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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몬스터 웨이브(4) (179/249)

 180화. 몬스터 웨이브(4)

“이런.”

 로엘이 드물게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연락을 취하나 했더니, 이걸 노린 거였나.”

 사념 마법을 익힌 현자는 그 자신으로부터 힘을 부여받아 마법사로 각성한 이들에게 단편적인 의지를 전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까 전 추격전이 벌어졌던 때, 아드바렌이 뤼바르의 윽박에 못 이겨 모종의 연락을 취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로 벌어지게 된 상황이 이것인 듯했다.

 까악! 까아악!

 캬아아아악!

 사방을 가득 메운 하피와 그리핀의 무리. 놈들이 진로를 방해하는 통에 와이번이 영 나아가질 못하고 있었다.

 로엘은 간만에 아공간으로부터 미니건을 뽑아 마구 난사했다.

 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

 다섯 개의 총신이 회전하며 수없이 많은 금속 탄환을 토해냈다. 그에 적중된 비행 몬스터들이 하나둘 추락했다.

“허어.”

 크레필만이 의형강기로 적을 쓸어가며 감탄 섞인 목소리를 뱉어냈다. 그는 이런 종류의 능력은 처음 보았다.

“…….”

 로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래선 곤란하다. 최대한 빠르게 지원을 가야 하거늘.

 놈들을 물리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시간이다. 그리고 저들이 비행형 몬스터라는 것이다.

 이것이 지상전이었다면 상대측을 쓸어버리는 데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았을 터였다. 로엘과 크레필만이 조합되면 저 정도 숫자 따윈 우습다.

 그러나 공중전은 양상이 완전히 달랐다. 각 개체의 전투영역 범위가, 움직임의 입체성이 지상전의 그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필연적으로 전투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비행형 몬스터를 버림패로 써서 시간을 벌겠다는 건가.’

 프레퍼도 나름 절박할 터였다. 요 몇 년간 사념의 수집에 계속해서 차질이 빚어졌을 테니까. 그렇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쪽이 공성전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듯했다.

 고대의 아티펙트로 소환된 언데드가 영지를 초토화시키지 못하면, 그들은 이번에도 막대한 손해만 입고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경우엔.’

 로엘은 짧게 고민했다. 무엇이 최선의 수인가.

 이내 결론이 나왔다. 그가 크레필만 카트넬을 돌아보며 말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먼저 이곳을 벗어나 이동해 주셨으면 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정리하고 뒤따르겠습니다.”

“…….”

 크레필만이 잠시 로엘을 빤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엘이 내심 안도했다. 혹시라도 이쪽의 정체, 의도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가 거절할까 걱정했는데, 거기까지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진 않았다.

 크레필만이 와이번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상당한 고도임에도 조금의 주저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쿠우우우우웅!

 얼마 지나지 않아 둔중한 착지음이 들려왔다.

‘쯧.’

 로엘은 와이번의 진로를 가로막는 몬스터들에게 탄환을 쏟아내며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선 자신도 그냥 뛰어내려 그를 쫓아가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카트리나가 혼자 남는다. 카트리나 한 사람으로선 이 숫자의 공중 병력을 모두 감당할 수가 없다.

“받으세요. 저희도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정리하고 이동합니다.”

 로엘이 아공간에서 미니건 하나를 더 뽑아 카트리나에게 건넸다.

 이내, 두 사람이 쏟아내는 금속 탄환의 비가 공중을 가득 메웠다.

 * * *

 콰아아앙!

“크악!”

 놈의 주먹에 정통으로 직격당한 바데룬의 방패가 결국 터져 나갔다. 바데룬의 신형이 튕겨 나가 성벽에 굉음을 내며 파묻혔다.

 놈과 전투를 벌인지도 벌써 한참이 지났다. 결국 바데룬의 체력이 바닥나고 말았다.

 그는 성벽에 처박힌 채 기절해버렸다. 사실상 무력화된 것이다.

[흐하하하하하! 이제 남은 건 너뿐이구나! 빈틈을 메워주던 방패가 사라졌으니, 이제 어떻게 버틸 요량이냐!]

 놈은 숨을 몰아쉬고 있는 레인에게 놀리듯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

 놈이 고개를 확 돌렸다. 그리곤 성벽 쪽을 향해 대뜸 브레스를 내뿜었다.

 레인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 경로를 가로막고 브레스를 검격으로 받아냈다.

 콰드드드드드드드드드!

 의형강기로 구현한 촘촘한 방벽은 놈의 브레스를 완벽하게 막아냈다. 예상하고 있던 놈의 후속타는 그림자 줄기를 밟고 공중제비를 넘어 피해냈다.

‘독?’

 대기 중으로 흩어지고 있는 놈의 브레스에서 지독한 독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불쾌한 느낌에 레인이 인상을 찌푸리자, 놈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하! 멍청한 놈! 이런 얕은수에 걸려들다니!]

‘……?’

[네가 받아친 그 공격은 지금 이 육신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 중 독성을 최대한 뽑아내고 증폭해 방출한 것이다! 피하지 않고 막은 시점에서 이미 끝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이다!]

‘뭔 소린가 했더니.’

 레인은 놈에게 머저리라고 욕설을 내뱉으려다가, 가까스로 그것을 삼켰다.

 진작 만독불침지체를 이뤘기에 이런 독 따윈 아무렇지도 않다. 그렇지만 놈이 오해해 준다면 이쪽이야 환영이다.

‘조금 곤란한 척을 해 볼까.’

 기왕 놈이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 이용해 먹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을 터다.

 이쪽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다. 놈이 방심해 준다면, 그로써 이쪽이 더 오래 버틸 수 있다면, 그 정도 연기쯤이야 못할 것도 없다.

“웃기는군. 이런 것쯤은 별것도 아니다.”

 레인은 입으로는 허세를 부리는 척 내뱉으며 한쪽 다리를 아주 살짝 절었다. 놈의 눈이 즐겁다는 듯 둥글게 휘었다.

[크흐아아아아!]

 콰쾅! 쾅! 콰콰콰콰쾅!

 놈의 주먹들이 일제히 불룩거리며 망치의 형상으로 화해, 레인을 향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떨어져 내렸다. 레인이 미묘하게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놈의 공격을 힘겹게 피해냈다.

 * * *

 결론적으로 말해서, 레인은 성공적으로 시간을 벌어냈다. 놈이 이질감을 느끼고 표정을 일그러뜨렸을 땐, 이미 20분이란 시간이 추가로 지난 뒤였다.

[빌어먹을 인간 놈! 나를 속였구나!]

“속은 놈이 병X이지.”

 레인은 킬킬 웃으며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놈의 공격을 받아 쳐냈다.

 그리고 정확히 그즈음에, 그렇게나 기다리던 지원군이 도착했다.

 촤아아아아악!

[카학!]

 어느새 놈의 배후에 나타난 크레필만 카트넬이 의형강기를 길게 뽑아내 놈의 목을 통째로 베어내 버렸다.

“가장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레인이 혀를 차며 크레필만을 향해 몸을 날렸다.

 놈은 일반적인 언데드와는 궤를 달리하는 유형의 언데드다. 머리 따윈 베어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제 막 참전한 크레필만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레인이 크레필만에게 장력을 날려 그를 밀쳐냈다. 그 반동으로 자신의 신형도 반대쪽으로 밀어냈다.

 콰아아앙!

 그렇게 두 사람이 사라진 공간으로, 놈의 손뼉치기가 작렬했다. 머리가 잘려 나간 모습 그대로 움직인 것이라 굉장히 기괴하게 느껴지는 공격이었다.

 대지에 착지한 레인은 놈이 연속해서 날려 오는 공격을 피해 크레필만에게 접근, 놈을 상대하기 위한 요령을 짧게 전달했다. 크레필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놈을 향해 쇄도해 나갔다.

 * * *

 강력한 지원군이 합세했다. 덕분에 기울어져 가던 전황을 어떻게든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레인의 체력이 바닥이라는 것. 그는 크레필만이 도착하기 전까지, 특히 홀로 놈을 맞상대한 20분 동안 너무 많은 힘을 소모했다.

 게다가 놈의 움직임이 크게 변했다.

 놈은 육신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점차 줄어가자, 이따금씩 모든 견제를 무시하고 성벽 쪽으로 달려들려고 했다. 그것을 저지하는 게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결국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크하아아아아아아아!]

 놈이 결국 크레필만과 레인의 견제를 뚫고 마구잡이로 달려들어 성벽을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콰아아아아앙! 콰르르르르르!

“으아아아악!”

“와아악!

성벽 한편이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붕괴에 휩쓸려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그들을 벌레처럼 눌러 죽이기 위해, 놈이 여덟 주먹을 쳐들었다. 놈의 눈은 살육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보랏빛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카하하하하하!]

 그리고 레인은, 마지막 남은 내력과 체력을 싹싹 긁어모아, 놈을 머리 위에서부터 여래신장으로 찍어버렸다. 뒷일은 생각지 않은 최후의 일격.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놈이 거하게 엎어졌다. 안타깝게도 일부 인간이 그 충격에 휩쓸려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고 말았다.

“커헉! 쿨럭! 쿨럭!”

 레인이 허리를 숙이고 거칠게 기침을 뱉었다. 너무 무리한 탓에 기침에 피가래가 섞여 나왔다.

‘빌어먹을.’

 이젠 정말로 여력이 없었다.

 지금 자신이 밟고 서 있는 이놈은 또 금세 신형을 회복할 터였다. 게다가 놈이 소멸하기까지 아직 30분은 넘게 남았다.

 크레필만이 건재하긴 했지만, 그자 혼자선 의미가 없었다.

 이미 살육에 대한 갈망으로 눈이 돌아가 버린 이 녀석은, 그의 견제를 몸으로 때워가면서라도 주위를 초토화시킬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해 보였으니까.

 결국 여기서 포기하고 몸을 빼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레인의 머리를 스쳤다.

“…….”

 저편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카트란과 시선이 교차했다.

 품속에 비상용으로 넣어둔 영약을 섭취해 순간적으로 내력을 폭발시키고, 카트란의 도움까지 받는다면 이 자리를 모면하는 것까진 어찌어찌 가능할 터였다. 후유증은 좀 남겠지만.

‘대신 지금까지 해온 일이 모조리 물거품이 될 테지.’

 레인이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한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많은 갈등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파아아아아아앗!

 그의 머리 위로 막대한 범위를 뒤덮는 빛이 떨어져 내렸다.

“어라.”

 소모된 체력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소모된 내력이, 급격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망가진 신체 컨디션이, 빠른 속도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발밑의 언데드가, 갑자기 괴성을 내지르며 온몸을 뒤틀어대기 시작했다.

“이건.”

 레인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이 빛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속해서 보아왔던 것이니까.

“성력으로 이런 것까지 가능하다고?”

 놀랐다. 단순히 회복마법으로 병자를 치료하고 축복으로 병사를 강화하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성력이 기적의 힘이라지만, 이것은 정도가 지나쳤다. 이미 바닥을 드러낸 내력을 일순간에 다시 차오르게 하는 것마저 가능할 줄이야.

 저 멀리에, 대이적을 일으킨 장본인의 얼굴이 보였다.

 성녀였다. 이곳까지 오느라 지친 것인지, 아니면 거대한 기적을 발현하느라 힘이 고갈된 것인지.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

 레인은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성녀에 대한 정보를 교단에서 통제하고 있음을.

 그게 아니라면 르우벤이나 바르바젠이 성녀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몰랐다는 게 설명이 되질 않는다. 아무리 그녀가 원래 역사에선 마족과의 전쟁이 터지기 전에 암살당했다고 해도.

“하.”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제 발밑에 있는 이 빌어먹을 소 대가리를 마음껏 족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놈은 계속해서 고통에 찬 비명을 내뱉고 있었다. 쏟아지는 빛에 육신이 파괴되었다가, 충만한 마력에 의해 다시 그것이 복구되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레인이 섬뜩하게 웃으며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막대한 기운이 나선형으로 발목을 타고 올라와 백열했다.

 그는 그것을, 조금의 주저도 없이 그대로 찍어 내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 *

 오래지 않아 장내가 정리되었다.

 성녀가 발현한 기적. 그녀조차 하루에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대축복’이 사그라들자, 놈은 금세 육신을 복구해 다시 날뛰었다.

 그러나 완전히 힘을 되찾은 레인과 바데룬, 크레필만은 놈을 수월하게 성벽에서 밀어냈다. 그리곤 여유롭게 놈을 요리해 나갔다.

 곧이어 비행형 몬스터를 정리하고 도착한 로엘이 가세하기까지 하자, 결국 놈은 완전히 샌드백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세 명의 최상위 무인에게 붙들린 채 수없이 포격을 얻어맞아 잠시도 형체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놈이 완전히 소멸한 이후론 몬스터들이 다시 슬금슬금 몰려들었다.

 그 대군을 향해, 레인은 비기스트를 이용한 참격을 두 번이나 날렸다. 대축복 덕분에 내력은 잔뜩 남아돌았다.

 대부분의 몬스터가 전멸하고 일부 살아남은 몬스터는 산맥을 향해 달아났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공성전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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