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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빌헬름 공작가(1) (137/249)

 137화. 빌헬름 공작가(1)

“축하한다.”

 레인이 나뭇등걸에 기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는 셀린에게 말했다. 방금 전 대련에서, 그녀는 결국 벽을 넘어섰다.

“그래, 새로운 경지에 발을 들인 감상은?”

“감상은 잘 모르겠고. 죽도록 힘들어. 사부 때문에.”

 무아지경의 와중에 경지가 오르긴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유도하기 위해 레인은 셀린을 유난히 혹독하게 밀어붙였다. 셀린의 입장에선 치가 떨릴 정도로.

 그러나 레인은 미안해하는 기색이나 반성하는 기색을 눈곱만큼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한 차례 피식, 하고 웃었을 뿐.

“조만간에 로엘 녀석이 남기고 간 전투팀과 대련을 하게 될 거다. 그때 네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될 테지.”

“일단 좀 쉬자. 사부.”

“그래. 쉬어둬.”

 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 다음 일을 처리해야지.’

 그는 곧바로 레이나를 호출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르우벤을 찾아갔다.

 * * *

“어서 와라.”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전하.”

 니에라 공작이 레인과 레이나, 그리고 르우벤을 반겼다. 레인이 미리 레이나가 일러줬던 말을 그대로 답습해 대표로서 예를 표했다.

“만찬이 준비되어 있다. 함께 식사나 하자꾸나.”

 니에라 공작은 일행을 이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르우벤은 딱히 초대한 손님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일행이 식당에 들어서자 먼저 앉아있던 다섯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젊은, 혹은 어린, 남녀가 뒤섞인 무리였다.

“내 제자들이다. 서로 통성명부터 하지.”

“부족하지만 공작 전하께 지도를 받고 있는 스테반 빌헬름이라고 합니다.”

 공작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각자 자신을 소개하는 다섯 남녀. 모두가 빌헬름 가에서 엄선한 재능 있는 자들이었다. 레인 일행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소개했다.

“하슨 백작가의 장녀, 레이나 하슨입니다.”

“레인입니다.”

“르우벤입니다.”

“통성명은 이쯤 하고. 자리에 앉을까?”

 니에라 공작이 살짝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상석에 자리하고 레인 일행과 공작의 제자 일행이 테이블을 기점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이런 이유로 부른 건가.’

 레인은 공작이 자신들을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왕국의 초신성과 미리 친분을 다져두려는 의도에 더불어, 그녀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한 용도로 이쪽을 이용할 생각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이상하게 다섯 제자 중 한 사람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긴 한데 명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쪽이 낯익은 것은 상대측에서도 마찬가지인 듯, 그녀 또한 놀란 표정으로 눈을 껌벅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니에라 공작이 캐치하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였나?”

“아 네. 가주님. 예전에 저분에게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

 레인이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확실히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반면 자신은 뭔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한데 그 형태가 명확하게 잡히질 않았다.

“이전에 저와 제 어머니가 가문을 떠나 헤이슨 자작령에 거주하던 때에…….”

“아, 그때 그 꼬마.”

 소녀의 발언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녀의 정체에 대해 확실히 알아낸 레인이 손가락을 튕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분명 스콜피온이라는 조직을 쳐부쉈을 때, 그곳에서 구해낸 여인의 딸이 저렇게 생겼었다. 그 여자가 빌헬름 가에 속한 인물이었을 줄이야.

 그러고 보면 그때 받은 쪽지에 적힌 주소가 이 근방이었던 것 같았다. 찾아갈 생각이 없어 반쯤 잊고 있었지만.

“그랬었군.”

 니에라 공작은 입가에 살짝 흥미로운 웃음을 드리웠다.

 그 이야기는 이미 들은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방계 중에서도 끄트머리에 위치한 가솔 한 사람의 가출 따윈 그리 기억할 가치가 없지만, 그것이 제자와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일이 레인과 관련되어 있는 일이었을 줄이야. 그와 이쪽 사이에 이런 의외의 접점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때엔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그 당시엔 제가 어려서 제대로 감사를 표하지도 못했지요. 이렇게 다시 만나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녀는 ‘그 당시엔 제가 어려서’라고 말했지만, 그래 봐야 2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그 숫기 없던 소녀가 이렇게 격식 있는 귀족 영애로 변했을 줄이야. 가히 환골탈태라고 할 수 있었다.

“혹시 그쪽의 아름다운 영애께선 올해로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런 와중 한 청년이 레이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방금 전 자신을 스테반이라고 소개한 인물이었다. 얼굴이 상기된 것이 영락없이 한눈에 반한 눈치였다.

“올해로 열일곱입니다.”

“저는 21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누가 묻지도 않았건만 자신의 나이를 밝히며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청년.

 레인의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그리고 그는 그런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성격이었다.

 레인이 옆자리에 앉은 레이나의 얼굴을 붙들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

 영문도 모르고 머리를 붙잡힌 채 끌려간 레이나는 이내 입술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눈을 크게 떴다.

 충족감이 느껴지기에 앞서 당황스러운 감정이 밀려왔다. 장소가 장소이지 않은가. 무려 공작 전하의 면전에서,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입술이 떨어졌다. 레이나가 혼란에 찬, 그러나 동시에 아쉬워하는, 그런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레인은 스테반을 돌아보며 선언했다.

“내 거다. 쓸데없이 찝쩍거리지 마라.”

“……!”

 레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에라 공작이 웃음기 어린 감탄사를 토해냈다. 그녀의 제자들이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르우벤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허리를 굽히고 숨죽여 웃었다.

 스테반의 얼굴이 일순 멍청하게 풀어졌다. 그것도 잠시, 그가 이내 질투심에 가득 찬 눈으로 레인을 노려보았다.

“뭘 봐.”

 레인은 태연하게, 뻔뻔하게 대응했다. 반면 옆자리의 레이나는 뒤늦게 부끄러운 감정이 몰려와 얼굴이 벌게졌다.

 이내 공작이 시녀들에게 음식을 들이도록 지시했다. 테이블 위에 산해진미가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일행은 곧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모두가 격식 있게, 품격 있게 식사에 열중했다. 단 두 사람, 레인과 르우벤만 빼고.

‘통성명할 때부터 눈치채긴 했지만, 평민이 확실하군.’

 스테반이 레인을 힐끗 곁눈질하며 생각했다.

 게걸스럽게 먹는 정도는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품위라고는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그 옆에서 잔잔한 모습으로 식사하고 있는 레이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확실히 잘 생기긴 했지만! 나름 호남형인 자신조차 오징어로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으로 잘 생기긴 했지만!

 그런 와중 스테반의 스승, 빌헬름 공작이 레인에게 물었다.

“식사를 마친 뒤엔 내 제자들을 한 번 지도해 주었으면 하는데, 부탁 좀 해도 될까.”

“이렇게 멋진 식사를 대접해 주셨으니 저 또한 답례를 해야겠지요.”

 레인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사실 옆에서 레이나가 소곤소곤 일러준 말을 그대로 읊은 것에 불과했지만.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의 의미를 곱씹던 스테반이 놀란 얼굴로 그의 스승을 돌아보았다.

“지도해 주다니요. 저자가 저희보다 실력이 뛰어나기라도 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빌헬름 공작의 단언에 스테반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자도 스승님처럼…….”

 노회한 육신을 경지에 이른 육체제어 능력으로 되돌린 것이냐고, 스테반은 그렇게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 질문이 끝을 맺기도 전에 빌헬름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는 겉으로 보이는 나이와 실제 나이가 일치한다.”

 스테반이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소년은 잘 쳐져도 이제 막 성년에 들어섰을 나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초일류의 벽을 뚫은 자신보다 경지가 높다니?

 그의 눈에 서린 강한 불신의 기색을 읽어낸 빌헬름 공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레인을 돌아보았다. 레인은 스테반을 시큰둥한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레인은, 이내 레이나를 돌아보며 툭, 하고 내뱉듯 물었다.

“왕국 유일 검존의 제자와 대련 한번 해 볼래?”

 * * *

 스테반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무기를 점검했다.

 갑작스러운 레인의 발언에 스테반은 당연히 반발하려 했다. 곧바로 따라붙은 빌헬름 공작의 말만 아니었다면.

[그것도 괜찮겠군.]

 스테반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자신은 동년배 중 최상위에 랭크될 정도의 실력을 지닌 인물. 보다 어린 여인과의 대련은 이기고 지고를 떠나 그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그는 이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레인을 신경질적으로 한 차례 흘겨보았다. 정작 그 본인은 이쪽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스승님과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 그래도 아주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스테반은 그나마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현재 자신의 눈앞에 마주 선 채 검을 든, 지금까지 보아온 그 어느 여인보다도 아름다운 백작 영애. 그녀에게 확실히 자신의 실력을 선보이기로 마음먹었다.

“자아. 시작!”

 잠시 후, 모두가 관전하는 가운데 두 사람의 대련이 벌어졌다. 선공은 레이나가 취했다.

‘검로가 너무 정직하군.’

 스테반은 그녀의 공격을 어렵잖게 걷어내며 내심 피식, 하고 웃었다. 기교나 기예 같은 것은 일절 보이지 않는, 굉장히 충실한 검격.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하긴 하지만 받아내기 어렵지는 않다. 몇 번 더 공격을 받아내다 보니 그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간결한 공격이 전부라면, 어렵잖게 이길 수 있다.’

 스테반이 자신감에 찬 미소를 흘렸다.

“결과가 훤히 보이는군.”

 그리고 레인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저 재능을 저런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대했다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집어삼켜지게 된다.

 레인의 예상대로, 스테반의 자만심이 깨어지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 어라?’

 스테반은 당황했다. 그는 왜 자신이 밀리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상대의 공격은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대처할 방법도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몸이 받쳐주질 않았다.

‘어째서?!’

 미묘하게, 아주 미묘하게 상대의 검격이 자신을 앞섰다. 이쪽에 비해 월등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하게 내지르는 검격인데 이쪽의 ‘타이밍’을 앗아가고 있었다.

‘이, 이게 가능해?!’

 스테반은 크게 당황했다.

 필살 검초를 사용해도 상대는 이미 공격 범위 바깥에 위치해 있었다. 상대를 밀어내고 자신을 추스르기 위한 강맹한 검격을 내질러도 그 특유의 단순한 검로로 가볍게 받아 쳐내버렸다.

 그야말로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상황.

‘단순한 검술밖에 구사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단순한 검술만으로 그 어떤 검술도 격파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검술을 익히지 않은 거야!’

 뒤늦게 레이나 하슨의 무시무시한 재능을 알아본 스테반은 경악했다.

 수많은 대련을 경험해 봤다. 여러 타입의 적을 상정해 가상전투를 그려봤다. 그러나 맹세코 이런 타입의 상대는 경험해 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저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는 검격일 뿐이다. 일체의 흔들림도 없는 검격일 뿐이다. 일체의 망설임도 없는 검격일 뿐이다.

 기계가 아닌 인간이 휘두르는 검이기에 존재해야 할 손실이, 그녀의 검격에는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기에 단순한 논리가 적용된다.

 상대와 동시에 검을 출수해도 상대에게 공격이 닿는 타이밍이 살짝 빠르다. 단지 그뿐.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전투의 흐름을 자신에게로 끌어오는 게 가능하다. 강탈해오는 것이 가능하다.

‘이게 대체.’

 스테반이 심적으로 부담을 크게 느낄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손발은 점점 어지러워지고, 뒷걸음치는 횟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를 악물고 검강을 구현시켜 필살의 일격을 날려보았으나 상대도 마찬가지로 검강으로 대응해왔다. 놀랍게도 저 나이에 이미 초일류의 경지에 이른 강자였던 것이다.

‘크윽!’

 스테반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 * *

“으응?”

“왜 저렇게 밀리시는 거지?”

 대련을 구경하던 니에라 공작의 제자들이 의아한 목소리를 흘렸다. 레이나의 재능이 가진 무서움은 직접 겪지 않고 멀찍이서 보는 것만으로는 알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니에라 공작은 알아볼 수 있었다. 레이나 하슨의 이해 불가한 자질을. 그것의 위험성을.

 자신의 경지에 한참 못 미치는 이들의 대련이지만, 그녀는 그 대련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위험한 재능이로군.”

“그녀가 지금의 경지에서 한 단계만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이 나라의 초인들 중 그녀를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은 공작 전하 정도밖에 남지 않게 될 겁니다.”

 레인이 훗, 하고 자부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니에라 공작은 그 말에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녀 또한 정말로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지?”

“?”

“저 재능을 알아보고 개화시킨 장본인이자 15살의 나이에 벌써 초인의 경지에 발을 들인, 너는 어떠냐는 말이다.”

 처음 대면했을 때만 해도 놀랐다. 십 대 중반에 초인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 있을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 인물이 키워낸 인재마저 심상치가 않았다. 이쯤 되니 상대에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일정 이상의 관심’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인이 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레인의 물음과 동시에 제자들의 대련이 마무리되었다. 관전자들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허.”

“끝났네.”

 스테반의 검이 주인의 손을 벗어나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스테반이 멍한 시선으로 그것을 뒤쫓았다. 레이나가 담담하게 검을 검집에 갈무리했다.

“…….”

 빌헬름 공작이 레인을 응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근처에 서 있던 르우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녀와 레인을 번갈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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