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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벨리아 왕국(2) (158/249)

 158화. 벨리아 왕국(2)

“그렇단 말이지.”

 로엘이 눈을 빛냈다. 확실히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할 인재였다.

 각성자들은 다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대륙을 침공할 마족의 군대를 막아내는 것.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반드시 대륙의 모든 힘을 집결시킬 필요가 있었다. 인간의 세력을 결집시키는 것은 물론이요, 아인종들의 힘까지도 합쳐야 했다.

 그 목적에 빗대어 보았을 때, 저 엘프가 정말로 그렇게 영향력이 있는 자라면 직접 접촉해 볼 이유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로엘이 르우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끌어들일 건데? 너도 알겠지만 ‘대수림’의 엘프를 끌어들이는 건 일반적인 인간을 영입하는 것과는 달라. 내 힘으론 끌어들이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

 확실히 로엘은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군침을 뚝뚝 떨어뜨릴 법한 제안을 건네는 것이 가능한 ‘기반’을 지녔다.

 문제는 상대가 인간이 아닌 엘프라는 것. 로엘의 회유가 눈앞의 엘프에게마저 통용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무턱대고 접근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르우벤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씩 하고 웃어 보였다. 그가 곧바로 가면을 착용하고 음유시인 엘프를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로엘이 그를 예의주시하는 가운데, 르우벤이 엘프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엘븐하임의 2왕자, 가르데인 루바렌.”

 르우벤의 발언에 주위의 시선이 확 몰렸다. 엘프 사내가 놀란 얼굴로 르우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동요한 기색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무슨 말이신지? 제 이름은 블레단입니다.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마족의 대륙 침공이 머지않았다.”

“?!”

 주위 사람들이 미친놈 보는 얼굴로 르우벤을 돌아보았다. 그야 그럴 법했다. 뜬금없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인간을 제정신이라 보긴 힘들 테니.

 사실 그것은 로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르우벤이 대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낼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다 저도 모르게 ‘응?’하고 의아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상한 분이시군요. 죄송하지만 저는 사이비종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엘프 사내가 피식, 하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백히 르우벤을 비웃는 얼굴. 그러나 르우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라면 내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세계수’에 기록된 역사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왕족’인 너라면.”

 우뚝.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던 엘프 사내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르우벤을 돌아보았다.

“이제야 내 말에 관심을 보이는군.”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물론.”

 주위 사람들의 의문 어린 시선을 흘려넘기며, 두 사람이 로엘을 비롯한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엘은 아공간에서 두 개의 무면탈을 꺼내 하나는 자신이 착용하고 하나는 플로라에게 건넸다. 그가 재미있다는 듯 살짝 웃었다.

“애초에 엘프의 왕족들은 마족의 대륙 침공에 대해 어느 정도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가.”

 * * *

 일행은 사람이 없는 한적한 찻집의 구석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곧바로 르우벤이 주위에 방음 마법을 펼쳤다.

“이젠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 싶군. 대체 내 정체는 어떻게 알았고, 세계수와 마족에 관련한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거지?”

“그 부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 정말로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그것을 대비할 동료를 모으고 있고, 그쪽이 그 동료로 삼기에 적합한 인물로 선정되었다는 것. 그것뿐이다.”

 르우벤이 그렇게 말하며 가면을 벗었다. 신비감 조성은 이쯤이면 됐다고 여겼다. 그는 알테라 시에서가 아니라면 굳이 로엘처럼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할 이유가 없었다.

“무슨 말이지?”

“자세한 것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저희는 전 대륙을 아우르는 연합조직을 구축할 예정입니다. 인간들의 왕국뿐 아니라 모든 아인종의 나라들까지 아우르는.”

 로엘이 입을 열었다. 변조된 목소리가 거슬렸는지 엘프 사내, 가르데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가능한가?”

“일단 제 뒤에는 제국이, 정확히는 황제 폐하가 계신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폐하께서도 이 일에 대해 모두 알고 계십니다.”

“믿기 힘든 이야기로군.”

 가르데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한 증명은 못 되겠지만, 그래도 괜찮은 판단 재료가 될 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로엘은 아공간에서 이것저것을 꺼내 들며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시간을 들여 증명했다. 황제의 인장이 찍힌 위임장 등 신빙성을 높일법한 물건은 많았다.

“지금은 완전히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저 그 사실을 엘븐하임의 상층부에 알려만 주시면 족합니다. 미래에 저희가 ‘연합’을 구축하게 되었을 때 손을 내밀면 그것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않도록.”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지만…….”

 오히려 엘븐하임 측에서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없어 의아할 정도의 제안. 그것이 오히려 의심스러웠는지 엘프 사내의 얼굴에 경계의 기색이 담겼다.

“그리 경계하실 것 없다. 정말로 그 이상의 의도는 없으니. 그쪽이라면 알고 있겠지. 마족의 대군이 침공해 오게 되면, 설사 전 대륙의 힘을 결집시킨다고 해도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

“우리도 이런 시국에 한가롭게 엘븐하임을 대상으로 암계를 펼치거나 할 여유는 없다는 말을 하는 거다.”

 르우벤의 지원사격. 어떤 의미에선 레인이 연상될 정도로 무례한 태도였다. 그러나 오만한 경향이 있는 엘프의 왕족을 ‘대등한 위치에서’ 상대하기 위해선 이 정도가 딱 적당했다.

 아까보단 경계의 기색이 조금 옅어진 듯한 엘프 사내. 로엘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걸 받아주십시오.”

 그가 아공간에서 꺼내든 십자검 형태의 귀걸이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통신전용 아티펙트입니다. 고대의 유물이죠. 대륙 어디에 있든 같은 종류의 아티펙트를 소지한 자와의 통신을 가능하게 하는 물건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귀물이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도 되는 건가?”

“투자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로엘이 무면탈 아래서 빙긋, 하고 미소 지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기색은 전해진 것인지. 가르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귀걸이를 받아들었다.

 가르데인은 잠시 귀걸이를 살피더니,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누군가를 호출하듯.

 슈우욱.

“…….”

 그의 그림자로부터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엘프 여성이 솟아 올라왔다. 로엘은 단숨에 여인이 암흑정령을 다루는 정령사임을 알아보았다.

“맡아두거라.”

“예.”

 가르데인이 귀걸이를 건네자 여인이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그리곤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무슨 수작을 부려뒀을지 모르니 굳이 자기가 직접 소지하고 있지는 않겠다는 건가.’

 로엘이 내심 작게 웃었다. 솔직히 이쪽이 조금 수상한 인상인 것은 맞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굉장히 철두철미한 대응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긴 했다. 아니, 저 정도로 유능한 상대라야 끌어들이는 보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

 * * *

 멀어져 가는 가르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르우벤이 로엘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거겠지.”

“어. 지금은 확실한 ‘끈’이 닿은 정도면 충분해.”

 이 이상은 이후에 천천히 진행하면 된다. 두 소년은 그런 종류의 잡담을 나누며 등을 돌렸다.

“이제 다음으로는…….”

“그 일을 해치워야지.”

“네가 말해둔 대로 그 여자의 위치는 파악해 뒀어. 은신에 소질이 있는 녀석이 지금도 계속해서 따라붙는 중이야.”

 로엘이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무언가 보고를 전해 듣기라도 하는 듯.

“며칠 있지 않아서 반응이 올 거야. 그 발정 난 드워프 새끼는 위험하니까 조심하라고 전해 두고.”

“어.”

 그 뒤로 이틀 동안, 두 소년은 제대로 휴식을 취했다. 각자 연인과 도시 곳곳을 구경 다니고 극장에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하고 음식점 탐방도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그리고, 로엘에게로 연락이 전해져 왔다.

[나타났습니다. 전해 들은 외양과 일치하는 드워프 하나가 감시 대상인 여인의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곳이 어디죠?”

 미리 왕국에 파견시켜뒀던 2팀 팀장의 연락. 로엘이 위치를 묻자 곧바로 답변해왔다.

 현재 로엘 일행이 위치한 장소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금방 가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그가 저희가 도착하기 전에 행동을 개시하려 한다면 잠시만 시간을 벌어주십시오.”

[맡겨주십시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는 위험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자를 상대하는 요령은 레인 님을 통해 뼈에 새겨질 정도로 확실하게 배워뒀습니다.]

“하하.”

 로엘이 바닥을 기며 신음하던 전투팀 일동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가자.”

 로엘과 플로라, 르우벤과 밀리아가 곧바로 바닥을 박찼다. 빠르게 달려 나가는 와중, 로엘과 플로라는 무면탈을 착용했다.

 네 사람은 이내 늙은 드워프 하나가 수수한 옷차림의 아름다운 여인 하나를 덮치려 들고 있는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크흐. 지루해 미치겠군.”

 프레퍼의 간부, ‘가르본’은 평화로운 도시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불평을 내뱉었다. ‘계획’이 초읽기에 들어선 지금, 조용히 때를 기다려야 하게 된 그는 굉장히 심심했다.

“이런 때엔 계집이라도 끼고 놀면 시간이 금방 지나갈 텐데 말이지.”

 누가 악의 조직의 간부 아니랄까 봐 내뱉는 대사조차 악역스러웠다.

 참고로 그가 말하는 ‘계집을 끼고 논다’는 것은 ‘서로의 합의 하에 이뤄지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상대를 강압적으로 짓누르는 데에서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을 느끼는 드워프였다.

“으엇?!”

 그런 그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그의 취향에 한없이 가까운 아름다운 여인이. 대충 봐도 그와는 마흔 살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나는 젊은 여인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크흐흐. 좋잖아.”

 딱히 수행 인원이 있어 뵈지도 않는 게, 어딘가의 평민인 듯싶었다. 가르본이 입맛을 다시며 여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전에 자신에게 경고를 날리던 용인족 사내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지만, 그는 그것을 이내 머릿속에서 치워냈다. 그런 녀석의 경고 따위 알게 뭐란 말인가.

 어차피 상대는 해치워도 뒤탈 없는 평민. 저런 수수한 차림새를 한 여인이 귀족일 리는 없을 터였다. 더더욱 거칠 게 없었다.

“옳지.”

 마침 그녀가 인적이 없는 골목길로 접어들자 가르본은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신형을 뽑아 올려 순식간에 여인의 앞쪽에 턱 하고 내려섰다.

“누, 누구?”

 당연하면 당연하다고 할까. 여인은 가르본의 갑작스런 등장에 상당히 놀랐다. 그녀가 경계하는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크흐. 영광으로 알거라. 이 몸의 시중을 들 인간으로 네가 채택된 것이니.”

 가르본이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접근했다. 너무나 악당스러운 대사. 여인이 표정을 순식간에 굳혔다.

“음적이었나!”

<화염구(Fire ball)>.

 그녀의 손 위로 활활 타오르는 붉은 구체가 생성되었다. 설마 그녀가 마법사일 줄은 몰랐던 가르본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아니 왜 마법사가 저렇게 수수한 모습으로 돌아다녀?’

 건드려도 뒤탈이 없는 대상인 줄 알았더니만. 어쩌면 벌집을 쑤신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다시 용인족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쳇, 알 게 뭐야!’

 그러나 이제 와 물러나기엔 너무 아쉬웠다. 거기에 용인족 사내에 대한 반발심이 어우러졌다.

‘뒤탈이 생기지 않게 완벽하게 처리하면 그만이지!’

 가르본은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내디뎠다. 그것이 파멸의 전주곡임을 알지 못하고. 원래 역사에서든, 현 역사에서든.

“더 가까이 오면 공격하겠어요!”

“크흐. 해보라고.”

 위협을 무시하고 접근해 오는 가르본에게 여인이 화염구를 내던졌다. 그러자 가르본이 주먹을 휘둘러 그것을 맞받았다. 순간적으로 보조 마법들이 팔을 타고 휘감아 올라갔다.

 콰앙!

 화염구가 폭발했다. 그러나 가르본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가 멈추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여인에게 다가갔다.

‘기본 마법인 화염구 치고는 위력이 상당하군. 아니, 애초에 크기부터가 일반적인 화염구보다 좀 큰 것 같았는데.’

 가르본은 속으로 그런 여유로운 감상을 내뱉으며 한순간 신형을 가속시켰다. 여인이 대경해서 뾰족한 비명을 내질렀다.

“꺄악! 오지마!”

<바람 장벽(Wind wall)>.

 여인의 주위로 보이지 않는 막이 뒤덮였다. 그러나, 가르본은 그것을 손쉽게 부숴버렸다.

 콰드드드득.

 단 일격. 주먹질 한방에 방어막이 속절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여인의 입에서 질린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응? 이거, 방어막도 꽤나…….”

 가르본이 무언가 말을 하며 여인의 두 발짝 앞으로 다가섰을 때.

 콰르릉!

 뇌격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으헉! 뭐야!”

 그가 급히 신형을 뒤로 빼냈다.

 그리고 그가 여인에게서 멀어지자마자 한줄기 두꺼운 빛의 기둥이 비스듬하게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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