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정비(6)
세 각성자의 대련은 굉장히 격렬했다. 결국 혼절하고만 파르엘을 구경꾼들이 서 있는 곳으로 치워둔 뒤론 마치 지금까지의 대련이 장난이었다는 듯 확 달라진 움직임을 선보였다.
“칼비오가 자격지심을 느낄 만도 하네. 로엘 녀석도 이전보다 훨씬 강해지긴 했는데, 나머지 둘은 그보다 더한 것 같아.”
“상당히 잘 버티네요. 1:1:1이란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어요. 줄타기를 잘한다고 해야 하나.”
“…….”
마탑 인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가운데, 그리든만이 침묵했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레인에게 내뱉듯 말한 문장을 머릿속으로 되새기고 있었다.
[무시하지 마라. 검사 따위가.]
그 발언의 이면에는, 자신이 ‘마법사’라는 선택받은 존재라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엔 굉장히 공허하게 느껴지는 알량한 자부심이.
‘나는 오만했다.’
그는 인정했다. 그 자신의 오만함을. 지금까지 자신이 타인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잘못되어 있었음을.
‘나를 뛰어넘는 자질을 가진 자는 세상에 저렇게나 많았다.’
그런데 몇 번의 좌절을 겪고서도 자신보다 아래인 자들을 상기하며 우월감에 젖어 있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죽도록 노력했어도 모자랐을 텐데.
‘그저 그런 삶을 영위하는 것은 지금 상태로도 괜찮다. 그러나 정점에 서기 위해선 지금과는 달라져야 한다.’
그리든의 내면에 거센 풍랑이 일었다. 칼비오가 느낀 것과 같은, 아니, 칼비오가 느낀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충격이 내면을 휩쓸었다.
앞으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다. 목적 없이 방황하고 있는 주제에 타인에겐 오만했던 지금까지와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올곧게 정진할 것이다. 정점에 서게 될 때까지. 스스로 만족할 만큼의 결과를 성취해낼 때까지.
‘…….’
그리든은 대련을 끝까지 구경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곤 백작성 쪽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야, 어디 가?”
메이엘이 그를 불었으나 묵묵부답. 사뭇 진지한 그의 표정에 메이엘이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청춘이구만.”
메이엘이 다시 고개를 돌려 대련을 관전했다. 자신도 동년배인 주제에 늙은이 같은 소릴 중얼거리며.
한쪽에선 적룡대 대원들이 돗자리 깔고 앉아 간단한 안주에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적룡대 대주, 플레이나가 술을 병째로 한 모금 들이키더니 대원들에게 물었다.
“다들, 생각은 해 봤어?”
“글쎄. 조금 급작스러워서.”
적룡대는 얼마 전에 로엘로부터 한 가지 제의를 받았다. 자신과 장기 계약을 맺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당연한 말이지만, 그것을 수락하게 되면 활동 무대를 제국으로 옮겨야 한다. 그녀들의 입장에선 고민이 들 수밖에 없었다.
“보수는 확실히 매력적인데.”
“매력적인 수준이냐 그게. 그 정도면 그냥 팔자가 핀 거지.”
사실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그만한 수입을 올리는 건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았다. 그 뛰어난 실력을 앞세워 웬만큼 세력 있는 귀족의 휘하로 들어가면 그만이니.
그렇지만 용병이라는 자유로운 신분을 그대로 보장받으면서도 그만한 수입을 올리기는 정말로 쉽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로 굉장한 메리트였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로엘의 제안에 흔들리고 있었다. 애초에 쓸데없는 제약에 매이는 것이 싫어 용병이 된 그들이니만큼 더더욱.
로엘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면 그녀들 또한 12사도와 같은 로엘의 직속 무력 조직이 된다. 언제든 그것을 그만둘 수 있다는 점이 12사도와는 다른 점이지만.
“그렇지만 그동안 왕국에서 쌓아 올려온 입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점은 상당히 아쉽지.”
그녀들이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역시 지금까지 쌓아 올려온 입지였다.
토우런트 왕국에서 ‘적룡대’라는 이름은 굉장히 유명하다. 제국에선 그렇지 않겠지만.
“그럼 어제 말한 대로 다수결로 정하기로 하자고. 우선 난 찬성.”
플레이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었다. 호쾌한 성격의 그녀는 ‘용병은 명성보다 실리’라는 기본적인 철칙에 충실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나도 찬성.”
다음으로 손을 든 것은 막내인 플로라였다. 곧바로 주위에서 야유가 날아들었다.
“우우.”
“너야 당연히 찬성이겠지 이것아. 심지어 너에겐 로엘이 따로 수행원 역할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잖아.”
“네 찬성표는 무효표야.”
플로라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곤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언니들의 말마따나 그녀에겐 따로 제의가 왔다. 그녀의 이능의 힘과 자신이 개발한 무구들의 상성이 좋다 여긴 로엘이 수행원이 되어달라 부탁해온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면 적룡대와는 따로 활동해야 했다. 그렇기에 플로라도 여러모로 갈등하고 있었다. 우선 제국으로 활동 거점을 옮기는 데까진 무조건적으로 찬성했지만.
“난 반대.”
“난 찬성.”
“난 가족들까지 제국으로 이주시킬 수만 있다면 찬성.”
플로라를 제외한 세 명의 대원이 각자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결과적으로 찬성표가 더 많이 나왔다.
“그 부분은 로엘에게 물어보기로 하고. 그럼 찬성 두 표에 반대 한 표. 가족 이주가 불가능하면 찬성 두 표에 반대 두 표가 되나.”
결과적으로 로엘이 적룡대 대원들의 가족들까지 이주시켜주겠다 약속하면 제국으로 활동 거점을 옮긴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로엘에게 그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사실상 제국으로 건너가는 것은 확정되었다고 봐도 좋았다.
“그러고 보면 저쪽의 나머지 두 사람도 당분간 제국에 거취를 정한다고 했지?”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모양이더라고요.”
“그것참. 무려 초인의 영역에 이른 녀석들이 일개 학생 신분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겠다니.”
“초인이라고 행정 능력까지 뛰어날 순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현 대륙에서 아카데미만큼 무언가를 확실하게 배울 수 있는 곳은 없다. 타국의 귀족들이 괜히 가정교사를 쓰지 않고 자식들을 제국으로 유학 보내는 게 아니다.
레인과 르우벤은 행정 능력이 극도로 부족하다. 앞으로 그들에게 요구되는 행정 능력은 절대 작지 않을 텐데도. 아카데미에 입학할 필요성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입학은 할 수 있대? 아카데미는 입학 조건도 굉장히 까다롭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요즘 로엘이 두 사람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입학 전까지 최소한의 수준은 갖추도록 만들겠다고.”
적룡대원들이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 한쪽에선 레인의 제자들, 그리고 밀리아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럼 여러분께서도 레인 님과 함께 제국으로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언니.”
레이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백작님께서 반대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응원해 주셨어요. 스승님을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최대한 배우라고.”
사실 딸아이의 장래를 응원한다는, 그런 훈훈한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백작은 굉장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레인이 초인의 영역에 발을 들이질 않나. 초인의 수준에 육박하는 아티펙트 콜렉터가 등장하질 않나.
레인의 친구라면서 바엘른 마탑의 마법사가 수시로 들락날락거리고, 심지어 최근엔 바엘른 마탑주까지 다녀갔다. 신경과민으로 위에 염증이 생길 지경이었다.
인맥을 쌓는 것에 기뻐하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백작으로선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보면 일개 시골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한계라고 할까.
그 모든 일의 중심에 레인이 있다 보니 이젠 그가 부담스럽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그와의 끈을 절대 놓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레인이 제국의 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난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사실 백작은 남몰래 한숨을 돌렸다. 딸아이가 자진해서 레인과 자신을 이어주는 끈이 되겠다고 나섰을 땐 두말 않고 승낙했다.
어차피 그녀를 출가시킬 생각이기도 했다. 그녀의 실력이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하고 있는 탓에 그녀를 백작위 계승자로 삼을 것을 요구하는 이들이 늘어났기 때문.
그것은 장남을 차기 백작으로 세우려는 백작의 뜻과 어긋났다. 딸아이 본인의 의지와도 어긋났다. 그녀의 재능이 일개 시골 영지에 얽매이게 되는 것 또한 그리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나를 레인에게 계속해서 붙여놓으면 그와 혼인할 확률이 높았다. 필시 머잖은 미래에 거물이 될 인물과 확고한 연결고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출가시킬 수밖에 없었다.
“어머님께선 조금 반대하셨지만요.”
다만 정치적인 계산보단 딸아이와 멀어지게 되는 슬픔을 우선시한 백작 부인은 조금 반대했다. 얼마 안 있어 백작에게 설득되었지만.
루미아는 레인의 움직임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에 금은보화가 쌓여 있는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한 채.
그녀는 눈을 또랑또랑하게 빛내며 중얼거렸다.
“언젠간 반드시…….”
셀린과 레이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녀의 중얼거림으로부터 느껴지는 끈적끈적한 욕망이 신경을 자극했기에.
그러나 그것을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레인이 그러지 말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녀들의 기세가 은연중에 루미아를 압박했다.
루미아는 전신을 저릿저릿하게 자극하는 그녀들의 기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레인을 관찰했다.
대련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최종 승자가 가려졌다. 최종 승자는 놀랍게도 로엘이었다.
경과는 이러했다. 지난번 레인의 승리에 경계심을 가진 로엘과 르우벤이 중간에 작정하고 그를 합공했다. 그렇게 가장 먼저 레인이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레인에게 마무리 일격을 꽂아 넣느라 자세가 무너진 르우벤에게 로엘이 곧바로 배신의 포격을 날렸다. 절묘한 타이밍에 임시동맹을 깨버린 것이다.
설마 이렇게 급작스럽게 배신할 줄은 몰랐던 르우벤은 가까스로 공격을 받아냈지만, 이후로 크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르우벤이 분통을 터뜨렸지만 로엘은 안색 한 번 변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였다. 체력적으로도 한계였던 탓에 결국 르우벤이 다음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치사한 자식!”
“긴장을 놓은 네 잘못이지.”
르우벤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울분 어린 외침을 내뱉었다. 그러나 로엘의 대응은 뻔뻔했다.
* * *
로엘이 제국으로 복귀해야 할 날이 가까워져 갔다.
마침 그가 떠나기 하루 전에 크레틸 자작의 여식이 도착했다. 그녀는 이전에 비해 건강해지고 살이 오른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가장 먼저 레인을 찾아와 그를 영롱한 눈동자로 한참 응시했다. 그러더니 언젠가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다음 날.
로엘은 그녀와 마탑 인사들을 데리고 제국으로 떠났다. 그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시달린 파르엘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물론 카트리나의 와이번을 이용했다. 카트리나를 제외한 1팀 팀원들은 레인의 지도를 마저 받기 위해 남았다.
“다음번엔 제국에서 보자고.”
“그래.”
이다음엔 레인과 르우벤이 제국으로, 정확히는 바엘른 마탑으로 찾아가기로 약속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
“우리도 갈게.”
“다음에 또 봐!”
적룡대와도 작별했다. 적룡대원들은 각자 제국으로 데려갈 가족들을 챙기기 위해 따로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우리도 대충 일정 마무리하고 제국으로 출발해야지. 일단 헬튼 백작과 니에라 공작을 찾아가는 일부터 해결할 생각이지?”
“그래야지.”
르우벤의 질문에 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니에라 공작부터.’
백작과 공작. 당연히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 대상은 공작이었다. 레이나와 함께 찾아오라 했으니 와이번을 다루는 르우벤 포함 3명의 인원으로 움직이게 되리라.
“넌 전생의 동료를 몇 명 포섭해 데려온다고 했고.”
“그래야지. 그 녀석들이 토우런트 왕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게 딱 이 시기였을 거거든.”
르우벤이 끌어들이려는 이들은 몇 년 내로 모두가 초일류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강자들이였다. 그런 인재들을 미리 포섭해 두면 이후에 상당히 도움이 되리라.
레인은 어떻게 포섭해올 것인지에 대해선 굳이 묻지 않았다. 어련히 알아서 잘할 터였다.
“여유 시간 동안엔 무공을 전수해줄 테니 요령 부리지 말고 열심히 익혀.”
“오. 드디어.”
약속한 대로 무공도 전수할 계획이었다.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
“저 녀석도 주기적으로 좀 자극해 보고,”
르우벤이 한쪽에 멀뚱히 서 있는 카트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카트란은 최근 자신이 각성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자각했다. 지금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자아와 소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녀석’을 끄집어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소통이 원활해진다고 했던가.”
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트란이 자신의 힘을 제대로 다루게 하기 위해서라도 르우벤의 말대로 그를 주기적으로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를 끌어내려면 카트란이 목숨의 위기를 느껴야 하잖아.”
“그게 왜.”
“아니, 저 녀석 입장에선 몇 번이고 죽을 뻔한 경험을 하는 건데, 좀 불쌍하다 싶어서.”
“그다지.”
그보단 자신 안에 있는 뭔지 모를 힘에 수시로 잠식되는 쪽이 더 좋지 않아 보였다.
다른 각성자들의 도움으로 그것을 안전하게 극복해나가고 있으니 오히려 카트란에겐 좋은 일이지 않을까. 레인의 개인적인 생각은 그러했다.
르우벤이 잠시 매정한 인간을 보는 눈빛으로 레인을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툭, 하고 물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움직일 거야? 니에라 공작부터 찾아갈 생각인 것 같은데, 지체할 것 없이 바로 내일부터 움직일까?”
“아니. 움직이는 건 며칠 있다가.”
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르우벤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셀린이 요즘 여기저기서 자극을 많이 받더니 꽤 진전을 이뤘어. 조만간에 초일류의 경지에 발을 들일 것 같더군. 스승으로서 지켜봐 줘야지. 도움도 좀 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