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제안(2)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가주, 루바르덴의 얼굴에 약간 노기가 어렸다.
워낙에 충격적인 이야기였기에 순간 당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판단력이 흐려진 것은 아니었다.
방금의 발언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굉장히 무례하게 비쳐 보일 수도 있는 종류의 것. 이것을 지적하지 않으면, 이쪽이 상대에게 숙이고 들어간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지금 날 더러, 모국을 배신하라고 한 건가?”
그의 전신에서 강렬한 기파가 흘러나왔다. 그것이 고스란히 로엘과 레인에게 전해져 두 사람을 압박했다.
‘기파를 차단해서 로엘 녀석을 보호하는 시늉을 해야 하나?’
레인이 고민했다. 일단 명목상 자신은 로엘의 호위 역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으니까.
고민은 짧았다. 그가 금세 결정을 내렸다.
‘귀찮아.’
어차피 로엘에게 이 정도 압박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터. 그냥 둬도 딱히 문제는 없으리라. 레인은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참으로 그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판단이었다. 이런 일에는 ‘이미지’도 나름 중요하거늘.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냐.’
그 기색을 읽어낸 로엘이 가면 아래서 옅게 쓴웃음을 지었다.
“잘못 듣지 않으셨습니다.”
로엘은 담담한 목소리로 루바르덴의 말에 답했다.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굳이 ‘배신’이라는 노골적인 표현을 사용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렇더라도 필요한 과정이었다.
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표현을 우회할 수도 있었다. ‘도탄에 빠진 왕국 백성들을 위해선 제의를 받아들이는 쪽이 옳다’는 식으로.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질을 벗어난 이야기일 뿐. 결국 배신을 대의라는 명목을 빌려 정당화한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불안정하게, 손쉽게 세워진 결심은, 그만큼 쉽게, 별것 아닌 계기로 깨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로엘은 그런 상황을 맞이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조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한 번은 이렇게 직설적으로 언급해 둬야 한다. 상대가 그 스스로 여지를 남겨두지 않도록. 쓸데없이 결정을 번복하는 일이 없도록.’
물론 그것이 무조건 옳은 방식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엘의 개인적인 취향에 불과했다. 그가 괜히 과거에 계약 마법에 그렇게 집착했겠는가.
“내가 제국을 두려워해서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 같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헛소리를 입에 담을 수가 있지?”
“헛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이 황제 폐하의 의지이기에 그대로 전달한 것일 뿐.”
로엘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루바르덴의 말을 맞받았다. 대륙에 이름 높은 칠검제(七劍帝)가 작정하고 압박을 가해오고 있음에도, 조금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이 왕국은 답이 없습니다.”
“궤변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왕국의 일. 그것이 우리 가문이 제국에 협력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썩어빠진 왕국을 구제하기 위해서 대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설마 왕국 스스로 내부 개혁을 이뤄내면 된다는, 꿈과 희망이 가득한 답변을 내어놓으시진 않으시겠지요.”
“…….”
일순 루바르덴의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현재 왕국이 빠져 있는 가장 큰 딜레마였다.
환부가 너무 오래 방치되어 곪아 터지다 못해 썩어버린 것이 현 메르타의 실정. 국가 개혁을 이루고자 해도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방관하실 겁니까? 지금껏 그래 온 것처럼? 왕족과 귀족이 백성을 개돼지로 취급하는 이 막장 국가를? 카트테리온 백작령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마치 제국이 이 나라를 집어삼키면 상황이 크게 나아질 것처럼 말하는군. 너희 제국이 이 나라의 백성들을 멋대로 착취하지 않을 거라 어떻게 알지?”
“제국은 점령국을 절대 식민지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따지기엔 이미 메르타가 더 떨어질 곳이 없을 만큼 최악이지 않습니까.”
“…….”
“장담하지요. 이 나라의 백성들이 구제받는 가장 빠른 길은, 타국의 침략, 점령에 의해 국가 상층부가 통째로 물갈이되는 것입니다.”
왕국의 인물이 아닌 제국의 인물이 그것을 내뱉은 시점에서, 이미 그 발언은 궤변이다. 그러나 루바르덴은 그것을 쉬이 지적할 수가 없었다.
그는 메르타의 실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로엘이 언급한 것들을 진작부터 통감하고 있었다.
감정적인 측면을 완전히 배제하고 보았을 때, 로엘의 발언은 실로 옳았다. 그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이 밀어닥치지 않는 한 메르타 왕국에 개혁의 여지는 없었다. 있더라도 오랜 세월을 필요로 했다.
“그 점령의 과정에서 죽어 나갈 백성들은?”
“의미 없는 질문을 하시는군요.”
“그렇군. 바보 같은 질문이었어.”
어차피 제국은 의지를 굽힐 생각이 없다. 카트넬 가에 주어진 선택지는 제국의 제의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그것뿐.
어차피 어떤 선택지를 고르더라도 전쟁에 의한 피해가 없을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카트넬 가가 제국의 편에 붙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일지도 모른다. 전쟁이 빠르게 종결될 테니까.
“그리고 애초에 카트넬 가는 왕실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카트넬 가는 메르타 상층부와 굉장히 사이가 나쁘다.
카트넬 가는 국격을 바닥까지 떨어뜨린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권력자들을 경멸한다. 반면 왕국의 권력자들은 그 자신들의 손에 넣고 마음껏 굴릴 수 없는 강력한 무력 집단인 카트넬 가를 경계, 견제한다.
실질적으로 카트넬 가가 없었으면 진작 망했을 국가인데, 왜 권력자들이 카트넬 가에 머리 숙이지 않느냐고?
간단하다. 그들에겐 그들의 권리가, 권력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국가적인 재난 상황이 닥쳐도 저들끼리 치킨 게임이나 벌이던 자들이 아닌가.
“국가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제쳐 두고서라도, 카트넬 가는 제국과 함께 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대로라면 카트넬 가에 미래가 없다는 것쯤, 가주님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현 카트넬 가는 그 위세가 예전 같지가 않다. 가문 내부적인 문제가 아닌, 외부 환경의 문제 때문에.
오죽하면 루바르덴이 대대로 가문의 주인에게 주어지는 ‘칠검제’라는 칭호보다 ‘비운의 가주’라는 칭호로 더 많이 불리겠는가.
“…….”
“피차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된 발언을 통한 간 보기는 필요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희는 ‘귀족’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지금부터는 카트넬 가가 제국에 협력하면 얻게 되는 이득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로엘이 손가락을 하나 펼쳤다.
“첫째로, 가문의 존속을, 그리고 가문이 통치하는 영지를 그대로 인정받을 겁니다.”
이어 추가로 손가락을 하나 더 펼쳤다.
“둘째로, 가문의 발전을 위한 제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을 겁니다.”
사실 이것은 앞으로 제국에 소속되게 될 모든 거대 무력 조직에 제시될 조건이었다. 그들의 힘을 키워주는 것도 마족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마지막으로, 제국이 보유하고 있는 초대 카트넬 가주의 유산을 양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뭐라?”
“초대 카트넬 가주께서 남기신 유적을 저희 제국에서 격파해서 말입니다. 그분이 생전 사용하시던 물건을 이쪽에서 보유하고 있습니다. 일곱 자루의 장검으로 이루어진 세트형 아티펙트를.”
“뭐라고!”
루바르덴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뒤쪽의 크레필만 또한 마찬가지.
기록에 전해지길, 카트넬 가의 초대 가주는 무려 열네 자루의 검을 다뤘다고 한다. 그중 일곱 자루는 그 본인이 직접 다뤘고, 나머지 일곱 자루는 아티펙트를 이용해 조종했다고.
그 물건은 초대 카트넬 가주의 전인이 사용하면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종류의 것. 만일 현 카트넬 가의 가주나 전대 가주가 그 물건을 사용하게 되면 단숨에 무력 수위가 몇 단계는 뻥튀기될 터였다.
물론, 그 아티펙트의 출처는 르우벤이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꽤나 좋은 조건이 아닙니까?”
루바르덴의 얼굴에 갈등의 기색이 어렸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기세는 어느새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이제는 마냥 로엘의 제의를 무례하다고 매도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제의를 거절하신다면 카트넬 가를 기다리는 결말은 오로지 파멸뿐일 겁니다.”
당근을 충분히 던졌으니 다음은 채찍이다. 로엘은 담담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애초에 제국이 대륙통합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 시점에서 이미 그 사실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이나 마찬가지긴 했다. 그렇지만 로엘은 굳이 한 차례 더 그 사실을 입에 올렸다.
어디까지나 제국은 을이 아닌 갑의 입장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서.
“조금 시간을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긴 시간을 드리지는 못합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답을 내어놓도록 하지.”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겠습니다.”
로엘은 깊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리곤 레인과 함께 여유로운 걸음으로 수련장을 벗어났다.
* * *
“잘 된 것 같아?”
“어.”
검가를 나서며 레인이 묻자, 로엘이 간단하게 답변했다.
“굉장히 큰 리스크를 감수하던데. 제국이 대륙통합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 버린 것도 그렇고.”
“아니, 그 반대야. 리스크는 조금도 감수하지 않았지.”
“?”
“애초에 검가가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언뜻 보기에, 카트넬 가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 제의를 수락하거나, 혹은 거절하고 제국에 맞서거나.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다. 그들의 앞에는 오로지 한 가지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실리적인 부분에서도. 대의적인 부분에서도. 심정적인 부분에서도. 그들이 제의를 거절할 요소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로엘은 그들을 끌어들이고 싶어서 리스크를 감수한 게 아니다. 어차피 이쪽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마치 이쪽이 큰 리스크를 감수한 것처럼 연출해 보였을 뿐이다.
사전에 그들에 대해 충분히 조사를 했고, 미래를 알고 있는 각성자들에게서 그들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그들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조건들을 엄선했다.
모든 것은 철저한 사전 준비로부터 비롯된 것. 애초부터 교섭 실패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고생 많았다.”
“어. 너도.”
레인과 로엘이 서로의 어깨를 한 번씩 번갈아서 툭툭 쳤다.
“드디어 이 나라에서 해야 할 모든 일을 끝마쳤군. 오늘은 치킨이나 뜯자고.”
“좋아. 그런데 누가 요리해?”
“기대해라. 이 몸께서 오랜만에 솜씨 좀 발휘할 테니.”
“재료는 내가 사 오면 되나.”
“아니. 아공간 안에 다 준비되어 있어. 재료부터 맥주까지 전부.”
“역시 신실한 신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군.”
“무려 전생에서부터 치느님을 영접해온 몸이시다.”
그렇게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두 소년은 검가에서 그들에게 내어준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며칠 후, 검가 측에서 답변을 주었다.
“제의를 받아들이겠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로엘은 카트넬 가주와 세세한 조항에 대한 부분을 조율하고, 조약 관련 서류를 남겨 서로 한 부씩 나눠 가졌다.
제국이 메르타 왕국을 집어삼키는 데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검가. 그 검가가 지금 이 순간 아군이 되었다.
솔직히 메르타에서 검가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은 쭉정이뿐이다. 제국이 긴장할 만한 요소가 아무것도 없다. 이젠 정말로 왕국을 날로 집어삼킬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성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카트넬 가주에게도 십자검 귀걸이가 하나 전달되었다. 초대 가주의 유산은 차후에 전해주기로 했다.
로엘은 제국에서 파견된 인물들을 모두 이끌고 왕국에서 철수했다. 그에겐 곧바로 착수해야 할 다음 일이 있었다.
레인은 올 때 그러했던 것처럼 일리나, 라미엔느와 함께 와이번을 타고 알테라 시로 복귀했다. 올 때와 다른 점이라면 바데룬 대신 카트란이 추가되었다는 정도일까.
어느새 아카데미 생활도 2년 차 2학기에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