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카르테리온(3)
레인의 돌직구 선언에 가주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 얼굴이 마치 ‘내 딸을 놓고 그런 식의 반응을 보여?’ 하고 분노를 표하는 것만 같았다.
‘어쩌라는 거지.’
아까만 해도 딸아이를 내어줄 수 없다느니 어쩌느니 하더니, 이번엔 무관심에 대한 분노인가. 레인은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냉각되려는 분위기를 전환시킨 것은 라미엔느 카트넬이었다.
“이 이상 절 부끄럽게 만드시면 내년 방학에는 가문을 찾지 않겠습니다. 아버님.”
“그건 안 돼!”
레인을 압박하던 가주의 기세가 순식간에 거두어졌다.
“흠흠. 실례를 끼쳤군.”
“…….”
가주, 루바르덴 카트넬의 표정이 곧바로 근엄하게 변했다. 레인이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자네가 4년 전에 내 아들 녀석을 구해 주었다는 ‘레인’이 맞나?”
“딱히 구해 주려고 그런 건 아니지만, 말씀하시는 인물은 맞습니다.”
“별로 사교적이지는 않은 성격이로군.”
“굳이 가주님과 친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피곤해질 것 같군요.”
루바르덴은 웃음을 터뜨렸다. 잘생긴 얼굴에 어울리는 호탕한 웃음이었다.
“내게 이렇게 대놓고 질색하는 모습을 보이는 친구는 또 처음이군 그래.”
“…….”
레인은 되도록 검가의 인사들과 친분을 다져두라던 로엘의 조언을 떠올렸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조언은 어디까지나 조언. 그것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레인의 마음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레인은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사내와 깊이 관계되면 관계될수록, 라미엔느와는 다른 의미로 귀찮게 되리라.
‘걸물이로군. 날 눈앞에 두고서도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있다니.’
반면 루바르덴은 레인에게 호감을 가졌다.
레인의 태도는 분명 보는 시선에 따라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루바르덴은 오히려 그런 당당한 태도를 마음에 들어하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오베른 녀석을 불렀으니 곧 도착할 게다.”
뒤편에서 전대 가주, 크레필만 카트넬이 그렇게 말했다. 그가 길게 하품을 내뱉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잠에 취한 듯 풀어진 얼굴로.
오래지 않아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할아버님. 오베른입니다.”
“들어와라.”
집무실로 들어선 오베른은 레인의 기억 속에 있는 흐릿한 인상의 소년에 비해 많은 점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키가 훨씬 컸다. 치기 어린 소년의 모습이 아닌 단단한 인상을 지닌 사내의 모습이었다. 등에 두 자루의 장검을 메고 있던 과거와는 달리, 각기 다른 종류의 검을 네 자루나 허리춤에 매고 있었다.
“확실히 너구나.”
레인의 모습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아니, 오베른의 변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오베른은 한눈에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레인과 조우했던 그 당시의 상황은 굉장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레인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 그것만큼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알아보기 쉬웠다.
“다시 한번 네게 감사한다. 네 덕분에 그때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일은 나 자신이 성장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래.”
레인은 딱히 답변할 말을 찾지 못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오베른을 위해서 한 일도 아니었던 터라 뭐라 말하기 참 애매했다.
“이렇게 만나게 된 김에 부탁이 있다.”
“?”
“대련을 한번 부탁하고 싶은데. 해줄 수 있나?”
레인은 오베른의 눈빛에서 강렬한 승부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라미엔느에게서 그가 무공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그가 즉답했다.
“싫어.”
“네게 자극을 받아 그동안 부단히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왔다. 실망시키진 않을 거다.”
“싫다고.”
“…….”
칼날도 틀어박히지 않을 단호함이었다.
“자자. 그 이야기는 이 자리가 파한 뒤에 둘이서 알아서 하도록 하고.”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루바르덴이 화제를 전환했다. 손님이, 그것도 은인이 싫다는데 밀어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른 이야기를 하지. 네가 우리 가문의 장남에게 도움을 준 것에 대해 감사히 생각한다. 그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은데, 혹시 바라는 게 있나?”
“…….”
여기서부터 본론이다. 레인은 잠시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그리곤 미리 로엘과 상의해서 준비해둔 답변을 내어놓았다.
“있습니다.”
“뭘 원하지?”
“다른 건 됐고, 카트넬 가의 영향력을 좀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영향력?”
예상치 못한 답변에 루바르덴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타국의 인물인 그가 이쪽의 영향력을 빌려서 취할 수 있는 이득이 대체 무엇이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별건 아닙니다. 가문의 영향력을 발휘해 의원을 좀 섭외해 주셨으면 합니다. 되도록 실력이 뛰어난 이들로. 가능한 많이.”
“의원?”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요청이다. 루바르덴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원을 모아서 뭘 할 생각이지?”
레인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전부 데리고 카르테리온 백작령으로 향할 생각입니다.”
뚝.
집무실 내부의 모든 이들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그들 모두가 국가의 권력 계층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 이들. ‘카르테리온’ 영지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잘 알고 있었다.
카르테리온 백작령은 현재 국가 상층부로부터 버림받은 땅이었다. 몬스터로부터 백성을 보호해야 할 중앙병력이 영지에서 빠져나가 되려 영지를 봉쇄하고 있는 상황.
심지어 그보다도 최악인 점이 있었다. 전염병 환자들이 넘쳐나는 땅이라는 것.
그렇다. 카르테리온은 현재 국가 상층부에서 전염병 환자들을 끌고 와서 가둬두고 있는, 강제 수용소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영지였다.
* * *
카르테리온 백작령.
이 영지는 토우런트의 헤이슨 자작령이나 노러츠의 플뢰비르 자작령과 비슷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팔키온 대산맥과 인접해 있기에 항상 몬스터의 위협에 시달리는, 위험천만한 장소.
현재는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백작의 뒤를 이어 젊은 여성 영주가 통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그녀는 정식으로 백작위를 승계받은 것이 아니었다. 백치인 장남을 대신해 떠밀리다시피 자리에 오른 것이지. 한마디로 정통성이 부족했다.
다른 귀족들은 그런 그녀의 단점을 헐뜯었다. 성별, 어린 나이, 부족한 정통성을 비난했다. 그녀를 제대로 된 영주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야 카르테리온 백작령을 ‘쓰레기장’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까.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야 영지에 전염병 환자들을 몰아넣을 수 있고, 파견시켜둔 병력을 바깥으로 빼낼 수 있으니까.
백작령은 버림받았다. 그 여파로 인해 범죄가 들끓는 무법지대로 화했다.
그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중앙군이 영지에서 빠져나가 버린 탓에, 젊은 영주는 치안병이고 사병이고 전부 싹싹 긁어모아 산맥 쪽에 투입해야만 했다.
안 그래도 수재가 일어난 탓에 영지 전체가 엉망인 상황. 민생이 피폐해진 것은 물론 범죄가 들끓고 있었다. 그런데 최소한의 치안병력마저 사라져버린 것이다.
안 그래도 전염병 환자가 잔뜩 돌아다니는 곳이다. 범죄율마저 높으니 사람들이 백작령을 기피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땅에 자진해서 발을 들여놓으려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정.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의로 그 땅에 발을 들여놓은 존재가 몇 명은 있었으니까.
거대한 천막. 그리고 그 내부에 빽빽하게 들어찬 간이침상.
그 침상에 뉘어진 수많은 환자. 그리고 그 환자를 돌보는 여러 의원들.
그리고 그 의원의 대열에 포함된 레인과 일리나.
그렇다. 레인은 정말로 그 자신의 말대로 카르테리온 영지에 자리 잡아 의료봉사를 펼치고 있었다.
“후.”
막 하나의 환자를 치료한 레인이 고개를 꺾으며 숨을 불어냈다. 이놈의 환자는 어째 끝도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게 당연하긴 했지만.
단순히 외상을 입은 환자들이면 그래도 좀 나은데, 전염병 환자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게 문제였다. 그들 중 상세가 심각한 이들은 일일이 내가요상술로 치료해야 했기에 심력 소모가 컸다.
다른 환자보다도 콜레라 환자와 장티푸스 환자가 많았다. 수재로 인해 각종 균이 증식하고 있다는 뜻.
현재 메르타 왕국에 널리고 널린 게 물에 팅팅 불은 채 부패해가는 시체였다. 콜레라균을 비롯한 여려 균들이 증식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긴 했다.
간단한 증세를 보이는 이들은 카트넬 가의 영향력을 빌려 끌어온 의원들에게 맡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위중해 보이는 이들은 죄다 레인과 일리나가 맡아서 치료해야 했다.
일리나가 오늘 제대로 밥값을 하고 있었다. 내가요상술을 가르쳐둔 보람이 있었다. 그녀의 분전에도 일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다 때려치우고 치킨이나 뜯고 싶다.’
레인은 환자의 몸에서 대침을 뽑아내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했다. 이 짓을 반복하는 것만도 벌써 2주째였다.
‘로엘 녀석이 손을 보태주면 좀 편할 것 같은데.’
그 녀석은 뭐가 그리 바쁜 건지.
로엘은 이곳 백작령에서 레인과 합류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대형 천막을 비롯한 각종 물품을 수북하게 쌓아놓곤 곧바로 떠나 버렸다. 왕실과 교섭을 진행해야 한다면서.
“감사합니다, 성자님.”
모든 침을 수거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레인에게 환자가 힘없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해왔다. 레인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아니, 그 말도 안 되는 호칭을 지어낸 놈은 대체 누구야.”
그야말로 온몸에 닭살이 일 정도로 끔찍한 호칭이었다. 레인이 이를 갈았다.
성자라니?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이게 무슨 지나가던 로엘이 폭소를 터뜨리고 갈 이야기인가.
그런 호칭을 받은 건 레인뿐만이 아니었다. 일리나 또한 성녀라고 불리고 있었다. 엄연히 진짜 ‘성녀’가 대륙 어딘가에 실존하고 있음에도.
저들은 세상 모든 것에 배신당한 이들이다. 그들의 시선에 이쪽이 어떻게 비치고 있을지를 생각한다면, 그 호칭도 그리 과한 것은 아닌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역시 너무 부담스러운 칭호였다.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오징어포처럼 쭈글쭈글해질 지경이었다.
“역시 굉장하십니다!”
“전염병 환자를 그렇게 쉽게 치료하시다니!”
“역시 성자님!”
주위 의원들이 한목소리로 레인을 칭송했다. 반쯤 억지로 끌려온 그들이었으나, 지금에 이르러선 완전히 레인과 일리나에게 매료된 상태였다.
처음에야 자신들도 전염병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지금에 와선 아무도 그것을 염려하지 않았다. 전염된다고 해도 곧바로 치료해줄 명의들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게다가 두 사람의 의학적 지식은 일반적인 의원의 그것은 한참이나 초월해 있었다. 그들이 의원들에게 그때그때 전하는 조언은 의원들의 실력을 가파르게 상승시켰다.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도 떨어지는 떡고물이 막대하니 의원들이 두 사람에게 호의를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제대로 고용비를 지급해주고 있기까지 하니 더더욱.
“아부는 됐으니까 빨리 가서 환자나 돌봐.”
레인이 으르렁거리듯 의원들에게 말했다. ‘성자’라는 칭호를 언급한 의원을 특히 무섭게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의원들이 찔끔하며 일제히 시선을 환자 쪽으로 돌렸다.
레인은 곧바로 다음 환자를 향해 움직였다. 피곤한 건 피곤한 거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필요한 일이다.’
레인은 그렇게 되뇌며 다음 환자의 몸에 침을 박아넣었다.
침을 따라 체내로 흘러들어간 내력을 조작, 체내에 잠복하고 있는 각종 균을 제거해 나갔다.
로엘과 일리나라면 호흡기나 항문으로 균을 배출시켰을 터였다. 그러나 레인의 경우엔 극도로 세밀하게 조정한 열양지기로 아예 균을 태워버렸다.
높은 경지와 섬세한 기예가 어우러지자 고차원적인 의료행위가 가능했다. 덕분에 그나마 심력과 시간의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
‘최대한 많은 환자를 치료한다. 그로써 좋은 인상의 명성을, 가능한 한 크게 떨친다.’
이번 의료봉사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레인에게 치료를 받은 수많은 전염병 환자들. 아마 그들 중 대다수가 백작령을 벗어나길 포기하고 이곳에 눌러살게 될 터였다.
이유야 간단했다. 치료가 된다고 해도 혹시 모를 위험성을 경계한 국가 상층부가 그들이 영지를 벗어나게 두지 않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자님!”
그리고 그렇게 레인에게 호의를 가진 이들이 영지 전역에 자리를 잡게 되면, 그것은 이후 고스란히 그의 힘이 되어 돌아올 터였다.
그도 그럴게, 레인이 차후 검가를 세울 장소가 바로 이곳 카르테리온 백작령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