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카르테리온(1) (169/249)
  •  169화. 카르테리온(1)

     바르바젠이 알테라 시를 떠나 용인족의 영토로 향하고, 아카데미의 겨울 방학이 끝났다. 레인, 르우벤, 카트란이 학업에 복귀했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 종업식 겸 상급생들의 졸업식이 있었다.

     2년차 학생이 된 터라 세 각성자도 행사에 강제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번 행사는 입학식과는 달리 나름 볼거리가 많았기에 레인과 르우벤이 꾸벅꾸벅 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름 볼거리 들을 거리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마지막으로 교장의 졸업 축사 시간이 다가왔다.

     레인이 지루한 연설을 예상하며 곧바로 몸을 의자에 깊숙이 파묻었다. 언제라도 잠들 수 있도록.

     그런데 이어진 축사는 의외로 굉장히 유쾌했다.

    “앞서 말했듯, 꿈이라는 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축사의 앞부분은 으레 어른이 아이들에게 할 법한 이야기였다.

    ‘꿈’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사 그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것이 많을 거라는.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진 내용이 문제였다.

    “제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도 ‘꿈’이 큰 역할을 했죠. 솔직히 저는 이십 대 중반 이전까진 그다지 촉망받는 인재가 아니었습니다. 모종의 계기로 명확한 목표를 세운 뒤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이지.”

     지금의 교장의 위상을 생각해 본다면 믿기 힘든 발언. 검성과 현자의 칭호를 동시에 가진 교장은 대내외적인 위상이 굉장히 높았다.

     그런 교장이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 ‘계기’라는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학생들의 주의가 단숨에 몰렸다.

     학생들의 시선을 음미하듯 한 차례 숨을 고른 교장이, 이어서 말했다.

    “사실 아직까지도 저는 스스로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회장이 조용해졌다. 경청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제 꿈은, 제 목표는 단 한 가지입니다. 언젠가 검존의 경지에 오르는 것.”

     교장은 한 학생을 손가락으로 지목해서 물었다.

    “그쪽의 학생. 묻겠습니다. 제가 이 목표를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 것 같습니까?”

    “제국 최강자 중 한 사람이라는 명예를 가지고 싶으셨던 게 아닙니까? 선망하는 영웅을 접하고, 그 상대를 동경하게 되었다든지 하는 이유로.”

    “그럴듯하긴 하지만, 아닙니다.”

     교장은 다른 학생을 지목하며 재차 물었다.

    “그쪽의 학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학생이 잠시 고민하더니 답변을 내어놓았다. 이번에도 교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다시 다른 학생을 지목했다.

     그것을 서너 번 반복하고.

    “다들 그럴듯한 추측을 내어놓았습니다만, 아닙니다. 그런 하찮은 이유로 그 원대한 목표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

    “제가 검존이 되고 싶은 이유는 오직 하나. 그 경지에 오른 자들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기예, 육체제어입니다.”

     교장의 발언에 학생들 사이로 어라, 하는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뭔가 굉장한 이유가 있을 것처럼 말하더니, 결국 젊음을 되찾기 위해서였던가.

    “육체제어로 육신을 전성기의 그것으로 되돌린다.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저는 이것을 수십 년간 꿈꿔 왔습니다. 무려 이십 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정진해 왔습니다.”

     교장이 갑자기 교탁을 탕, 하고 내리쳤다. 그리곤 감정이 듬뿍 실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육체의 젊음을 되찾는다. 그로써 이 지긋지긋한 유전의 굴레를 벗어던진다! 의사도, 신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선천적인 저주를 극복해낸다!”

     학생들이 재차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유전의 굴레? 저주?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교장이 '저주'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거늘.

     그리고, 교장의 말이 이어졌다.

    “탈모라 불리는, 이 극악하기 짝이 없는 저주를!”

    “미친.”

     르우벤이 저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그 표정은, 대다수 학생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회장에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폭소가 회장 내부에 가득 울려 퍼졌다. 진지하기 그지없던 연설 와중에 갑자기 이 무슨 황당한 발언이란 말인가.

     그러나 교장은 진지했다. 근엄했다. 엄숙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탈모가 진행되기 시작한 이십 대 중반부터, 제 삶의 목표는 오로지 그것이었습니다. 제 명성도, 지위도, 권위도. 모두 그 목표를 향해 정진하다 보니 얻게 된 부가적인 소득에 불과합니다.”

     교장은 훗, 하고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 허황된 꿈도, 황당한 꿈도 좋습니다. 꿈을 가지고 정진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문득 자각하게 될 겁니다. 어느새 손에 쥐어져 있는 것들이 작지 않게 되었음을.”

     나름 뼈있는 발언이었지만 웅성거리는 소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모두가 채 가시지 않는 웃음을 가라앉히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기억해 두십시오. 만인의 부러움을 사는 성공. 사회적인 인정. 타인의 경외를 이끌어 내는 명성. 그 모두가 여러분의 의식을 전환시킨 자그마한 계기, 자그마한 목표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이미 반수 이상의 학생들은 교장의 연설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웃음으로 상황을 즐거이 흘려보낼 뿐. 그러나 교장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유쾌하게 연설을 이어갔다.

    “재미있는 양반일세.”

     르우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레인이 픽, 하고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여 그 말에 동의했다. 작년 입학식 때의 연설은 그렇게나 지루하더니만, 알고 보니 이게 본모습인 모양이었다.

     교장의 연설은 오래지 않아 끝을 맞이했다. 박수와 함성이 뒤따랐다.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2학년부터는 행정학부에도 실기 수업이 있었다. 그동안 익힌 이론을 바탕으로 학교 측에서 마련한 행정 업무를 소화해내야 하는.

     가상의 영지와 그에 맞는 가상의 제반 사항. 그로부터 비롯되는 가상의 업무.

     실제 영지의 살림을 책임지는 관리의 일을 학생들에게 간접적으로 체험시키는 것이 수업의 목적이었다. 가상의 업무라지만 실제 그것과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이 훈련을 바탕으로 다음 학기에는 무려 실전을 경험하게 되어 있었다. 알테라 시에 속한 시립 기관 곳곳에 학생들을 행정 보조 인력으로 순차적으로 파견, 그 평가를 내려 성적에 반영시키는 것이 행정학부의 전통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실기가 들어가게 되면서 수업은 더욱 빡세졌다. 안 그래도 할 일이 여러모로 많은 레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학업, 본인의 수련, 제자 지도, 로엘 직속 무력 조직의 지도, 그리고 최근 신설한 무력대의 지도까지. 그 모든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레인의 일상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다행한 점은 이제 학업을 방해하는 요소는 없다는 점이었다. 유령 스터디 그룹에 든 덕분에 그룹 권유를 목적으로 찾아오는 학생도 대폭 줄었고, 라미엔느 카트넬을 피해 다니느라 심력을 소모할 필요도 없어졌다.

     바쁜 일상을 구가하면서도 레인은 모범생답게 모든 수업 과정을 우수하게 수료했다. 친하게 지내는 동급생은 없어도 주위 선생에게는 인정받는, 충실한 아카데미 생활을 구가했다.

     학업, 수련, 지도. 반복되는 일상은 1학기의 끝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만 학기 말. 레인의 태도에 변화가 조금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분위기에 변화가 일었다고 해야 할까.

     학기말 시험을 준비하며 열의에 차 있었던 작년의 모습과 대비되는,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공부에 열중하는 기본적인 자세마저 바뀐 것은 아니었으나, 명확한 온도의 차이가 있었다.

     함께 시험공부에 열중하던 르우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뭔가 너 작년에 비해 공부에 집중을 못 하는 모양새다?”

    “그런가?”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레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르우벤은 레인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따금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나, 괜히 천장을 한 번씩 올려다보는 모습이나. 작년의 그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 변화의 결과는, 학기말 시험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1등 : 라미엔느 카트넬]

    라미엔느 카트넬은 여전히 1등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냈다. 반면 레인의 경우엔…….

    [5등 : 레인]

    등수가 세 계단이나 추락했다.

    여기서 르우벤은 한 차례 더 위화감을 느꼈다. 그 승부욕 충만한 레인에게서 분해하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질 않은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오히려 담담하게 결과에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자신의 공부가 부족했음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기에, 라는 이유만으론 납득할 수 없는 태도였다.

     평소부터 레인의 모습을 지켜봐 온 르우벤으로선 의아한 광경일 수밖에 없었다.

    “너 레인 맞지?”

    “뭔 소리야.”

     농담이 먹히질 않는 것을 보니 레인이 맞긴 한 모양이었다.

     * * *

     학기가 마무리되었다. 그 시점에 맞춰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다.

     우선 카트란이 무투대회 2위로 입상했다. 아직 2년 차에 불과한 학생이 대회 2위에 입상했다는 것은 굉장한 쾌거였다.

     그런데 1위로 입상한 인물 역시 카트란과 같은 2년 차 학생인지라 주의를 끌었다. 바로 라미엔느 카트넬. 카트란은 결승전에서 라미엔느를 만나 패배한 것이었다.

     변칙적인 검술의 귀재인 라미엔느와 우직하고 굳건한 스타일의 검사 카트란의 대결은 꽤나 팽팽하게 진행되었는데, 아무래도 기본적인 기량에서 차이가 벌어졌다.

     르우벤의 경우엔 부단한 수련이 빛을 발해 드디어 천마신공을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마검의 힘을 어느 정도 무리 없이 끌어다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무공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에 아티펙트와 문신에 담긴 힘이 병행되어야 했지만.

     그리고 레인의 제자인 루미아와 일리나가 경지에 들었다. 루미아는 내력을 이용해 손에 날카로운 기운을 덧씌울 수 있게 되었고, 일리나는 내가요상술을 무리 없이 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의 경우엔 아무 기반도 없이 바닥부터 시작했던 터라 본래라면 이 수준까지 오르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어야 했다. 그런데 스승인 레인의 도움으로 시간을 상당히 단축해낼 수 있었다.

     바로 곁에서 지도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력을 두 사람의 체내에 주입해 직접적으로 관여하기까지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갓난아기에게나 가능한 벌모세수까진 무리였지만, 레인은 넘치는 영약으로 그 비슷한 행위를 주기적으로 행했다.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부분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덕분에 두 사람 모두 무인으로서의 진정한 출발점에(어디까지나 레인 관점에서의)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을 절반 이상 단축시킬 수 있었다. 특히 루미아의 경우엔 마공을 익힌 터라 성장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인. 가장 큰 변화는 그에게 일어났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특별한 계기도 없이. 격렬한 무언가의 과정을 동반하는 일도 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주위 사람들조차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용하게.

     초인의 영역에 발을 들인지 정확히 2년 반밖에 지나지 않은, 너무나도 이른 시점에.

     그가 벽을 넘어섰다.

     * * *

    “젠장!”

     오랜만에 레인과 르우벤이 대련을 했다. 그 결과, 르우벤이 처참하게 깨졌다.

    “이건 반칙 아니냐!”

    “뭐가.”

     르우벤이 바닥에 드러누운 채 분통을 터뜨리건 말건, 레인은 담담한 얼굴로 납검할 따름이었다.

    “아니 초인의 경지에 오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초월자야!”

    “2년 반 됐군.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

    “그게 오래 걸린 거라고?!”

     르우벤이 무슨 말도 안 되느냐는 얼굴을 했지만, 레인은 진심이었다.

     초인과 초월자 사이의 간극은 의외로 그렇게까진 크지 않다. 초일류와 초인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만큼 압도적이진 않다.

     그렇다고 초월자의 경지에 오르기 쉽다는 뜻은 아니다. 그 간극의 넓고 좁음과는 관계없이, 그 거리를 좁힐 방법을 찾는 것 자체가 힘들다.

     대부분의 무인은 그 길을 찾지 못해 좌절한다. 전생에 이미 그 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 레인은 경우가 완전히 달랐지만.

     아무튼, 레인이 초일류의 경지에 오르고 초인의 영역을 돌파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2년.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자신이 초월자의 벽을 넘어서는 데엔 그보다도 적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그 예측이 보기 좋게 깨어지고 말았다. 학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에 치인 데다, 비기스트의 활용을 위한 영약 섭취와 운기행공에 개인 수련 시간의 절반 이상을 투자한 탓이었다.

    “빌어먹을. 이젠 상대가 안 되는군. 그렇다고 대련에서 마검을 꺼내 들 수도 없고.”

     르우벤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대련이 아닌 실전이었다면 승부가 이렇게 일방적이진 않았을 터였다. 아니, 오히려 르우벤 쪽이 압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직 레인은 경지를 완전히 수습하지 못했으니까.

     르우벤에겐 마검이 있다. 실전에서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닥치게 되면 르우벤도 앞뒤 가릴 것 없이 마검을 뽑아 들 터였다.

     그러나 이것은 대련. 그리고 마검은 대련에 사용하기엔 굉장히 부적절한 물건이었다. 안 그래도 제어하기 힘든 물건이건만, 그걸 든 채로 어떻게 ‘모의 전투’를 벌인단 말인가.

    “그놈의 재능은 매번 사람을 서럽게 만드네. 창조신님, 밸런스 조정 제대로 안 합니까.”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괜히 신을 원망하는 발언을 내뱉었다.

    [레인.]

     그런 와중, 레인의 귀걸이로 통신이 들어왔다. 로엘이었다.

    “어.”

    [슬슬 준비해라.]

    “벌써 시기가 그렇게 됐나.”

    [그래.]

     레인이 중얼거림에 로엘이 가볍게 긍정했다. 그가 잠시 텀을 두고 다시 말을 이었다.

    [메르타 왕국에 수재(水災)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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