 드는 생각. 레인이 책에 미약하게 내력을 실었다. 종이는 철제 무기와 비교해 내력 전도율이 형편없었지만, 경지가 높은 레인에겐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억.”
책 모서리에 정수리를 찍힌 학생 하나가 추가로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그쯤 되자 여학생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이, 이게 무슨.”
“저 녀석, 대체 정체가 뭐야!?”
레인은 답변 대신 신형을 날렸다. 기겁해서 검을 치켜드는 학생을 향해 서적 내려치기.
카앙!
단숨에 검이 두 동강 났다.
‘미친.’ 하고 중얼거리는 그녀의 얼굴에 작렬하는 옆 표지 어택. 그녀의 신형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 * *
장내가 완전히 정리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직도 안 가고 뭐 해. 얼른 가라.”
“히익!”
괴롭힘당하고 있던 여학생이 움츠러든 신음을 흘리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레인은 그녀를 한 차례 힐끗 돌아보았다가, 이내 무릎 꿇고 손들고 앉은 여학생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이것들을 어떻게 한다.”
레인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는지, 리비아가 버럭, 하고 소리쳤다.
“이런 짓을 벌이고서, 뒷일이 두렵지 않은 거냐!”
“…….”
레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벌 받는 자세로 목소리만 위협적이여 봤자 아무런 감흥도 안 든다.
레인이 근처에서 제법 큼직한 바위를 집어다가 그녀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떨어뜨리면 죽는다.”
“…….”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벽에 기대고 서서 벌 받는 여학생들을 한 차례 쓸어본 레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모두 마무리된 뒤에야 저질렀다는 감상이 고개를 쳐들었다.
‘역시 이건 내 선에서 정리가 안 되겠지.’
그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귀걸이를 조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웬일로 먼저 통신을 다 주냐.]
“사고를 좀 쳐서.”
[너 설마. 대체 누굴 반병신으로 만든 거냐. 고위 귀족 자제는 아니겠지?]
“아니, 반병신까진 아니고.”
자세한 설명은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건만, 대체 어떻게 아는 것일까. 로엘의 추측성 발언은 사건의 본질에 꽤나 근접해 있었다.
‘대체 이 녀석은 날 무슨 이미지로 보고 있는 거지.’
순간적으로 레인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어느 가문인데.]
“르뤼렌 백작가라던데.”
[미친. 군벌 귀족이잖아.]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귀걸이 너머로 로엘의 잔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레인이 그것을 한 귀로 흘리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참 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처리 좀 부탁해도 될까.”
[다음번에도 이런 일 생겨나면 가만 안 둔다 진짜. 안 그래도 바쁜데.]
“…….”
현재 레인의 의식주, 거기에 용돈을 비롯한 모든 편의는 로엘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그의 가만 안 둔다는 협박은 레인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두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아무튼, 잘 좀 처리해줘.”
[끊어 인마.]
통신이 끊어졌다.
레인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리비아에게 다가가 손에 들린 바위를 치워주었다. 그리곤 그보다 세 배는 큰 바위를 캐서 다시 그녀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야 이 악마 같은 놈아!”
리비아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주위를 크게 울렸다.
* * *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한참을 고통받다 풀려난 리비아는, 기숙사로 되돌아오자마자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녀는 우선 추종자들을 시켜 레인에 대한 정보를 모으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별다른 연고 없는 평민임을 확인했다.
‘행정학부 학생이면서도 그만한 실력을 감추고 있기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귀족가 자제는 아니었단 말이지.’
그녀가 섬뜩하게 웃었다.
그렇다면야 정말로 거리낄 것이 없다. 제대로 복수해주리라. 그녀가 근육통이 일어난 팔을 주무르며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날부터, 그녀는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꼈다.
“아니, 폭행당했다니까요?! 제가?”
“그러니? 하지만 그 남학생은 행정학부 학생이지 않니.”
행정학부로 찾아가 교사에게 가서 따졌지만, 얼버무리려고만 하고 제대로 된 대응을 해주질 않았다.
처음에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아서 그런가 싶었는데, 몇 번 다른 교사들에게도 그 짓을 반복하다 보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대체 왜?’
심지어 어떤 교사는 되려 역정을 냈다. 전후 사정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네 행실이 나빠서 벌어진 일인데 누굴 탓하느냐고 질책하는 이마저 등장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더욱 큰일이 벌어졌다. 추종자들이 그녀와 슬금슬금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너 대체 왜 이래!?”
“가문에서 연락이 와서…….”
“연락? 무슨 연락?”
“죄송해요!”
리비아가 붙든 손목을 뿌리치고, 추종자 여학생이 달아나 버렸다. 리비아가 멍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리비아는 알지 못했다.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귀족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 황제. 그 황제가 꼭두각시이며, 레인이 그 황제의 권세를 멋대로 빌어다 사용할 수 있음을.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로엘이 바르바젠에게서 그 권리를 어느 정도 이양받았다. 그 로엘에게 레인이 부탁을 건넬 수 있으니 거기서 거기였지만.
또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결정타가 터졌다.
그녀는 숙소로 배달되어 온 가문의 서신을 읽고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그것을 쫙쫙 찢어버렸다.
“대체 정체가 뭐야, 그 녀석!”
이젠 하다 하다 본가에서 쓸데없는 짓 말라는 압박이 내려올 줄이야. 심지어 이번 일을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말라는 함구령까지 떨어졌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그 레인이라는 녀석은 겉으로 드러난 정보가 다가 아니다. 무언가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 자신과 같은 일개 귀족 자제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흩날리는 종이 쪼가리들을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허무한 기분을 느꼈다.
겨우 이런 것이었던가. 그동안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권세란 게. 더욱 큰 권세가 나타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그런 것이었던가.
“…….”
그녀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숙소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푹, 하고 몸을 파묻었다.
정말로, 오늘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 * *
순식간에 2학기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아카데미 2년 차 2학기에는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것을 하나 꼽자면, 역시 실기평가를 치렀다는 것일까.
레인은 영주관에 배속되어 영주 직속 기사단을 보조하는 행정 인력의 역할을 수행했다.
배운 대로 순조롭게 업무를 소화했고, 기사단 인물들과 친분도 다졌다. 그럭저럭 유익한 시간이었다.
다만 기사단장과 부기사단장이 문제였다. 이 두 사람은 연인 관계였는데, 밀애를 나눌 공간을 찾다가 자꾸만 레인에게 배정된 작업공간을 찾아왔다.
아주 깨가 쏟아졌다. 어차피 오래 보지 않을 얼굴이란 생각인지, 레인의 앞에서도 애정 표현에 거침이 없었다. 조금 행위가 과격해질 땐 레인에게 자리를 비켜달라 요구하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해 겁나게 민폐였다. 마음 같아선 둘 다 창문 바깥으로 집어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레인은 로엘의 잔소리를 떠올리며 그것을 참아냈다.
심통이 조금 많이 난 날은 숙소로 돌아가 레이나와 농밀한 시간을 보내며 그것을 풀어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우선 르우벤이 조금 위험한 지경에 처했었다. 마검의 힘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침식이 가속화된 탓이었다.
그나마 학기가 마무리될 즈음에는 어떻게든 마기를 억눌러 위험한 수준은 벗어났다. 대신 시험 점수는 낙제만 면했다 뿐이지 거의 그에 근접할 정도로 처참해졌다.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하긴 했지만.
다음으론 카트란이 결국 무투대회에서 우승을 거뒀다. 최대 라이벌인 라미엔느 카트넬이 아예 대회에 불참한 탓에, 비교적 손쉽게 최종 승자가 되었다.
아무래도 라미엔느는 카르테리온 백작령에서의 공성전을 경험하고 이런 대회 따위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모양이었다. 카트란은 오히려 그녀의 불참을 아쉬워했지만.
카트란은 지난 시간 동안 정말로 열심히 수행했다. 지난 패배를 설욕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자부할 만큼.
그런데 정작 설욕해야 할 대상이 모습을 드러내지조차 않은 것이다. 그가 약간 맥이 빠진 모습을 보인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인의 성적 순위에 변동이 일었다. 어김없이 교실 한쪽에 붙은 대자보 가장 윗줄에, 드디어 레인의 이름이 적혔다.
[학년 전체 1등 : 레인]
[학년 전체 2등 : 라미엔느 카트넬]
대자보를 올려다보는 레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반면 그 뒤편에서 라미엔느가 분했는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르우벤이 완전히 구도가 뒤바뀐 두 사람을 보고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1등이나 2등이나 거의 점수에 차이가 있지도 않건만, 두 사람에겐 그게 굉장히 중요한 모양이었다.
하여간에 모범생들이란.
* * *
겨울 방학 시즌이 돌아왔다.
레인은 방학의 시작과 동시에 르우벤, 밀리아, 제자들, 그리고 라미엔느를 데리고 다시 메르타 왕국을 찾아갔다.
와이번으로 이동하기엔 조금 인원수가 많았기에 르우벤의 본 드래곤을 이용했다. 이번에도 라미엔느는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목적지는 카트넬 가. 즉 검가였다.
방문 목적은 오로지 하나. 수련이었다. 정확히는 레인과 밀리아, 일리나, 라미엔느를 제외한 나머지의 수련.
제자들의 경우엔 검가의 다양한 강자들에게 도전하도록 지시할 예정이었다. 많은 전투 경험을 쌓도록. 일리나의 경우엔 그냥 혼자만 남겨두기 미안해서 함께 움직이기로 한 것이었고.
그리고 르우벤의 경우엔…….
“야, 여기 지장 좀 찍어라.”
“뭔데?”
“읽어봐.”
르우벤은 레인이 내민 서류를 받들고 읽어보았다. 그리곤 황당하다는 듯 내뱉었다.
“야. 초일류가 장난이냐. 어떻게 한 달 내로 날 초일류로 만들어?”
서류에 적힌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방학 기간 내에 초일류의 경지에 다다르도록 해 주겠다.]
[대신, 이쪽이 제시한 수련 방법에 절대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성실히 따라야 한다.]
[아티펙트의 사용을 일절 금한다. 여지를 없애기 위해, 이후 찾아올 로엘의 아공간에 인벤토리 툴을 보관해 두기로 한다.]
[수련이 고되다고 달아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위 조항을 어길 시, 조금 가혹한 제재가 가해질 수 있다.]
르우벤이 계약 서류를 팔랑거리며 말했다.
“대체 무슨 목적이야?”
이 무슨 수상하기 짝이 없는 계약서란 말인가.
딱히 레인이 뒤통수를 칠까 우려하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그 정도의 신뢰는 쌓았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역시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종류의 내용은 아니었다.
“너, 최근에 위험했잖아. 마검에 자아를 먹힐 뻔했었지.”
“그렇지.”
“그래서 제안하는 거다. 거기 적힌 대로, 이번 방학 동안 무슨 수가 있어도 초일류로 만들어 주마.”
“…….”
“너도 알 것 아니야. 근본적인 경지를 올려두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 위험한 상황이 닥치게 된다는 거.”
“아무리 그렇다지만, 진짜 이게 가능은 해? 한 달 내에 초일류라니. 초일류가 무슨 식빵처럼 뚝딱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마도 가능할 거다. 네가 그 계약에 동의하기만 한다면.”
이미 르우벤은 일류의 끝자락에 다다라 있었다. 그가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재능의 문제.
레인이 하려는 일은 그저 그 벽을 넘어설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 그뿐이었다.
르우벤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수확이 달콤하면 뭘 하는가. 조건이 이렇게나 괴악한데. 계약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그런 르우벤의 귓가에, 레인의 말이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이봐. 낮이밤져 아저씨. 고민은 그쯤하고 얼른 찍지그래.”
“방금 뭐라고 했냐.”
“요즘 아주 처참하게 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너 이 자식!”
르우벤의 분노한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레인이 밀리아와 한 차례 시선을 교환했다.
“…….”
그녀가 슬쩍 시선을 회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살짝, 아주 살짝 끄덕였다.
“쯧쯧.”
“하면 되잖아! 하면 될 것 아니야!”
결국 르우벤은 계약서에 지장을 찍고 말았다.
그렇게, 일명 르우벤 초일류 만들기 프로젝트, 지옥 수련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