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빌헬름 공작가(3)
공작이 처음으로 신형을 비틀거렸다. 지근거리에서 터져 나온 포효에 반고리관이 충격을 받은 것이다, 레인이 곧바로 신형을 뺐다. 그리곤 공작의 배후로 돌아갔다.
“윽.”
공작이 반응하려 했으나 아주 미세하게 레인이 빨랐다. 그가 공작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터엉!
강렬한 일장에 공작이 튕겨 날아갔다.
공작과 같은 부류의 상대라면 검격보다 이런 종류의 공격이 더 효율적이었다. 공작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콱! 콰과과곽!
공작이 공중에서 신형을 억지로 뒤틀어 바로 세웠다. 그녀는 바닥에 길게 족적을 남기고서야 밀려나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후우.”
그녀가 길게 숨을 불어냈다. 그러더니 뻑뻑한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어깨도 몇 차례 휙휙 돌렸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레인은 그녀가 약간 열이 오른 상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이마에 살짝 혈관이 불거져 있었다.
‘더럽게 튼튼하군.’
레인이 내심 혀를 찼다. 이번 교전에선 처음으로 확실한 이득을 거뒀다. 그런데 그게 정말로 이득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것이, 상대가 너무 멀쩡했다.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닐 터였다. 다만 그녀의 경지가 높은 만큼 그 정도 충격으로는 움직임에 제약을 가할 수 없는 듯했다. 크레틸 자작이 상대였다면 충분히 효과를 봤을 텐데.
이래서야 상대가 약이 바짝 올랐을 뿐이다. 앞으론 더더욱 힘들어지지 않을까.
‘자, 와라.’
레인이 눈을 깊게 가라앉혔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는 질적으로 다른 공격이 쏟아져 나올 것임을.
공작이 검을 길게 휘둘렀다. 상당히 떨어진 거리였음에도.
콰드드드드!
공격을 막아낸 레인이 길게 족적을 남기며 밀려났다. 생각대로의 강렬한 일격이었다.
‘의형강기.’
그것은, 의형강기(意形降氣). 초인조차 넘어선, 초월자들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기술.
초일류의 경지에 이르면 강기를 형성시키는 게 가능해진다.
초인의 경지에 이르면 강기의 응용 폭이 넓어지고 그것을 압축하는 게 가능해진다.
그리고 초월자의 경지에 이르면 강기를 마음 가는 대로, 원하는 대로 변형시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시전자가 뜻을 세우면 그것이 그대로 무기에 반영되는 것이다. 그것을 어떤 이들은 ‘심검(心劍)’의 경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방금 전 공작이 행한 일은 간단했다. 강기를 채찍처럼 뽑아내 레인을 향해 휘둘렀을 뿐이다. 그녀의 검은 검이되 더 이상 검이 아니었다.
‘전생에 나도 참 유용하게 써먹었던 기술인데.’
레인이 저릿저릿한 팔을 털어내며 생각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생엔 지금처럼 수많은 무구를 그림자 속에 보관하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의형강기로 검 이외의 무구를 형상화시켜 전투에 사용하곤 했다.
‘이거 일일이 받아치긴 힘들겠군.’
무형검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강기의 밀집도도 상당히 높았다.
강기에 의념을 싣는 경지에 이른 공작의 공격이다. 위력이 높은 것이 당연했다.
‘발에 땀 나도록 뛰어다녀야겠군.’
맞부딪치는 일은 최소한도로 줄이고 속도전으로 밀어붙여야 했다. 레인이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지더니 공작의 주위를 빠르게 맴돌기 시작했다.
* * *
흔히 초일류의 경지에 이르면 거리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고들 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검강을 형성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을 외부로 발출시킬 수도 있게 되니까.
그렇지만 그것을 진정한 의미의 ‘극복’이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 그것은 초일류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여전히 근접전을 선호하는 대다수 검사들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유야 간단하다. 발출된 검강은 그저 직선으로 날아갈 뿐이기 때문이다.
암만 실력 있는 무예가라도 직선적인 공격만으로 상대를 제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것은 레이나 정도쯤 되는 재능을 가져야만 가능하다.
결국 대부분의 검사는 직접 검을 휘두르는 전투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접근전을 베이스로 중간중간에 장거리 공격도 날리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월자는 진정으로 거리의 제약을 극복한 이들이다. 그들이 날리는 검강은 직선적이지 않다.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화하고 궤도가 뒤틀리며 위력이 조절된다.
그렇기에 그 경지에 이른 자들은 그에 이르지 못한 자들을 발아래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천외천(天外天)이라 불린다.
그런 초월자를 상대하게 된 레인이다. 현재 그는, 치미는 욕설을 참아내느라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젠장, 이거 경지 낮은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절대 열다섯에 초인의 경지에 오른 이가 할 법한 생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레인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치 가위바위보에서 상대에겐 세 가지 선택지가 있는데 이쪽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는 기분이라고 할까. 수 싸움에서 완전히 밀리고 있었다.
레인은 그야말로 신들린 듯한 움직임을 선보이는 중이었다. 온몸의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채 일순간도 신형을 멈추지 않고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니에라 공작은 그저 제자리에 선 채 모든 공격을 덤덤히 걷어냈다. 그리곤 중간중간에 기습적으로 의형강기를 날렸다.
쾅!
“크읍.”
공작 특유의 검법이 그대로 녹아든 강기의 폭풍. 감각을 속이고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강기 하나를 레인이 억지로 신형을 뒤틀어 쳐냈다.
정면에서 다가오다 궤도가 꺾여 측면에서 날아들고. 직선을 그리며 날아드는가 싶었더니 갑자기 반원을 그리며 날아들고.
그야말로 눈이 핑핑 돌아가는 공격들이었다.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레인은 공격을 받아낸 반동으로 곧바로 몸을 빼고 다시 가속했다. 가속, 가속, 가속.
이기어검이 공작의 뒤를 노렸다. 빠른 템포의 검격이 쉴 새 없이 공작을 몰아쳤다. 그러나 공작에게선 일말의 흔들림도 엿보이지 않았다.
“이것도 받아낼 수 있을까?”
공작이 거진 수십에 달하는 강기를 사방으로 뿜어냈다. 검강 하나하나가 모두 중간에 궤도가 비틀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공작을 중심으로 주변이 완전한 지옥으로 화했다.
그게 한 번으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 공격을 연속으로 내지르길 다섯 번. 검강의 총 숫자만 세 자릿수를 넘어섰다.
“흑아, 검.”
레인이 그림자로부터 검 한 자루를 더 뽑아냈다. 이기어검도 불러들여 주변으로 배치했다. 그리곤 신들린 쌍검술을, 아니 삼검술을 선보였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콱!
감각을 한계까지 동원해 날아드는 공격을 쳐내고 흘려내고 막아냈다.
모두 받아낼 수는 없어 전신에 무수히 상처가 생겨났지만, 움직임에 지장을 줄 정도의 부상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직접 보고서도 믿기가 힘든 기예였다.
“굉장하구나. 그걸 무사히 막아낼 줄은. 그렇지만 뒤가 비었다.”
“…….”
그러나 겨우 공격을 막아냈나 싶었더니 공작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레인이 인상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공작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다. 알고서도 그녀가 배후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순전히 경지의 차이로부터 빚어진 결과라 입맛이 썼다.
“이렇게 했던가?”
공작이 레인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곤 진각을 밟았다.
터엉!
레인이 입가에서 선혈을 뿜으며 날아갔다. 방금 전 공작에게 먹인 일격을 그대로 되돌려 받은 것이다.
‘검격을 내지를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익숙하지 않은 장법으로 타격을 입히다니. 공작도 그리 성격이 좋지만은 않군.’
레인이 그런 생각을 하며 대지에 추락했다.
이내 그가 바닥에 손을 짚고 신형을 세웠다. 곧바로 몸을 일으켰던 공작과는 달리 약간 힘겨운 얼굴이었다.
“여기까지 할까.”
공작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납검하려 했다.
레인은 일반적인 검성과는 달랐다. 방금 전 일격으로 상당한 데미지를 받았을 터. 그 몸으로는 더 이상 승산이 없을 터였다.
“계속 가겠습니다.”
그러나 레인은 다시 검을 들었다. 눈동자에 독기가 가득 들어찬 상태였다. 공작이 납검하려던 손을 멈칫했다.
레인이 공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오히려 아까보다도 빨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공작이 피식, 하고 한 차례 웃었다. 이내 두 사람이 만들어낸 소음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 * *
“…….”
스테반이 말을 잃고 두 사람의 대련을 응시했다. 뒤늦게 도착한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대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역시 왕국제일검사라고 해야 하나. 정말로 괴물이구만.”
르우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옆에서 레이나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레인을 쫓았다.
스테반이 그런 레이나를 살짝 곁눈질했다. 그리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저자를 사랑하는 모양이구나.’
그와의 압도적인 격차에 이미 한 차례 좌절감을 맛봤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느껴지는 좌절감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은 어째서일까.
주로 그가 그녀를 주도적으로, 약간은 강압적이다 싶게 대하는 것을 보고 혹시나 했다. 그러나 자신에겐 애초부터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생각을 굳이 지금에 와서야 떠올리다니, 나도 굉장한 속물이로군.’
스테반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와의 격차를 절실하게 느낀 지금에서야 포기할 마음이 들다니 어지간히 옹졸한 마음이었다.
어차피 속으로만 생각한 일이라 딱히 책망할 사람도 없건만, 스테반은 자신을 자책했다. 기본적으로 그는 굉장히 성실한 성격이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런가. 감정을 통제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는데.’
애초부터 두 사람이 연인임을 밝혔음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은, 자신이 상대 남성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의미 없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동화책에서 간혹 봤다. 저 혼자서 괜히 질투심을 불태우는 등장인물들. 그치들을 비웃곤 했건만 자신도 그들과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털어내자.’
스테반은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만 손해를 보게 되는 미련이다. 되도록 빠르게 털어내는 것이 좋으리라.
그가 다시 공작과 레인의 대련 장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두 사람의 대련으로부터 되도록 많은 것을 배워둬야 할 때였다.
* * *
두 초인의 대련은 그로부터 30분이 더 지나서야 끝을 맺었다.
물론 승자는 공작이었다. 그녀가 가볍게 숨을 불어내며 납검했다. 반면 레인은 바닥에 대자로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허억, 허억.”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머릿속으로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가진 힘을 완벽하게 수습하고 기량을 조금만 더 끌어올린다면, 대련이 아닌 실전에서는 승산이 있을지도.’
무려 초월자를 상대로 승산을 점치고 있는 그였다. 그 생각을 누군가 들었다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리라.
레이나가 그런 레인을 향해 달려갔다. 포션과 수통, 그리고 물에 적신 수건을 챙겨서.
그녀가 한참 레인을 돌보는 동안, 공작이 제자들 앞에 다다랐다.
“수고하셨습니다. 스승님.”
“그래, 감상은 어떻더냐.”
“굉장했습니다.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니. 자신감을 잃을 것까진 없다. 넌 충분히 재능이 있으니까. 다만 저 녀석이 정말로 규격 외의 괴물일 뿐이지.”
“그 괴물은커녕 그자의 제자에게조차 패배한 참이라 그리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군요.”
“그것도 그런가.”
공작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서, 좌절하고 포기할 테냐?”
“아니요. 끝없이 정진해서 언젠가 반드시 저들과 동일선상에 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공작이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계획과는 좀 다르지만, 확실히 제자가 좋은 쪽으로 영향을 받았다. 그 특유의 성실한 성격상 뭐가 어찌 됐든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녀가 제자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몸을 풀어두어라. 휴식을 좀 취한 뒤에 그가 약속대로 너희의 수련을 지도해 주기로 했으니까.”
“저 몸 상태로 말인가요?”
제자들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딱 봐도 한계에 다다른 모습이거늘.
“하루 정도는 휴식을 취하고 움직일 것을 권해보긴 했다만. 본인의 입으로 금방 회복할 수 있다고 하니 어쩌겠느냐.”
그녀의 말대로, 레인은 얼마 있지 않아 신형을 일으켰다. 물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포션을 이용한 치료, 그리고 운기행공 덕분이었다.
그날 공작의 제자들은 지옥을 보았다. 마치 공작에게 당한 것을 되갚기라도 하듯 레인이 혹독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작이 입가에 쓴웃음을 그렸다.
공작의 저택에 며칠 정도 머물며 그녀의 제자들을 지도해 준 뒤. 레인은 곧바로 공작가를 나섰다. 뭘 그리 급하게 떠나느냐고 공작이 핀잔했지만, 적당히 둘러댔다.
떠나기 전에 미르나가 질문해왔다. 참고로 미르나는 스콜피온을 무너뜨리면서 도움을 준 여인의 딸의 이름이었다.
“어떻게 하면 레인 님처럼 강해질 수 있나요?”
“열심히 수련하면.”
레인은 굉장히 정석적인, 그러나 영혼 없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나 미르나는 그것을 굉장히 진중한 얼굴로 받아들였다.
“노력하겠습니다.”
이후 레인 일행은 와이번을 타고 바로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헬튼 백작이 거주하고 있는 수도로.
이동 도중 르우벤이 레인에게 물었다.
“헬튼 백작하고도 대련할 거야? 친분을 쌓기 위해?”
“아니. 힘들어.”
동공 수련자들은 쓸데없이 터프했다. 물론 헬튼 백작이 니에라 공작처럼 힘든 상대는 아닐 터였지만, 설사 대련일지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레인은 조금 쉬고 싶었다.
그렇다고 헬튼 백작과 친분을 쌓기 위한 다른 방도를 생각해낸 것은 또 아니었다.
“그럼?”
“네가 대신해.”
“엥?”
“네가 헬튼 백작과 대련하라고.”
레인이 자신의 일을 뻔뻔하게, 무책임하게 르우벤에게 떠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