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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화. 지옥수련(1) (182/249)

 183화. 지옥수련(1)

 2학기가 시작되었다.

 레인과 카트란은 다시 원래의 반복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카트란은 그 자신의 수련에 박차를 가했고, 레인은 학업, 수련, 제자 육성, 무력대 창설에 힘을 쏟았다.

 알테라 시로 돌아온 레인은 제자들의 진경을 확인하고 약간 놀랐다. 모두 실력이 한 단계씩 진일보해 있었다.

 레이나와 셀린의 경우엔 초일류의 끝자락에 다다라 있었다. 앞으로 일이 년 내로 다음 경지에 진입하지 않을까 싶었다.

 뛰어난 재능, 그리고 뛰어난 스승, 거기에 영약을 비롯한 온갖 준비된 기연들까지. 빠르게 성장하기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으니 그 경지에 이른 것도 이상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인의 기량이라는 게 제반 사항이 갖춰졌다고 해서 반드시 쑥쑥 성장하는 것은 또 아니다. 두 사람이 그만큼이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 자신들의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리라.

 레인은 드물게 두 사람을 칭찬하는 발언을 했다.

“훌륭하네. 둘 다 열심히 노력한 모양이야.”

“아직 부족하죠. 스승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수준이 되려면.”

“…….”

 레이나는 빙긋 웃으며 겸양의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 어린 뿌듯한 기색만큼은 숨길 수 없었는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셀린의 경우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발끝으로 바닥을 긁기만 했다.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아직 부족하다라.’

 레인이 보기에, 두 사람의 경지는 절대 낮지 않았다.

 저 정도면 중원에서도 동년배의 무인 중 최상위권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 비교조차 되질 않겠지.

 그녀들은 어린 나이에 그만한 경지를 이룩했음에도 자만하지 않고 있었다. 향상심을 잃지 않고 정진하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고마웠다. 스승으로서 이런 제자들을 두었다는 것만큼 뿌듯해지는 일이 없었다.

 레이나와 셀린의 성장도 놀라웠지만, 가장 놀라운 성장을 이룩한 것은 역시 루미아였다.

 그녀는 레인이 메르타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일류의 경지에 막 발을 들여놓은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작 레인이 떠나 있던 3개월 만에 수기(手氣)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자면, 일류 중에서 상위권에 들 정도. 오래지 않아 경지의 끝에 이르러 초일류를 바라볼 수 있게 될 듯했다.

 겨우 3개월 만에 그 정도까지 성장했다는 것은 정말로 보통 일이 아니었다. 레이나나 셀린조차 그 경지였을 때 루미아와 같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진 못했다.

 듣기로, 그녀는 지난 3개월 동안 르우벤, 밀리아, 레이나, 그리고 셀린에게 계속해서 대련을 청하고 다녔다고 했다.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고 무리해가면서.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그녀의 컨디션을 신경 써주느라 진땀을 뺐다던가.

‘간혹 인간의 집념은 상식을 초월해 이해 불가한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하지. 딱 그에 부합하는 모습이로군.’

 그 집념이 딱히 좋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녀 또한 열심히 노력했다.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할 정도로.

 레인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루미아와 시선을 맞추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했다.”

 루미아는 예전과는 달리 그 손길을 쳐내지 않았다. 대신 기분 좋다는 듯 갸르릉, 울었다.

“이것으로 멀어진 거리를 어느 정도는 좁힌 거겠죠.”

“…….”

 두서없는 발언이었지만, 레인은 그녀의 말에 담긴 의미를 곧바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녀가 제 몸을 돌보지 않아 가면서까지 무리해서 성장하려 한 이유. 그 이유가 바로 레인 자신인 모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불쑥 경지가 올라 버린 ‘목표’. 그로 인해 치밀어 오른 조바심이 그녀가 그토록 경지 향상에 목메도록 만든 원인이 아닐까.

 어쩐지 즐거운 기분이 든 레인이 그녀에게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다. 그러니 어서 내가 서 있는 곳까지 올라와라.”

“언젠가, 반드시.”

 루미아가 마주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 웃음은 분명 귀엽고 어린 여자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어딘가 스산한 느낌이 전해져 오는 웃음이기도 했다.

 * * *

“실기평가라.”

“넌 어디 배정받았냐? 난 외성 치안병을 관리하는 행정관으로 가게 됐는데.”

“영주관.”

“세상 불공평한 것 봐라. 최상위권 성적이라고 배정된 장소까지 호화롭네.”

 이제는 익숙한 르우벤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레인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바로 라미엔느 카트넬이 기다리고 있는 그룹 전용 스터디룸. 방문 목적은 아티펙트를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아깝지 않아?”

“아니, 괜찮아. 어차피 언젠가는 카트넬 가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데 써먹으려던 물건이었고. 그 시기가 이렇게 앞당겨질 줄은 몰랐지만.”

 일곱 자루의 장검이 한 세트로 묶인, 초대 카트넬 가주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아티펙트. 지금까지 르우벤 또한 여러모로 애용해온 물건이었다.

 분명 그것을 타인에게 양도하게 된 지금의 상황이 그리 달갑진 않을 터였다. 그런데, 의외로 르우벤의 얼굴에서는 그다지 기분 나빠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그 본인의 말마따나 언젠간 이런 용도로 사용할 물건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딱히 이걸 내어준대도 전력의 감소는 없을 듯하니까. 아마 마검을 원숙하게 다루게 될수록 활용하는 아티펙트의 숫자는 줄어들게 될 것 같고.”

 -이제는 딱히 그 물건이 그에게 절실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최상위 아티펙트 중에서도 특별한 몇몇은 서로 상성이 맞지 않으면 반발해버린다고 했던.”

“어. 그랬지.”

 그렇기에 르우벤은 상성이 맞는 아티펙트를 모아 세트를 구성하고, 그것을 필요에 따라 바꿔 장착해 전투에 임하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상해냈다.

“그런데 이 마검이란 게 능숙하게 다루게 되면 될수록 그와 비슷한 성질을 보이더라고.”

“다른 아티펙트들과 반발하는?”

“어. 단순히 반발하는 것과는 느낌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그런 종류의 제약이 생기긴 하더라고. 희한한 물건이야.”

“흠.”

“앞으로 내가 직접 전투에 활용하는 아티펙트의 숫자가 꽤 줄어들지도 모르겠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스터디룸에 다다랐다.

 레인이 속한 그룹은 적어도 대외적으론 상당히 인정받는 그룹이었기에, 배정된 스터디룸 또한 상당히 세련되고 규모가 큰 것이었다.

“와, 이거 성적 하위권은 서러워서 살겠나.”

 르우벤이 재차 불평을 내뱉으며 노크하고 방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던 라미엔느 카트넬이 두 사람을 맞아 주었다.

“어서 와. 차는 뭘로 내줄까?”

“녹차.”

“홍차.”

“잠시만 기다려.”

 이내 세 사람은 테이블 하나를 두고 둘러앉았다.

“어쩐지 적응이 안 되네. 그 모습.”

 라미엔느가 레인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고소를 머금었다.

 메르타 왕국에 크게 명성을 떨친 성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보기만 해도 재미없어지는 모범생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그건 됐고, 일단 용건부터 해결하지.”

 레인은 괜히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가 르우벤에게 눈짓하자, 르우벤이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인벤토리 툴.”

 뒤쪽에 출현한 간이선반. 르우벤이 선반에서 일곱 자루의 장검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테이블 한가운데에 올렸다.

“이것이…….”

 라미엔느가 멍하니 그것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홀린 듯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 검을 살짝 뽑아 보았다.

 차앙.

“굉장해.”

 천을 가져다 대면 곧바로 잘려 나갈 것만 같은 예기를 뿜어내는 미려한 검신. 그녀가 그것을 납검하고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로 되돌렸다.

 이것의 운반을 위해 현재 가문에서 파견되어 이곳으로 오고 있는 원로만 셋이다. 이 아티펙트가 무사히 전달되기만 하면, 앞으로 가문은 한 차례 큰 도약을 이루게 되리라.

“말했듯, 아직 그 물건의 소유권은 완전히 너희 가문 측에 넘어간 게 아니야. 이 녀석에게 ‘귀속’되어 있는 것을 ‘대여’해준 것뿐이지.”

“차후에 제국과의 밀약을 완벽하게 이행하면 그때 이것의 소유권을 완전히 넘겨준다. 맞지?”

“그래.”

 당연한 말이지만, 제국은 호구가 아니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만한 아티펙트를 선불로 선뜻 내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이쪽이야말로.”

 라미엔느는 레인, 르우벤과 한 번씩 악수를 나눴다. 세 사람의 모임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 *

 스터디룸을 나선 뒤 볼일이 있다는 르우벤과 헤어져 홀로 교정 뒷길을 통해 귀가하려던 레인은, 어쩌다 보니 묘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평소라면 그런 상황을 맞이하기도 전에 먼저 자리를 피했을 터였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지, 여인의 뾰족한 비명 소리가 유난히 귓가에 크게 울렸다.

“그, 그만!”

“하! 너 이 건방진 평민 새끼. 어디 다시 한번 나를 무시해 봐라.”

“내, 내가 대체 언제 널 무시했다고.”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내력으로 한껏 예민해진 청각을 통해 들려오는 대화. 대충 무슨 상황인지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었다. 딱히 드문 일도 아니었다.

 아카데미도 결국 하나의 작은 사회였다.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존재하는. 일단 교칙상으론 평등이 보장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교칙일 뿐이었다.

 아마 이 앞의 상황은 그와 관련한 종류의 것일 터.

‘평소라면 굳이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레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답지 않게 감상적이게 되었다고 스스로를 질책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지난 방학 동안 돌봤던 환자들이 자신을 부르던 그 목소리.

[성자님!]

“…….”

 레인은 바로 최근까지 굉장히 많은 숫자의 사회적 약자들을 접했다.

 그들을 돕고, 그들에게서 존경받았다. 그들을 지켜주었고, 그들에게서 경외 받았다. 그들과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했고, 그들이 가진 아픔을, 고통을, 슬픔을 전해 들었다.

 아무래도 그 시간이 자신을 조금 변화시킨 모양이었다. 어쩐지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쯧.”

 그것이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아, 레인이 한 차례 혀를 찼다.

 그가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건물 외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움츠린 한 여학생과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여학생의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전형적인 집단 괴롭힘이었다.

 쓰러진 여학생의 몸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그런 여학생을 둘러싼 무리는 하나같이 입가에 냉소를 짓고 있었다.

 * * *

 유서 깊은 제국의 귀족 가문인 르뤼렌 백작가의 차녀, 리비아 르뤼렌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뭐야?’

 그곳에 서 있는 남학생을 보고 먼저 머릿속에 든 생각은, ‘짜증 난다’는 것이었다.

 전부터 눈에 거슬리던, 분수를 모르는 평민 녀석을 족치고 있던 차였다.

 교사의 눈에 띄면 안 되기에 일부러 인적 드문 장소를 골랐다. 그런데 웬 이상한 녀석이 나타나 상황을 목격해 버렸다.

 이런 경우, 그녀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놈을 회유하는 것. 둘째는 놈을 협박해 입막음하는 것.

 그녀는 일단 상대를 한 차례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놈은 비리비리한 행정학부 학생이었다. 별 볼 일 없는 평민이기도 했다.

 굳이 첫 번째 선택지를 고를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야, 너. 이리 와봐.”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쪽의 지시에 따르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겁에 질리기라도 한 것일까. 사내놈이 배짱도 없고, 한심했다.

 결국 그녀는 건방진 평민 여자를 추종자들에게 맡겨두고 스스로 그의 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곤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윽박질렀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았나 보지?”

 위협적인 표정으로 으르렁거리던 그녀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놈의 얼굴에서 어떤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뭐지?’

 그녀가 왠지 모를 위화감에 살짝 미간을 모았다. 그리고 그때, 놈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일단 하나 묻겠는데. 저 여자가 너희에게 무언가 큰 잘못을 한 건가?”

“뭐?”

 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실소하고 말았다. 이 무슨 얼빠진 질문이란 말인가.

 그러자 이쪽의 그 반응으로부터 무언가를 읽어냈는지 놈이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내가 오해를 한 건 아닌가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로군.”

 놈, 레인은 한 차례 소리 나게 목을 꺾으며 그렇게 말했다.

 혹시 몰라서 확인차 질문을 던져봤는데, 역시 괜한 짓거리였다.

 눈앞의 여인은 그냥 쓰레기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권세를, 약자를 마음껏 짓밟아도 좋을 권리로 착각하고 있는.

 여인, 리비아가 한층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못된 년이면 어떻게 제재라도 가하려고?”

 가까이서 보니 굉장히 비열하고 재수 없게 생긴 얼굴이었다. 이걸 걷어차 버릴까, 하고 레인이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공부만 해라.]

[제 성격에 못 이겨서 어디 귀족가 자제하고 부딪치기만 해.]

[네가 사고 치면 그걸 무마시키느라 고생하는 건 나야, 인마.]

 아카데미 입학 전에 로엘이 몇 번이고 주지시킨 당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의 윽박에 못 이겨 얌전히 학창 시절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

 그리고 바로 그다음 순간.

 퍼억!

“케엑!”

 레인은 여인의 복부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원래 약속은 깨라고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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