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카르테리온(2)
메르타 왕국 전역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실제로 왕국의 대부분이 먹구름에 잠식되었다.
고대의 유적을 가장한 트랩의 발동. 그로 인해 발현된 대규모 마법. 자연적인 현상과는 거리가 먼 장마의 발생.
메르타 왕국은 때아닌 재난으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 농작물이 처참하게 망가졌고, 홍수로 인한 재산 피해가 급증했으며, 전염병이 창궐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내의 문제만도 아니었다. 고대의 마법이 딱 메르타 왕국 국내에만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니었으니. 엄한 주변 국가 영지에도 피해가 미쳤고, 그로 인한 외교적 항의가 빗발쳤다.
이런 국가적 비상사태에 대한 메르타 왕국 상층부의 대응 방침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잘못했네, 나는 잘못이 없네. 대책이 마련되어야 하는 귀족회의에선 매일같이 책임 전가가 오갔고, 그로부터 비롯된 정쟁이 판을 쳤다.
주변 국가에 지불할 배상금을 모아야 하는 왕족들과 영주들은 가진 것을 내어놓지 않고 세율을 올렸다. 당장 죽어 나가고 있는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고 오히려 착취한 것이다.
전염병에 대한 대비? 이뤄지고 있을 턱이 없었다. 대신 전염병 환자가 발생했을 때, 그들을 몰아넣을 영지를 선정하고 그곳에 병력을 배치하는 일만은 빠르게 이뤄졌다.
유적을 가장한 함정을 건드려 왕국에 재앙을 몰고 온 왕실과 귀족을 성토하는 백성의 무리. 그들은 순식간에 제압되어 즉결처분되었다.
그야말로 썩어빠진 국가의 전형. 국가 상층부가 타락하면 그 나라가 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메르타 왕국은 그것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 * *
“초대해놓고 이런 말 하는 것도 미안하지만, 지금 왕국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데, 괜찮겠어?”
“상관없어.”
라미엔느의 물음에 레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애초에 ‘그런 상황이기에’ 가는 것이었다.
이번 방학 기간에 맞춰, 레인은 라미엔느의 가문인 카트넬 가를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당연하다고 할지, 방학 동안 본가에 잠시 복귀하는 라미엔느와 동행해서 움직이기로 했고.
“그런데 뒤쪽에 그 사람은 누구야?”
라미엔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레인의 뒤편에 서 있는 인물의 정체는 일리나였다. 이번 메르타 행에는 그녀가 동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자 겸 보조 인력.”
“제자?”
라미엔느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리 봐도 레인 쪽이 더 어려 보였다. 의구심이 풀리기는커녕 더욱 깊어졌다.
“…….”
그런 라미엔느의 뒤편에서 레인을 지그시 응시하는 중년 사내가 하나.
그는 카트넬 가문에서 라미엔느가 무사히 가문에 복귀할 수 있도록 파견한 호위 인력이었다. 무려 원로원에 속한 초인.
‘상당한 실력이군. 기도만 놓고 보면 오베른와 비교해도 그리 꿇리지 않겠어.’
레인을 훑어보며 그가 내린 평가였다. 그는 초인의 영역에 이른 인물인 만큼 상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실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물론 착각이었다. 그는 레인의 실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 그야, 레인이 그 자신의 기도를 의식적으로 조절했으니까.
반박귀진(反撲歸眞).
중원에선 레인이 다다른 경지를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곤 한다. 자신의 기운을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경지.
사실 내력을 의식적으로 운용하는 좌공 수련자인 레인은 초인의 영역에 이르렀을 때부터 이것이 가능했다. 보다 높은 경지에 오른 이들까진 속일 수 없었을 뿐.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선, 설사 상대가 검존이나 대현자일지라도 그가 실력을 선보이기 전까진 그 경지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반박귀진이 레인에게만 허락된 기예는 아니었다. 이쪽 세계의 검존쯤 되면 그와 비슷한, 혹은 똑같은 기예를 부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들과 레인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했다. 그것은, ‘나이’.
이쪽 세계는 좌공이 아닌 동공이 주가 되다 보니 무인의 성장 속도가 전체적으로 균등하다. 물론 그 사이에서도 자질에 의한 격차는 존재하지만, 중원의 그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렇기에 검존의 경지에 이른 이들은 대체로 나이가 지긋한 이들뿐이다. 빨라도 오륙십 대. 늦으면 100세 이상의 나이가 되어서야 그 경지에 다다르는 이도 있다.
역사나 설화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영웅쯤 되면 삼사십 대의 나이에 검존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은 경우도 모양이지만.
아무튼, 그렇기에 그들 검존에게는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억지로 육신의 나이를 되돌린’ 흔적.
체내의 기운은 숨길 수 있어도 육신에 남은 흔적만큼은 숨길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 흔적은 초인쯤 되는 실력자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레인의 경우엔 애초에 젊었다. 육신을 과거의 그것으로 되돌릴 이유 따위 조금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초월자로서의 특징을 타인에게 완전히 감추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이쪽 세계의 검존도 육체의 젊음을 포기하기만 하면 똑같은 행위가 가능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1. 타인에게 자신의 경지를 감춤으로써 얻을 수 있는 메리트.
2. 육신을 전성기의 그것으로 되돌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급격한 전력의 상승, 젊음, 그리고 수명의 증가.
이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후자를 포기하고 전자를 고를 수 있는 인물이 있을까? 게다가 전자를 고름으로써 생기는 이점도 후자의 기량 상승이면 거의 상쇄되는데?
결국 레인처럼 자신의 경지를 완벽하게 숨길 수 있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었다. 설사 그러한 괴짜가 있다고 해도 육신의 기량 면에서 레인에게 크게 밀릴 터였고.
라미엔느의 호위인 카트넬 가문의 원로가 그른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은 그런 연유였다.
“그런데.”
레인이 미간을 모으며 입을 열었다.
“왕국까지 어떻게 이동할 생각이지?”
“아. 적당한 규모의 마차를 수배해 뒀어. 가는 길에 불편하진 않을 거야.”
예상한 일이긴 했지만, 절로 한숨이 나왔다. 마차 타고 어느 세월에 왕국까지 간단 말인가. 할 일도 많은데 그런 식의 시간 낭비는 사절이었다.
“그 마차, 돌려보내.”
“뭐?”
“마차 타고 어느 세월에 제국과 왕국을 왕복해. 이동 시간만으로도 방학의 삼분지 이가 날아가겠군.”
“마차를 되돌려 보내면 이동은 뭘로 해?”
“따라와.”
레인은 일행을 이끌고 도시 외곽에 세워진 대형 창고로 향했다.
키에에에에에에!
“와이번?!”
창고 내부로 들어선 라미엔느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떡하니 대형 몬스터가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설마 이동 수단이란 게…….”
“어. 이 녀석 맞아.”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미엔느도, 그 뒤편의 원로도 놀랍다는 표정을 했다.
* * *
드높은 창공을 가로질러 메르타 왕국으로 향하는 와중.
‘정체가 뭐지?’
카트넬 가의 원로, 바데룬이 레인의 얼굴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그저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닌 아카데미원생 정도로 여겼건만, 거기에 와이번을 길들인 테이머였을 줄이야.
심지어 행정학부에서의 성적도 최상위권이라고 들었다. 그야말로 여러 방면에서 또래 실력자들을 크게 앞서는 인재였다.
이 정도로 다방면에서 뛰어난 인재가 그저 평범하게 제국으로 유학 온 학생이다? 심지어 귀족이 아닌 평민이고? 그럴 수도 있는 것일까?
비슷한 생각은 라미엔느도 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묘하게 이질감이 드는 상대였다. 그 어떤 상대를 대하더라도 당당한 태도에, 일반적인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까지. 평범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보니 일신에 지닌 능력마저 범상치가 않았다. 감추고 있는 무술 실력도 가데룬의 말대로라면 동년배 중 최상위권이라고 하니 말 다 했다.
이 정도의 인재가 우연히 탄생했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일까?
아니. 오히려 국가적 차원에서 키워낸 인재라는 편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자신에 대한 정보를 되도록 제한하려는 태도도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소속 국가는? 출신 국가라고 소개한 토우런트 왕국일까? 혹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제국일까?
누가 거대집단의 차기 수장 아니랄까 봐 온갖 가설을 다 세워보는 그녀였다. 정작 레인 본인은 타인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춰져 보이는지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이 없었지만.
“그런데 스승님.”
그런 와중 일리나가 레인에게 물었다.
“?”
“그 모습, 왜 아직도 유지하고 있으세요?”
“그거야…….”
동행하고 있는 두 사람 때문이라고 대답하려던 레인이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결국 저 두 사람에게는 본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메르타 왕국에서의 일정을 마친 후엔 로엘과 함께 제국의 사자로서 카트넬 가에 재방문하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그런가. 굳이 이런 답답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필요가 없는 거였군.”
“생각지 못하고 계셨나 보네요.”
너무 앞으로의 일정에만 신경 쓰느라 간단한 부분을 놓친 모양이었다.
“?”
레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라미엔느의 앞에서 천천히 안경을 벗었다. 아티펙트가 사라짐에 따라 흐릿했던 인상이 본래의 날카로운 인상으로 돌아왔다.
다음으론 어깨에서 졸고 있던 흑아를 그림자 속으로 복귀시켰다. 곧바로 그림자에서 줄기가 화라락 일어나 레인의 몸 전체를 빈틈없이 감쌌다.
“암흑정령?!”
라미엔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온몸을 감싼 그림자 줄기가 휘리릭 풀려나 다시 그림자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을 땐, 레인은 어느새 중원식 무복을 갖춰 입은 모습으로 화해 있었다.
이어서 지저분하게 늘어뜨려 얼굴을 가린 머리칼을 적당히 틀어 올렸다. 그림자로부터 받아든 대침 두 개를 꽂아 다시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것으로 마무리.
그렇게, 레인은 그 자신의 본모습을 완전히 되찾았다. 중원식으로 표현하자면, 반안(潘安)이나 송옥(宋玉)조차 울고 갈 외모.
“어?”
라미엔느도, 바데룬도 말을 꺼내질 못했다. 뭔가에 홀린 듯한 시선으로 레인의 얼굴을 쫓을 뿐.
레인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봐.”
그 발언에 두 사람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모습은?”
“본모습.”
“왜 지금까지 숨겼어?”
“이전에 쓸데없는 트러블 피해 가며 조용히 학창 생활을 보내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레인은 라미엔느의 상투적인 물음을 툭툭 끊어가며 짧게 해명했다.
일단 이 정도만 이야기해 둬도 그녀가 아카데미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떠드는 일은 없으리라. 지금까지 지켜본 바론 그렇게 입이 가벼운 성격은 아니었으니.
‘실력은 둘째치고, 외모로는 오베른 녀석이 상대가 안 되는군.’
바데룬이 또다시 실없는 생각을 했다. 오베른이나 라미엔느도 우월한 유전자로부터 비롯된 뛰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솔직히 눈앞의 소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반면 라미엔느는 빠르게 제정신을 차리고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저 주목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외모를 숨기고 있었다. 단지 그뿐인 이야기. 별달리 추궁할만한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가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고 이쪽의 태도에 변화가 일면 그만큼 실례인 일이 없다. 여기선 이쪽의 태도에 변화가 없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
그러나 결국 힐끗, 하고 한 차례 레인을 돌아보고 마는 그녀였다.
* * *
순조롭게 카트넬 가까지 도착한 레인은 곧바로 라미엔느의 안내에 따라 가주를 알현할 수 있었다.
가주가 레인을 맞이한 장소는 개인 집무실이었는데, 레인은 그 장소에 들어서자마자 초월자의 기척을 둘이나 잡아낼 수 있었다.
‘현 가주와 전대 가주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건가?’
레인이 알기로 카트넬 가의 초월자는 그 두 사람뿐이었다. 아니, 한 시대에 둘이나 되는 초월자를 배출해냈다는 것부터가 역사 깊은 검가의 저력을 증명하는 일이긴 했지만.
레인이 집무실 내부에 자리 잡은 두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한 사내는 집무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있었고, 다른 한 사내는 그 뒤편 소파에 방만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짧게 쳐낸, 라미엔느와 같은 물색의 머리칼. 뺨을 가로지르는 흉터. 큰 키. 장대한 골격. 잔잔하게 가라앉은 기도. 그리고, 여러 자식을 둔 아비라고는 보기 힘든 젊은 외견.
상석의 사내는 아마 카트넬 가의 가주일 터였다.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전대 가주가 손님을 맞이하고 현 가주가 그 뒤에 제멋대로 늘어져 있는 것은 아닐 테니.
가주로 짐작되는 사내는 라미엔느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선 레인을 빤히 응시하더니, 진중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딸아이는 못 내어준다.”
곧바로 라미엔느가 이마를 짚었다. 왜 부끄러움은 이쪽의 몫이란 말인가.
팔불출도 정도껏이여야지, 저게 초면인 상대에게 할 발언이란 말인가.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레인의 대답은 평소와 같이 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