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펜타트리움 아카데미(4)
모든 시험이 마무리되고 며칠이 지났다.
“진짜 아슬아슬했네.”
수업 마무리 직전 담임이 한쪽에 걸어둔 큼지막한 벽보. 그곳에 적힌 시험 결과 및 전교 등수를 훑으며 르우벤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근데 넌 진짜 대단하다.”
“…….”
르우벤은 겨우 낙제를 면한 수준에서 그쳤다. 그의 노력이 그렇게 부족했던 건 아니었지만, 워낙 아카데미의 시험이 어려웠기 때문.
사실 지난번 유적 공략을 통해 습득한 아티펙트들을 다루는 수련에 매진하느라 시간이 부족했던 측면도 있었다. 무공 수련에도 시간을 할애했고.
반면 레인은 낙제를 면하는 건 고사하고 최상위권에 랭크될 정도로 굉장한 점수를 받았다. 그의 전교 등수는 무려 ‘2등’이었다. 그 또한 그 자신의 스케줄 소화에 시간을 상당히 사용했는데도.
“하여간에 머리 좋은 놈들은.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니까. 무예에 대한 재능도 굉장한 수준인데 공부하는 머리도 그렇게 좋다니.”
“재능?”
“그래. 재능.”
“글쎄. 내게 이쪽 재능이 있다는 말은 동의하기가 조금 힘들군.”
“야, 전교 2등이 그런 말 하기냐. 네가 엄청 노력했다는 건 나도 아는데, 그래도 재능이 어느 정도 받쳐준 것도 사실이잖냐.”
“아마 로엘이었다면 내가 지난 4개월 동안 공부해서 습득한 지식 따윈 일주일 내로 전부 마스터하지 않았을까.”
“갑자기 네가 재능이 없다는 말에 설득력이 부여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레인은 가늘게 뜬 눈으로 벽보를 응시하며 답했다. 그런데 어조에 살짝 가시가 돋쳐 있었다.
“야, 너 어쩐지 기분이 좀 나빠 보인다?”
“기분 탓이겠지.”
“아니,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너 혹시 그런 거냐? 1등을 못 해서 분한 거야?”
“…….”
“와, 이 녀석, 진짜 제대로 모범생 마인드에 심취했네.”
르우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레인이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곁눈질했다.
르우벤의 말마따나 레인은 상당히 분해하고 있었다. 그는 공부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승부욕이 굉장했다.
“그런데 우리 반 최고 인기인께선 공부도 잘하네? 전교 1등이라니.”
르우벤이 벽보 최상단부에 적힌 이름을 올려다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레인이 못마땅한 얼굴 그대로 르우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한 사람의 이름이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약간 크게 적혀 있었다.
[라미엔느 카트넬]
“안 그래도 높은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겠네. 이 녀석도 앞으로 상당히 힘들겠어.”
“그런가.”
“뭘 너는 상관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말하냐. 너도 마찬가지로 앞으로 상당히 귀찮아지게 될 텐데.”
“뭐?”
“몰랐어? 2학기 때부터는 너도나도 쓸 만한 스터디그룹을 만들거나 이미 만들어진 그룹에 가입하려 든다던데.”
“대체 뭐 하러.”
“펜타트리움 아카데미에 그런 종류의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거든. 인원수를 채우면 특정 교사를 고문으로 신청할 수도 있고.”
“…….”
“그즈음엔 혼자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녀석들이 많아진다고 하니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당연히 상관있지. 너 무려 전교 2등이잖아. 자신이 속한 스터디그룹에 널 끌어들이고 싶은 녀석들은 차고 넘칠걸?”
“귀찮게 됐군.”
레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전형적으로 혼자 공부하는 것을 선호하는 부류였다.
아무리 아카데미에서 스터디그룹 형성을 장려하고 지원한다고 해도 그 시스템을 이용할 생각 따위 눈곱만큼도 없었다.
르우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보통 그런 식으로 타인에게 관심받는 것에 우월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많아도 그저 귀찮아하는 인물은 드물었다.
‘이 녀석 답네.’
그가 레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시험도 다 끝났는데, 이제 축제 구경이나 가자. 기사학부는 진작에 필기, 실기 모두 끝나고 오늘부터 무투대회를 연다는데. 가서 카트란 응원이나 해 줘야지.”
시험이 끝난 뒤엔 축제가 있었다. 일 년에 두 차례 열리는 아카데미 전통 축제가.
그리고 매번 그 축제의 스타트를 끊는 것이 기사학부 소속 학생 전원이 강제 참가해야 하는 대회, 즉 ‘무투대회’였다. 64강부터는 그것을 관전하는 관객만도 수천이 넘어가는 대규모 이벤트.
여기에 걸린 가산점이 상당했기에, 기사학부 학생들 입장에선 최선을 다해 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트란이 이 대회의 우승을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타 학부, 혹은 외부 참가자도 받았다. 상금, 상품, 명예를 노리고 따로 대회에 참가하는 이들도 상당한 숫자였다. 물론 연령층은 16세에서 18세 사이로 제한했지만.
“가자니깐.”
어느새 다시 벽보를 응시하고 있는 레인의 팔을 르우벤이 잡아끌었다. 레인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 * *
펜타트리움 아카데미의 부지는 굉장히 광대하다. 그리고 그 부지 내에는 온갖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시설 중 ‘명물’이라 불리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콜로세움형 초대형 연무장이다. 물론 이 연무장의 설립 목적은 무투대회에 사용하기 위해서이고.
현재 그 연무장에선 연속해서 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저 예선전에 불과하건만, 그 시합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관객이 수백에 달했다.
그 콜로세움의 한편. 적당한 좌석에 앉아 예선전을 치르는 기사학부 학생들을 지켜보는 두 소년.
르우벤은 적당히 간식거리를 섭취하며 나름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었다. 반면 레인은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지루해.”
“왜, 나름 박진감 있는데.”
“카트란은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글쎄? 오늘 안에 나오긴 할 테지.”
“그거 몇 분 보겠다고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좀 즐겨라 좀. 이 빡빡한 친구야.”
르우벤의 타박에도 레인의 표정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재미없는 것은 흑아 또한 마찬가지인지, 길게 하품을 내뱉더니 레인의 어깨 위에 올라 몸을 웅크렸다.
“그러고 보니 흑아가 상당히 인기 있더라.”
“?”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나 귀여운 고양이인데. 흑아에게 관심은 있는데 네가 워낙 무뚝뚝한 분위기라 접근하질 못한 녀석들이 한둘이 아닐걸?”
“그런가.”
레인이 손가락으로 흑아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흑아가 고롱고롱거리며 울었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울음소리까지 재현해낸 흑아의 능력이 놀라웠다.
두 사람이 잡담을 나누는 동안 경기 하나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다음 선수들이 단상 위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오. 저기 좀 봐.”
“?”
어떤 인물의 등장에 연무장이 술렁였다. 레인이 르우벤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그도 익히 잘 아는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라미엔느 카트넬.”
“시험 직후에 무투대회까지 참가했구만. 진짜 성실하네.”
“저 경기는 볼 것도 없겠군.”
레인의 말마따나 경기는 압도적인 양상을 띠었다. 라미엔느 카트넬은 허리춤에 매인 네 종류의 검을 수시로 바꿔 들며 상대를 몰아쳤다.
거의 압살당하다시피 한 상대 학생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단상을 내려갔다.
“저걸 카트란이 이길 수 있으려나.”
“글쎄. 저 녀석과 맞붙기 전에 상급생들과도 수없이 맞붙어야 할 텐데. 그걸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두 소년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 다음 참가자가 단상에 올랐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카트란이었다.
“상대는 상급생이군. 그것도 3년 차.”
“이기겠지? 카트란 녀석, 굉장히 주목받는 기대주라던데.”
“모르지. 상대의 실력이 상급생 중에서도 수위권에 드는 수준이라면 질지도. 물론 저 녀석이 ‘그 인간’을 불러낸다면 누구한테 지겠냐마는.”
두 사람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시합이 시작되었다. 선공은 상급생 쪽이 먼저 취했다.
“오, 팽팽하네.”
“아니, 카트란 쪽이 위야.”
“그래? 내 눈에는 비슷한 실력으로 보이는데.”
상급생과 카트란은 시작부터 격렬하게 맞붙었다.
평범하게 장검 한 자루를 든 카트란과는 다르게 상급생 쪽은 양손에 시미터를 들고 있었다. 빠른 템포로 공격해오는 상급생을 카트란이 안정된 자세로 막아내는 형국이었다.
“카트란 쪽의 중심이 더 안정적이야. 여력도 좀 더 남겨둔 것 같고,”
카카카카카카카카캉!
연속적인 공격.
오라가 충만하게 실린 시미터 두 자루가 쉴 새 없이 반원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카트란이 한 자루의 장검만으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모든 공격을 걷어냈다.
언뜻 보기엔 호각지세였으나 실상은 조금 달랐다. 상급생 쪽이 약간 초조해 보이는 것에 비해 카트란의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차차 상황이 카트란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급생 측의 체력이 바닥을 보이게 된 것이다.
상급생의 검술은 상당한 수준의 정교함과 빠른 속도를 자랑했으나, 그만큼의 체력 소모를 요구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런 종류의 검술로 카트란과 겨우 ‘호각’이었던 시점에서 그의 패배는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이내 상대를 완전히 제압한 카트란. 심판이 그의 승리를 선언했다. 담담하게 납검하고 단상 위에서 내려가는 카트란을 대전 상대인 상급생이 분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이겼네. 저 상급생도 잘 싸웠는데 안 됐구만.”
르우벤이 카트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카트란이 그것을 알아보고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
“왜 카트란에겐 무공을 전수해 주지 않는 거야?”
르우벤이 저 멀리 대기실로 모습을 감추는 카트란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물었다.
“재능이 없어서? 그게 아니면 역시 아직은 저 녀석을 신용할 수가 없어서?”
“둘 다 아니야.”
레인의 답변은 간결했다. 그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카트란은 확실히 재능이 있어. 아마 넘칠 정도로. 그렇지만, 그 재능은 중원의 무공에 맞는 종류의 것이 아니야. 이쪽 세계의 무술에 걸맞지.”
“그래?”
르우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했다는 듯. 레인은 이런 일에 허언이나 거짓을 내뱉을 성격이 아니었다.
“나 먼저 일어난다.”
“왜? 더 구경 안 해?”
“카트란 녀석의 경기까진 다 봤잖아.”
“쯧쯧. 축제를 즐길 줄 모르는 녀석 같으니. 아, 가바렌!”
르우벤이 한 차례 혀를 차며 레인을 배웅했다. 그러더니 막 콜로세움에 들어서 주위를 둘러보는 반 친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 * *
레인은 교정을 가로질러 곧바로 숙소 쪽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귀가해서 제자들의 수련이나 봐줄 생각이었다.
참고로 레인이 머무는 숙소는 아카데미 부지 내 기숙사가 아닌 그 바깥에 로엘이 구해둔 고급 주택이었다.
로엘이 개발한 마력제품이 모두 구비되어 있어 웬만한 귀족들마저 부러워할 저택. 대륙 스케일의 부자를 친구로 둔 덕분에 온갖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
한참 걸음을 옮기던 레인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멀찍이서 이쪽을 따라붙는 기척을 느낀 탓이었다.
‘또 그 여잔가.’
레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면식도 없는 자신의 뒤를 왜 자꾸 밟는단 말인가.
그녀처럼 타인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타입과 얽히면 되도록 조용히 학창 시절을 보내려는 계획이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레인은 곧바로 바닥을 박찼다.
다행히 주위에 보는 눈은 없었다. 레인은 가볍게 건물과 건물 사이를 타 넘으며 기척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
그런 와중, 그의 감각에 이번엔 다른 기척이 걸려들었다. 시선을 돌려 그쪽을 바라보니, 일단의 무리가 대치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딱 보니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는 모양새였다. 부상을 입은 채 쓰러진 학생 하나와 그 학생을 뒤에 감춘 채 검을 뽑아 든 소년. 그리고 그런 소년을 둘러싼 일곱 남녀.
보아하니 기사 학부 내 무투파와 기사파의 충돌인 듯싶었다. 레인의 움직임이 멎었다.
평상시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터였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교사가 등장해 상황을 정리시킬 테니까.
“저 녀석, 왜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거야.”
문제는 그중에 아는 얼굴이 보인다는 점. 그리고 그 인물이 포위된 채 부상자를 보호하고 있는 소년이라는 점이었다.
“카트란.”
레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