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벨리아 왕국(4) (160/249)

 160화. 벨리아 왕국(4)

“가져가거라.”

“감사합니다. 프라젠 라 델타하르그 남작님.”

“남작이라고 부르지 마라. 성도 붙이지 말고. 귀족의 삶은 오래전에 버렸다. 대체 그런 건 어떻게 알아내는 건지.”

 프라젠이 투덜거리며 로엘의 말을 받았다. 로엘이 빙긋 웃으며 거진 숯덩이가 다 된 드워프 노인을 전투팀에게 넘겼다.

“제국의 정보력은 우수합니다.”

“그래 보이는군. 수십 년 전에 모든 걸 버리고 속세를 떠난 노인네의 신상정보까지 알아내는 것을 보면 말이야.”

 로엘이 내심 픽 하고 웃었다. 실상 프라젠에 대한 정보는 르우벤으로부터 얻어낸 것에 불과하거늘. 아직 엠페러 아이즈의 국외 영향력은 그 정도로 완벽하지 못했다.

 그러나 로엘은 굳이 그것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프라젠이 제국을 높게 평가해주는 것이 좋았으니까.

“이 자를 심문한 결과는 나오는 대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국에는 ‘그분’이 있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 악명 높은 노친네 말인가.”

 프라젠이 혀를 찼다. 속세를 떠나 마법 수련을 위해 수십 년을 은거한 노인마저 알 정도라니. 대체 악명이 얼마나 높은 건지.

“제자분은 저희 쪽에서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곳으로 찾아가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로엘이 상단 지부의 위치가 그려진 약도를 내밀었다. 프라젠이 그것을 곧바로 받아 들고 확인했다.

“쯧. 너희에겐 빚을 졌군. 너희가 언급한 제국으로의 망명은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런데 그 가면은 벗을 수 없는 게냐? 상당히 껄끄럽군.”

“죄송합니다. 저는 제국의 음지에서 움직이는 자인지라.”

“쯧쯧. 이 습한 곳에서 가면 쓰고 움직이기도 고역일 텐데. 고생이 많군.”

“…….”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카르테나는 해양도시라는 칭호에 걸맞게 기후가 굉장히 습했다.

“그래서,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었지.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별건 아닙니다.”

 로엘이 검지를 세워 가르본을 가리켰다.

“이 드워프가 속한 조직이 세운, 벨리아 왕국에 내전을 일으키려는 계획. 그 계획을 저지할 예정입니다. 그 일에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대현자는 벨리아 왕국에 뿌리를 둔 프레퍼의 거점들을 통째로 쓸어버린다. 아끼는 제자를 잃고 광분해서. 원흉인 프레퍼의 간부를 족치고 그에게서 얻어낸 정보를 토대로.

 중간 과정이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지만, 현생에서도 결론적으론 똑같은 결과가 나타나게 될 터였다. 로엘이 계획한 대로.

 로엘은 빙긋, 하고 웃었다. 가면 아래에서 짓는 웃음이라 그것이 상대에겐 보이지도 않을 텐데도. 거의 습관의 영역에 이른 웃음이었다.

 * * *

“이, 이 미친!”

“사, 살려줘!”

“저게 대체 뭐야아아아!”

 프레퍼의 거점으로 쓰이고 있는 폐건물. 정확히는 그 지하 시설이 거점이었다.

 그곳에, 재앙이 몰아닥쳤다.

 쿠르르르르르르르!

 허공에 떠 있는, 그 질량만 해도 수백 톤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물의 구체. 떨어지면 백 퍼센트 홍수가 일어나게 되는 인공 재해.

 프레퍼의 조직원들은 그것을 올려다보며 경악에 찬 외침을 토해냈다.

“오, 온다!”

“점점 다가온다!”

 거대한 물 덩어리가 천천히 지상으로 하강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프레퍼의 조직원들이 너도나도 앞다퉈 건물을 벗어나려고 발악했다.

 서로 발이 걸려 넘어지고 그걸 또 밟고 지나가고. 그야말로 어디 재난 영화에서나 볼 법한 광경.

 재앙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장소에서 멀찍이 떨어진 언덕 위쪽. 그곳에 선 로엘이 중얼거렸다.

“팝콘, 팝콘이 필요해.”

 로엘은 아공간을 열어 보존계열 마법진이 새겨진 아티펙트를 꺼내 들었다. 소형 냉장고만 한 크기의 상자가 바닥에 쿵 하고 내려섰다.

 로엘이 그 안에서 아직도 따뜻함이 유지되고 있는 팝콘을 꺼내 들었다. 총 네 개를. 그것을 일행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자신도 먹기 시작했다.

“장관이네, 진짜.”

 팝콘을 와작와작 씹어먹으며 르우벤이 낄낄 웃었다.

 인공적으로 생성된 거대한 소용돌이에 건물이 반파되고 수십에 달하는 인간이 휩쓸리는 비현실적인 광경. 말 그대로 돈 주고도 못 볼 진귀한 광경이었다.

“다른 쪽은? 잘 되고 있대?”

“어. 속속들이 보고가 올라오고 있어. 무리 없이 정리하고 있는 모양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벨리아 왕국에 존재하는 프레퍼의 거점은 하나가 아니었다. 가르본을 심문한 결과 총 열 개나 되는 거점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중 눈앞의 폐건물처럼 인간의 발길이 뜸한 외지에 자리 잡은 곳들은 프라젠에게 처리를 부탁했다. 반대로 인간의 발길이 많이 닿는 장소에 자리 잡은 곳들엔 전투팀을 파견했다.

 그러나 그중 몇 군데에는 아직 손을 쓰지 않았다. 내전을 일으키려는 반란 세력과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어 어떤 고급 전력이 숨어있을지 알 수 없는 곳들이었다.

 벨리아 왕국 소속 검성이라도 튀어나오면 여러모로 곤란해지지 않겠는가.

“이제 남은 놈들은 결집했을 때 대현자를 앞세워 압박한다. 맞지?”

“그렇지. 저분은 대현자 중에서도 독보적인 경지에 이른 것 같으니, 단순히 무력시위만 해도 상당한 효과를 보지 않을까.”

 본래는 조금 더 복잡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로엘은 프라젠의 실력을 직접 목격한 뒤로 계획을 전폭적으로 수정했다. 보다 효율적이고 간단한 방식으로.

“그럼 난 슬슬 다시 밀림으로 갈게.”

“그래. 조만간 엠페러 아이즈에서 정보를 보내올 테니 잘 읽어보고. 그쪽에 가면 도우미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고마워.”

 대체로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르우벤은 다시 밀림으로 향하기로 했다. 벌레와 곤충의 현자를 찾아 영입하는 일도 빼먹을 수는 없으니.

 로엘과 플로라, 르우벤과 밀리아는 그로부터 조금 더 재앙의 광경을 구경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자 팝콘을 싹 비운 후였다.

 르우벤이 본 드래곤에 탑승해서 자리를 벗어나자, 로엘이 아공간에서 무면탈을 꺼내 들어 착용했다.

“이제 슬슬 나도 내 할 일을 해야지.”

 이제부터 로엘도 바쁘게 돌아다니며 일해야 했다. 제국의 어둠에 속한 자로서 해야 할 일을.

 * * *

 반란군이 결집했다.

 벨리아 왕국의 심장부, 수도 가르베니엄으로 진군하기 위해 수만의 군세가 결집했다.

 왕국 남부는 수도가 위치한 북부와 애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해양을 끼고 있어 거주민들의 생활양식부터 가치관까지 북부와는 판이하게 다른 탓. 양측은 걸핏하면 충돌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지역감정을 프레퍼가 부추겼다. 언령 마법사를 동원해 일부 하위 귀족들을 세뇌하고, 그렇게 세뇌한 귀족들을 발판삼아 남부의 유력 귀족들을 끌어들였다.

 프레퍼가 이번 일에 들인 공은 상당했다. 자금 원조, 인력 원조를 통해 의욕을 고취시키기도 했고, 내전 발발 조짐을 북부 유력자들에게 알리려는 스파이들을 차단하는 데에도 암중에서 힘을 쏟았다.

 그렇게 탄생한 반란군. 지상 병력보단 해상 병력이 많은 남부임에도 용케 북부군과 대적할 수 있는 수준의 대군이 결집했다.

 그렇게 모인 대병력이 기세등등하게 진군해 나아가고 있던 도중.

“멈춰라!”

 그들의 눈앞에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무슨.”

 반란군의 수장이 당황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상정치 못했기에.

“다시 한번 말하겠다! 멈춰라! 너희 역도들의 시도는 이미 좌절되었다!”

 앞길을 가로막은 병력의 지휘관은 그렇게 말하며 한 사람을 앞으로 끌어냈다. 화려한 의관을 걸친 통통한 청년이었다.

“억!”

“저, 전하!”

 반란군 수뇌부들이 일제히 경악에 찬 외침을 뱉어냈다.

 영지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안전하게 남부로 이송되어 오고 있던 3왕자가 왜 저곳에 있단 말인가! 이번 반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거늘!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했건만 정보가 새어 나갔구나! 제기랄!’

‘3왕자 전하가 넘어가 버렸으니 이래서야 최소한의 명분조차 갖출 수 없다.’

 상대측 병력이 이쪽에 비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냥 밀어붙일까 생각했던 수뇌부들의 표정이 일제히 일그러졌다. 무려 초인까지 붙여 이송시키고 있던 왕자를 대체 누가 탈취해 갔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런 그들의 시야에, 최소한의 저항 의지마저 박살 내는 광경이 들어왔다.

“억! 저, 저게 뭐야!”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궁!

 대지가 흔들렸다. 지진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떨림이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거대한 대지가 통째로 뒤집혀 올라가기 시작했다.

<흙무덤(Clay tomb)>.

 그것은, 언젠가 파르엘이 펠라키 산맥에서 몬스터의 시체를 감추는 용도로 사용한 적 있는 간단한 마법. 그러나 반란군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런 허접스러운 마법의 발현 결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야말로 거대한 언덕. 그 높이만 삼십여 미터에 달하는 대지의 융기가 일행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거대한 흙무덤 위에 사뿐히 내려앉아 일행을 지그시 굽어보는 노인이 하나.

“흐허허.”

 반란군의 수뇌부 중 하나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반란군에 속한 네 명의 초인 중 하나였다.

 벨리아 왕국에는 초월자가 없다. 초인은 열한 사람이나 있지만. 즉, 사내는 왕국에서 가장 강한 열한 명 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임에도, 눈앞의 광경에는 단숨에 전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초인이기에 더욱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언덕이 만들어지며 주위에 휘몰아쳤던 거대한 마력의 흐름. 무려 초인의 영역에 이른 자이기에 가지게 된 압도적인 감각이, 눈앞의 노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생히 전해 주었다.

‘방법이 없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다. 압도적인 무력적 우위라도 이쪽에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수를 내어 볼 텐데, 저 노인 하나 때문에 판도가 통째로 뒤바뀌고 말았다.

“투항하라! 지금 당장 투항하면 그나마 죄가 경감될 것이다!”

‘크윽!’

 상대측 지휘관의 목소리가 반란군 총사령관의 귀를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몇 년간 공들여 준비한 반란이 시작도 해 보기 전에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 * *

 그리 깔끔하지만은 않은 넓은 공동 안.

 공동의 중심에 세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무릎 꿇고 있는 사내의 앞쪽에 서서 사내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것을 조용히 구경하고 있었다.

 무릎 꿇은 사내는 딱 봐도 마법사임을 알 수 있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로브를 착용하고 지팡이를 손에 쥔 칙칙한 인상의 중년인.

 로브에 새겨진 문양이 상당히 화려했다. 격전 직후인지 너덜너덜하긴 했지만.

 그 앞에 서 있는 이는 무면탈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몸의 굴곡을 통해 여성임을 유추할 수는 있었다.

 가면인은 로브인의 이마에 총구를 겨눈 채 반대쪽 손으로 십자검 귀걸이에 손을 가져갔다. 무언가 조작하듯 귀걸이를 만지작거리길 잠시.

“3팀.”

 그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눈앞에 있는 로브인에게 말을 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주변에 다른 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고. 뜬금없는 혼잣말.

“3팀. 보고합니다. A구역 제압 완료. 적측 완전 궤멸 확인. 아군 피해 전무. 이상입니다.”

 대답은 귀걸이에서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로브인이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사실 로브인에게 들리지 않게 할 수 있었지만, 가면인이 일부로 음량을 조절한 것이었다.

“7팀.”

“7팀. 보고합니다. B구역 제압 완료. 적측 완전 궤멸 확인. 아군 피해 전무. 이상입니다.”

“11팀.”

“11팀. 보고합니다. C구역 교전 중. 아군 피해 전무. 5분 이내에 상황이 종료될 것이라 예상됩니다. 이상입니다.”

“13팀.”

“교전 중이야. 아군 피해는 없고. 3분 이내에 상황이 종료될 거다. 이상.”

 연속적인 부름. 그리고 바로바로 들려오는 답변. 그리고 답변에 섞여 들려오는 적들의 비명.

“그렇다네.”

 가면인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로브인에게 말했다.

로브인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러다 이내 수치심에 벌겋게 물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네년이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이곳 말고도 거점은 몇 군데나 더 존재한다! 이곳을 무너뜨린다 해도 네년에게 복수해줄 이들은 차고 넘친다는 말이다!]

 -라고, 그가 소리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

 가면인이 피식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더 보여줄 건 없는 모양이지? 그럼 잘 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방아쇠에 얹은 손가락에 힘을 주려고 했다.

“대체 우리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로브인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 발언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는 너희는 세상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렇게 학살을 저지르는 건데?”

 푸슉!

 건조한 소음과 함께 로브인의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 로브인은 발작하던 표정 그대로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가면인은 더 이상은 볼 일이 없다는 듯 곧바로 뒤돌아 공동을 나섰다.

“자, 이제 이걸로 벨리아 왕국 내에 존재하는 프레퍼의 거점은 대체로 다 정리했나.”

 반란군이 집결하기 위해 한군데로 모인 지금, 그들을 지원하던 프레퍼의 거점엔 별다른 위협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참에 깔끔하게 정리해 버렸다.

 가면 여인이 손에 들린 권총을 휙 하고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우웅-.

 갑작스레 허공에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무언가의 입구가 생성됐다. 금속 무구가 그 안으로 쏙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요즘 13팀 실적이 좋네요. 역시 초일류 전력이 다수 포함된 팀답다고 해야 할지.”

 뒤편에서 조용히 구경하고 있던 가면 사내가 가면 여인에게 말을 붙였다.

 13팀은 최근 새롭게 생겨난 팀이었다. ‘적룡대’라는 S등급 용병대원 네 사람에 가면인이 영입해 붙여준 상위 여성 정령사로 구성된.

 실력이 실력인 만큼 상당히 활약해 주고 있었다. 가면인은 조만간 그들에게 줄 선물이라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니들이 좋아하겠네.”

 그 생각을 전해 들은 가면 여인, 플로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자, 그럼.”

 가면 사내, 로엘이 한 차례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제 ‘죽은 자’들을 영입하러 가 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