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카르테리온(6) (174/249)
  •  174화. 카르테리온(6)

    “프레퍼가?”

    [요즘 그놈들 활동이 여러모로 위축됐잖아. 작년의 벨리아 왕국에서의 일은 특히 타격이 컸을 테고. 그래서 그런가, 조금 무리해서라도 부족한 사념을 보충하려는 듯해.]

    “그 장소를 카르테리온으로 잡았다는 건가?”

    [그래.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이야. 최상위 간부로 추정되는 자들의 움직임이 포착됐어.]

    “일을 귀찮게 만드는군.”

    [좋게 생각해. 다행히 우리 쪽에서 놈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했잖아. 이참에 간부까지 사냥할 수 있다면 좋은 거지.]

    “정작 고생하는 건 난데 너무 쉽게 말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쉽게 말하는 거지.]

    “뭐 이런.”

    [아무튼 그쪽 일은 잘 부탁해.]

    “끊어 인마.”

     레인이 매몰차게 통신을 끊어버렸다. 그리곤 화풀이하듯 환자의 몸에 세침을 박아넣었다.

    “저기, 좀 아픈 것 같은데요.”

    “기분 탓이야.”

     약간의 클레임이 있었지만, 레인은 그것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치료를 계속해 나갔다.

     * * *

     레인이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로엘은 메르타 왕국 수뇌부와 협상을 벌였다.

     장소는 국왕, 그리고 각 귀족 파벌의 수장들이 한데 모인 집무실.

     일반적인 제국의 사자였다면 정식 절차를 밟고 온갖 대소신료가 모인 대전에서 국왕을 알현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엘의 활동 무대는 그런 ‘밝은’ 무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오히려 국왕과 최고위 귀족 몇 사람에게 비밀스러운 회동을 요구했다. 제국의 사자로서 왕국에 좋은 제의를 가지고 왔다며.

     일반적으로 아무런 사전 고지도 없이 타국의 사신이 이런 무례한 요구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타국이 제국이라면, 그리고 요구를 받는 국가의 상황이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는 비상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로엘은 손쉽게 왕국의 최상위 권력자들과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왕국 최상위 귀족과 그 귀족을 호위하는 최상위 전력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모이는 것을 느끼며, 로엘은 살짝 미소 지었다. 물론 가면 아래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국왕 전하.”

     로엘이 한쪽 무릎을 꿇고 주먹 쥔 오른손을 가슴에 대어 예를 표했다. 동시에 주위 귀족들을 호위하는 전력을 가늠했다.

    ‘현자 하나에 검성 둘. 그리고 초일류 전력 스물이라.’

     국왕을 수호하는 근위 기사단장, 왕국 마법사의 정점인 궁정 마법사, 그리고 유서 깊은 후작가의 가주. 이 세 초인에 대한 경계는 늦추지 않아야 하리라.

     딱히 저들과 맞붙을 생각은 없지만, 이쪽의 제의를 저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다. 가능성이 낮더라도 상황 자체는 상정해 둬야 했다.

    ‘비상시 내 한 몸 빼내는 것 정도는 문제없겠군.’

     무력으로 저들 전부를 압도하는 건 무리였다.

     검성이든 현자든 각각이라면 어렵잖게 격파할 수 있다. 그러나 검성과 현자가 연계해서 덤벼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두 종류 이상의 초인이 힘을 합쳤을 때의 파괴력은 단순히 덧셈으로 계산되지 않으니까.

     뭐,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만일의 상황이 닥쳐도 제 한 몸 지키긴 어렵지 않을 듯싶다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그래. 제국의 사자가 짐에게 무슨 말을 전하려는 지 들어보지.”

     국왕은 가타부타 본론부터 꺼냈다.

     이곳은 대전이 아니었다. 굳이 절차와 예법을 번거롭게 하나하나 따질 이유가 없었다.

    “폐하께선 이번 메르타 왕국의 재난 상황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고 계십니다.”

    “…….”

    “그렇기에, 왕국에 국가 차원의 지원을 제안하고자 하십니다.”

    ‘웃기는군.’

     국왕이 미간을 좁혔다.

     애초에 ‘그’ 황제가 타국의 재난에 유감을 표한다는 것부터가 난센스였다. 입에 발린 소리도 정도가 있지.

    ‘그 웃기는 장단에 맞춰주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제국이 어떤 의도든 간에, 왕국 입장에선 웬만해선 지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백성들이 굶주림, 전염병, 급증한 범죄율로 인해 죽어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구휼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썩어빠진 메르타의 귀족들이라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백성들을 외면하고, 자신의 것을 절대 내어놓지 않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치킨 게임’.

     당장 자신의 것을 내어놓으면 그만큼 가진 힘이 줄어든다. 그리고 그 줄어든 힘만큼 정쟁에서 밀리게 된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 이쪽과 대척점에 서 있는 다른 귀족이 이득을 본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진 것을 내어놓지 않는다. 가진 것을 소모하는 쪽은 상대 파벌이어야 하기에. 차라리 사이좋게 공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 파벌이 승승장구하는 꼴은 절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냥 이번 일에 한해서만이라도 각각의 파벌이 합의하고 적절하게 손해를 분담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게 가능했다면 메르타 왕국의 국격이 이렇게까지 떨어졌을 리가 있나.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지라도, 그들은 절대 서로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양보하지 않는다. 파멸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오기 직전까지는.

     그렇기에, ‘타국의 지원’은 그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다.

     이후 원조 국가로부터 어떤 대가를 요구받게 될지 알 수 없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큰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당장의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의미한 눈치 싸움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점이 크다.’

     타국에 손을 벌림으로써 생기는 손해. 서로 눈치싸움만 벌이느라 문제가 국가의 곪아 터질 때까지 방치됨으로써 생기는 손해.

     어느 쪽이 더 큰 손해일까. 현 메르타의 실정에 비춰 생각해 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그리고 제국의 원조는 자연스럽게 치킨 게임을 종식시킬 명분이 된다.

     당연하지만 치킨 게임은 왕국의 귀족끼리나 가능한 행위다. 제국을 상대로 치킨 게임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백성을 구휼하기 위한 물자’ 대신 ‘제국에 갚아야 할 빚’이 당면한 과제로 주어진다. 그로써 모두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만둘 수 없었던 치킨 게임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퇴색된다.

     그것만 해도 큰 소득이었다.

    “예상하시고 계시겠지만, ‘약간의 대가’는 필요합니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국왕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뻔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대가성 없는 원조였다면 이렇게 비공식적인 만남을 요청할 리도 없겠지.

     중요한 것은 상대가 내거는 조건이 어느 정도인가. 그것뿐.

    “이것은 폐하께서 국왕 전하께 전하라 명하신 서신입니다.”

     로엘은 품속에서 황제의 직인이 찍힌 서신을 꺼내 시종장에게 전달했다. 서신은 우선 궁정 마법사의 검사를 거쳐 국왕에게로 넘어갔다.

    “과하다고 생각지 않나?”

    “그렇습니까?”

     국왕이 인상을 찡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음에도 로엘의 답변에 담긴 어조는 평탄했다.

    “이 서신에 적힌 모든 조건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서신에 적힌 ‘조건’을 모두 읽고 난 국왕은 확신했다. 제국은 이참에 메르타 왕국에 끼치는 영향력을 크게 늘리려 하고 있다.

     이 조건 모두를 수용했다간 제국이 국내의 일에 얼마나 간섭하려 들지 알 수가 없다.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니 협상을 벌여야 한다. 조건을 완화시켜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낫다.

     의외로 로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신에도 적혀 있겠지만, 협상 권한이 제게 위임되어 있습니다. 저를 통해 조건을 조율하시면 됩니다.”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엘은 고개 숙인 채 앞으로 할 말을 정리해 나갔다.

     지금부터는 외교의 탈을 쓴 이익 싸움의 시간이다. 지루하고 답답한, 그러나 치열한 싸움의 시간.

     그리고 그것은 로엘의 전문분야였다.

     * * *

     왕궁을 나선 로엘은 수도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트리나와 합류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가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로엘이 빙긋, 하고 웃었다.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로엘은 많은 부분을 상대측에 양보했다. 애초부터 왕국이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진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듯, 조금씩 조금씩 조건을 완화시켜 주었다.

     추가적인 대가를 받아내는 대신 아예 조항을 바꿔버리기도 했다. 이를테면 3번 조항이 그러했다.

    [3. 제국에서 공간 마법을 통해 운송되는 물자는 일차적으로 왕실에 전달된다.]

     제국의 구호물자는 일차적으로 왕실에 전달되고, 왕실은 그 물자를 적절히 운용해 백성들을 구휼한다. 그런 내용의 조항.

     본래는 제국의 귀족이 직접 백성들에게 물자를 공급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조항이었으나, 왕국 인사들의 강력한 반대와 회유, 뇌물 공세에 변경되었다.

     왕국 측의 주장은 이러했다. 국내의 일에 제국의 인물이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언뜻 타당해 보이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더러운 계산이 섞여 있음을 로엘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딱히 신경 쓸 바는 아니었기에 적당히 밀고 당겨 얻어낼 것 다 얻어낸 뒤, 그들의 뜻대로 조항을 수정해 주었지만.

     이 조항을 통해 메르타 왕국 상층부는 두 가지 이익을 취했다.

     첫째. 제국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 물건이 아무리 제국에서 보내온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제국 주도로 배분되느냐 왕국 주도로 배분되느냐는 큰 차이가 있다. 백성들에게 끼치는 영향도, 국가의 자존심도 문제다.

     조항의 변경을 통해 왕국은 적어도 민심을 통제할, 자존심을 세울 최소한의 수단을 챙겼다.

     둘째. 제국과의 협상으로 인한 손해를 어느 정도 메꿀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썩어빠졌기로 유명한 메르타의 귀족들이 제국에서 운송되어온 물자를 그냥 나눠줄 리가 없다. 제국에 지불한 대가가 있으니만큼 보상심리가 고개를 쳐들겠지.

     지원 물품은 일단 백성들에게 전달은 될 것이다. 다만 공짜가 아닐 테지. 이후에 값을 치러야 함은 물론 이자까지 붙지 않을까.

     남의 물건 팔아서 제 배를 채우는 격이지만, 다른 국가도 아니고 메르타가 그것에 주저할 리가 없다. 로엘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왜, 역사적으로도 있어 온 일이 아닌가.

     멀리 갈 것 없이 로엘의 전생의 고향, 한국의 역사만 봐도 국가 상층부가 구휼 제도 가지고 돈놀이를 벌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튼, 왕국 상층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그 본인들의 이익을 최대한 사수해낸 셈이었다.

     국가적인 재난이 일어나고, 피해 수습을 위해 타국에 손을 벌리게 된 상황. 그 와중에도 이 정도 출혈로 그칠 수 있었으니 선방한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하. 재미있지 않습니까?”

    “……?”

     그러나 로엘은 그들을 비웃었다. 카트리나는 어째서 로엘이 냉소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기울였다.

    “저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 조항 변경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되는 건 저들이 아닙니다. 제국이지요.”

    “예?”

    “저들은 기본적인 전제부터 잘못 잡고 있습니다. 제국은 왕국에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이번 일을 계획한 게 아닙니다.”

     로엘은 황제의 직인과 메르타 국왕의 직인이 찍힌 두루마리를 아공간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왕국을 집어삼킬 밑 작업을 계획한 것이지.”

     그렇기에 로엘은 못 이기는 척 조항을 변경해 주었다. 아니, 애초에 왕국의 귀족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은근히 유도했다.

     왕국은 알지 못하고 있다. 이 조항이 훗날 어떤 후폭풍이 되어 몰아닥칠지.

     지금은 왕국의 체면을 세우고 귀족들의 이익을 보장해줄 이 조항이, 훗날 거대한 재앙으로 화해 되돌아올 것임을.

     로엘의 머릿속에선 이미 이 조항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시나리오가 그려지고 있었다.

    [자비로운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은혜를 왕국의 귀족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도적질했다. 본래 왕국의 백성들에게 돌아가야 할 은혜를 가지고 그들 멋대로 장사를 벌였다.]

     그야말로 훌륭한 전쟁의 ‘명분’이, 왕국 측 사기를 떨어뜨릴 프로파간다가 아닌가.

     애초부터 제국이 왕국에게 제시한 모든 조건은 받아들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설사 그것이 적당히 완화되고 변형되더라도.

     말하자면, 독이 든 성배.

     왕국은 단지 제국이 국내에 영향력을 높이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반면 제국은 왕국을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이다. 그 시선의 차이로 인해 시작점부터 벌어지게 된, 치명적인 간극.

     어째서 이렇게 시선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을까. 제국이 작정하고 온갖 공작을 펼쳐 왕국을 기만했기에? 아니면 애초에 메르타가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은 국가라서 경계심이 부족했기에?

     아니.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메르타의 고위 인사들 사이에 만연한 ‘나태함’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 지속된 대륙의 평화로 인해 나태함이 뼛속까지 자리 잡은 상태다. 그 나태함이 지나쳐 자국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것을 외면할 정도로.

     즉, 그들은 대격변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나태함이 머지않은 미래에 그들 스스로의 목을 조르게 될 터였다. 그날이 굉장히 기대된다고, 로엘은 생각했다.

    “이제 대부분의 일은 끝났습니다. 마무리만 남았군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 남았다. 차후 손쉽게 메르타 왕국을 집어삼키기 위해선 반드시 처리해야만 하는 일이.

     그러나 로엘은 그 부분에 대해선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자, 이제. 카르테리온 백작령으로 갑시다.”

     로엘이 카트리나와 함께 와이번에 오르며 그렇게 말했다. 이제는 레인과 합류해야 할 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