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제안(1)
길었던 싸움이 마무리되고, 레인이 성벽 위로 다시 올라섰다.
병사들이 침을 꿀꺽 삼키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들은 지금, 영지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원해낸 영웅과 마주하고 있었다.
물론 레인 혼자서 해낸 일은 아니다. 카트란, 바데룬, 크레필만, 성녀, 그리고 로엘의 도움이 있었기에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인상 깊은 모습을 선보였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된 영지에 찾아와 수많은 사람을 구원함으로써 크게 이름을 떨친 성자. 그 성자가 수만의 몬스터를 단신으로 대적해 검을 휘두르는 대반전.
거대한 참격으로 몬스터들을 단숨에 쓸어버리던 압도적인 무위.
전쟁의 와중 갑작스레 찾아온 위기. 모든 이를 공포에 잠기게 만든 절대적인 ‘악’의 등장.
위기 끝에 등장한 지원. 대륙에 그 명성이 자자한 ‘성녀’의 대축복.
결국 악마를 물리치는 데 성공하고 그 뒤의 일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해내는, 그야말로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스토리와 연출.
이미 병사들은 레인에게 완전히 매료된 상태였다. 그들은 이제 레인이 마지막 승리 선언을 외치기만 하면, 그에 크게 호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레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순 병사들은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승리의 표효? 영지를 지켜낸 병사들을 치하하기 위한 자긍심 고취 발언? 그도 아니면 혹시 죽은 자들에 대한 애도?
그러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외침은, 병사들이 생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부상자!”
* * *
모두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레인은 공성전이 마무리되자마자 진료소로 되돌아왔다. 자신을 뽐내고 선전하는 어떠한 행동도 없이, 담담하게. 부상자들을 대거 이끌고서.
때아닌 환자의 대량유입에 진료소의 의원들과 사제들이 좌절했다.
레인은 그런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팔을 걷어붙였다. 그리곤 중상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스승님. 피곤해 보이시는데 조금 쉬시고 하시죠.”
“일단 위급 환자만 먼저 다 돌보고.”
피로에 찌든 레인의 얼굴을 보고 일리나가 걱정 어린 얼굴을 했다. 그러나 레인은 융통성 없게 고개를 한 차례 저을 뿐이었다.
다행히 일리나의 근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뒤, 기도와 휴식으로 성력을 회복한 성녀가 합세했으므로.
성력은 외상에는 가히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힘. 성녀의 대범위 회복마법에 중상자도 경상자도 모두 빠르게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실상 대부분의 환자는 성녀가 치료했지만, 앞서 레인이 보여준 모습은 구해낸 목숨의 숫자를 떠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정작 그 본인은 그런 것을 의식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지만.
* * *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레인은 남은 방학 기간 대부분을 진료소에서 보냈다.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고, 로엘이 추가로 쏟아내고 간 구호 물품을 배급해 그들의 영지 정착을 도왔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이만 가겠습니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우선 귀찮게 자꾸만 정체를 캐묻던 성녀가 교단의 부름으로 영지를 떠나게 되었다.
레인은 그녀에게 십자검 형태의 귀걸이 하나를 건넸다.
“이건 뭐죠?”
“통신 기능이 담긴 아티펙트.”
“예?”
“가지고 있어. 껄끄러우면 부관에게 맡겨둬도 되니까. 이후에 그게 ‘우리’와의 연결점이 될 거다.”
“…….”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녀에게, 레인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이어서 말했다.
“아, 그렇지.”
“?”
“아크문드 왕국 왕실 직속 암살조직 ‘다크문’을 주의해라. 교단에 알려서 놈들을 감시하는 데 힘을 쏟도록 해.”
“예?”
“그들이 네 목숨을 노리고 있다.”
“!?”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쪽에 묻고 싶어 하는 게 많다는 건 빤히 보였지만, 레인은 굳이 구구절절한 설명을 덧붙이진 않았다.
결국 그녀는 영지를 떠날 때까지 자신의 의문을 해소하지 못했다.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찾아왔습니다.”
다음으로 백작령의 임시 영주인 비앙카가 찾아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무래도 레인이 보여준 모습이 워낙 대단했다 보니 영주성으로 불러들이는 대신 자신이 직접 찾아오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했다.
“혹시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든 준비해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
레인은 차마 머지않은 미래에 이 영지를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이라곤 대답할 수가 없어 적당히 그들을 되돌려보냈다. 동경의 눈빛이 가득 담긴 비앙카의 표정을 마주하기가 어쩐지 굉장히 껄끄러웠다.
“불카르 에렌 바드롬이라고 합니다. 백작의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자’님 맞으십니까?”
그리고 왕국에서 몇 차례에 걸쳐 사절을 파견해왔다. 레인에 관한 이야기가 왕국 상층부에까지 전해져, 왕국 차원에서 영입 제의를 해온 것이다.
무려 초월자다. 그것도 소속 국가가 명확하지 않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은 수수께끼의 인재. 제의가 오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공성전 당시 레인을 구원하러 로엘이 참전했고, 그것을 많은 사람이 목격했다. 그렇기에 그가 제국 측 인물이라는 추측이 많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증. 일단 못 먹는 감이더라도 찔러는 봐야 하지 않겠는가. 레인이 자신의 정체에 대한 것을 끝까지 언급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국왕 전하께서 성자님께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혹시 왕궁을 한 번 방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바빠.”
“방문해 주시면 성대한 연회를 열고, 이번 일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큰 상을 내리시겠다 하셨습니다.”
“바쁘다고.”
레인의 답변은 여느 때와 같이 칼 같았다. 왕국의 사신에겐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고 환자에게만 집중했다.
애초에 카르테리온 백작령을 이 지경까지 몰아간 놈들이 바로 이 나라의 귀족들이다.
이번 일에 대한 보답이라니,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되도 않는 소릴 지껄이고 있었다.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한 번 고려해 주십시오. 성자님께도 절대 나쁜 이야기가 아닐 겁니다.”
“야 이 새끼야.”
레인이 치료 완료한 환자를 두고 목을 뚜둑 뚜둑 꺾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백작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으르렁거렸다.
“대체 몇 번을 더 거절해야 그 빌어먹을 입을 닥칠 생각이냐.”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지나치다? 그래, 하나 묻자. 너희 왕국 상층부 놈들은 내가 이 영지에 자리 잡고 환자들을 치료할 동안 무슨 도움을 줬지?”
“…….”
“산맥에 몬스터가 들끓어서 이곳의 영주가 외성 방비에 모든 힘을 쏟는 동안 너희는 뭘 했지? 듣기로 오히려 중앙 병력을 빼내서 영지를 봉쇄했다고 하던데.”
“…….”
“몬스터 웨이브가 끝나고, 전후 처리로 이곳 영지가 미쳐 돌아가고 있는 동안 너희는 무슨 지원을 했지? 제국으로부터 지원물자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은데, 이곳 영지에 그게 보급되는 걸 한 번을 본 적이 없어.”
“…….”
“왜 대답을 못 해.”
레인의 목소리가 착 하고 가라앉았다. 일순 백작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파견한 사자들이 매번 성자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말도 못 붙이고 돌아오자, 왕국에선 이번에 아예 초인을 보냈다. 백작은 무려 검성의 경지에 이른 강자였다.
그러나 그런 백작임에도 레인이 내뿜는 무시무시한 기세에는 몸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대체 날 뭘로 봐야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는 게 가능하냐.”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희가 날 너희 수준의 병신으로 여기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그런 제의가 나올 수가 없거든?”
백작의 표정이 굳었다. 방금의 발언은, 도저히 그냥 참고 넘어갈 수가 없는 무례였다.
“이쪽은 엄연히 왕실의 명으로 적법한 절차와 예의를 갖춰 찾아온 사자다. 아무리 그대가 초월자의 경지에 이른 강자라고 하나, 방금의 발언은 지나쳤다!”
“어쩌라고.”
“무례를 사과해라. 그렇지 않으면 방금의 발언을 메르타 왕실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겠다.”
“뱀 새끼도 아니고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방금 전 내가 한 질문에는 벙어리처럼 대답도 못 하더니, 꼬투리 잡을 건덕지가 보이니 얼씨구나 하고 물어뜯는구나.”
쾅!
무언가 항변하려던 백작의 안면에, 뭘 어찌해볼 틈도 없이 레인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컥!”
“지X하고 있네.”
쾅! 쾅! 콰득! 퍽! 카드드득!
따라온 수행원들이 경악하건 말건, 레인은 백작을 아주 탈탈 털어버렸다. 보는 이들이 다 아플 정도로 작신작신 두들겼다.
딱 죽지 않을 정도까지 구타하고 꾸깃꾸깃하게 접어 영지 외곽에 버려놓자, 수행원들이 그를 챙겨서 부리나케 영지를 벗어났다. 그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레인은 손을 탁탁 털고 진료소로 되돌아왔다.
와아아아아아!
그가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진료소의 환자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국가에 버림받은 백성인 그들에게 있어, 레인이 보여준 모습은 그야말로 통쾌함 그 자체였다.
“성자님 최고다!”
“크하하하하하! 보는 내가 다 통쾌했수다!”
의도치 않게 또 깊은 인상을 남긴 레인이었다.
카트넬 가의 인물들과도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오베른은 대련을 청하길 그만두고 한동안 레인을 가만히 관찰했다. 굉장히 복잡한 심정이 담긴 얼굴로. 그러다 어느 날 입술을 질끈 깨물고 가문에 복귀해 수련실에 처박혔다.
크레필만은 역시나 레인의 정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어 왔다. 한바탕 그와 푸닥거리를 하고 나서야, 레인은 그 귀찮기 그지없는 질문의 연쇄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라미엔느는 크레필만, 바데룬과 함께 가문에 복귀하더니 이후 혼자서 레인을 다시 찾아왔다. 가문에 다시 방문해달라는 요청이 담긴 서신을 들고서.
그리고 레인은,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조만간 찾아가지. 제국의 사자로서, 제대로 준비를 갖춰서.”
“……!”
라미엔느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심증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방학의 끝자락. 이젠 정말로 개학까지 며칠 남지 않게 된 시점.
레인은 진료소를 정리했다. 그런 뒤 로엘과 함께 카트넬 가를 방문했다.
이번 방문은 지난번처럼 풀어진 분위기에서 진행되지 않았다. 일단 비공식 방문이었기에 방문 절차가 복잡하진 않았지만, 회담 장소에는 무거운 기운이 흘렀다.
회담 장소는 가문의 비밀 수련장. 그곳에, 가문의 최고 실력자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가주, 전대 가주, 원로원의 구성원들, 그리고 차기 가주로 내정된 라미엔느 카트넬까지.
그들의 앞에 선 로엘은 평소처럼 가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레인은 그런 로엘의 한 발짝 뒤에, 마치 그를 호위하듯 섰다.
로엘과 가주 사이에 가벼운 인사가 오고 갔다. 그리고 가주, 루바르덴 카트넬이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제국의 사자가 우리 카트넬 가문을 찾아와 무슨 제안을 하고 싶다는 건지 어디 들어볼까.”
로엘은 가면 아래서 빙긋, 하고 웃었다.
이제 이 제안을 건네는 것을 끝으로, 메르타 왕국에서의 일은 완전히 마무리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국은, 앞으로 몇 년 내로 대륙통합 전쟁을 일으킬 예정입니다.”
쿵!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이야기에, 루바르덴조차 입을 열지 못하고 눈을 껌벅이기만 했다.
“물론 메르타 왕국에도 제국의 군세가 진군해올 겁니다. 그러니…….”
로엘이 바로 말을 잇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충분히 분위기가 고조되었음을 느낀 로엘은, 그제서야 뒷말을 이었다.
“그때가 오면, 왕국을 배신하고 제국에 귀순해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