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몬스터 웨이브(1) (176/249)
  •  177화. 몬스터 웨이브(1)

     한계치까지 길이가 늘어난 사슬낫 아티펙트의 표면에 검강이 덧씌워졌다.

     본래라면 절삭력이 없어야 할 사슬 부분에 날카로운 날이 세워졌다. 출렁거려야 할 사슬이 무형의 힘에 붙들려 빳빳해졌다.

     레인이 신형을 뒤틀어 사슬낫을 크게 휘둘렀다. 부채 모양의 궤적을 그리며 사슬낫이 전방을 통째로 휩쓸었다.

     콰우우욱!

     범위에 있던 모든 몬스터가 단숨에 썰려 나갔다. 최대치까지 늘어난 사슬낫은 그 길이만 해도 200미터.

     사슬낫의 표면적은 비기스트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에 내력 소모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어떤 의미에선 비기스트보다도 유용한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제한 없이 마구 사용할 수 있는 무구라는 말은 아니었다. 이 공격 또한 그때그때 괜찮은 타이밍이 갖춰질 때를 골라 사용해야 했다.

     그래도 효율성은 발군. 한 번 사슬낫이 검강에 휩싸일 때마다 백 단위 수의 몬스터가 썰려 나가니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속이 다 시원할 지경이었다.

    “그워어억!”

     용케 궤적을 피해 접근해온 오우거가 레인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레인이 그림자에서 폴암을 꺼내 들며 도약, 신형을 크게 회전시키며 오우거의 머리를 찍었다.

     콰직!

     단숨에 반쪽으로 갈린 오우거의 머리. 레인이 곧바로 폴암을 놓고 신형을 띄웠다.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도달한 미노타우로스의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철제 도끼라. 프레퍼 놈들이 공수해 온 건가.’

     레인이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 대형 몬스터가 사용하는 무기 치곤 지나치게 세련된 물건이었다.

     프레퍼는 마법사를 찍어내듯 생산한다. 그리고 그 마법사들 중에는 유난히 ‘테이머’의 비율이 높다.

     그 테이머들 중 조금 경지가 높은 이들은 어김없이 비행형 몬스터를 길들이고 있다. 프레퍼가 대륙 각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물론 일개 양산형 마법사가 아무리 뛰어나 봐야 와이번과 같이 최상위권의 몬스터를 길들이긴 힘들다. 사념 마법과 유난히 친화력이 높지 않고서야.

     그들 대부분은 기껏해야 하피, 혹은 그리핀을 길들이고 있을 뿐이다. 전투력은 그다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경량화 마법으로 무게를 줄인 무구들을 대거 실어 나르는 정도는. 저 무기는 그런 식으로 공수되어 온 것이겠지.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폴암을 회수했다. 그 사이 레인은 미노타우로스의 무릎을 박차고 재도약했다.

     그의 발끝이 미노타우로스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관성을 그대로 실은 회전차기.

     콰아아앙!

     미노타우로스가 바닥에 처박혔다. 바닥에 나선형 균열이 퍼져나갔다.

     공중에서 자세를 다잡은 레인은 곧바로 그림자로부터 장검을 한 자루 뽑아 들었다. 그리곤 내력을 한계치까지 주입했다.

    “파검.”

     검이 산산이 부서졌다. 수없이 많은 파편에 일일이 검강이 깃들어 전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캬아아아아아!”

    “쿠에에에엑!”

     지옥도가 펼쳐냈다. 수십에 달하는 몬스터가 벌집이 되어 무너져 내렸다.

    “워어어어어어억!”

     또다시 오우거가 달려들어 왔다. 레인은 오우거의 정면으로 돌진해 거대한 상체 위에 자신의 등을 맞댔다. 철산고.

     쩌엉! 콰과과과곽!

    “쿠에에엑!”

    “크에엑!”

     오우거의 거체가 단숨에 허공을 날았다. 후열의 소형 몬스터들을 깔아뭉개며 데굴데굴 굴렀다.

     레인이 다시 그림자로부터 사슬낫을 꺼냈다. 그리곤 그것을 길게 풀어 주위 몬스터들을 휘감았다. 몬스터들의 전진이 멎고, 서로의 발이 엉켰다.

     곧바로 레인이 사슬낫을 풀어내며 그것을 크게 휘두를 준비를 했다. 이 정도 밀집됐으면 한 번쯤 쓸어내 줄 때가 되었다.

    “후읍!”

     레인이 사슬낫을 강하게 움켜쥔 채로 신형을 단숨에 뒤틀었다. 무형의 힘 덕분에 일자로 고정된 사슬낫이 단숨에 몬스터 군단을 휩쓸었다.

     콰우욱!

     또다시 세 자릿수에 달하는 몬스터가 일격에 갈려 나갔다.

     * * *

    ‘말도 안 돼.’

     오베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기 힘들었다.

     그의 눈에 비친 레인은 그야말로 전신이었다. 어딘가 동화 속 영웅마저 연상될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의 소유자.

     예전,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때.

     그가 보여주었던 뛰어난 실력에 오베른은 크게 자극을 받았다. 그는 가문의 온갖 지원을 받아 가며 성장해온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무력감을 주는 상대가 존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무력감이 원동력이 되어 그는 지금껏 정진해 왔다. 지금에 이르러선 그와 자신 사이의 격차가 상당히 좁혀졌을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설사 그 또한 계속해서 성장했을지라도.

     그런데 아니었다. 그가 성장한 정도는 오베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초일류도, 초인도 아닌 초월자라니. 수만의 대군에 정면으로 맞설 정도로 압도적인 강함이라니.

     솔직히 몬스터와 병사들 사이에 섞여 칼을 휘두르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오베른은 얼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곁에서 라미엔느가 정신 차리라고 몇 번이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전투에 완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을 자꾸만 강탈하는 존재는 레인뿐만이 아니었다. 성벽 한구석에 여유롭게 기대앉아 하품을 내뱉고 있는 소년 또한 놀라운 실력자였다.

     레인이 아무리 강하고 범위 공격을 팍팍 터뜨리는 괴물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그는 사람이었다. 개인이었다.

     그가 커버할 수 있는 몬스터는 한계가 있었다. 몬스터들은 그가 군단 전체를 쓸어버릴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고 몰려들어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런데 그렇게 벌어지게 된 공성전의 형태가 굉장히 기묘했다.

    “워어어어억!”

    “쿠워어어어어!”

     쾅! 쾅! 콰광!

     몬스터들은 온갖 방해를 딛고 성벽을 올라 성벽을 지키는 병력과 거칠게 맞붙었다. 그런데 그 수비 병력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과 같은 몬스터였다.

     다름 아닌 카트란의 솜씨였다. 그에 의해 수많은 대형 몬스터가 성벽 수비 병력을 향해 겨누던 무기를 되돌려 몬스터를 겨누었다.

     카트란의 광대한 ‘영역’ 내에 들어서 자유를 강탈당한 몬스터들은 강력한 공성 병기의 역할을 도맡았다.

     콰앙! 쾅! 콰르르르르르!

    “쿠에에에에에!”

    “쿠악!”

     카트란에게 세뇌된 대형 몬스터들은 타고난 신력으로 성벽 아래를 향해 바위를 던졌다. 조잡한 사다리를 부쉈다. 힘겹게 성벽을 기어 올라온 몬스터들을 분쇄했다.

     물론 몬스터도 생명체인지라 다치기도 하고 체력이 다하기도 했다. 그런 경우가 닥치면, 카트란은 주저 없이 그치들에게 성벽 아래로 뛰어내릴 것을 지시했다.

    “워어억!”

     쾅! 빠직! 빠지직! 콰르르르르!

    “키에에엑!”

     자살을 명령받은 몬스터는 상대적으로 위험해 보이는 장소로 제 몸을 던져 특공을 펼쳤다. 그에 조잡한 사다리가 무너지고 소형 몬스터들이 압사를 당했다.

    “무어어어어어어!”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난 공백을, 카트란은 성벽 위로 기어 올라온 또 다른 대형 몬스터를 조종해서 채워 넣었다.

     그야말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끝판왕.

     영지의 병사들과 민병들은 카트란이 조종하는 몬스터들을 앞세워 상대적으로 안전한 견제만 가하면 되었다. 각자 철창과 나무창을 열심히 내지르며, 대형 몬스터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빈틈을 메웠다.

     그럼에도 벌어지는 틈은 영지의 기사들이 발에 땀나게 뛰어다니면 어떻게든 메꿀 수 있었다. 그야말로 철통같은 방어태세가 갖춰진 것이다.

     전투 규모가 규모인지라 사상자가 아예 나오지 않을 순 없었지만, 정말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상대측과 이쪽의 전력 차를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기적적인 성과였다.

    “문제는 내 마력이 전부 바닥나기 전에 레인 녀석이 몬스터들을 전부 쓸어버릴 수 있겠냐는 건데.”

     카트란이 성벽 바깥쪽에서 작정하고 날뛰고 있는 레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될 것 같군.”

     지금의 페이스를 끝까지 유지할 수만 있다면 어찌어찌 가능할 것 같다고 카트란은 생각했다. 그가 픽, 하고 웃으며 마침 팔이 부러진 오우거를 향해 자살 특공을 명령했다.

    “우워어어어억!”

     오우거가 구슬피 물며 성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 * *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은 뭐지?’

     크레필만 카트넬은 잠시 머릿속으로 고민했다. 물론 손을 움직여 몬스터를 베어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이곳에서 몬스터 몇 마리 베어 넘기고 있어 봐야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레인과 카트란이란 스페셜리스트들의 존재로 인해 공성전은 안정적인 양상을 띄워가고 있었다. 굳이 자신이 여기에 메어 있어야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으리라.

     전장에서 장수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정확한 역할을 찾는 것.

     크레필만은 분명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이나,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낼 수비병으로 움직이는 데엔 영 효율이 별로였다.

     실력의 문제가 아닌 상성의 문제였다. 그에겐 레인과 같이 단숨에 수백의 몬스터를 쓸어버릴 수단이 없었으니까.

     그 자신이 가진 힘에 비해 활약이 미미하다는 것은 크레필만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이 맡아야 할 일이 무엇일지 주위를 둘러보며 고민했다.

     그런 와중, 그가 눈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을 향해 몰려드는 몬스터들 중 대형 몬스터들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

     그는 한때 검가의 주인이었던 만큼 눈썰미가 좋았다. 상황판단력도 뛰어났다.

     몬스터들의 이상이 한 번 눈에 들어오고 나자, 이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장한 흑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흑막이 있다면, 그들의 위치는 필시 팔키온 산맥 내부겠지.’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크레필만은 곧바로 신형을 날렸다. 성벽 아래로 뛰어내려 착지하고, 온몸에 기막을 두텁게 두른 채로 전차처럼 돌진해 나갔다.

     그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는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로막는 족족 충돌에 튕겨나가거나 반으로 썰리고 말았다.

     공성전에 걸맞지 않느니 어쩌니 해도 크레필만은 대륙 최강을 논할 수 있는 강자 중 하나. 몬스터 따위에게 그가 고전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쾅! 쾅! 쾅!

    “쿠에에에엑!”

    “키이익!”

     크레필만과 충돌한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몬스터의 진형을 가르며 산맥을 향해 나아갔다.

     * * *

    ‘꼼짝없이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카르테리온의 임시 영주, 비앙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초강자들의 가세 덕분에 상황이 단숨에 반전되었다. 이쪽의 전멸이 확실시된 상황이었건만, 이 추세라면 오히려 몬스터를 전멸시키는 것이 가능할 듯싶었다.

    ‘성자. 성자라.’

     저기 성벽 아래서 압도적인 무위를 뽐내며 몬스터를 학살하고 있는 사내. 그가 성자라는 사실은 주위에서 떠드는 소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한 번쯤 만나보고 싶었던 상대였다. 솔직히 그가 이곳 영지에 찾아와준 덕분에 영지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넘쳐나는 전염병 환자를 치료해주지 않았다면, 구호물자를 보급해 주지 않았다면 영지의 사정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처참했으리라.

     당장의 일이 급해 그를 따로 찾아갈 여유가 없던 차였는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후에 영지의 일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면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다.’

     받은 도움이 너무 커서 오히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솔직히 지금의 영지에는 저만한 상대가 만족할 만한 대가를 지불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도 일단 원하는 것이 있는지 물어봐 두긴 해야겠지.’

     은혜도, 원한도 확실하게 갚는 것이 카르테리온 백작가의 철칙. 지금 갚을 수 없다면 나중에라도 갚을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그녀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곤 예의 성자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콰욱!

     마침 사슬낫을 이용한 거대한 참격이 단숨에 수백의 몬스터를 쓸어버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반복된 장면이지만, 비앙카는 볼 때마다 소름이 돋는 광경이라는 생각을 했다.

    “응?”

     그런데, 그런 그녀의 눈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비쳐 보였다. 어쩐지 음울한 느낌을 주는 그 빛은, ‘성자’가 쓰러뜨린 몬스터의 사체 중 하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뭐지?”

     비앙카가 미간을 모았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전해져 오는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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