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카르테리온(7)
팔키온 대산맥.
험준한 지형. 그리고 그곳에 생식하는 엄청나다는 말로도 부족한 숫자의 몬스터.
대륙에 이름 높은 금지(禁地)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런 산맥의 한복판. 몬스터 생태계 상위권 포식자인 오우거가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겁 없는 두 인간을 향해 위협적인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우워어어어어억!
“시끄러워.”
그러자 밤색 머리칼에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로브인이 소맷자락에서 뼈다귀 하나를 꺼냈다. 그리곤 그것을 적당히 내던졌다.
콰드드드득.
분명 별다른 힘이 담기지 않은 것이 분명한 그 뼈다귀는, 놀랍게도 오우거의 단단한 외피를 가볍게 뚫고 체내에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쿠워어어어어!”
오우거가 비명을 내지르며 복부를 부여잡았다. 로브인은 그런 오우거를 감정이 담기지 않는 눈으로 응시하며 마법을 발현했다.
<뼈 폭발(Bone explosion)>.
드드드드드드득.
오우거의 복부에 꽂힌 뼈가 폭발했다. 수많은 뼛조각이 오우거의 체내를 거칠게 헤집었다.
쿠우웅.
오우거는 가래 끓는 울음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결국 대지에 그 거대한 몸을 뉘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지?”
로브인, 프레퍼의 최상위 간부이자 게르반의 진전을 이은 천재 흑마법사 ‘제파스’가 함께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거의 다 끝나갑니다.”
“그 말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
“이만한 규모의 작업이 아닙니까. 그 정도는 이해해주셔야지요.”
마찬가지로 프레퍼의 최상위 간부이자, ‘보스’의 두 직계제자 중 한 사람인 ‘아드바렌’이 후후 웃으며 답변했다.
그의 손짓에 따라 끔찍하게 일그러진 인간의 얼굴 형상을 한 사념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미 주위는 그 괴이한 기운에 완전히 잠식된 상황이었다.
“쯧. 마음에 안 들어.”
제파스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아드바렌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법 수련을 위해 사용해야 할 귀중한 시간을 이런 식으로 낭비하게 된 것이 기분 나빴다. 조직의 압박에 못 이겨 그동안 애지중지 보관해온 ‘아티펙트’를 소모해야만 하게 된 상황이 짜증을 배가시켰다.
“제파스 님은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신 겁니까?”
“물론. 트리거가 충족되는 순간 바로 발동하도록 완벽하게 조작해뒀다.”
“…….”
아드바렌은 거만하기 그지없는 상대의 태도가 고까웠으나, 그것을 겉으로 표출하지 않고 도리어 미소 지었다. 눈앞의 어린 현자는 그 정도 비위는 맞춰줘도 좋을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기대되는군요. 아무리 유지 시간이 짧다고 해도 현시대에는 절대 볼 수 없는 마법이 발현되는 것 아닙니까.”
“젠장. 이 귀한 걸 겨우 이런 일에 사용하게 되다니.”
“이해해 주십시오. 요즘 사념의 수급에 차질이 큰 탓에 조금 무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조직이 당신에게 해준 지원을 생각해서라도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마시길.”
“흥.”
제파스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게르반의 전인인 자신밖에 다룰 수 없는 최상위 소모성 아티펙트. 그것을 내어준 것만으로도 조직으로부터 지금까지 지원받은 모든 것에 대한 답례는 마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귀한 물건이었다.
“그 작업만 마무리되고 나면 나는 돌아가도 되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이 뒤로는 수확하는 일만이 남을 테니까요. 이제 곧 오실 뤼바르 에덴바인 님과 교대하시면 됩니다.”
아드바렌은 ‘나도 너 같은 놈과는 이 이상 함께 움직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팔키온 산맥에서 제파스와 분쟁을 일으켜 좋을 게 없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참으면 저 재수 없는 면상을 더 이상 볼 필요가 없게 될 터였다.
* * *
레인이 로엘과 통신을 주고받은 지 이틀이 지나, 카트란이 진료소에 도착했다.
“왔군.”
“어. 들은 것보단 덜 바빠 보이네.”
“이제야 한숨 돌리게 됐지.”
레인이 어깨를 주무르며 카트란의 인사에 답했다.
성녀가 가세한 이후로 레인은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당장 두 명이서 하던 일을 세 명이 분담하게 된 것이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돌봐야 할 환자 수가 3, 4할 가까이 줄었다.
“‘그게’ 벌어지는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는 거였지?”
“어. 그렇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확실해.”
“로엘은?”
“글쎄. 왕국과의 교섭을 끝내고 나면 바로 온다고 하긴 했는데.”
“그런가.”
“스승님. 이쪽 환자 좀 봐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내력이 고갈돼서…….”
“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 일리나가 레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레인이 곧바로 자리를 벗어나자 카트란이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적당히 천막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할아버님.”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진료소에 또 다른 방문자가 나타났다. 바로 라미엔느 카트넬과 카트넬 가의 원로인 바데룬이었다.
두 사람이 찾은 대상은 다름 아닌 가문의 전대 가주인 크레필만 카트넬.
“아버님께서 가문으로 복귀해 달라고 하십니다.”
“아니, 이 늙은이를 뭣 하러?”
“하실 일 전부 내팽개치고 몰래 가문을 빠져나오셨으니 찾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렇다. 크레필만 카트넬은 몰래 가출해서 이곳 백작령을 찾은 것이었다. 그는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났을 뿐, 여전히 가문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다.
“쯧. 늙은이 하나쯤 빠진 공백 정도는…….”
“아버님께서 전부 메꾸고 계시죠. 아버님께서 벼르고 계십니다. 다음번엔 반드시 자신 쪽에서 가출해 버리겠다고.”
“…….”
“가문의 주인이 가출해 버리는 상황은 되도록 보고 싶지 않네요. 그러니 빠르게 복귀해주셨으면 합니다.”
“크흐음!”
크레필만은 귀를 후비며 못 들은 시늉을 했다.
라미엔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이렇게 말한다고 들어먹을 상대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4년 전 갑작스럽게 오베른을 납치해 대륙 유랑을 다니지도 않았겠지.
이렇게 되면 별수 없다. 이곳에서 머물며 계속해서 그를 계속해서 닦달해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일찍 가문에 복귀할 터였다.
“…….”
괜히 머리가 아파져 왔다. 대체 카트넬 가엔 왜 이렇게 괴짜가 많을 것일까.
“많이 지치신 듯합니다, 성녀님. 조금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한쪽에서는 성녀가 환자들을 계속해서 돌보고 있었다. 명백히 지친 상태임에도 우려를 표해오는 성기사에게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레인이 그런 그녀를 힐끗 곁눈질하며 생각했다.
‘성녀는 그냥 이곳에서 계속 환자들을 돌보게 두는 편이 좋겠지.’
아무래도 자신이 자리를 비우고 나면 일손이 부족해진다. 성녀까지 끌고 갔다간 일리나만이 남게 되는데, 그랬다간 그녀가 과로로 쓰러져 버릴지도 몰랐다.
그리고 일리나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편이 좋았다. 자신이 자리를 비워도 성녀를 호위하는 성기사들이 이곳의 치안을 책임져줄 테니.
성녀가 가진 힘은 분명 대규모 전투에 적합하지만, ‘이번 일’은 그녀의 능력이 제대로 활용되기가 힘든 구석이 있었다. 대규모 축복을 통해 강화되어야 할 병사들이 죄다 영지 바깥으로 빠져나가 되려 영지를 봉쇄하고 있는 실정이니.
그리고 근본적으로 레인은 성녀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녀와 그녀 일행의 일에 굳이 간섭해 봐야 좋을 것 하나 없었고.
‘대신 저들을 데려가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겠군.’
그가 다음으론 검가 쪽 인물들을 돌아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검존 하나에 검성 하나. 그리고 초일류에 근접한 실력자 둘. 하나하나가 쓸만한 전력이었다.
게다가 카트란과 자신까지 합치면 와이번으로 아슬아슬하게 실어 나를 수 있는 숫자였다. 이왕이면 데려가는 편이 좋으리라.
레인이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며 환자의 몸에 박힌 침을 수거하고 있던 때.
귀걸이로부터 로엘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레인. 바로 넘어와라. 시작됐다.]
기다리고 있던 연락이 드디어 왔다.
“그래. 금방 가지.”
레인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곤 카트란을 호출했다. 그에게 상황을 전한 뒤, 곧바로 검가 측 인물들이 모인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크레필만 카트넬에게 말했다.
“저와 함께 백작성 외성으로 이동해 주셨으면 합니다.”
“음? 이곳의 환자들을 두고 말이냐?”
“더 중요한 일이 생겼습니다.”
“……?”
레인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 크레필만 카트넬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 * *
몬스터가 들끓는 대산맥 근방의 영지는 필연적으로 중앙군이 상주하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식량 부족, 영역 다툼 등의 이유로 산맥의 몬스터가 툭하면 영지로 밀려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몬스터 침공이 대규모로 이뤄질 때가 있다. 이를테면 겨울철.
겨울철에는 식량이 부족해진다. 그로 인해 소규모 몬스터 무리가 굶주림을 참지 못해 산 아래로 내려오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의 대군이 결집하는 경우가 생겨난다.
그 사태를 막기 위해 영지에 상주하는 인간의 병력이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물론 방비. 그리고 두 번째는 사냥.
특히 중요한 것은 사냥이다. 헤이슨 자작령이 수시로 중앙군을 운용하는 것도, 플뢰비르 자작령이 그렇게까지 우대정책을 펼쳐 용병들을 영지에 잡아두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그 때문이다.
영지의 병력, 용병, 그리고 몬스터 헌터들은 수시로 산맥을 드나든다. 그로써 산맥 내 몬스터의 개체 수가 조절되고, 사냥을 통한 부수입은 영지의 경제를 활성화시킨다.
그 순환구조가 유지되어야만 대산맥 근방의 영지는 안정화될 수 있다. 그래야만 몬스터의 침공을 예방하거나 막아낼 수 있고, 성벽을 보수할 수 있으며, 충분한 숫자의 병력을 유치시킬 수 있다.
그런데 모종의 이유로 그 순환구조가 끊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다. 카르테리온 백작령에 불어닥친 재앙은 바로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안 그래도 썩어빠진 왕국 상층부로 인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던 영지다.
지금은 백작령 바깥으로 빠져나간 중앙병력은 애초에 영주의 명을 잘 듣지 않았다. 영지 방비는 어찌어찌 맡더라도 산맥으로 진군하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백작령에 플뢰비르처럼 용병이 대거 상주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플뢰비르는 용병우대정책이 있었다. 방치된 영지이긴 했지만, 적어도 국가 상층부에서 영지의 일에 훼방은 놓지 않은 것이다.
반면 백작령은 정책을 발의하는 족족 상부에서 제동을 걸었다.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실상은 강직한 성격의 전대 백작이 왕실과 다른 귀족들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이었지만.
오랜 시간 몬스터가 증식해 포화상태에 다다른 산맥이었다. 걸핏하면 몬스터 무리가 쏟아져 나와 영지 외성을 두드리는 실정.
여기에 왕국 전체를 뒤덮은 수재가 더해졌다. 팔키온 산맥 상공에도 어김없이 먹구름이 뒤덮였고, 산맥의 생태계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자연적으론 절대 불가능할 정도로 쏟아진 비는 산맥의 몬스터들을 굶주리게 했다. 산사태가 걸핏하면 일어났으며, 인간의 영지와 마찬가지로 전염병이 창궐했다.
인간의 그것엔 한참 못 미치지만, 몬스터에겐 지능이 있다. 그런 몬스터들에게 종족의 차이를, 먹이사슬 관계를 뛰어넘는 절대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선 산맥을 넘어 몬스터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보통 몬스터들이 이 결론에까지 도달하는 일은 웬만해선 없다. 이것은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아무리 지능 낮은 몬스터라도 여기까지 내몰리고 나면 결국 이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봤을 때 끔찍한 재앙이다.
역사적으로 이 사태가 일어난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이 사태가 간혹 한 번씩 일어날 땐,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거대한 인명 피해가 동반되곤 한다.
종족을, 먹이사슬 관계를, 부족 간 갈등 관계를, 소통되지 않는 언어의 문제를 모두 뛰어넘은, 몬스터들의 이해 불가한 대통합. 그리고 인간 사회로의 침공.
겨울철의 몬스터 대결집조차 비교가 되지 않을 대재앙.
그것을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 * *
“몬스터 웨이브(Monster wave)가 터졌습니다.”
“뭣?”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지금 가서 막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이곳 백작령은 쑥대밭이 될 겁니다.”
검가 측 인물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져나갔다.
176화. 서장
몰려드는 몬스터의 대군을 바라보며, 카르테리온의 임시 영주인 비앙카 카르테리온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젠장.”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결국 이렇게 끝을 맞이하게 되다니, 너무나도 허망했다.
부친의 장례를 치른 이후, 비앙카는 하루도 쉬지 않고 영지의 일에 매달려왔다. 기울어져 가는 가문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타고난 여장부의 기질을 가진 그녀는 불안해하는 가신들을 안정시켰고, 영지의 병력을 재편성했으며, 영지의 발전을 위한 각종 정책을 고안해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여기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고 만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메르타’라는 썩어빠진 국가 그 자체였다.
‘빌어먹을 돼지 새끼들. 그 개자식들에게 이 영지에 사는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겠지.’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없다. 이곳 백작령에 거주하는 사람의 숫자가 대체 몇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차라리 잘됐다.’
비앙카는 이젠 성벽 바로 앞까지 당도한 몬스터의 대군을 체념한 눈길로 응시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놈들은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이곳 영지의 실정 따위 관심조차 없는 놈들이니.’
지금의 메르타 상층부는 탐욕스럽고 썩어빠진 것뿐만 아니라 무능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카트넬 가가 아니었다면 진작 타국의 침공을 받았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그런 놈들이 저만한 대군의 침공을 최소한의 피해로 막아낼 수 있을까. 그녀는 그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눈앞의 몬스터들에게 백작령이 초토화되고 나면, 다음은 백작령을 봉쇄하고 있는 중앙군이다. 그다음은 백작령과 인접한 영지들이고. 왕국이 받을 타격이 보통이 아니리라.
이참에 한 번 제대로 엿 먹어봐라.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저주의 말을 뱉어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원래 역사에서는 실로 그녀의 생각대로 되었다. 수재에 이어 몬스터 웨이브로 인한 피해까지 누적된 왕국은 본격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비앙카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여기까지 자신을 지지하고 따라와 준 고마운 얼굴들이 그곳에 있었다.
문득 그녀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여기서 이렇게 스러져서는 안 되는 목숨들이건만.
“뭘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계십니까?”
“죽을상은 무슨 죽을상!”
이 와중에도 능글맞게 물어오는 부관에게 그녀가 버럭, 성을 냈다. 순식간에 평소의 사나운 기세를 되찾은 그녀가 소리쳤다.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뼈를 묻는다!”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데. 굳이 너희까지 추가되지 않아도 환자는 미어터지게 많아.”
갑작스레 바로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비앙카가 기겁해서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웬 소년이 하나 있었다.
“어엇?”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왔어!?”
부관들이 급히 검을 뽑아 들고 소년을 겨눴다. 소년의 등장을 목격한 병사들이 놀란 목소리를 뱉어냈다.
“저, 저기! 위쪽! 또 온다!”
탁. 탁. 탁. 탁. 탁.
그리고 뒤이어 다섯 사람이 공중에서 성벽 위로 떨어져 내렸다. 총 사남 일녀.
“본 적이 있는 얼굴이로군.”
그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장년인이 주위를 둘러보다 비앙카를 발견하곤 중얼거렸다. 물론 그는 크레필만 카트넬이었다.
“엇, 성자님?!”
“진짜 성자님인데?”
현재 성벽 위에는 영지의 병력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많았다. 민병이라도 있어야 그나마 빈자리를 메꿀 수 있을 만큼 현재 영지 전력은 처참했다.
그런데 그 백성 중에 레인을 알아보는 자가 있었다. 레인의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았거나, 치료를 받은 이들과 친분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레인은 카르테리온 백작령에서만큼은 상당한 유명인사였다.
오히려 크레필만 카트넬을 알아보는 사람은 적었다.
그는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난 지 오래였다. 게다가 일선에서 물러나자마자 타인의 시선이 귀찮다는 이유로 일부러 육체를 약간 노화시키기까지 했다.
그가 스스로 자신이 가진 힘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를 알아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럽게 많군.”
레인이 성벽 너머를 내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쿠아아아아아아!”
“그르워어어어어어억!”
시야에 담긴 세상 전체에 몬스터가 있었다. 펠라키 산맥에 인접한 헤이슨 자작령에서 거주했던 레인조차도 이런 광경은 처음 보았다.
“정말이었군. 대체 이것에 대해선 어떻게 안 거지?”
크레필만이 레인에게 물었다. 그도 성벽 너머로 펼쳐진 광경에 약간 질려 하는 기색이었다.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다.”
레인은 몬스터 웨이브의 발생, 그리고 그 시기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크레필만의 입장에선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전부터 여러모로 이질감이 느껴지는 소년이었는데, 이번 일은 특히 그게 심했다. 단순히 특이한, 뛰어난 소년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일만 마무리되고 나면 말씀드리죠.”
레인은 훗, 하고 웃음을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그와는 이후에 따로 자리를 가져야 했다.
“카트란. 넌 일단 성벽 위에서 방어를 맡아줘.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그래.”
카트란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다른 누구보다 레인이 돋보여야 했다. 상대적으로 임펙트가 덜한 쪽의 일은 자신이 맡는 것이 옳았다.
‘카트란. 분명 무투대회 결승에서 맞붙었던 상대가 맞는데.’
라미엔느가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카트란의 얼굴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려 결승에서 맞붙은 대전상대를 잊었을 리가 있겠는가.
이상한 점은, 두 사람에게 이상할 정도로 긴장감이 없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자신들이 나서면 이 상황을 확실히 종식시킬 수 있다는 듯한 언행과 태도였다.
솔직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대체.’
그녀가 미간을 모으며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카트란이 살짝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쩌저저저저적.
그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라미엔느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 전원, 일순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했다. 크레필만이나 바데룬 같은 경우엔 저도 모르게 검 손잡이를 움켜쥐고 말았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즐기듯, 카트란이 ‘붉은색 눈동자’로 주위를 한차례 쓸어보았다.
“경계할 것 없다. 난 적이 아니야.”
“으윽.”
주위 사람들이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히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라미엔느의 얼굴에 혼란해 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눈앞의 소년은, 자신과 무투대회에서 맞붙었던 그 인물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지금 그와 자신이 맞붙는다면 자신은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고 말리라.
주위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트란은 레인을 돌아보며 툭, 하고 말했다.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날뛰다 와라. 애송이.”
“누구더러 애송이라는 거냐.”
레인이 으르렁거렸다. ‘그’와 레인의 사이는 그리 좋지 못한 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걸 써야지.”
“일찍도 기억해내는군.”
카트란이 가면을 착용했다. 본격적으로 힘을 사용하게 되면 정체를 감추라는 로엘의 지시가 있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카트란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의 얼굴을 목격한 인물은 근처의 몇 사람뿐. 검가 측 인사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목격자 몇 사람만 골라서 기억이 흐려지도록 머리를 약간 주물러 주면 그만인 일이었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럼, 간다.”
레인은 곧바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아직 이쪽을 향해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는 기사들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어어어!”
“성자님! 위험합니다!”
그의 신형이 성벽 아래로 사라졌다. 몇몇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성벽 끄트머리를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크레필만 또한 신형을 날려 성벽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무모하군. 저 대군에 정면으로 맞설 셈인가?’
어느새 몬스터의 대군이 수십 미터 앞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무모하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설사 검존인 자신이라고 해도 저런 행동은 하지 못한다.
아무리 경지가 높다고 해도 인간의 체력은, 체내에 축적된 오라의 양은 유한하다. 반면 적의 숫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만 단위 수를 가볍게 넘기는 수준이었다.
‘뭘 어쩌려고.’
내려다보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 걱정과 의아함이 담긴 표정이 떠오른 그때.
레인은 후, 하고 한 차례 숨을 고르다 작게 말했다.
“흑아.”
그림자로부터 거대한 검이 한 자루 밀려 올라왔다. 레인은 검 손잡이를 붙듦과 동시에 손목에 걸린 중력 조작 아티펙트를 기동시켰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
크게 휘두르려는 듯 뒤로 당겨진 거검의 표면에, 세상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는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기운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
크레필만 카트넬은 경악했다.
말도 안 된다.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오라의 총량에는 명백히 한계가 있다. 일격에 담아낼 수 있는 힘의 절대치는 절대 저 정도일 수가 없다.
“…….”
그렇지만 그의 초월적인 감각은 ‘저것’이 절대 환영이나 거짓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광경을 지켜보며 크레필만이 성벽 모서리를 으스러지도록 세게 쥐었다.
“후우우.”
레인이 숨을 고르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내력 증진에 공을 들였음에도 ‘이것’을 이용한 검강 사출 가능 횟수는 세 번이 한계였다.
장기적인 전투가 벌어질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번 전투에서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일 수 있는 것은 지금 한 번뿐이라 봐야 했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레인은 단전에서 뿜어져 나와 손을 타고 검으로 흘러드는 막대한 기운을 차근차근 조절해 나갔다.
검 표면에 일렁이는 형상의 검기가 덧씌워졌다.
검기가 화라락 일어나 한데 뭉치더니 검 위에 또 다른 검의 형상을 이뤘다.
그렇게 생성된 검강은, 눈을 멀게 할 듯한 백광을 토해내고 있었다.
“쿠워어어어어억!”
“우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캬아아아아악!”
어느새 지척까지 다다른 몬스터들.
성벽 위에선 이미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궁병의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아 큰 성과는 보지 못하는 듯했지만.
완전히 준비를 마친 레인이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우에서 좌로.
공간검 ‘비기스트’에서 사출된 검강은, 압축된 공간을 벗어나자마자 단숨에 거대한 참격으로 화했다.
콰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
“세상에.”
성벽 위에 선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질 않는 몬스터 대군 진형의 한 축이, 통째로 갈려 나가는 광경을.
* * *
팔키온 대산맥이 내려다보이는 상공.
로엘은 카트리나에게 말했다.
“저 즈음이 적당하겠군요.”
“알겠습니다.”
카트리나가 와이번을 몰아 산맥 어딘가의 중턱에 위치한 공터로 향했다.
공터에는 오크의 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 내려서기 전, 로엘이 아공간을 열어 그 내부에 잠든 언데드를 풀었다.
[커르르르릉!]
[커르릉! 컹!]
헬 하운드의 무리가 아공간에서 뛰쳐나와 순서대로 지상에 착지했다. 그리고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다.
“쿠워억!”
“쿠에에에엑!”
빠르게 신형을 날리며 입에서 탄환을 쏟아내고 등에 얹혀진 마력포를 격발하는 언데드는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했다. 수십에 달하는 오크가 별달리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장내를 깔끔하게 정리한 헬 하운드들이 와이번에서 내려선 로엘과 카트리나의 앞에 질서 정연하게 자리 잡고 앉았다.
“찾아라.”
로엘이 말했다.
“놈들을 찾아서 내게 알려라.”
[커르르르르릉!]
수십에 달하는 고위 언데드들이 화답하듯 일제히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선 헬 하운드들이 마력의 흔적을 쫓아 산개해서 달려나갔다. 소음을 듣고 몰려와 앞길을 가로막은 몬스터들은,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쓸려나가고 말았다.
로엘은 카트리나와 함께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그 뒤를 쫓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