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영웅과 악마의 유적(3)
“후우.”
로엘이 어깨를 주무르며 조종석에서 내려섰다. 그와 동시에, 체스판 위에 있던 조각상들이 움직임을 보였다.
쿵! 쿵! 쿵! 쿵! 쿵!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양옆으로 갈라서는 조각상들. 줄 맞춰 선 뒤 서로를 마주 보다가, 일제히 오른팔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 진동이 일어났다.
그그긍, 하는 소리와 함께 밀려 올라가는 석문. ‘다음’ 관문으로 향하기 위한 통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수고했어.”
르우벤이 웃으며 다가와 로엘에게 말했다. 로엘이 됐다는 듯 손을 저었다.
“딱히 수고랄 것도 없지. 가자.”
“그래.”
네 사람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통로를 주파했다.
그리고, 다음 관문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진형을 갖추고 서 있는 일단의 조각상 무리였다. 총 열여섯 개체.
레인이 어라, 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저건 뭐야.”
“뭐긴 뭐야. 이번에 우리가 돌파해야 하는 녀석들이지.”
르우벤이 가볍게 답변했다. 그러자 로엘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알겠는데, 왜 또 있는 거야. 저 체스 말들.”
“그냥 유적 제작자가 악랄한 녀석이었다고 생각하면 돼.”
“대영웅이 사실 악랄한 인간이었다니.”
로엘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껏 무사히 돌파했건만 이 녀석들이 또다시 배치되어 있었다니. 이전 관문을 힘겹게 돌파한 공략자의 멘탈을 갈아버리려는 의도가 듬뿍 담긴 처사였다.
“사실 전 관문에 있었던 것들과는 조금 다른 타입이야.”
“그래?”
“어. 전 관문에 있던 것들은 그냥 파괴하면 파괴되지만, 여기 있는 놈들은 파괴해도 순식간에 수복되어 버리거든. 진형 중심에 위치한 킹을 부숴버리기 전까진.”
“이러언 미친.”
결국 로엘이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심지어 전 관문에 배치되어 있던 것들보다 더 강력한 놈들이었다!
사실 이 유적은 그 자체의 자가 복원력이 굉장한 곳이었다. 아무리 파괴시켜도 시간이 지나면 원래 모습으로 복구되게 되어 있었다. 관문도, 함정도, 가디언도, 심지어 유적 자체도.
그렇지만 그 복원 속도는 그렇게까지 빠르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간 공략자의 발목을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관문만큼은 다른 모양이었다.
“일반 체스 말을 아무리 부숴 봐야 별 소용이 없어. 몇 초 내로 완전히 복구되어 버리니까. 킹을 노려야 해.”
“…….”
“참고로 킹도 전 관문에 있던 놈들과는 달라. 유적을 수호하는 두 가디언 중 하나거든. 대충 중간 보스 정도 된다고 보면 돼.”
“킹만 제거하면 나머진 기동을 멈추는 건가?”
“어. 그러니 잘해 보자고.”
르우벤이 로엘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먼저 앞으로 나섰다. 그러더니 대뜸 대범위 마법을 방출했다.
<얼음창의 비(Ice spear rain)>.
조각상들의 진형 위쪽. 그곳에 쩌저적, 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얼음창.
마력을 머금어 일반적인 얼음의 수백 배에 달하는 강도를 지니게 된 창들이 일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콰과과과과광!
그저 창 하나만을 꼬나쥐고 있던 전 관문의 것들과는 달리, 거대한 방패까지 장착한 폰(Pawn)들. 그들이 일제히 방패를 들어 올려 진형을 보호했다.
아무래도 충격량이 상당했는지 방패가 푹푹 패여 나갔다. 조각상들이 딛고 선 바닥에 쩍쩍 금이 갔다.
르우벤이 그것을 노렸다는 듯 빠르게 진형에 접근해 들어갔다. 곧바로 레인, 밀리아가 뒤따라붙었다. 로엘이 원거리 지원을 맡았다.
“일단 묻겠다만, 양동작전 같은 건 안 통하겠지?”
“조각상한테 뭘 바라냐.”
레인의 물음에 르우벤이 고개를 저었다.
슈왁!
로엘이 뒤쪽에서 포격을 날렸다. 양손에 마력포를 들고 동시에 기동. 두 줄기의 두꺼운 섬광이 공간을 가로질러 조각상들이 갖춘 진형에 작렬했다.
콰아아아아앙!
금세 유기적으로 진형을 변화시키는 조각상들. 폰 하나가 팔을 내려 로엘의 포격을 방패로 받아내고, 그 빈자리를 나머지 일곱이 곧바로 메꿨다.
마력포는 강력했다. 방패가 형편없이 우그러들었다가 터져나갔다. 순식간에 폰의 몸통에 구멍이 뚫렸다. 뒤쪽에 위치한 다른 체스 말들이 연쇄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킹에게까지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곧바로 재생되기 시작하는 놈들의 동체.
심지어 방패마저 순식간에 원상복구 되어갔다. 로엘이 혀를 찼다.
마력이 다함과 동시에 얼음창의 비가 그쳤다.
[쿠아아아아!]
동시에 마력이 듬뿍 담긴 포효를 내지르며 진형에서 뛰쳐나오는 나이트(Knight) 두 개체.
거대한 군마 위에 앉은 것은 전 관문의 그것과는 다른, 육중한 갑주를 차려입은 기사. 거대한 랜스를 들고 엄청난 속도로 질주해오는 그 모습은 마치 전차를 연상시키는 박력이 있었다.
곧바로 레인이 신형을 날려 한 군마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동시에, 진각.
콰아아아앙!
거대한 파장이 퍼져나갔다. 군마의 머리가 통째로 박살이 났다.
곧바로 무너져 내리는 동체. 그 위에 앉은 기사 또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옆으로 신형을 옮긴 레인의 등이 기사의 몸통과 맞닿았다.
철산고(鐵山?).
콰아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튕겨 나간 기사 조각상의 상반신이 또 다른 나이트와 거칠게 충돌했다. 한꺼번에 부서져 나가는 두 조각상. 수많은 파편이 비산했다.
“오오.”
르우벤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냈다.
곧바로 밀리아가 지원을 가했다. 그녀가 착용한 아티펙트들은 빛 계열 마법 조합. 상당히 높은 위력과 효율을 자랑했다.
<빛의 거검(Giant sword of light)>.
그녀의 손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빛이 결집 되더니 거대한 검의 형상을 이뤘다. 그녀가 그것으로 전방에 위치한 폰을 후려쳤다.
콰과과과광!
단숨에 통째로 부서져 나가는 폰. 진형에 빈틈이 생겨났다. 그리고 곧바로 로엘의 지원 사격이 날아들어 빈틈이 더욱 넓어졌다.
“하압!”
어느새 그 사이로 파고든 르우벤이 청광에 휩싸인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곧바로 킹의 앞을 가로막는 두 마법사 조각상. 두 조각상이 발현한 방어마법이 르우벤의 주먹과 충돌해 섬뜩한 기음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른 사람도 아닌 르우벤의 공격이다. 균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졌다. 방어마법이 와장창 부서지고 권격이 일직선으로 킹을 향해 날아들었다.
“으왓.”
그러나, 르우벤은 결국 공격을 거두고 신형을 뒤틀어야만 했다. 킹 바로 옆에 붙어 있던 퀸이 날카로운 돌려차기를 날려왔기 때문.
다른 조각상들은 움직임에 약간의 부자연스러움이 있지만, 퀸만큼은 그런 것이 없었다. 동작이 굼뜨지도 않았다.
마치 발레리나와 같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면서도 치명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위력을 머금은 돌려차기. 그 거대한 육체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기습에 르우벤은 결국 한 차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더럽게 단단하네.”
그 사이에 한쪽에선 레인과 성벽 기사들이 거칠게 충돌하고 있었다. 아무리 레인이라도 갑작스레 진형을 뚫고 전차처럼 돌진해오는 놈들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어 붙들려 있는 상태였다.
거대한 해머를 들고 달려드는 육중한 동체의 기사들. 움직임이 좀 부자연스럽지만 순간 가속도와 힘만큼은 다른 조각상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도 튼튼해서 파괴하기도 힘들거늘, 심지어 파괴해도 금세 복구되어 버리기까지. 레인이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와중, 진형의 중심에 있던 킹의 몸에서 광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르우벤이 일행에게 경고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저건 맞으면 진짜 위험하니까 잘 피해라.”
“말 안 해줘도 그건 알 것 같다.”
이렇게 강렬한 기파가 주위에 몰아치고 있는데 모를 수가 있나. 레인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대꾸했다.
키이이이이이이잉!
킹의 눈으로부터 광선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막대한 에너지가 결집되어, 설사 초인일지라도 무시할 수 없는 절삭력을 지닌 광선이.
그리고 킹의 목이 기이한 각도로 꺾이고 회전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광선의 궤도가 제멋대로 뒤틀리며 주위 사방을 작살 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네 사람.
체스 말들의 공격까지 받아 내가며 공격을 회피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경지가 낮은 이는 일행 중에 존재하지 않았다.
도리어 몇몇 체스 말들이 광선에 직격당해 부서져 나갔다. 금세 복구되기 시작하긴 했지만.
“저 광선 공격이 그친 다음엔 잠깐이지만 틈이 생길 거야. 그때 단숨에 몰아쳐서 끝내자. 마무리는 레인 네가 지어 줘. 길을 만들어 줄 테니.”
“어.”
르우벤과 레인이 광선을 피해내며 작전을 수립했다. 이어 밀리아와 로엘에게 소리쳐 지원을 부탁했다.
“지금!”
얼마 지나지 않아 광선이 멎었다. 로엘과 밀리아가 지원 사격을 날리고, 르우벤이 단숨에 강력한 마법을 연속해서 발출해 길을 뚫어냈다.
광선이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파괴를 저지른 직후, 조각상들이 부서진 동체를 완벽하게 수복하기까지의 몇 초 안 되는 짧은 틈. 그 틈을 정확하게 노린 집중포화.
단숨에 길이 열렸다. 킹에게 직통으로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 길이.
그 길을 단숨에 주파한 레인이, 어느새 그림자로부터 뽑아 든 창을 회전시켰다. 그에 강기를 덧씌우고, 음한지기를 부여했다. 창을 들지 않은 반대쪽 손에는 열양지기를 부여했다.
창격을 내지른 뒤에 곧바로 일장을 내지를 심산. 음한지기로 얼리고 열양지기로 두드려 단숨에 파괴해버릴 작정이었다.
킹의 옆에 위치해 있던 퀸이 날카로운 지르기를 날려왔다. 그리고 그것을 밀리아가 제지했다.
<빛의 사슬(Light chain)>.
촤르르륵!
그녀의 손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사슬이 퀸의 팔을 휘감았다. 곧바로 확 잡아끄는 밀리아. 퀸의 거대한 동체가 일순 휘청였다.
그리고 그 직후, 레인의 창격이 킹의 정수리에 정확하게 작렬했다.
콰드드드드득!
* * *
일행은 계속해서 등장하는 관문을 돌파하고 또 돌파했다. 그리고 결국 유적의 최종 수호자가 자리 잡고 있는 공동에 다다랐다.
“얼마 안 가서 마지막 관문을 수호하고 있는 거대한 청동 거인이 나올 거야. 준비해둬. 이 유적의 최종 보스라서 만만치 않을 테니.”
“너무 순조로운데.”
로엘이 혀를 내둘렀다.
분명 이곳 유적의 난이도는 굉장했다. 이전에 공략했던 ‘자이언트 플랜츠’와는 격이 달랐다.
그러나 일행의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전적으로 회귀자인 르우벤의 덕택이었다.
함정이면 함정, 시험이면 시험, 방어 시스템이면 방어 시스템.
유적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인물이 있다 보니 공략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 분명 장애물 중에는 설사 초인 이상의 실력자일지라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종류의 것들도 상당했음에도.
죽을 고비를 넘기며 거대 식물, 곤충들을 뚫어야만 했던 3년 전 유적 탐험이 억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매번 이런 식으로 유적을 공략한 거야?”
“아니. 이렇게 내부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유적은 이곳뿐이야. 여긴 말했듯 전생에 내가 속해 있었던 용병대가 직접 공략했던 장소니까.”
“보통은 한 번 경험한다고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할 텐데.”
“내가 그때는 좀 광기에 차 있었지. 다 왔다. 준비해.”
르우벤이 탱커 세트를 갖춰 입었다. 그가 전위에 서서 청동 조각상의 공격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로엘과 레인은 높은 기동성을 앞세워 상대의 주의를 끌며 데미지를 누적시키고, 밀리아는 후방에서 안전하게 마법을 쏟아내기로 했다.
쿠구구구궁!
그 크기만 15미터에 이르는 청동 조각상이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딱 봐도 중량이 엄청날 것 같은 거대한 해머를 들고 있었다.
“쯧, 마음에 안 들어.”
“왜?”
“전생에 단장을 죽인 녀석이 대형 해머를 들고 있었거든.”
일행이 가볍게 잡담을 나누는 사이, 몸을 완전히 일으킨 청동 조각상이 포효를 내질렀다. 마력이 충만한 포효가 주위 대기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가자.”
사전에 이야기된 대로, 르우벤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청동 조각상이 손에 들린 해머를 거칠게 휘둘렀다. 르우벤이 뛰쳐나가 그 공격을 X자로 교차한 팔을 들어 받아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그렇게, 유적의 최종 관문을 지키는 수호자와의 결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