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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바엘른 마탑(1) (140/249)
  •  140화. 바엘른 마탑(1)

     헬튼 백작가 방문은 원만하게 잘 끝났다.

     레인은 자신이 말했던 그대로 르우벤에게 헬튼 백작과의 대련을 떠넘겼다. 레인과의 대련을 기대하고 있었던 백작은 처음엔 실망감을 표출했으나 막상 대련이 시작되자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르우벤은 온갖 방법으로 백작을 농락했다. 이런 종류의 강자가 존재할 거라곤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백작은 광소를 터뜨리며 덤벼들고 또 덤벼들었다.

     솔직히 실력을 놓고 보자면 르우벤이 위였다. 그러나 타고난 승부사인 백작은 르우벤이 질릴 때까지 덤벼들고 또 덤벼들었다.

     그는 르우벤의 다채로운 공격패턴에 완전히 매료되어 대련을 끝낼 생각 자체를 하질 않았다. 르우벤은 친선대련 와중 백작을 완전히 때려눕힐 수도 없고 해서 한참을 붙들려 있어야 했다.

     그 이후 세 사람은 적당히 하루를 머물고 백작가를 나섰다. 백작이 무리한 대련의 여파로 제풀에 앓아누운 덕분에 그들의 빠른 귀가를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백작가에 레인과 레이나를 내려준 이후, 르우벤은 미리 계획했던 대로 움직였다. 전생의 동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와이번을 타고 백작령을 떠났다. 밀리아가 따라붙었다.

     레인은 그동안 제자들을 돌보고 1팀 팀원들을 지도했다. 동시에 로엘이 남겨주고 간 학습 자료들을 토대로 행정학을 익혔다.

     카트란도 여러 차례 자극해 보았다. 그는 점점 내면의 자아와 소통이 원활해져 갔다. 요즈음은 간단한 대화도 가능해진 모양이었다.

     참고로 레이나와 셀린 두 사람을 1팀 팀원과 대련시켰더니 적당히 호각을 이뤘다. 초반엔 레인의 제자들 쪽이 압도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1팀 팀원들의 연계가 높아져 반대의 결과가 벌어지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르우벤이 두 명의 동료를 영입해서 데려왔다. 각각 이십 대 중반의 청년과 삼십 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사내 쪽은 정령사, 여인 쪽은 검사였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실력자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두 사람이 그들보다 한참 어린 르우벤과 반말을 터놓고 있었다.

    ‘아니, 용병업계에선 그렇게 특이한 일도 아닌가.’

     레인이 그런 심심한 감상을 떠올렸다.

    “자, 그럼 이제 대충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은 것 같은데.”

    “그래. 이제 슬슬 가야지.”

     일이 모두 마무리되었다고 여겨지자 일행은 짐을 쌌다. 물론 제국으로 향하기 위함이다.

     레인과 르우벤 일행을 포함해 카트란, 1팀 팀원들까지 모두 이동하기로 했다. 인원이 많은 만큼 와이번으로는 무리라 여겨 도보를 이용하게 되었다.

     * * *

     일행이 바엘른 마탑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흐른 후였다.

     오랜 여행이었지만 일행의 얼굴에 피로가 비치진 않았다. 제국에 들어선 이후론 로엘의 입김이 닿았는지 최대한 편의를 받으면서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와.”

     로엘이 일행을 마중 나왔다.

    “우리는 어디서 머물면 되지? 마탑 내에 거취를 정할 수는 없을 테고.”

    “그건 당연하지. 마탑 근방에 내가 세운 공방이 있는데, 건물 상층부가 비어있어. 거기에 짐을 풀면 돼.”

     소속 마법사도 아닌데 마탑 내에 머무르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건 로엘의 영향력이 있어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일행은 로엘이 세운 대형 공방을 보고 한 차례 감탄을 토해냈다. 어지간히 돈이 넘쳐나는구나, 하는 감상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숙소는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넓이만 제외하면 귀족 저택에도 그다지 꿇리지 않을 듯했다. 모두가 만족감을 표시했다.

    “조만간에 현대식 저택을 지어볼 생각인데, 최초 입주자는 너희들이 될 거야. 영광인 줄 알아.”

    “오오.”

     로엘이 각성자들에게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전생에 어떤 문명을 누리고 살았는지 아는 각성자들이 기대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 그럼. 지금부터는 뭘 하면 돼?”

    “하던 대로. 우선 아카데미 입학을 위한 공부부터 해야지. 너희를 가르칠 가정교사는 미리 섭외해 뒀다.”

     적당히 아카데미 출신 행정학도들을 물색해 두었다. 앞으로 그들이 레인과 르우벤을 맨투맨으로 가르치게 될 터였다.

    “그런데, 카트란 너도 입학하고 싶다고?”

    “응. 난 기사학부로 입학하려고. 일단 검술 실력을 가다듬고 싶어서. ‘그분’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했고.”

    “좋아. 학비는 있고?”

    “내가 지금 가진 게 없어서, 혹시 괜찮다면…….”

     카트란이 긴장한 얼굴로 우물쭈물 말했다. 그의 내면에 잠든 인물은 [어차피 상대는 네게 호의가 있고 돈도 넘쳐나니 부담 갖지 말고 부탁하라]고 했지만, 그 본인의 성격상 그게 쉽지가 않았다.

    “빌려줄게. 나중에 갚으면 돼.”

     로엘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한 인재를 돈으로 얽어맬 기회인데 이걸 놓칠 수야 있나.

    “그러고 보니 레인. 그 구음절맥 귀족 아가씨 대단하더라. 자질이 장난이 아니야. 그 짧은 기간 동안 부탑주님의 마음에 들어서 제자로 들어갔어.”

    “그 부탑주란 사람이 빙(氷)계 마법에 소양이 있는 모양이지?”

    “어. 그쪽 분야의 정점에 가깝지. 무려 현자인데.”

    “잘됐네.”

     잠시 이야기의 주제가 바뀌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일행의 대화는 앞으로의 일정 쪽으로 넘어갔다.

    “일단 레인 너에겐 앞으로도 내 직속 전투팀들의 훈련을 부탁할게. 르우벤 너는 틈틈이 인재를 끌어들여서 전력을 보강하도록 하고.”

    “그래.”

    “그리고 너희들이 좋아할 만한 소식 하나 가져왔다.”

    “?”

    “다 같이 대련 한 번 하자. 특별히 내가 힘 좀 써서 일정을 잡았지.”

    “대련? 상대는 누군데?”

     로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드리웠다. 이런 식으로 뜸 들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레인이 그를 재촉했다.

    “바엘른 마탑주.”

    “뭐?!”

    “무려 대륙 최강자 중 한 사람과 대련을 할 수 있게 된 거다. 어때?”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트란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르우벤이 눈을 연속해서 껌벅였다.

     그런 와중, 레인이 사나운 웃음을 흘렸다.

    “좋은데.”

    “너라면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지.”

     이내 르우벤도 재미있겠다며 큭큭 하고 웃음을 흘렸다. 카트란만이 나머지 각성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둘러보며 덜덜 떨었다.

     * * *

     바엘른 마탑주, 로카인 파르테인은 대륙에서 손꼽히는 초월자다. 세인들은 그를 가리켜 대륙 전역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라고 칭송하곤 한다.

     그렇지만 로엘은 그 평가조차 모자란 것임을 잘 알았다.

     겨우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가 아니다.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는 드는 인물이었다. 그 정도로 로카인 파르테인의 실력은 무시무시했다.

     그런 인간이 요 몇 년 동안 로엘에게서 현대 지구의 지식을 전수받았다. 안 그래도 뛰어난 실력이 그것을 바탕으로 더욱 진일보했다.

     심지어 최근엔 공간 마법이 담긴 아티펙트까지 르우벤에게서 양도받았다. 앞으로도 더더욱 진보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거 상대가 되려나.’

     로엘이 침을 삼켰다. 로카인 파르테인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아는 만큼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로카인이 각성자들끼리의 대련을 지켜보고 흥미를 가졌던 점을 이용해 대련을 주선하긴 했다. 그런데 막상 상황이 닥치자 너무 기분을 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선 곳은 도시의 명물인 대형 투기장의 중심. 로카인 파르테인을 중심으로 레인, 르우벤, 로엘이 포위하듯 늘어섰다.

     카트란은 결국 대련에서 열외되었다. 자신은 도저히 안 되겠다며 도망쳐버렸다.

    “헛헛. 이제 시작해도 되겠느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일 대 삼 대련이었다. 그것도 상대가 전부 초인이었다. 그럼에도 로카인의 얼굴은 여유로웠다.

    “자아. 그럼 시작하자꾸나.”

     로카인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레인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로카인의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카드드득!

     레인의 검격이 로카인의 어깨에서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거리를 남겨둔 채 정지했다. 마치 보이지 않은 벽에 가로막힌 듯.

     항시 로카인의 몸을 뒤덮고 있는 공간역장(空間力場)에 공격이 가로막힌 것이다. 로카인이 레인을 흘깃 돌아보며 웃음을 흘렸다.

    “……!”

     레인은 그로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섬뜩한 느낌을 전해 받았다. 그가 저도 모르게 훌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 * *

    “움직임이 좋군.”

    “로엘 저 녀석. 그 자신도 괴물이면서 친구도 괴물 같은 놈만 골라 사귄 모양이군 그래.”

    “…….”

     그 모습을 관객석에서 지켜보는 세 사람. 모두가 마탑이 자랑하는 초인들이었다. 그중 두 사람은 무려 바엘른 마탑의 부탑주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마탑을 수호하는 최강의 기사. ‘검성’, 캐틀린.

     빙계 마법을 극한까지 다루는 현자. 블파림.

     중력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현자. 가데른.

     탑주에게 도전하는 무모한 젊은이들이 있다는 이야기에 구경할 겸 찾아온 이들. 모두가 얼굴에 나름 흥미 어린 기색을 띠고 있었다.

     대체 탑주는 무슨 생각으로 그들의 도전을 받아들였는지도 궁금했고, 만용을 부린 소년들이 처참하게 깨지는 광경을 기대하고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탑주의 실력을 견식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조금 늦었습니다.”

     와중 관객석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이번 대련은 비밀리에 치러지고 있는 터라 주위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찾아올 수 있다는 건, 그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는 의미였다.

    “어서 오너라. 엘리제.”

    “여기 앉거라.”

     블파림과 가데른이 그녀를 반겼다. 그러나 그녀, 엘리제는 그들이 가리킨 자리 대신 캐틀린의 옆자리에 앉았다. 주책바가지 현자들 옆에 앉았다간 쓸데없이 시달려야 하니까.

    “이제 막 시작한 모양이네요.”

    “그래. 방금 막 첫 합을 주고받았다.”

     엘리제와 캐틀린이 정체 모를 압박감에 대치 상황을 유지하고 있는 세 소년을 둘러보았다.

    “보아하니 대련이 그리 길어지진 않을 듯하구나. 저렇게 겁먹은 걸 보면.”

     엘리제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지 않은 탓에 약간 불퉁해진 얼굴을 한 블파림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엘리제가 그를 흘깃 돌아보며 말했다.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하겠죠.”

    “왜, 저놈들이 뭔가 대단한 걸 보여주기라도 할 것 같으냐?”

    “얼마 전에 메이엘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된 적이 있는데, 그녀가 그러더군요. 외유를 다녀오면서 로엘의 친구들을 보고 왔다고.”

    “?”

    “그 친구들이 모두 초인의 영역에 이른 괴물들이라고 하더군요. 심지어 로엘 본인도 그동안 초인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전투력을 길렀고요.”

    “나도 그 이야기는 들었지.”

     가데른이 턱을 쓸며 답변했다. 사실 대련을 구경하러 나온 이유엔 소년들의 실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믿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저들 전원이 초인의 영역에 이른 강자들이라니. 정보를 전해온 인물이 믿을 수 있는 인물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애초에 상식을 벗어난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확인하러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어린 것들이 죄다 초인이라고?”

     반면 요즈음 새로 들인 제자 가르치는 일에 푹 빠져 대외적인 활동을 등한시 해온 블파림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캐틀린만이 표정을 살짝 굳혔다. 그녀는 이전에 로엘의 실력을 확실하게 견식했기에 엘리제의 말을 허투루 넘길 수가 없었다.

     엘리제가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러 왔습니다. 메이엘이 허언을 하는 성격은 아니지 않나요.”

    “확실히 그 녀석이 좀 괄괄하긴 해도 허언을 내뱉진 않지.”

     가데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구경이 될지도 모르겠군.”

    “저 어린놈들이 죄다 초인이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는 건가? 자네는?”

     블파림이 여전히 불신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가데른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거야 지금부터 눈으로 확인하면 될 일이지.”

     그 말과 동시에 세 소년이 움직임을 취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화려한 장신구로 온몸을 도배한 소년이었다.

     * * *

    “이렇게 눈치만 봐서 뭘 하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부딪쳐야지.”

     르우벤이 그렇게 말하며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말과는 다르게 우선 원거리 공격으로 간을 볼 생각이었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용의 포효가 대기를 쩌렁쩌렁하게 뒤흔들었다. 르우벤이 무슨 일을 벌일지 미리 알고 있던 레인과 로엘은 내력으로 귀를 보호했다.

     로카인이 살짝 놀란 눈을 했다. 르우벤이 이런 공격을 할 줄 몰랐다기보단, 갑작스레 터져 나온 압도적인 음량에 움찔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그는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았다. 음파 공격마저 확실하게 차단해주는 공간역장이 있었으니까.

     곧바로 레인과 로엘이 다음 행동을 취했다. 레인이 다수의 검강을 사출하고, 로엘이 포격을 날렸다.

     쾅! 콰쾅! 콰드드드드!

     그 모든 공격이 역장에 가로막혔다.

     다만 이번 공격은 나름 성과가 있었다. 역장에 금이 갔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에 거미줄처럼 균열이 번져 있었다.

     충격량이 일정 이상 누적되면 깨지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세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스슥.

     균열이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췄다. 자가 복원력까지 있는 모양.

    “이번엔 이쪽이 공격하도록 하마.”

     로카인이 한 손으로 수염을 쓸며 다른 손으로 작게 원을 그렸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가운데가 뚫린 원반 형태의 파장이 생겨났다.

    “!”

     예전에 본 적이 있는 마법이다. 레인이 급히 소리쳤다.

    “뛰어!”

     레인과 로엘이 급히 신형을 띄웠다. 르우벤이 아티펙트를 발동시켜 날아올랐다.

     그리고 마법이 사방팔방을 잠식해 들어갔다. 방대한 범위가 마법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촤아아아악!

     투기장의 구릉 지대가 단숨에 썰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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