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영웅과 악마의 유적(2)
“호오.”
유적 내부는 밝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막연히 어두컴컴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레인이 작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대영웅의 유적 아니랄까 봐 입구부터가 남다르군. 여기 짓는 데 얼마나 돈이 깨졌으려나.”
로엘은 대뜸 견적부터 내렸다.
“생각하는 것만큼 돈이 들진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영웅은 수많은 이종족의 지지를 받았다고 하니까요. 이 유적도 여러 종족이 힘을 합쳐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걸 또 밀리아가 성실하게 답변했다.
“그런가요? 대영웅도 굉장한 인물이었네요. 그런 식으로 자재 원가 절감에 노동비 절감을 이뤄내다니. 그런데 그런 건 어떻게 아셨나요?”
“르우벤 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로엘이 르우벤을 돌아보았다. 르우벤이 어깨를 한 차례 으쓱했다. 그가 그들이 위치한 공간 한가운데 놓인 제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별것 아니야. 저기에 적힌 내용이거든.”
그가 가리킨 제단 위에는 한 권의 서책이 놓여 있었다. 마법적인 보호조치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그곳에 놓여 있었음에도 전혀 낡지 않은 서책이.
로엘이 다가가서 서책을 집어 들었다.
“대영웅의 자서전이네.”
“맞아. 그 자체의 가치만으로도 역사학자들이 거품을 물 만한 유물이지.”
“그런데 왜 이런 게 여기에 덜렁 놓여 있대. 별다른 장애물도 안 보이고. 이 방엔 이 서책밖에 안 보이는데.”
피라미드형 건축물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대충 집 한 채 넓이일까. 그 내부는 텅 비어 있고 한가운데에 제단과 서책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잠시만.”
르우벤이 제단 왼쪽으로 가더니 벽돌 하나를 빼냈다.
안쪽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마법진의 중앙에 보석 하나가 박혀 있었다.
“오. 그런 곳에 비밀장치가 숨겨져 있었나.”
달칵.
르우벤이 보석을 마법진에 더욱 깊숙이 박히도록 눌렀다. 그러자, 제단 위쪽으로 마법진이 구축되더니 이내 마력으로 이루어진 글자가 생성되었다. 룬 어였다.
[암호를 말씀해 주십시오.]
“사실 흑마검사 게르반에게 최후의 일격을 먹인 이는 대영웅이 아닌 요정 여왕.”
[승인되었습니다.]
제단이 소음을 일으키며 옆으로 밀려났다. 그러자 바닥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특이한 암호네.”
“그 서책을 통해서 알아내야 하는 암호야. 전생에 노러츠 왕국의 현자들이 일 년 넘게 열심히 머리를 맞대서 풀어낸 내용이지.”
사실 첫 번째 관문은 유적 탐사자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제작된 구간이었다.
대영웅의 유적은 고대 마법사의 생활공간일 뿐인 여타 유적들과는 달랐다. 명백히 공략자를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곳이었다.
르우벤의 경우엔 제작자의 의도를 간단히 무산시켜버렸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회귀자’라는 건 사기야.”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말하기냐.”
“이건 어쩔까?”
“그 서책은 두고 가. 공략이 마무리되기 전까진 일정 공간 밖으로 반출되지 못하게 하는 조치가 취해져 있으니까.”
네 사람은 차례차례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그그그그긍.
모두가 지하로 들어서자 제단이 소음을 일으키며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갔다.
* * *
그리고 그로부터 2시간이 지난 후.
[암호를 말씀해 주십시오.]
“…….”
제단 위로 떠오른 문구를 바라보는, 두꺼운 갑주를 걸치고 거대한 해머를 손에 든 기사가 하나. 그는 한참을 끙끙대다 결국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괴성을 내질렀다.
“크아아아!”
“지, 진정하십시오. 자작님.”
“그러니까 대체 그 암호가 뭐냐고!”
갑작스럽게 대영웅의 유적이 등장하고, 그에 맞춰 괴인들이 나타나기까지. 그야말로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노러츠 상층부는 곧바로 근처에 위치한 초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런 일에 한해서만큼은 대처가 빠른 그들이었다.
그런 사정으로 이곳에 가장 먼저 도착한 자작이었다. 왕국에서 손꼽히는 강자이자 만인에게 경외 받는 초인.
그러나 자작은 이런 사태는 전혀 상정치 못했다. 괴인들과 전투를 벌이는 것은 고사하고 고작 유적의 시스템에 발목이 붙잡힐 줄이야.
“괜찮습니다. 자작님. 어차피 이 유적의 출입구는 이곳뿐. 바깥에서 포위한 채 기다리고 있다가 놈들이 나오면 그때 사로잡으면 그만입니다.”
상대적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한 기사가 자작에게 조언했다. 굳이 바깥에서 기다리자고 한 것은 유적 내부에 오래 자리 잡고 있어서 좋을 게 없다는 상식적인 판단에 의거한 것이었다.
자작의 안색이 이내 밝아졌다.
“그렇군! 그런 수가 있었어.”
‘이걸 말해줘야만 안다니.’
기사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자작은 분명 무예에 한해서만큼은 굉장한 천재성을 지닌 인물이었으나, 그 이외의 부분은 너무 모자랐다. 한 마디로 무식했다.
자작은 별다른 고민도 없이 곧바로 유적 바깥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수행하는 기사들이 허둥지둥 뒤따랐다.
“그런데, 혹시 술 좀 있나?”
“긴급 상황입니다. 술은 자제해 주십시오.”
“에이. 당연히 취할 정도로 마실 생각은 없지. 몇 잔 정도는 오히려 몸도 달궈주고 좋잖아. 있어 없어? 없으면 가서 좀 사 오고.”
‘제정신인가?’
기사는 내심 욕설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것을 속으로 삼켰다. 이 무식한 작자에게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제명에 못 죽는다.
기사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면 자작의 부탁, 아니 명령은 거절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기사는 당장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준비해 두겠습니다. 플리퍼 자작님.”
자작의 입가에 씩 하고 호선이 그려졌다.
* * *
“그래서, 여기에 함정이 있다고?”
“어. 상당히 튼튼한 데다 어정쩡하게 파괴되었다간 폭주하는 시스템까지 겸비되어 있어. 그러니 무형검(無形劍)으로 단숨에 날려버려.”
“그러지.”
레인이 일행의 앞으로 나섰다.
허리춤에 걸린 검을 뽑아 들고 검강을 생성, 그리고 압축. 막대한 기파가 휘몰아치며 사위의 긴장감을 높였다.
그렇게 축적된 기운을, 겉보기엔 평범한 벽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함정지대를 향해 사출했다.
콰아아아아아앙!
막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벽이 통째로 터져나가며 돌가루와 쇳가루가 비산했다.
그리고 먼지가 가라앉은 뒤, 벽 너머에 자리 잡고 있던 ‘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참하게 파괴된 채로.
“허.”
“난 함정 장치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저게 말도 안 되게 위험한 물건이라는 건 대충 보기만 해도 알겠군.”
레인의 말마따나, ‘장치’는 그야말로 굉장한 위압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반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 크기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수많은 부품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끼릭거리는 것이, 보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이었다.
파괴하기 전까진 초인인 레인의 감각에조차 걸려들지 않았다는 게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저게 작동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우선 바닥이 꺼져. 그리고 그 꺼진 바닥 아래서부터 회전하는 톱날이 밀려 올라오지. 참고로 톱날은 마법 합금 금속으로 이뤄져 있더군.”
“…….”
“그런 뒤엔 천장으로부터 회전력에 듬뿍 실린 창이 쏟아져 나와. 다음으론 극독이 발린 화살비가 쏟아지고, 마무리로 주위 사방이 화염 계통 마법으로 잠식되기까지 하던데.”
“대영웅은 사실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인간이었는지도 모르겠군.”
듣기만 해도 끔찍한 함정이었다. 유적 탐사자를 시험하기는커녕 단숨에 지옥으로 보내려는 의지로 가득한 함정이 이곳에 있었다.
“괜히 여기가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유적으로 유명했겠냐.”
“근데 넌 쉽게 돌파하고 있잖아.”
“난 전생에 여길 공략해 봤으니까.”
르우벤이 어깨를 한 차례 으쓱였다.
“슬슬 가자. 저쪽 구역도 지혜를 시험하는 구간이라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거야.”
“시험지를 줬더니 어디선가 답안지를 외워다가 그대로 옮겨쓰는 불량한 학생이 여기에 있구만.”
“원래 어려운 문제는 답안지를 보고 베끼는 게 제맛이지.”
로엘의 타박에 르우벤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그리곤 앞장서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 * *
발걸음을 옮긴 일행의 눈앞에 드러난 것은, 백색과 흑색의 거대한 타일이 번갈아 깔린 널찍한 공간이었다.
거대한 공동 내에 사람 두 배 정도 되는 크기의 철제 조각상이 가득했는데, 반은 흰색으로 도금되어 있었고, 나머지 반은 흑색으로 도금되어 있었다.
경장을 갖추고 창을 든 병사들.
마치 성벽과도 같은 디자인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친 기사들.
사납기 그지없어 보이는 대형 전투마 위에 앉아 활을 든 궁기병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로브에 그럴듯해 보이는 스태프를 든 마법사들.
심지어 왕관을 착용하고 화려한 용포를 걸친 사내들과 티아라가 머리에 얹힌 아리따운 여인까지.
조각상 하나하나가 굉장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장엄한 광경에, 레인이 미간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저건 또 뭐야.”
“내 생각엔, 이거 체스판 같은데.”
“체스판 같은 게 아니라 체스판 맞아.”
로엘이 멍하니 중얼거리는 것을 르우벤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도전 기회는 두 번. 저쪽의 조종석에서 흑색 말을 조종하면 돼. 유적의 시스템으로 조종되는 상대를 이기기만 하면 되는 심플한 구조지.”
“지면 어떻게 되는데?”
“이 안에 있는 모든 조각상이 일제히 적으로 돌변하게 돼.”
“하나하나가 마법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 같은데.”
“어. 전생에 대충 견적을 내려 보니, 모든 개체가 적어도 초일류의 수준은 넘는 것 같더라고. 움직임은 좀 굼뜨지만 대신 방어력이 끝내주더라. 심지어 서로 유기적으로 진형까지 갖출 줄 알던데?”
체감상 초일류, 혹은 그 이상인 것들이 31개체나 되다니. 그리고 그게 겨우 하나의 관문에 배치된 것들일 뿐이라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로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전생엔 그냥 시험 안 치르고 전투를 벌여서 넘어간 모양이지? 이 녀석들의 전투력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시험 치르기 전에 몇 가지 확인차 하나를 건드려 봤어.”
시험을 치르지 않고 그냥 공격하면 반격해 오는지, 그리고 하나하나의 개체가 가진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르우벤이 속해 있던 용병대는 폰(Pawn) 하나를 골라 공격을 날려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끔찍했다.
유적의 방어 시스템이 작동, 무려 31개체에 달하는 초일류를 넘어서는 전력이 일제히 덤벼들었으니 말 다 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판단하에 실험을 감행했던 것이기에 용병대는 무사히 후퇴하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뒤로 시간을 두고 다시 되돌아온 용병대는 얌전히 시험을 치렀다. 용병대의 전력을 전부 동원해도 질 정도의 전력은 아니었지만, 큰 피해가 예상되었으니까.
“용병대에 천재면서 체스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친구가 하나 있었던 게 다행이었지. 그 녀석이 어떻게든 승리해 줘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거든.”
“체스 규칙은 일반 체스와 완전히 동일해?”
“어. 똑같아.”
“다른 점을 꼽자면 우리 측 말에 퀸(Queen)이 없다는 것 정도인가.”
그야말로 욕설이 나오는 핸디캡이었다. 다른 말도 아니고 하필 퀸이 없을 건 또 뭐란 말인가.
“사실 이번 공략에선 이 구간을 힘으로 돌파하려 했었지만…….”
르우벤이 로엘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잘 부탁해.”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지더라도 힘으로 돌파하면 되니까 부담 갖지 말고.”
“날 뭘로 보는 거야.”
로엘이 성큼성큼 조종석으로 향했다. 그가 자리를 잡고 서자, 어디선가 딱 인간만 한 크기의 조각상 하나가 나타나 상대측 조종석에 자리를 잡고 섰다.
“저쪽 조종석에 자리 잡은 조각상, 역사책에서 보던 대영웅과 비슷하게 생긴 것 같은데?”
“정답.”
“제작하면서 안 부끄러웠나?”
그렇게 유적의 시험, 체스가 시작되었다.
“시간제한은 없다고 생각하면 돼. 전생에 이곳을 통과할 때는 5시간 가까이 소요했는데도 별다른 일이 없더라고. 마음 편하게 먹고 천천히 해.”
“아니, 20분 안에 끝내주지.”
로엘이 픽, 하고 웃으며 폰(Pawn) 하나를 전진 배치시켰다. 거대한 조각상 하나가 그그긍 하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밀려 나갔다.
* * *
그 자신의 호언장담이 무색하지 않게.
로엘은 정확히 17분 만에 체스를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