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영웅과 악마의 유적(5)
시간이 늦었기에 제2 유적 공략은 다음 날로 미루기로 했다. 일행은 공동에 캠핑을 차리고 휴식을 취했다. 아공간을 지닌 로엘 덕분에 풍족한 노숙을 할 수 있었다.
로엘이 뜨끈한 수프를 한 숟갈 떠먹으며 물었다.
“전생에는 왜 이 이상으로는 안 들어간 거야?”
“간판에 쓰인 글귀 때문에.”
“그거 보고 안 들어갔다고?”
로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간판 쪽으로 돌아갔다. 잡다한 내용은 집어치우고 내용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이러했다.
[이 너머로는 흑마검사 게르반의 유산이 잠들어 있다.]
[게르반의 유산은 위험하다. 대륙에 그것이 다시 풀려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만일 그대가 대륙의 안위를 염려하는 자라면 나의 유산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는 것을 권한다.]
작성자는 말할 것도 없이 대영웅 하르넴. 게르반의 유산이 세상에 풀려나오는 것을 경계하는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난 글귀였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고작 저런 글귀 하나 때문에 공략을 중단했다고?”
“우리 단장이 조금 그런 면이 있었지. 정의감이 넘친다고 해야 하나. 굳이 게르반의 유산까지 세상에 풀려나게 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 같더라고.
“용병단원들의 반대는 없었고?”
“딱히. 어차피 그 이상 공략해 봐야 대부분을 왕국에 빼앗기게 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제1 유적을 공략한 것만으로도 용병단의 입지는 충분히 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단순히 유물을 빼앗긴다는 측면뿐 아니라 용병단에 큰 피해가 예상된다는 측면도 있었다. 당시의 용병단에게 제2 유적 공략은 여러모로 수지가 맞질 않는 장사였던 것이다.
“그런 거였군.”
로엘이 침음을 흘렸다.
앞으로는 르우벤의 경험에 기대 유적을 돌파할 수 없다. 그리고 르우벤의 경험이 바탕이 되지 않는 유적 탐험은 정말로 목숨을 걸어야 했다. 살짝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반면 레인은 태평했다.
“그래. 얼마 안 있어서 가능할 것 같다고?”
그는 그 자신의 그림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측은한 마음을 품을지도 모를 모습. 실상은 그림자 속에 깃든 정령과 의사소통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조금 궁상맞아 보이는 광경인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저는 먼저 수면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밀리아는 성실했다.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내일을 대비하기 위해 잠을 청했다. 세 각성자가 무슨 캠프라도 온 것처럼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 * *
다음 날.
네 사람은 아침 일찍부터 제2 유적 공략을 나섰다. 새롭게 포지션을 정비해서.
르우벤이 언제든 비상시를 대비할 수 있도록 중위를 맡았다. 밀리아와 로엘이 후위를, 레인이 전위를 맡았다.
통로를 한참 나아가자 빛이 사라졌다.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히히히히히.]
[인간이다! 인간이다! 용인족도 있어!]
근원지를 알 수 없는 날카로운 귀곡성이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희끄무레한, 실체가 없는 것들이 언뜻언뜻 시야에 비쳤다.
<광구(光球 - Light Ball)>.
밀리아가 마법으로 빛의 구체를 구현시켰다. 시야가 상당히 확보되었다. 일행 중 어둠 따위에 행동에 제약을 받을 인물은 없긴 했지만, 그래도 시야는 확보해두는 편이 좋았다.
[빛이다!]
[히히히! 도망가자!]
“누가 악마의 유적 아니랄까 봐 시작점부터 으스스하기 그지없네.”
르우벤이 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고로 최악의 흑마검사 게르반은 세인들에게 ‘악마’라는 칭호로 불리기도 했다.
“뭔가 온다.”
“대체 숫자가 몇이나 되는 거야.”
레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예민한 감각으로 전해져오는, 적어도 세자릿수에 달하는 적의 기척.
이내 일행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수백에 달하는 사자(死者)였다. 뼈로 이루어진 몸통에 녹이 슨 갑주를 갖춰 입고, 마찬가지로 녹이 슨 무기를 들고 있었다.
“이건 너희들이 처리해라.”
레인이 뒤로 물러났다. 딱히 특출난 기백을 가진 녀석은 없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데엔 무인인 레인보다 나머지 세 사람의 힘이 적합했다. 가능, 불가능의 문제가 아닌 효율의 문제였다.
로엘이 마력포를 꺼내 들며 앞으로 나섰다. 르우벤과 밀리아가 마법을 발현시킬 준비를 마쳤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거 쓰러뜨려도 다시 일어나겠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인데.”
“글쎄. 실험해 봐야지.”
“좋아.”
로엘이 대뜸 포격을 날렸다.
콰드드드드드드!
포격의 궤적에 따라 통째로 분쇄되는 언데드의 무리. 그 직후, 다시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히익! 강하다! 저 녀석 강해!]
[그렇지만 소용없지! 아무리 강하다고 해 봤자지!]
[여기 유적에 존재하는 사자(死者)들은 절대 죽지 않는걸! 그야 이미 죽었으니까! 히히!]
우드득! 우드득!
마치 귀곡성에 내포된 기분 나쁜 내용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거진 분쇄되다시피 한 언데드의 육체가 수복되기 시작했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제1 유적의 체스 말들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행의 발목을 잡을 수준은 충분히 될 듯싶었다.
“아마 아무리 부순다고 해도 끝이 없겠지?”
“그렇겠지. 적어도 우리가 지치는 게 유적의 마력이 다 떨어지는 것보단 빠를 테니”
“그럼 결론은 하나인가.”
로엘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이 툭, 하고 중얼거렸다.
“빠르게 길을 뚫어내며 전진해야 한다는 거군.”
앞으로 이런 식의 교전을 몇 번이나 더 치러야 할지 모른다. 그 와중 일일이 언데드를 상대할 수는 없다.
그러니 제2 유적 공략은 되도록 빠른 템포로. 언데드들이 몸을 복구하고 다시 따라붙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신속하게 돌파해야 할 터였다.
르우벤이 확 하고 몸을 날렸다. 그의 손으로부터 광범위한 전격 마법이 방출되어 사위를 휩쓸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직! 콰르르르르르!
[히악! 저 인간도 강하다!]
[강하다! 강하다!]
단숨에 무너져내리는 언데드 군세의 전열. 직후 당혹한 심정이 담긴 귀곡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로엘이 그렇게 무너진 대열 한쪽으로 포격을 날렸다. 연속해서 세 차례.
콰앙! 콰아앙! 콰드드드드드득!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단번에 길이 뚫렸다. 일행이 그 길을 지나 내달렸다.
언데드들이 갈라진 틈을 메우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때, 밀리아의 마법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빛의 사슬(Light Chain)>.
수십 미터에 달하는 사슬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죽죽 뻗어 나가더니 언데드들의 접근을 막아냈다. 일행에게 달려들던 언데드의 선두가 일제히 사슬에 칭칭 휘감겨 제자리에 고정되었다.
사슬에 휘감긴 언데드들은 영 힘을 쓰지 못했다. 밀리아가 착용한 아티펙트는 빛 속성 마법 조합이라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 굉장히 효율적인 면모를 보였다.
“몇몇 고화력 무기 빼곤 그다지 써먹을 만한 게 없겠네.”
신형을 죽죽 뽑아내며 로엘이 투덜거렸다.
언데드에게 일점사는 그리 효과가 없었다. 강력한 범위공격으로 통째로 휩쓸어버려야 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무기를 못 써먹게 되었다.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는 와중, 레인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전방에서 상당한 기백을 지닌 개체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이번엔 일백 정도. 그중에 초일류급 전력이 둘 있는 것 같다.”
로엘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만한 개체가 있다고? 딱 보니 유적 시스템으로 인해 생성된 언데드들인 것 같은데.”
“게르반의 언데드 군단은 대륙 전역을 휩쓸었을 정도로 강력했다고 하니까. 그의 유산을 이용해 유적 시스템을 만들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일반적으로 언데드는 마법사가 직접 조종하기 마련이었다. 강력한 개체일수록 손이 많이 가는 것은 물론이었고.
그런데 이 유적의 언데드들은 통솔자가 없음에도 강력한 개체가 섞여 있는 모양. 기가 찰 노릇이었다.
“조심해.”
레인이 일행을 돌아보며 경고했다. 탐지 마법으로 위험을 감지한 르우벤이 옆으로 살짝 물러났다.
촤악!
바닥에서부터 뼈로 이루어진 창이 솟아 나왔다. 이어 수십 개에 달하는 창들이 순차적으로 사방팔방에서 튀어나왔다. 끝이 시퍼렇게 물든 것이 독이 발려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일행 중 부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레인의 경우엔 날아드는 창을 일일이 부숴버리기까지 했다.
“또 온다.”
촤좌좌좌좌좌좌좍!
이번엔 벽과 천장에서 뼈 화살이 쏟아져 나왔다. 바닥이 덜컹거리며 독이 발린 검이 튀어나왔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흑아.”
레인의 그림자로부터 검은 줄기가 수없이 뻗어 나왔다. 일행이 각자 그것을 밟고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으로 모든 함정을 피해냈다.
파드드드득!
그 직후, 어디서 날아온 것일지 모를 언데드 박쥐 무리가 날아들었다. 각자 발톱으로 조그마한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일행의 머리 위로 뿌리며 지나갔다.
쏟아져 내려오는 것은 보랏빛 액체. 육안으로만 봐도 닿아서 좋을 것이 없어 보이는, 그런 것.
아무래도 흩뿌려진 액체다 보니 쳐내기도, 그렇다고 피할 공간을 확보하기도 애매했다. 곧바로 르우벤이 방어 마법을 발현해 일행을 감쌌다.
치익! 치이이익!
“뭐 이딴!”
금세 부식되기 시작하는 방어막. 르우벤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최상위 아티펙트로 형성시킨 방어막이다. 최상위 이능력자인 결계사(結界事)의 그것만은 못하다고 해도 그 방어력은 절대 낮지 않다.
순식간에 부식되고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만한 방어막을 녹여버릴 정도면 대체 어느 정도의 독성을 지닌 것이란 말인가.
“······.”
그 와중 레인은 눈을 빛냈다.
쉴 틈은 없었다. 이내 기감에 걸려들었던 무리와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레인이 속도를 더해 일행의 전면으로 나섰다.
“강력한 개체는 내가 처리하지. 너희들은 범위공격으로 나머지를 쓸어버려.”
적절한 역할 분담. 빠르게 치고 나가기 위해선 이 방식이 가장 유용할 터였다.
“시이이이이잇!”
사자(死者) 특유의 바람 빠진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레인이 그중 선두에 선 거대한 개체를 향해 지체 없이 달려들었다.
나머지 개체들은 평범한 해골 병사였지만, 선두의 두 개체만은 달랐다. 맹수의 형태를 지닌 뼈 무더기 위로 날카로운 가시가 수없이 솟아 올라와 있었다.
“후읍.”
레인이 그중 한 개체를 향해 일장(一掌)을 내뻗었다. 새까만 어둠에 뒤덮인 손바닥이 언데드의 이마에 맞닿았다.
콰아아아앙!
그와 동시에 언데드의 머리가 통째로 터져나갔다. 수백에 달하는 뼛조각이 사방팔방으로 튀어 나갔다.
대대로 마교 교주에게만 전수되어온 독문 장법. 천마장(天魔掌).
언데드의 체내로 침투해 들어간 내력이 한순간에 결집해 폭발한 결과였다.
반동으로 신형을 뽑아 올린 레인이 곧바로 다른 개체의 머리에 착지했다. 곧바로 일장. 남은 개체마저 머리가 폭발해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콰드드드드드! 콰아앙! 콰지지직!
뒤이어 나머지 일행이 강력한 화력의 공격으로 나머지 언데드를 쓸어버렸다. 곧바로 치고 나가는 네 사람.
레인이 뒤를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강력한 개체는 자가 복원 능력도 뛰어난지 방금 부쉈던 머리가 벌써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대충 1-2분 정도면 멀쩡한 모습으로 되돌아갈 듯싶었다.
“속도를 더 높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로엘의 의견제시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의 신형이 일제히 파공음을 내며 전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 * *
한참 나아가던 일행은 어느 순간부터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어떡해! 여기까지 왔어! 와버렸다고!]
[안 돼! 침입자는 퇴치해야 해! 히히히!]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할까?]
안 그래도 시끄럽게 굴던 희끄무레한 망령들. 그치들이 한층 더 시끄럽게 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것들 좀 조용하게 만들 수 없나.”
“실체가 없는 놈들이라 뭘 해도 안 없어지는 것 같더라고.”
괜히 거슬리는 느낌을 받은 레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르우벤과 밀리아가 방심하지 않고 주위를 경계했다.
그리고 로엘은, 망령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경청했다. 단순히 시끄러운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치들이 무언가 일을 벌일 것만 같았기에.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어떡하긴!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직접 처리해야지!]
[그래! 그러자! 히히히히!]
[지금이다! 문을 닫아!]
그그그그긍.
일행이 막 하나의 통로를 주파해 널찍한 공동에 다다름과 동시에, 천장에서부터 석문이 내려와 통로 입구를 가렸다. 퇴로가 차단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일행의 발걸음이 멈췄다. 공동과 이어진 통로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갇힌 건가?”
“이즈음에서 딱 가디언 하나가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인데.”
레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르우벤은 유적을 격파한 경험이 많은 만큼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공동의 한가운데엔 거대한 뼈의 동산이 존재했다. 그 위를 수많은 망령이 떠다니고 있어 굉장히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시작하자!]
[침입자를 몰아내자!]
어느 순간, 망령들이 일제히 뼈 무더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뼈 무더기가 일제히 덜그럭거리며 일어가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더걱! 더걱! 더걱! 더걱! 더걱!
콰르르르르르르륵!
공동 내에 있던 그 엄청난 분량의 뼈가 일제히 모여 하나의 실루엣을 형성해냈다. 그 길이만도 30미터에 다다르는, 거대한 뱀의 형상을.
그리고.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완전히 형상을 갖추자마자 일행에게 시선을 돌려 포효를 내지르는 초거대 언데드. 시각적인 박력이 압권이었다.
르우벤이 피식, 하고 웃으며 중얼거렸다.
“예감 적중이로군.”
후우우웅!
그 거대한 동체를 움직여 거칠게 꼬리를 휘둘러오는 초거대 언데드. 일행이 일제히 흩어져 자리를 벗어났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압도적인 질량의 꼬리가 바닥과 충돌하자 지진이라도 난 듯 바닥이 흔들렸다.
일행은 순식간에 각각 다른 방향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 레인과 르우벤, 밀리아가 가디언을 향해 돌진해 들어가고, 그것을 로엘이 원거리에서 엄호했다.
[캬아아아아아아악!]
대형 언데드의 울음소리가 공동 내부를 가득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