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바엘른 마탑(3) (142/249)
  •  142화. 바엘른 마탑(3)

     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캉!

     레인이 신들린 듯 검을 휘둘렀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바늘들을 쳐냈다. 그러나 쳐낸 바늘은 대지로 떨어지지 않고 주변의 공간문으로 빨려 들어가 다른 공간문을 통해 재출현했다.

     무한히 쏟아져 나오는 바늘비. 심지어 튀어나오는 위치가, 날아드는 방향이 죄다 제멋대로다. 하나하나의 위력마저 낮지 않다.

     끝없는 소모전을, 상대에겐 어떠한 피해도 줄 수 없고 이쪽만 일방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소모전을 강요당한 레인이 사정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흡.”

     레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렇게 무력하게 모든 힘을 소진할 때까지 검만 휘두르다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바늘들을 쳐내며 한 걸음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로카인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발을 디딜 곳이 부족한 탓에 절로 움직임이 제한되었다. 그렇지만 레인은 초감각으로 그것을 극복해가며 한 걸음씩 착실히 신형을 움직였다.

     푹. 푹. 푹. 푹.

     레인의 몸에 바늘이 박혀 들기 시작했다. 도저히 모든 공격을 받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카인 쪽으로 다가갈수록 바늘비의 밀도가 높아졌다.

     공간의 틈에 숨어 이쪽을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는 로카인을 향해, 레인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수천, 수만 번 바늘을 쳐냈으나 계속해서 바늘이 그의 몸에 박혀 들었다.

     그나마 로카인이 위력을 조절하지 않았다면 박히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터였다. 온몸이 꿰뚫렸겠지. 지금만 해도 계속해서 내부가 진탕되고 있긴 했지만.

     레인도 로카인이 손속에 사정을 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 마법의 발현을 막지 못한 시점에서 게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 특유의 오기가 그 핑계로 항복을 선언하는 것을 납득치 못하게 했다.

     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캉!

     푹. 푹. 푹. 푹. 푹. 푹.

     레인이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몸에 박혀 드는 바늘의 개수가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로카인으로부터 다섯 걸음을 남겨뒀을 즈음.

    “…….”

     결국 로카인에게 닿지 못한 레인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채로 혼절했다. 수십 개의 바늘이 움직임을 멈춘 레인에게 추가로 박혀 들었다.

     로카인이 급히 마법을 거뒀다. 레인이 더 이상 데미지를 입지 않도록. 모든 바늘이 힘을 잃고 대지로 떨어져 내렸다.

     그가 무릎 꿇고 앉은 채로 혼절한 레인을 내려다보며 질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지막의 그건?”

     대련의 종반. 레인이 억지로 걸음을 옮겨 로카인을 향해 접근하던 때.

     그렇게나 압도적으로 몰아붙이는 상황이었음에도 로카인은 일순 그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기백에서 밀리고 말았다.

     그것은, 실질적인 무력의 강함이나 약함과는 또 다른 무언가였다.

    “정말로 어디까지 성장할지 궁금해지는군.”

     그가 혼절한 레인을 공간 마법으로 관객석으로 이송시키며 헛헛, 하고 웃었다.

     그렇게 세 소년과 로카인의 대련이 마무리되었다.

     * * *

     먼저 관객석에서 상처를 치료한 로엘과 르우벤이 레인을 치료했다. 몸에서 바늘을 빼내고 포션을 부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블파림과 가데른이 쑥덕쑥덕 이야기를 나눴다.

    “저것들이 정말로 전부 열다섯이라고?”

    “말이 안 나오는군.”

     정말로 놀라웠다. 어느 정도로 놀라웠냐면, 엘리제 파르테인의 불가해한 자질을 접했을 때보다도 놀라웠다.

    “마법을 심도 있게 파고 들은 녀석들이라면 그나마 좀 이해를 하겠는데, 저 셋은 그것도 아니라서 더 놀랍군.”

     마법사라면 십 대 중반에 초인의 반열에 이르렀다 해도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드물긴 해도 그런 괴물은 분명 출현하곤 했으니까.

     그러나 저들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심지어 한 사람은 무예를 수련한 인물이었다.

    “로엘의 경우엔 마법사긴 하지만 공방 마법밖에 익히지 않았지.”

     블파림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딱히 차별적인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공방 마법사는 초인의 대열에 들어서는 게 불가능하다는 지적을 한 것이지.

    “자네는 저 소년들 중 한 사람이라도 감당할 자신이 있나?”

    “날 뭘로 보는 건가? 저런 애송이들쯤은 간단히 제압할 수 있지.”

    “그런가? 난 자네만큼 자신하진 못하겠군.”

    “…….”

     약간 힘이 빠진 듯한 가데른의 발언에 블파림이 입을 닫았다. 자존심을 앞세워 호기롭게 승리를 장담하긴 했으나 사실 그 또한 그렇게까지 자신이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저들은 아직도 소년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장해 나갈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자신들과는 비교하는 게 우스운 일이리라.

    “뭔가 입맛이 쓰군그래.”

    “그러고 보니 엘리제가 안 보이는군.”

    “끝까지 다 보지도 않고 수련실로 돌아갔다. 무언가 생각이 많은 듯싶던데.”

     두 사람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캐틀린은 세 소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 정도였나?’

     로엘은 그녀의 아들을 살려준 은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그를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왔다. 최근에 그의 ‘일’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본인은 그렇다 치고 그 주변 인물들마저 이 정도의 실력자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의문이 생겨났다.

    ‘넌 대체 무슨 미래를 그리고 있는 거냐.’

     로엘이 거대한 세력을 일궈가고 있음을 캐틀린은 잘 알았다. 보이는 영역에서는 거대한 상단을,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는 무섭도록 그 크기를 불려가는 무력 집단을.

     거기에 저 괴물들까지 더해진다면 대체 어떤 결과가 도출될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

     그러고 보면 이전에 로엘에게 ‘앞으로도 웬만한 부탁은 전부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 약속이 어떤 식으로 되돌아올지도 상상이 가질 않았다.

     캐틀린은 슬며시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가만히 억눌렀다.

    “탑주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런 와중 로카인이 관객석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두 부탑주가 그에게 말을 붙였다, 그 소리에 캐틀린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헛헛. 어떻던가?”

     로카인이 수염을 쓸며 물었다. 두서없는 질문이었지만 다들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다.

    “굉장하더군요. 그 나이에 이룩한 경지라고는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친하게 지내두게. 그래 둬서 나쁠 것 없는 아이들이니.”

    “친하게라. 그 이상은 손을 쓰지 말라는 의미이십니까?”

     가데른이 물었다. 동시에 주변에 바람으로 이루어진 음파 차단막이 둘러쳐졌다. 세 마법사만을 감싸는 차단막이. 참고로 가데른의 부전공은 바람 계통 마법이었다.

    “…….”

     캐틀린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 이내 표정을 풀고 먼저 마탑으로 되돌아갔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에서 배제되는 일쯤이야 흔했다.

     블파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가데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챈 것이다.

     세 소년의 힘은 굉장히 위험했다. 이후 어떤 식으로든 대륙의 정세에 영향을 끼칠 거라 예상될 정도로.

     그런 소년들이 알아서 마탑으로 찾아왔다. 그러니 적당히 손을 쓰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든, 혹은 정략혼을 밀어붙여 얽어매든.

     실력이야 상당하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어찌 됐든 어린 소년들이다. ‘이쪽’의 경험까지 풍부하진 않을 테니 찔러볼 틈은 얼마든지 있을 터.

    “헛헛.”

     로카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들의 발언은 조금 도의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눈앞에 선 두 사람은 손익 계산에 민감한 마법사이자 거대 세력의 정점. 이런 종류의 발언에 주저함이 없는 이들이었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그게 당연하긴 했지만.

     로카인은 그들의 도덕적인 측면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경고하기로 했다.

    “손을 쓰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웬만해선 해를 끼치는 쪽으로는 가닥을 잡지 않는 게 좋을 걸세. 자네들을 위해서라도.”

    “어째서입니까?”

    “황제 폐하께서 저들에게 상당한 관심이 있으신 듯싶더군. 그리고 그 관심은 호의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 같았고.”

    “!”

     두 현자의 얼굴이 굳었다. 현 황제의 무서움은 제국민으로서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황제가 ‘호의’를 가진 대상은 전 대륙을 통틀어 몇 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황제가 이들 각성자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로엘 때문이다. 호의야 그들 모두가 마왕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됐고.

     로카인은 거대 국가기관의 수장인 만큼 엠페러 아이즈의 수장과 안면이 있었다. 그 덕분에 단편적인 정보는 전해 들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엠페러 아이즈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제국 내에서 세 소년에게 해를 입히는 게 어떤 결과로 되돌아올지를.

     여파가 작든 크든 좋은 결말을 기대하긴 어려울 터다. 그것을 두 현자에게 경고한 것이다.

    “…….”

     잠시 후, 음파 차단막이 소멸되었다.

     로카인이 두 현자를 지나쳐 먼저 마탑으로 향했다. 잠시 저들끼리 무언가 눈짓을 주고받던 두 현자가 그 뒤를 따랐다.

     걸음을 옮기며 로카인이 생각했다.

    ‘꼭 황제 폐하께서 저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문제만이 아니더라도 저 녀석들을 함부로 적대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 * *

     레인의 상처를 모두 치유시킨 로엘이 투기장을 떠나가는 현자들의 뒷모습을 힐끗 곁눈질했다.

     현자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가 한쪽 좌석에 교묘하게 숨겨진 크리스탈을 집어 들었다. 르우벤이 크리스탈의 정체를 알아채고 감탄했다.

    “메모리 크리스탈(Memory Crystal)?”

    “어.”

    “어쩐지. 왜 갑자기 감각 교란 아티펙트를 빌려달라고 하나 했더니, 그거 숨기려고 그랬구만.”

     로엘이 크리스탈에 걸쳐둔 팔찌를 르우벤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리곤 크리스탈을 기동시켰다. 그러자 한 가지 영상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친하게라. 그 이상은 손을 쓰지 말란 의미이십니까?]

     문제의 발언이 영상을 통해 흘러나왔다. 언뜻 듣기엔 별것 아닌 말이지만, 두 소년은 이 발언에 얼마나 높은 위험성이 잠재되어 있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이거, 이거. 무서운 영감님일세. 그런데, 넌 또 이걸 어떻게 알고 미리 크리스탈을 숨겨둘 생각을 다 했냐?”

    “그냥 느낌으로 알겠던데. 애초에 이분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기도 했고.”

     르우벤의 질문에 로엘이 가볍게 답변했다. 그는 이런 쪽의 눈치에 있어서 귀신같았다. 괜히 자진해서 제국의 어둠을 맡겠다고 나선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보아하니 탑주님이 경고를 해두신 덕분에 딱히 별다른 액션을 취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정말로 이쪽에 무언가 해를 끼친 건 아니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경고 정도는 해 두는 게 좋겠지. 어떤 방식으로 의사를 전해야 할지는 좀 고민해 봐야겠다.”

    “그 문제는 내가 맡지.”

     어느새 정신을 차린 레인이 상반신을 일으키며 말했다.

    “정신 좀 들어?”

    “그래. 온몸이 쑤시긴 한다만.”

     레인이 몸을 일으키던 중 한 차례 휘청였다. 그가 팔꿈치로 가까스로 상반신을 지탱하며 중얼거렸다.

    “크. 세상이 핑핑 도는군.”

    “그렇게나 피를 흘렸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누워 있어.”

    “괜찮아. 포션 기운 좀 돌면 금방 괜찮아질 테니.”

     레인은 한 차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옆에 놓인 포션 한 병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보다, 그 문제는 나한테 맡겨. 가볍게 경고하는 것 정도야 그렇게 어렵지 않으니까.”

    “그 몸 상태로는 힘들 것 같은데.”

    “아까도 말했지만, 이 정도야 조금만 있으면 다 회복될 거다.”

     레인이 상체를 천천히 난간에 기대며 한 차례 숨을 불어냈다. 로엘이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맡겨보지.”

     * * *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 레인이 바엘른 마탑에 조심스럽게 침입했다.

     그의 계획은 아주 간단했다. 두 현자의 숙소로 찾아가 머리맡에 몰래 두루마리 서신을 하나씩 두고 올 생각이었다. 애초에 레인이 세운 계획이 복잡한 과정을 내포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무려 마탑에 침입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미 난센스인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레인은 그다지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 자신감의 이면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그중 첫째는, 그 자신의 경지가 오르면서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게 된 신투(神偸)의 무공.

     신투는 중원제일도둑. 그의 은신술을 간파할 수 있는 이는 전 중원을 통틀어 극소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마탑은 용담호혈. 마법진을 비롯한 수많은 방해 요소가 결집된 장소였다.

     그러나 신투 또한 온갖 진법과 기관진식으로 보호된 보물창고를 털고 다녔던 인물. 그의 무공이라면 마탑에서도 충분히 먹힐 터였다.

     접근 대상이 로카인만 아니라면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 레인이었다.

     두 번째 요소는 바로 내통자의 존재. 물론 그 내통자는 로엘을 뜻했다.

     마탑 내부 구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전달받았다. 그리고 침입에 도움이 되도록 ‘약간’ 손을 써 줄 것을 요구했다. 그로써 레인의 잠입이 들통날 가능성은 더욱 낮아졌다.

     보통이라면 그 정도 도움만으로 마탑에 침입하는 게 수월할 리가 없다. 그렇지만 레인에게는 아니었다.

     레인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계단으로 이동했다. 승강기는 몰래 이용하기 불편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레인이 마탑 최상층부에 위치한 한 방문 앞에 섰다. 그가 괜스레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펼쳐 내용을 한 차례 훑었다.

    서신에는-

    [헛헛. 어떻던가?]

    [굉장하더군요. 그 나이에 이룩한 경지라고는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친하게 지내두게. 그래 둬서 나쁠 것 없는 아이들이니.]

    [친하게라. 그 이상은 손을 쓰지 말라는 의미이십니까?]

     -메모리 크리스탈에 기록되어 있던 대화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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