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영웅과 악마의 유적(4)
높이만 15미터에 이르는 대형 청동 조각상이 휘두르는 초대형 해머. 육중한 파공음이 대기를 울렸다.
콰아아앙! 콰드드드드드!
“크읍.”
그 압도적인 공격을, 르우벤은 길게 족적을 남기는 정도로 완벽하게 받아냈다. 곧바로 레인과 로엘이 양옆으로 뛰쳐나가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레인의 백광 서린 검격과 로엘의 포격이 각각 청동 조각상의 양 옆구리에 작렬했다. 공격을 받은 지점이 눈에 보일 정도로 패여 나갔다.
<빛의 창(Light Lance)>.
밀리아의 손에서부터 날아간 거대한 창이 조각상의 머리를 꿰뚫었다. 시간을 들여 마력을 압축시킨 마법이라 위력이 상당했다.
청동 조각상이 휘청이자 르우벤이 곧바로 몸을 빼냈다. 그런 뒤 가속해서 재차 달려들었다. 온갖 가속 마법이 그의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대로 조각상의 다리에 거칠게 충돌.
쿠우우우웅!
결국 완전히 중심을 잃은 청동 조각상이 뒤쪽으로 넘어갔다.
“지금! 최대한 피해를 입혀!”
곧바로 세트를 바꿔 입은 르우벤이 대자로 누운 청동 조각상 위에 올라 온갖 마법을 쏟아냈다. 레인과 로엘, 밀리아가 금세 가세했다.
레인이 검격을, 로엘이 포격을, 르우벤이 전격 마법을, 밀리아가 빛 계열 마법을.
섬광이 번쩍이고 폭음이 울렸다. 청동 조각상은 신형을 일으키기 위해 계속해서 버둥댔지만 세 각성자와 밀리아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쿠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아까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단순한 소음일 뿐임에도, 마치 르우벤의 용의 포효나 레인의 사자후와도 같은 박력이 담겨 있었다.
그 소음에 일행이 일제히 자리를 이탈했다. 르우벤에게서 사전에 전해 들은 경고대로.
콰지지지지직!
검은 전격이 대형 조각상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 여파만으로 조각상과 맞닿은 바닥이 바스러지고 비산했다.
일정 이상 데미지를 입으면 발동하는, 가디언의 최종 비기. 흑뢰(黑雷).
“지금부터는 시간만 끌면 된다 이거지?”
“어. 그게 좀 힘들 테긴 하지만.”
흑뢰는 극도로 파괴적인 힘. 그 압도적인 힘은, 힘의 주체인 조각상조차 시시각각 가루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규격 외의 것이다.
참으로 빌어먹게도, 유적의 최종 보스인 이 조각상을 피해 없이 ‘쓰러뜨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의 일행에게는.
흑뢰에 내포된 가공할 힘을 무시하고 본체에까지 큰 타격을 입힐 공격. 그런 공격을 날릴 수 있는 인물이 일행 중에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그만한 공격을 날릴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것.
쉽게 말해 이런 것이었다. 레인의 무형검이라면 조각상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딜레이가 너무 긴 공격이라 써먹기가 힘든 게 문제인 것일 뿐.
흑뢰가 사위를 쉴 새 없이 휩쓰는 상황에서 그런 강력한 공격을 구현해내기가 어디 쉽겠는가. 굳이 그런 위험성 높은 방안을 밀어붙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마지막 관문을 돌파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로 장기전.
흑뢰는 굉장히 강력한 힘이지만 양날의 검이다. 그 힘의 주체가 되는 조각상의 동체에도 피해가 가니까.
그 힘으로 인해 동체가 완전히 무너져 자멸하기까지 버티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무리해가면서까지 직접 쓰러뜨리려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어설프게 타격을 입히려 하지 마. 되도록 피해 다니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게 좋을 거야. 공격에 타격을 입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그로 인해 무너지는 것보다 스스로 무너지는 속도가 더 빨라.”
“어.”
“흑뢰는 특히나 주의해. 저거에 잘못 닿았다간 순식간에 골로 간다.”
“그래.”
르우벤이 주의사항을 재차 확인하고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눈가에 검은 번개를 번쩍이며 대형 조각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이었다면 흑뢰에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져버렸을 동체를, 그 높은 강도와 거대한 크기로 커버해 버텨가며 움직이는 조각상. 곧바로 휘둘러져 오는 거대한 해머.
그새 해머의 개수가 2개로 늘어 있었다. 새로운 해머를 장착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들고 있던 해머가 정확히 세로로 반이 갈라진 것이었다.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든 채였다.
각 해머에는 특히나 강렬한 흑뢰가 맺혀 있어 섬뜩함을 더했다. 그것이, 한껏 육신을 긴장시키고 있던 르우벤을 목표로 날아들었다.
“하압!”
르우벤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강력한 전격 마법을 구사했다. 그와 동시에 그 자신은 몸을 뒤로 빼냈다.
콰과과과과과광!
잠시간 균형을 이루는가 싶던 흑광과 청광의 대결은 금세 결판이 났다. 흑광이 청광을 깨부숴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위력 자체보다는 그 지속력에서 차이가 난 탓.
그러나 해머는 의미 없이 허공을 갈라 바닥과 충돌했다. 흑뢰와 전격 마법이 충돌하면서 생긴 약간의 딜레이는 르우벤이 몸을 빼내는 데 활용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섬(閃).
그사이, 어느새 거대조각상의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레인이 그림자 줄기를 타고 도약해 후두부에 검강을 직격시켰다.
콰앙!
흑뢰와 검강이 충돌해 소음을 자아냈다. 정작 동체엔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했지만, 강력한 힘에 떠밀린 동체가 살짝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뒤따라 그림자 줄기를 밟고 도약한 로엘이 곧바로 포격을 날렸다. 레인의 공격이 적중된 바로 그 자리, 후두부에.
콰지지지지지지직!
바로 직전 검강과의 충돌로 인해 그 근방의 흑뢰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그곳을, 포격이 단숨에 꿰뚫어버렸다. 그대로 동체에 직격.
아무래도 흑뢰를 꿰뚫는 과정에서 힘이 많이 소모된 탓에 큰 데미지를 줄 수는 없었다. 그저 겉 부분을 조금 갈아낸 정도. 흑뢰를 온몸에 두르고도 상당한 시간을 버틸 수 있는 내구도를 지닌 조각상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대신, 안 그래도 불안정했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있었다.
쿠콰콰콰콰콰콰쾅!
완전히 앞쪽으로 기울어져 쓰러지는 조각상. 굉음이 울렸다. 흑뢰에 바닥이 통째로 갈려 나가면서 훅, 하고 먼지가 일었다.
그렇게 틈을 만들어 낸 일행이 한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
[쿠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조각상은 금세 다시 그 동체를 일으켰다. 그리곤 거칠게 날뛰었다.
“사전에 말해준 몇 개의 패턴만 주의해! 자잘한 부분은 너희들이 알아서 판단하고!”
“이거 몇 시간이나 끌어야 해?”
“정확히는 몰라! 상당히 오랜 시간 전투를 치렀던 것으로만 기억하고 있어!”
일행은 각자 견제를 가하고, 주위 사방을 휩쓰는 흑뢰를 피하고, 기회를 봐서 적당한 위력의 공격으로 조각상의 움직임을 제한시킨 뒤 숨을 돌렸다. 그것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계속해서 반복했다.
“야, 이거 대체 언제 끝나!”
“처음에 비해서 많이 망가진 것 같긴 한데.”
“오래 걸린다니깐.”
한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레인이 불평을 내뱉었다. 그는 성격상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전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우왓!”
콰드드드드드드!
두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조각상의 전투패턴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었다. 르우벤이 사전에 일러주었던 대로.
조각상의 팔다리 관절부가 완전히 부식되었다 싶더니, 갑자기 주먹 하나가 거리를 격하고 날아들었다. 마치 팔이 쭉 늘어난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공격.
그 비밀은 부식된 관절부 안쪽에 있었다. 조각상 내부에 설치된 와이어에 연결된 팔이 쭉 뻗어 나온 것이었다. 물론 흑뢰는 여전히 조각상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으므로 위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워낙 갑작스럽게 패턴이 변화한 탓에 정작 그것에 대해 사전에 일러주었던 르우벤 본인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졌다.
레인이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려 르우벤의 속을 긁었다. 로엘이 ‘어디서 많이 보던 펀치 같은데’라는, 실없는 감상을 내뱉었다.
초거대 조각상이 전투 불능이 되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은 전투 개시로부터 3시간이나 흐른 뒤의 일이었다.
* * *
조각상을 쓰러뜨린 뒤론 그 지대를 일정 시간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안전지대.
일행은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로엘이 여기저기 우그러지고 부서져 볼품없게 변한 청동 조각상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 정도로 망가진 게 알아서 복구된다니, 무섭네.”
“이 유적의 고유 특성이지. 관문을 지키는 장애물들엔 모두 자가 복원력이 있어서 아무리 파괴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게 돼.”
“확실히 일반적인 탐사대에겐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유적으로 느껴지겠어.”
“그런데 이 정도면 네가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할 정도로 위험한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샌드위치를 우물우물 씹던 레인이 툭 하고 말했다.
유적 탐험에 있어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가히 절대적인 메리트였다. 이번 유적 공략에 참여하면서 레인은 그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다.
이 유적은 분명 괴악한 난이도를 자랑하긴 했다. 그렇지만 일전에 르우벤이 내비쳐 보인 경계심이 이해될 정도의 위험을 지금까지는 겪어보지 못했다. 그것이 레인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르우벤이 어깨를 한 차례 으쓱하며 답변했다.
“그게 그렇지가 않아. 유적을 공략하고 난 뒤가 문제거든.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지.”
“?”
“이제 이 뒤로는 자잘한 함정밖에 남지 않았어. 그걸 지나가고 나면 보상이 잠든 공간이 나오지. 그곳에 도착하고 나면 설명해 줄게.”
* * *
일행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더 지나서야 유적의 끝을 볼 수 있었다. 바깥은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이 되었으리라.
자잘한 함정을 모두 돌파하고 나니 눈앞에 나타난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대문.
그 안으로 들어서자 널찍한 공동 가운데 놓인 제단이 눈에 들어왔다. 제단 위에는 한 자루의 검이 꽂혀 있었다.
“이게 성검인가.”
로엘이 검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맑은 은빛을 뿜어내는 검이었다. 육안으로만 봐도 그 영험함이 느껴졌다. 심신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성검은 안 챙겨갈 생각이냐?”
레인이 감회 어린 눈빛으로 성검을 바라보는 르우벤에게 물었다.
“어. 다른 것들이야 어차피 왕국에서 대부분 강탈해갈 물건들이니 그냥 챙겨가겠지만, ‘성검’은 이야기가 달라. ‘단장’이 쓰게 두는 게 나을 거야.”
“그냥 네가 사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 저 검은 주인을 가리거든. 적어도 우리 중에는 저 검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거고.”
어차피 검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제단에서 검을 뽑아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르우벤은 일말의 미련도 가지지 않았다.
“그 ‘인정’이라는 건 어떤 기준으로 받는 거지?”
“여러 가지 있다만, 일단 심성이 착해야 해.”
“못 써먹을 물건이군.”
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첫 번째 기준부터가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르우벤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밀리아라면 인성 면에서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긴 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그녀는 검술에 조예가 없었다. 애초부터 논외의 대상이었다.
“난 생각이 없다만 혹시 모르니 너는 한 번쯤 시험해보는 게 어때?”
“됐어. 나도 생각 없다.”
“그래?”
르우벤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능성의 문제를 떠나 한 번쯤 시도 정도는 해 볼 것이라 생각했거늘.
일행이 들어선 공동은 여섯 개의 통로와 이어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입구였고, 나머지 다섯 중 넷은 유적 공략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잠들어 있었다.
일행은 각 방을 돌아다니며 유물들을 쓸어 담았다. 정리는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로엘의 아공간에 전부 보관해두기로 했다.
모든 일을 마무리한 뒤, 일행은 마지막으로 남은 통로 앞에 섰다.
통로 입구에 거대한 간판이 붙어 있었다. 간판을 수놓은 글자는 역시 룬 어였다.
레인이 르우벤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 뒤로는 너도 알지 못하는 공간이라고?”
“어. 너희들이 많이 도와줘야 할 거야.”
르우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판을 유심히 살피던 로엘이 재미있다는 듯 입술 끝을 밀어 올렸다.
간판 상단부에 쓰인 글자는 이러했다.
[제2 유적.]
“그런 건가. 제1 유적에는 대영웅의 유산이 잠들어 있고…….”
“제2 유적에는 대영웅이 전후에 수습한 게르반의 유산이 잠들어 있을 테지. 저 글귀대로라면.”
로엘의 혼잣말을 르우벤이 이어받았다. 일행의 눈빛에 일제히 이채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