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라미엔느 카트넬(3)
“너희 가문에 방문해 달라고?”
“응.”
카트넬 가(家).
대륙에 이름 높은 검가(劍家) 중 하나.
굉장히 ‘특이한’ 검술을 주력 검술로 삼기로 유명하다. 그 가문의 검술은 경지가 높아질 때마다 활용하는 검의 개수가 늘어나는, 통상적인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
당장 라미엔느만 해도 세 자루의 장검을 사용한다. 가문의 최강자인 전대 가주의 경우엔 무려 7자루의 검을 활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무려 200년간 이어져 온 유서 깊은 가문이지만 현시대에는 상당히 저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그 원인은 가문의 소속 국가인 ‘메르타’.
현시대엔 이상할 정도로 국가 상층부가 썩어빠진 왕국이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메르타는 그중에서도 톱을 달리는 수준의 부패한 국가였다.
참으로 억울하게도, 카트넬 가는 그런 국가의 이미지 때문에 저평가 받고 있는 중이었다. 본디 ‘검가’라는 것은 국가의 권력 계층과는 또 다른, 어떻게 보면 하나의 독립된 세력임에도.
레인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보상을 주고 싶으면 그냥 라미엔느 본인이 전달해 주면 그만 아닌가. 굳이 방문 요청까지 해오는 목적을 알 수가 없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사실 라미엔느가 레인에게 가문 방문을 제안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확인 절차.
정황상 레인이 남동생의 은인임이 분명해 보이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황. 조금 더 확실한 검증이 필요했다. 가문에 있는 남동생과 대면시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 가문의 최강자인 전대 가주, 크레필만 카트넬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라미엔느의 남동생인 오베른은 레인에게서 큰 자극을 받아 지난 3년간 열심히 정진해왔다. 거기에 그가 내린 레인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높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대 가주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만일 기회가 된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중얼거리던 전대 가주의 모습을 라미엔느는 기억하고 있었다. 라미엔느가 방문 요청까지 한 것은 그런 연유였다.
일단은 그렇긴 하지만, 이유를 그대로 말하면 어떤 의미에선 실례다. 그래서 그녀는 적당히 에둘러서 답변했다.
“대충 선물을 건네는 정도로 보답을 마무리 짓기엔 사안이 조금 크니까.”
“그런가.”
레인은 잠시 고민했다. 초대를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본래라면 생각지도 않고 거절했을 터였다. 그는 귀찮을 것 같은 일은 피하고 보니까. 하지만…….
‘조만간 메르타 왕국에 갈 예정이 있단 말이지.’
마침 시기가 딱 일치했다.
바로 내년 여름이었다. 메르타 왕국에 대규모 수재(水災)가 일어나는 때가.
그때 메르타 왕국으로 가서 계획된 일을 행할 사람으로 낙점된 것이 바로 레인이었다. 그리고 ‘계획’에는, 메르타 왕실은 물론 카트넬 가와의 접촉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 애초에 레인은 카트넬 가와 접촉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방문할 거라면 초대라는 형식을 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은인이니 뭐니 하는 부분은 좀 귀찮을 듯싶지만.
‘그리고 나 자신도 검가에 관심이 있고.’
레이나에게 검가의 존재를 전해 들었을 때부터 한 번쯤은 찾아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최근엔 그 자신이 검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보니 더욱 그 생각이 강해졌다.
아무튼.
아무래도 계획대로 ‘사절’로서 방문하는 것보다는 ‘손님’으로 방문하는 게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라미엔느의 제안이 살짝 끌렸다.
“그 부분에 대해선 조금 나중에 답변해도 될까.”
“얼마든지.”
레인은 우선 이 문제는 로엘과 상의하기로 결심했다. 혼자서 멋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럼. 이만 일어나지.”
“그래.”
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바깥으로 향했다. 나가기 전에 문 바로 옆에 은닉되어 있었던 아티펙트를 수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라미엔느가 눈치채지 못하게 자연스럽게.
* * *
레인은 방을 나선 뒤 피식, 하고 웃었다.
이럴 거라면 그냥 진작 얼굴 마주 보고 이야기해 보았을 것을. 괜히 피해 다니느라 심력을 소모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면하면 여러모로 귀찮게 될 것 같아 피해왔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리 불편해할 일이 없었다. 오히려 상대 쪽에서 알아서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니 걱정거리가 덜어졌다.
“로엘.”
레인이 발걸음을 옮기며 귀걸이를 조작했다.
[무슨 일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로엘의 목소리. 레인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적당히 요약해서 설명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전해 듣던 로엘은, 이내 살짝 감탄사를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오. 상당히 괜찮은 상황이네. 당연히 받아들여야지.]
“그런가.”
[물론. 어차피 ‘설득’해야 할 이들인데 알고 보니 네가 그들과 좋은 인연이 있었다는 거잖아. 그 어드벤티지를 포기해야 할 이유가 없지.]
“그런데 이제 와서 묻는 것도 새삼스럽지만, 왜 굳이 내가 메르타 왕국에 가야 하는 거야.”
[참 일찍도 물어보는군. 정작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건성으로 대답하더니.]
“…….”
[말했듯, 내년 여름에 메르타 왕국에 들러 왕실과 검가에 차례차례 방문할 거야. 그때 네가 나와 동행해줘야 해.]
“그건 알겠는데, 왜 굳이 나를 데려가느냐고 묻는 거야.”
레인이 의아해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굳이 자신이 함께 움직일 필요성이 있느냐는 것.
메르타 왕국 방문엔 카트란도 동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동안 열심히 ‘그’와 소통도 해왔고 실력도 갈고닦은 만큼 이번 기회에 실력을 점검해 보기로 한 것이다.
사실 일방적으로 호의를 받고 있는 카트란이 제 스스로 부담감에 못 이겨 뭐라도 하고 싶다며 지원해 온 것이었다. 물론 로엘은 그것을 시원스레 승낙했고.
“카트란과 네가 함께 움직이는 정도면 전력이 부족할 리는 없을 텐데.”
[그렇긴 하지.]
로엘이 시원스레 답변했다. 그 빠른 답변에 레인의 의구심이 더욱 깊어졌다.
“그런데 왜?”
[간단해. 여러모로 생각해 봤는데.]
“……?”
[앞으로 네가 검가를 세울 장소는, 역시 메르타 왕국이 좋겠다고 판단했거든.]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레인이 특정 스터디 그룹에 소속되었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붙드는 학생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가 속한 그룹에 라미엔느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끼리끼리 뭉쳤다는 인식이 퍼진 것이다.
“넌 진짜 공부만 하는구나.”
그리고 레인은 완전히 공부에만 몰두했다. 신경 쓸 것도 없어졌겠다, 아주 작정하고 매달렸다.
“이번엔 1등 해야지.”
“승부욕 하난 알아줘야 한다니깐.”
르우벤이 레인을 빤히 응시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똑같이 배우고 똑같이 공부하고 있건만 성취도가 과장 보태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나고 있었다.
르우벤도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레인이 너무 열심이었다. 보는 사람이 다 질릴 정도니 말 다 했다.
“카트란 녀석도 성적이 최상위권이던데, 어쩐지 나만 학창 생활을 설렁설렁 보내는 듯한 기분이야. 뭔가 억울하네.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신경 쓰지 마. 네가 노력하고 있는 건 다들 아니까. 천마신공 수련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힘들어 보이던데.”
“아니, 그렇게 따지면 자기 수련에 제자 육성까지 하고 있는 넌 뭔데.”
“나야 전생의 경험이 있으니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너와는 사정이 다르지.”
사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르우벤은 다른 각성자들에 비해 ‘재능’이 부족했다. 똑같이 수련하고 공부하더라도 들여야 할 노력의 절대치가 훨씬 높았다.
그렇지만 레인은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기로 했다. 말했듯, 그도 발전했다. 그것이 실례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래서, 요즘 수련 경과는 어떤데.”
“나쁘지 않아. 네가 전수해준 무공이란 거, 진짜 대단하긴 하더라. 완전히 신천지야. 아무래도 마공이라 그런지 익히면서도 좀 불안 불안하긴 하다만.”
“뭐, 그건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렇고, 요즘 자괴감이 장난 아니게 들더라.”
“왜?”
“밀리아가 이번에 초일류의 영역에 발을 들였거든.”
“그랬지.”
본래 이쪽 세계의 권각법을 익혀 적당한 수준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던 밀리아는, 레인이 전수한 무공을 수련하면서 무섭도록 성장했다.
남만야수궁(南蠻野獸宮)의 무공은 그녀와 상성이 굉장히 좋았다. 그녀는 단숨에 무공에 익숙해지는가 싶더니 최근에 대뜸 초일류의 영역에 들어섰다.
당장 스승의 역할을 맡아 그녀를 가르친 레인이 보람을 느꼈을 정도였다. 어째서인지 ‘사자후(獅子吼)’를 가르쳤더니 ‘용의 포효(Dragon roar)’가 되어 튀어나와서 조금 놀라긴 했지만.
본래 그녀보다 약간 윗줄의 실력자였던 르우벤은(물론 아티펙트 활용이라는 부분을 제하고), 이번에 그녀에게 완벽하게 추월당했다. 자괴감이 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하긴 했다.
“…….”
말하는 르우벤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레인이 펜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분위기가 살짝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의 와중, 르우벤이 침중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밤일에서 완전히 밀리고 있어.”
“야 인마. 그게 문제였냐.”
레인이 저도 모르게 태클을 걸고 말았다. 괜히 걱정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럼 뭐가 문젠데?”
“…….”
“애초에 내가 재능 없는 거야 전생에서부터 통감해온 일인데. 뭘 새삼스레.”
르우벤은 레인의 생각보다 훨씬 쿨한 인물이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레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곤 다시 펜을 집어 들고 공부에 열중했다. 르우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네가 새롭게 영입했다던 그 현자는 어떻게 지내고 있냐.”
“아. 곤충과 벌레의 현자? 로엘이 마련해준 실험실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고 있어. 일지와 아티펙트를 연구하느라 바쁜가 봐.”
“흠.”
“그런데 그 이야기 들었어? 적룡대 대주가 얼마 안 있어서 벽을 넘을 것 같다던데.”
“얼마 안 있어서가 아니라 이미 넘어섰어. 정확히는 그저께. 아티펙트로 전해오더군.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다.”
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참고로 그때 레인은 플레이나의 자랑을 채 1분도 들어주지 않고 매몰차게 통신을 끊어버렸다.
“오오. 원래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검성의 등장인가. 그것도 자연스럽게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좋은데.”
“조만간 대련 한 번 해달라고 하더군. 주말에 시간 내서 한 번 찾아갈 생각이야.”
“어, 그래? 살살 해라. 이제 막 초인 된 사람 기 죽이지 말고.”
“아니. 철저하게 박살 낼 거다. 그 아줌마는 자존감이 너무 강해서 문제야. 그걸 어느 정도 눌러두는 편이 오히려 앞으로의 성장에 좀 더 도움이 될 테지.”
“본심은?”
“자랑하질 못해서 안달 난 모습이 재수 없어.”
“네가 그럼 그렇지.”
“이 아줌마 어지간히 자랑하고 싶었는지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이 온다고. 귀찮아.”
“야, 좀 받아줘라. 이 빡빡한 친구야.”
“싫어.”
르우벤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이런 놈이 애인은 대체 어떻게 만든 건지.
“그러고 보니, 이번 겨울 방학엔 좀 바쁘겠더라.”
“왜.”
“어제 로엘에게 연락 왔어. 말 좀 전해달라더라. 너하고 연락이 닿질 않는다고.”
플레이나가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걸어와서 아예 귀걸이의 통신 기능을 정지시켜둔 레인이었다. 연락을 받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
레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펜타트리움 아카데미의 겨울 방학은 한 달밖에 되지 않는다. 3개월에 달하는 여름방학과 비교하면 굉장히 짧은 기간.
그렇기에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각성자 일행도 어디 가지 않고 제 할 일이나 하며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연락이란 말인가.
그런 레인의 궁금증을 곧바로 알아채기라도 한 것인지, 르우벤이 이어서 말했다.
“전에 네가 부탁한 일을 조금 앞당겨서 처리했다더라. 네 직속 무력 조직을 창설하기 위한 준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