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게르반의 유산(1)
어느새 2학기도 끝을 맞이했다. 학기말 시험의 때가 다가왔다.
시험 전야. 레인과 르우벤은 밤샘 공부에 돌입했다. 어차피 일반인과는 체력이 다른 두 사람이라 컨디션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숙소에 상주하는 주방장이 야식으로 만들어준 순살치킨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레인이 물었다.
“이번엔 어떨 것 같냐. 낙제는 면할 것 같아?”
“어떻게든. 어우, 머리가 깨지겠네.”
르우벤이 머리칼을 쥐어 싸매는 시늉을 했다. 그가 포크로 치킨 한 조각을 찍어 우물우물 씹으며 되물었다.
“넌 어떤데. 이번엔 진짜 1등 할 자신 있어?”
“글쎄.”
레인은 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나 르우벤은 그의 표정에서 자신감을 읽어냈다.
“오호. 이번엔 진짜 자신 있나 본데? 열심히 했다 이거지?”
“그런 것 아니야.”
레인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숨겨진 기분 좋은 기색을, 르우벤은 어렵잖게 느낄 수 있었다.
“······.”
르우벤이 눈을 가늘게 뜨고 레인을 빤히 응시했다. 레인이 그것을 못 느낀 체하며 공부에 열중했다.
* * *
시험이 끝나고, 교실 한쪽에 대자보가 붙었다.
[학년 전체 1등 : 라미엔느 카트넬]
[학년 전체 2등 : 레인]
아주 근소한 차이였다. 정말로 근소한 차이로 1등과 2등이 갈렸다.
결국 순위의 변동은 없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 2등이면 진짜 굉장한 거지.”
르우벤이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안 그래도 나빴던 레인의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 * *
검가를 구성하는 요소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진다.
검가의 첫 번째 구성요소는 가주와 그 혈족이다.
검가는 어찌 됐든 하나의 가문이다. 그렇기에 그 중심에는 가문의 주인과 그 혈족이 주축이 될 수밖에 없다.
다만 여타 귀족 가문과 다른 것은, 가문의 주인 될 인물에게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면 원로원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자격이 박탈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검가의 ‘위상’은 귀족의 ‘권력’과는 또 다른 종류의 것이다.
검가만큼 선전성이 중요한 집단이 없다. 검가의 진정한 힘은 그 위상에 반해 몰려드는 수많은 무도가, 빈객, 수련생과 관광객에 있으므로.
‘위상’이 추락하게 되면 검가는 끝장이다.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원로원이 차기 가주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그로부터 비롯된다.
그렇기에 검가의 주인은 만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존재여야 한다. 그 일신의 무력이 뛰어나야 함은 물론이고, 통솔력과 행정 능력, 카리스마도 뛰어나야 한다.
검가의 두 번째 구성요소는 수련생이다.
일반적으로 검가에선 수련생을 받아들인다. 그에 수많은 귀족 자제와 부유한 평민의 자제가 무술을 사사하기 위해 몰려든다.
수련생은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검가로부터 수준 높은 무술을 전수받을 수 있다. 검가의 주 수입원 중 하나다.
물론 돈이 있어도 자질이 없거나 자질을 커버할 정도의 노력을 보이지 않으면 금세 퇴출된다. 반대로 평민 중에서 특출난 재능을 가진 이들은 오히려 검가에서 금전을 지원해 주기도 한다.
검가의 세 번째 구성요소는 무력대다.
무력대는 수련생 중에서 지원자를 받아 엄격한 심사를 거쳐 편성된다. 말 그대로 검가의 무력을 상징하는 집단.
이들은 수련생들과 완전히 다른 위치에 선다. 수련생들이 돈을 지불하고 검가에서 가르침을 받는다면, 이들은 오히려 검가에서 품위유지비를 내어준다. 그것도 막대한 금액을.
심지어 수련생들이 배우는 것보다 상위의 무술을 익힐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기까지. 그렇기에 많은 수련생이 소속된 가문의 무력대에 들 수 있기를 희망하곤 한다.
이들은 평시에는 조교의 역할을 맡는다. 수련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이들이고, 검가를 찾아오는 무인들이 대련을 요청했을 때 나오는 것도 이들이다. 가끔씩 외부 행사에 동원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문에 위기 상황이 닥치거나 소속 국가가 위기를 맞이하면, 그들은 그 어느 세력보다도 무서운 무력 집단으로 탈바꿈된다. 검가가 가장 직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이들이다.
네 번째 구성요소는 원로원이다. 가문 내에서 가주와 가주의 혈족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들.
원로의 자격은 무력대 출신이면서 초인의 대열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에게 주어진다. 간혹 실력이 좀 부족하더라도 가문에 큰 공을 세운 이에게 주어지기도 하지만, 거의 없는 케이스다.
이들은 한마디로 가문의 최고수들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선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가문의 얼굴이다. 그쪽 세계에 관심이 없는 자들은 가문을 대표하는 가주의 명성만을 보지만, 관심이 있는 자들은 가주 이외의 실력자들까지 살피니까.
원로원에는 간혹 가주를 넘어서는 실력자가 속해 있는 경우조차 있다. 라미엔느 카트넬과 오베른 카트넬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참고로 레인이 세울 검가의 경우엔 그의 제자들이 이 원로원의 구성원이 될 예정이었다. 일단 그들이 모조리 초인의 대열에 들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레인은 그 부분에 대해선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요소가 바로 검가를 찾아오는 무예 수련자, 관광객, 빈객.
검가라는 것은, 간단하게 표현해서 무인의 성지와도 같은 곳. 그 명성에 이끌려 찾아오는 사람들이야말로 검가의 진정한 저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앞으로 레인은 대륙에 그 자신의 명성을 크게 떨칠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명성을. 차근차근 기반을 다져가며 검가를 세울 게 아니니까.
레인의 목표는 대륙제일검가.
그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그는 기본적으로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 요소를 충족시킬 필요가 있었다.
다섯 요소 중 첫 번째와 네 번째는 이미 대체로 충족된 상태였다. 그 본인과 제자들이 있으니까. 두 번째와 다섯 번째는 차후에 검가를 세우고 나서야 채울 수 있는 요소였고.
그런데 세 번째 요소가 문제였다. 검가의 실질적인 힘이라 할 수 있는 ‘무력대’.
아무리 적어도 무력대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 검가를 세울 최소한의 틀을 갖출 수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세월에 수련생을 받아들이고 키워 쓸 만한 수준으로 만들고 무력대를 조직, 정비한다는 말인가.
그로 인해 내려지는 결론은 한 가지였다. 미리 무력대를 창설해둬야 한다는 것. 이후에 제2, 3의 무력대를 추가로 창설할지라도, 하나의 무력대는 미리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번 방학에 레인이 처리할 일이 그것과 관련이 있었다. 제국 각지에서 로엘이 영향력을 발휘해 모아둔 지원자들 중, 쓸 만한 자질이 있는 자들을 선별하는 일.
로엘이 창설한 전투팀과는 다르게 이번에 뽑을 이들은 레인이 전수하는 무공을 익히고 상위의 경지에 다다라야 했다. 그것도 레인이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까지.
그렇기에 보다 까다로운 절차를 걸쳐, 대대적으로 일을 벌였다. 최종적으로 그렇게 가려 뽑은 천여 명의 인재를 대상으로 이번 방학 동안 레인이 직접 심사를 진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중 정확히 200명만이 레인에게 무공을 전수받아 무력대로 거듭날 예정이었다. 무공을 전수한 대상의 실력을 단숨에 끌어올리는 핵심은 결국 ‘영약’인지라, 일단 그 숫자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이후에 무력대를 더 늘리게 되더라도 그들에겐 무공을 전수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아니, 상황을 봐서 하나의 무력대 정도는 추가로 늘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머지는 유적에서 획득한 대영웅과 그의 동료들의 무술을 풀어 모집할 계획이었다. 수련생 또한.
그때를 대비해 레인은 획득한 무술서와 메모리 크리스탈을 한참 탐독, 분석하고 있었다. 무예에 한해선 규격 외라고 할 법한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튼 이야기를 되돌려, 레인은 이번 방학을 기점으로 이후 무력대로 거듭날 인재들을 선별, 가르쳐야 하게 되었다.
그의 입장에선 학업과 본인 훈련, 제자 육성만도 바쁜데 여기에 또다시 새로운 일이 추가된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에 대한 일말의 불평도 내뱉지 않았다.
애초에 이는 각성자들이 서로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미 논의된 사안이었다.
필요한 과정이니만큼 아카데미는 다닌다. 그러나 미래를 대비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니 학업 이외의 활동도 병행한다.
기본적으로 큼직한 활동은 방학 중에 처리한다. 반면 제자 육성, 수하 훈련, 그 본인의 실력 증진을 위한 수련은 학기 중에 아카데미에 통학하며 동시에 해결한다.
괜히 레인과 르우벤이 아카데미의 기숙사가 아닌 멀리 떨어진 주택에 거취를 정한 게 아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던 것이다. 운신의 자유를 위해.
“그래서, 아가씨와 나는 왜 데리고 가는 거야? 사부.”
로엘이 알려준 시험장 중 한 곳으로 향하는 와이번의 등 위에서, 셀린이 물었다.
참고로 와이번을 몰고 있는 것은 레인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마법의 소양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것이 가능해진 이유는, 얼마 전 르우벤에게서 선물로 받은 ‘아티펙트’.
르우벤에겐 이제 본 드래곤이 있기에 테이밍 마법이 내장된 아티펙트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그것이 별다른 이동 수단이 없는 레인에게로 넘어오게 된 것이었다.
“별것 아니야. 지금부터 뽑게 될 녀석들은 앞으로 너희가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지.”
“뭐?”
“아무래도 내가 매일 붙어서 가르칠 수는 없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레인에겐 시간이 부족했다. 어찌 됐든 학업을 비롯한 다른 일에도 시간을 쏟아야 했으니까.
그렇기에 부족한 시간은 이미 경지에 든 두 제자를 이용해 메울 심산이었다. 두 사람이라면 그럴 능력도, 자격도 차고 넘쳤다.
셀린이 귀찮다는 듯 뒷목을 긁적이며 호리병으로 술을 한 모금 홀짝였다.
“맡겨주세요. 스승님.”
반면 레이나는 빙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주라는 듯.
“키에에에에에에!”
와이번이 한 차례 기성을 내지르며 창공을 가로질렀다.
* * *
널찍한 실내. 그곳에 모인 20대의 남녀 100여 명. 그 모두가 로엘이 모집한 인재들이었다.
일단 귀족가의 자제나 명성 높은 부호의 자제는 제외했다. 한동안 존재가 은폐될 이들이었으니까.
동시에 모두가 최소 검기를 발현하는 것이 가능한 실력자들이었다. 앞으로 성장시켜야 하는 만큼 나이가 많은 이들을 제하고 뽑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레인보다 나이가 많긴 했다. 사실 레인이 규격 외인 것이지 실제론 이들도 동년배 중에선 수위권에 드는 실력자들이었지만.
한쪽에 배치된 다과와 홍차를 즐기며 각자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들은, 문이 열리는 소음에 일제히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선 레인, 레이나, 셀린. 세 사람은 주변을 쭉 둘러보는가 싶더니,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상석으로 향했다.
전체적으로 어려 보이는 외견인지라 장내의 인물 중 반 정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사전에 전해 들은 ‘심사위원’이라곤 생각하기 힘들었기에.
반면 나머지 반 정도는 얼굴들이 살짝 풀어졌다. 남자고 여자고 가릴 것 없이. 그야말로 눈이 정화되는 기분마저 들 정도로 잘생기고 아름다운 일행이었다.
“반갑다. 오늘 너희의 심사를 맡을 레인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툭, 하고 레인이 내뱉었다. 설마 했던 발언에 장내에 웅성거리는 소음이 퍼져나갔다.
“조용.”
레인이 홍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말했다. 그러나 소음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은 레인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탁, 하고 두드렸다.
후우우우우웅.
그리고, 손바닥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무형의 파장.
“……!”
“윽.”
파장은 단숨에 실내 전체를 휩쓸었다. 딱히 어떠한 물리적인 힘이 담기진 않았으나, 이 자리에 모인 전원에게 단숨에 경각심을 심어줄 정도로 웅혼한 기운.
실내의 인물들은 모두가 오라를 다룰 수 있는 실력자. 방금 전의 그것이 말도 안 되는 기예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소음이 단번에 잦아들었다.
레인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그림자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휘둘러 테이블 앞쪽 바닥에 적당한 크기의 원을 그렸다.
그런 뒤 다시 자리로 되돌아가 앉은 레인이 말했다.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서 원 안쪽에 서.”
한 청년이 손을 들고 물었다.
“어떤 이유로 그런 지시를 내리시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간단한 테스트를 좀 진행하려고.”
“그 간단한 테스트라는 것은, ‘심사’과 관련이 있는 내용입니까?”
“관련이 있지. 통과하면 ‘합격’이니까.”
“……!”
좌중의 인물들이 단숨에 안색을 굳혔다.
간단한 테스트 하나로 곧바로 합격 여부를 결정한다니. 정말로 그럴 리가 있겠는가. 절대 말처럼 간단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뭐 해? 한 명씩 나와.”
“…….”
당연한 말이지만, 누구도 먼저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아직 ‘테스트’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먼저 나서는 것만큼 손해를 보는 일이 없었으니까.
그 기색을 읽은 레인이 팔꿈치를 테이블에 기댄 채 머리를 긁적였다. 무료한 얼굴로.
“딱히 나중에 나온다고 유리한 테스트는 아니니 아무나 나와. 시간 아까우니까.”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허리춤에 곡도를 찬 붉은 단발의 여성이었다.
“혹시 시작 전에 무슨 테스트인지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일단 패기 있게 나서긴 했으나 내심 불안했던 것인지 여인이 물어왔다. 레인이 대수롭지 않게 답변해 주었다.
“간단해. 그 원에서 벗어나지 않고 견디면 돼.”
원의 크기는 딱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였다. 발 디디기엔 충분할 정도의 크기였지만, 그렇게 넉넉한 크기도 아니었다.
“……?”
“시작하지.”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개를 기울이는 여인에게, 레인이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그렇게 말했다.
화악!
그리고, 레인의 몸에서부터 폭발적인 기세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