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펜타트리움 아카데미(3)
펜타트리움 아카데미 교장의 엄숙한 연설이 넓은 공간 내부를 크게 울렸다.
이곳은 세 각성자가 입학한 펜타트리움 아카데미의 대강당. 수천에 달하는 신입생들이 눈을 빛내며 단상 위에 선 교장의 연설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 중간 즈음에 섞여 금방이라도 잠들 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는 두 소년. 그중 한 소년이 하품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교장이 대머리네.”
“그러게.”
교장의 연설은 길었다. 길이도 너무 길었다. 긴 것도 문제인데 심각하게 지루했다.
두 소년은 결국 밀려오는 수마(睡魔)를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왼쪽 옆자리에 앉은 카트란이 픽, 하고 쓴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저희 펜타트리움 아카데미에 잘 오셨습니다. 환영합니다, 신입생 여러분!”
“와아아아아아아!”
교장의 연설은 그로부터 20분이 더 지나서야 끝을 맺었다.
“스읍.”
함성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르우벤이 입가의 침을 닦고 옆자리의 레인을 흔들어 깨웠다.
* * *
[펜타트리움 아카데미.]
[총학생 수 7500에 달하는 제국 최고의 교육기관.]
[3년제. 성년에 이르는 16살에 입학해 18살에 졸업하는 제도.]
[1년 중 방학은 총 4개월. 여름에 3개월, 겨울에 1개월.]
[드넓은 부지에 교육을 위한 모든 시설이 총망라되어 있기로 유명함. 대도서관, 십여 개에 달하는 연무장, 마탑의 그것에 비견되는 실험실 등등.]
[학생간 신분의 차등은 두지 않음. 황제 폐하의 지엄한 명령에 따라 학생 신분일 동안엔 모두에게 평등을 부여.]
[막강한 교사진 분포. 특히 교장은 제국에 이름 높은 검성이면서 클라이럼 마탑의 부탑주이기도 함.]
[학생, 교사 중에는 이종족 출신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음. 그중 대다수는 제국 거주민이지만, 간혹 대수림이나 대밀림 같은 이종족들의 영역에서부터 유학 온 이들도 존재.]
[그 외에…….]
레인은 아카데미에 대한 여러 정보가 담긴 팸플릿을 적당히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대충 자신이 입학한 아카데미가 굉장히 이름이 높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알 수 있었다.
그는 현재 르우벤과 함께 방대한 넓이의 캠퍼스를 가로질러 이동하는 중이었다.
목적지는 캠퍼스 내 중앙광장. 정확히는 그곳에 세워진 3층짜리 석조건물이었다. 팸플릿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그곳에 ‘교장실’이 있을 터였다.
“왔군.”
건물 앞에 다다르자 흰색 바탕에 아무런 무늬도 새겨지지 않은 무면탈을 착용한 사내가 두 사람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 옆에 카트란이 서 있었다.
“수고가 많네. 로엘.”
“이름은 부르지 마. 이쪽 일을 하는 동안에 내 정체는 베일에 싸여 있어야 하니까.”
“그래.”
“들어가자.”
무면탈에 정장을 갖춰 입은 사내, 로엘이 말과 함께 건물 안쪽을 가리켰다.
그의 목소리는 기계음을 연상시킬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사실 그가 착용한 무면탈은 이전에 르우벤에게 빌려 사용했던 그 물건이었다. 그 가면의 외양만 손을 본 것이다.
일행이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인족 여성이 일행을 3층 집무실로 안내해 주었다.
외눈 안경을 쓰고 정장을 갖춰 입은 이 여성은 앞으로 레인과 르우벤을 가르칠 교사 중 하나였다. 이동하는 동안 가벼운 인사가 오갔다.
“교장 선생님. 지시하신 대로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수인족 교사가 몇 차례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화답이 들려오자 그녀는 지체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업무용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교장이 일어나서 일행을 반겼다.
“만나서 반갑네. 누가 폐하의 그림자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겠군.”
그가 너스레를 떨며 악수를 청했다. 로엘이 대표로 그와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후작님. 케르티아 남작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성 말고 이름은 물어도 가르쳐 주지 않겠지?”
“…….”
로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교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후후, 하고 웃었다.
“그쪽 친구들은 이번 임무를 도와줄 조력자들인가?”
“그렇습니다.”
“두 사람 모두 본 적 없는 이들이군. 제국의 인재에 관한 정보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상세히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말이지.”
“…….”
“타국의 인재인가?”
“그렇습니다.”
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숨길 생각도 없었다. 황제의 ‘그림자’인 케르티아 남작의 ‘인맥’이라고 설명하고 넘어가면 될 문제였다.
교장 또한 그 문제를 굳이 깊숙이 파고들 생각은 없었는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앞으로 내게 도움을 구해야 하거나 정보를 전달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쪽의 세실리아에게 부탁하면 될 것이네. 그녀는 내 비서면서 동시에 이 아카데미의 교사니까.”
“알겠습니다. 후작님.”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세실리아 님.”
로엘은 교장, 그리고 수인족 여교사와 차례대로 인사를 나눴다.
나머지 각성자들은 멀뚱히 그것을 구경하기만 했다. 애초에 그들은 앞으로 ‘협력자가 될 인물’에게 안면이나 트기 위해 찾아온 것일 뿐, 뭔가 대단한 일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레인과 르우벤이 잠시 변장을 풀고 본 모습을 드러내 보인 것을 마지막으로, 각성자 일행과 교장 사이의 면담은 마무리되었다.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
그로부터 며칠 뒤. 첫 수업 날.
레인은 총 12개의 학급 중 1반으로 배정되었다. 그것은 르우벤과 이전에 소개받은 세실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부러 모아뒀군.’
레인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담임인 세실리아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20대 중반의 아리따운 여성이 담임이라는 사실에 학급의 남학생들이 들뜬 모습을 보였다.
이후로 학생들의 자기소개 시간이 이어졌다. 의례적인 행사였다. 앞자리에 앉은 순서대로 학생들이 일어나 자신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시작했다.
누군가는 임팩트 있는 소개를, 누군가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제공하는 소개를. 어떤 이는 자신감 넘치는 소개를, 또 어떤 이는 심하게 위축된 소개를.
참고로 교실은 반원형이고 뒷좌석으로 갈수록 높은 곳에 위치하는 형태였다. 레인과 르우벤의 경우엔 비교적 뒤쪽에 앉아 있었기에 한참이 지나서야 차례가 돌아오게 되었다.
“레인입니다. 토우런트 왕국 출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레인의 자기소개는 손에 꼽힐 정도로 간결했다. 반면 르우벤의 자기소개는-
“르우벤이라고 합니다. 노러츠 왕국 출신입니다. 그리고 장래 희망은 용병왕입니다!”
-동급생들의 폭소를 자아낼 정도로 황당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행정학부 학생이 용병왕을 꿈꾸다니, 이렇게 이질적인 자기소개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어난 것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물색 머리칼 소녀였다.
“라미엔느 카트넬입니다. 메르타 왕국 출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자기소개 또한 레인만큼이나 간결했다. 그러나 주위 학생들의 반응은 레인에게 보였던 반응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저 사람인가!”
“명문 검가(劍家)인 카트넬 가의 정식 후계자!”
“왜 기사학부에 입학하지 않은 거지?”
“바보야. 검가의 후계자가 뭐가 아쉬워서 굳이 아카데미에서 검술 지도를 받으려 하겠냐. 검술 경지가 웬만한 조교들조차 넘어설 수준일 텐데.”
“그것도 그런가.”
교실이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라미엔느 카트넬은 토우런트 왕국과 국경을 마주한 메르타 왕국 소속 명문 검가의 정식 후계자. 입학과 동시에 수많은 이목을 끌어모은 유명인사 중 하나였다.
“그건 그렇고, 예쁘다.”
“그러게.”
여러모로 관심을 끌어모으는 여인이었다. 레인은 그녀를 힐끗 곁눈질하며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얽히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타입이군. 근처에 접근도 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기분 탓일까. 그녀가 힐끔힐끔 이쪽을 돌아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아니, 기분 탓이 아니었다. 레인의 ‘감각’은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았다. 그가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레인은 교실과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에 힘썼다. 전형적으로 재미없는 모범생의 모습을 한 그에게 접근해 오는 학우는 그다지 없었다.
다만 어떤 이유에선지 라미엔느 카트넬이 그의 뒤를 밟곤 했다. 레인은 그때마다 기감으로 파악하고 미리 자리를 벗어나 귀찮은 상황을 모면했다.
르우벤은 레인에 비해 상당히 자유분방한 학창 시절을 구가했다. 한 명의 친구도 사귀지 못한 레인과는 달리 그의 주변엔 항상 친구들이 넘쳐났다.
아무래도 첫날의 임펙트 있는 자기소개의 덕이 컸다. 그렇다고 놀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고, 적당한 스터디 그룹에 속해 나름대로 학업에 힘썼다.
카트란은 기사학부에서 순조롭게 자신의 실력을 키워갔다. 그의 자질은 상당히 쓸 만한 수준이라서, 조교들에게 여러 차례 칭찬을 듣곤 했다.
졸업할 즈음엔 초일류의 경지에 발을 들일지도 모르는 유망주로 손꼽히는 인물이라는 평가였다. 특유의 진중한 성격까지 맞물려 인기도 상당히 많았다.
마지막으로 로엘의 경우엔 사업 관련, 그리고 ‘그쪽’ 관련 일에 바빠 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 그래도 사업 쪽은 대충 정리가 되어가는 추세였다.
그런 나날의 와중, 드디어 1학기의 종반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매 학기를 마무리할 때마다 치러야 하는 시험 날짜 또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거 너무 어렵지 않냐.”
“불평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공부해.”
르우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불평을 내뱉었으나 레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몰입해서 필기 내용을 암기하는 데만 집중하는 모습.
“너 모범생 코스프레 좀 하더니 진짜 모범생 다 됐네.”
“필요한 일이니까.”
레인이 이렇게까지 학업에 열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사실 ‘로카인 파르테인과의 대련’이었다. 그가 보여준 압도적인 경지에 경각심이 물밀듯 밀려온 것이다.
로카인 파르테인이 이룬 경지는 정말로 굉장했다. 전생의, 그러니까 무력적인 측면이 절정기를 맞이했던 시기의 레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꽤 위협을 느꼈을 거라 생각될 정도로.
그런데 그런 로카인이 속해 있는 제국이 원래 역사에서 마족의 군대에 무너졌다고 한다. 심지어 그가 가진 힘의 ‘유용성’은 레인의 그것과는 비교되질 않는 수준임에도.
막연히 ‘위험하니 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마족의 위협이 그제서야 확실하게 피부로 느껴져 왔다. 단순히 그 본인의 무력만 증진 시키는 것으로는 턱도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아 버렸다.
그렇기에, 지금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 둘 생각이었다. 적어도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정작 그 로카인이 마족의 대륙 침공 때엔 수명이 다해 무덤 속에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레인이었다.
“적어도 낙제점은 받지 마라. 로엘 녀석이 벼르고 있더라고. 낙제 따윌 했다간 브라질리언 왁싱을 시켜버리겠다던가.”
레인이 눈 아래가 거뭇거뭇해진 것으로도 모자라 스트레스로 살짝 야위기까지 한 로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끔찍하네.”
르우벤은 이전에 로엘에게서 들은 ‘브라질리언 왁싱’의 의미를 상기하며 한 차례 몸을 떨었다. 그야말로 끔찍한 형벌이었다.
더 끔찍한 사실은, 펜타트리움 아카데미의 시험 난이도가 높기로 정평이 나 있다는 것. 쉽게 말해 그 형별을 받게 될 가능성이 절대 낮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첫 시험은 3년 동안 치를 모든 시험을 통틀어 가장 난이도가 높다고 하니.”
정말로 르우벤의 말처럼 가장 높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상은 학생들이 그렇게 체감하는 것일 뿐.
사실, 1년 차 1학기는 학생들이 아카데미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배려해주는 시간이라고 봐도 좋았다.
1학기를 마친 뒤엔 다음 학기까지 3개월이라는 시간이 방학으로 주어진다. 말하자면 1년 차 1학기는 다음 학기, 그리고 그에 곧바로 이어지는 다다음 학기와 뚝 떨어져 있는 학기라는 뜻이었다.
실상 본격적으로 빡빡해지는 것은 2학기부터. 1년 차 1학기는 그 뒤에 이어지게 되는 학기들에 비하면 날로 먹는 시기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그렇게나 느슨하게 풀어둔 1학기임에도, 시험 문제의 난이도는 2학기의 그것에 못지않게 높게 책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학생들이 체감하는 난이도는 그야말로 아득한 수준. 그렇게 매년 첫 시험에서 낙제점을 받는 학생이 무려 전체의 3할에 이른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것은 사실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1학년 1학기에 치러지는 시험은 펜타트리움 아카데미의 전통과도 같은, 학생들에게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한 일종의 ‘신고식’.
그 사실 자체를 모르는 학생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신고식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렇게 첫 시험에서 낙제한 학생들은 방학 동안 휴식은커녕 내내 보충학습에 시달려야 했다. 추가적인 학비를 지급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심지어 그런 뒤에 2차 시험까지 통과해야 했고.
그로 인해 맹렬한 위기감에 빠진 학생들을 다음 학기부터 아카데미 측이 순조롭게 바짝 조이는 식이었다. 어찌 보면 악랄하다고도 할 수 있는 제도였다.
이야기를 돌려서.
르우벤은 이번 방학에 로엘과 함께 움직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낙제점을 받아 그게 불가능해지기라도 했다간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터였다.
로엘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그리 관대한 성격이 아니었다. 브라질리언 왁싱 따윈 사소한 일인지도 몰랐다.
최근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는 로엘인 만큼 더더욱.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해.”
“…….”
결국 르우벤이 신음을 내뱉으며 서적에 머리를 파묻었다. 레인이 그를 한 차례 곁눈질했다가 이내 시선을 거뒀다.
* * *
야속하게도, 시간은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이 완벽한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학기말 시험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