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정비(4)
레인은 다음 날부터 일리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저기. 어째서 호흡법 같은 걸 익혀야 하는지 물어도 될까요?”
“네가 배워야 할 의술이 무공의 일종이기 때문이지. 잔말 말고 가르쳐주는 대로 익혀.”
“?!”
일리나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레인의 지시를 따랐다. 기초를 다지는 데에만도 몇 년은 걸릴 거라고 설명하자 표정이 상당히 볼만해졌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호흡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레인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허락했지?’
레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자신도 잘 이해가 가질 않는 사안이었다.
‘딱히 재능이 있어 보인 것도 아니고, 굳이 부탁을 들어줘야 할 만큼 빚을 진 적도 없는 데다,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어서 동정심이 든 것도 아닌데.’
레인은 애초에 일리나를 제자로 들일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녀가 자신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게 의술이라지만, 그 의술의 바탕이 되는 것 또한 무공이었다. 자질이 없는 그녀에게 굳이 시간을 쏟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여 버렸다. 분위기에 휩쓸려 저도 모르게 승낙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강렬한 염원에 고개를 끄덕여 버리고 말았다.
“…….”
레인은 이내 고민하길 포기했다. 아무려면 어떤가. 이미 받아들인 것을.
그냥 새로운 제자 육성에 힘쓰면 그만인 일이다. 지금 와서 고민한다고 무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레인이 한참 그녀를 지도하고 있는데, 로엘이 다가왔다.
“레인. 1팀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어.”
“어. 갈게.”
레인은 일리나에게 수련을 계속할 것을 지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이전에 1팀 팀원들과 모의전을 치러봤던 그 장소로.
* * *
“어서 오십시오.”
공터엔 이미 1팀 팀원들 전원이 정렬해 있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레인에게 상당히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다고 할까.
“앉아.”
“예?”
“가부좌 틀고 앉으라고.”
레인은 가타부타 지시부터 내렸다. 최소한의 인사치레도 없는 그의 행동에 1팀 팀원들이 얼떨떨해하면서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력을 운용해봐. 봐줄 테니.”
“운기행공을 하란 말씀이십니까?”
“어.”
“그건 왜…….”
“너희들이 배운 무공, 그게 누구에게서 나온 거라고 생각해?”
“로엘 님이지요.”
“그러니까 그 로엘이 누구에게 무공을 배워서 너희에게 가르친 것 같냐고.”
“설마.”
“그래. 나다. 거기다 로엘 녀석은 너희들이 익히고 있는 무공과 다른 무공을 익히고 있는 탓에 가르치는 게 미흡했겠지. 그걸 내가 봐주겠다는 거다.”
1팀 팀원 모두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이것이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그래서 곧바로 지시를 따랐다.
카트리나는 한쪽에 멀뚱히 서 있었다. 그녀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인은 심법, 보법, 금나수법 순서로 순차적으로 그들의 수련을 지도해 주었다. 중간에 가만히 서서 뭐 하냐며 카트리나까지 강제로 수련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무공 수련을 지도해 준 다음엔 대련을 했다. 12사도의 약점은 다수의 약자에겐 강하되 소수의 강자에겐 약하다는 것. 그들에겐 유기적인 연계를 통해 강자를 몰아치는 요령을 깨닫게 해 줄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레인에겐 ‘그런 쪽’의 경험이 풍부했다. 연계를 취하는 쪽이 아닌 반대의 입장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을 겪은 횟수가 횟수다 보니 그쪽 분야에 대해 잘 알 수밖에 없었다.
“허억, 허억.”
“정말로 죽겠군.”
보고들은 풍월이 있는 만큼 수월하게 가르쳤다. 그를 상대해야 했던 1팀 팀원들은 초죽음이 되었지만.
카트리나를 포함한 모든 팀원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숨을 몰아쉬는 가운데, 레인은 유유히 자리를 벗어났다.
백작 저택으로 돌아와 보니 르우벤이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밀리아와 로엘도 함께 가려는 듯했다. 막 와이번의 등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어디 가냐, 너희.”
“노예시장.”
“노예시장?”
레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절로 거부감이 드는 단어였다.
“거긴 왜 가?”
“그게, 옛 동료 중에 이맘때에 노예상에게 끌려다니던 녀석이 두 명 있거든. 가서 적당히 빼내 주려고.”
그런 이유였던가.
레인이 로엘을 돌아보았다. 밀리아는 르우벤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라 치고, 로엘은 왜 거기에 동행하는 것일까.
“난 노예시장엔 관심 없어. 그 옆에 붙어있다는 암흑시장에 가려는 거지.”
“아.”
그러고 보면 자신에게 선물로 준 대량의 극독들도 정상적인 루트로 입수한 것은 아닐 터였다. 국가에서 금지하는 품목이니. 로엘이 암흑시장에 관심이 있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도 따라가고 싶은데. 상관없겠지?”
“너도 오려고? 왜?”
“노예시장에 관심이 있어서.”
정확히는 노예시장에서 거래되는 ‘이종족’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셀린에게서 생각지도 못하게 재능을 발견했던 것처럼, 어쩌면 다른 이종족들에게서도 의외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일개 노예시장에서 그만한 재능을 발견할 거라고 정말로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재능이 특별한 것임은 레인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셀린의 경우는 정말로 우연이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심심하던 차에 복권이나 긁으려는 심정에 가까웠다. 간만에 외출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고.
“뭐야, 너도 사내놈이란 말이지?”
르우벤이 음흉하게 웃었다. 레인이 노예시장에 가려는 것이 다른 쪽의 목적이 있어서라고 여긴 것이다. 레인이 무슨 개소리냐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야.”
“그래, 그래. 난 다 이해할 수 있다. 으헉!”
르우벤이 기겁하며 중심부를 부여잡았다. 레인이 기습적으로 접근해 올려 차버린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로엘이 익살스럽게 웃으며 양손을 들고 고개를 저었다. 밀리아가 르우벤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데미지를 회복한 르우벤이 와이번을 조종했다. 그가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살짝 닦아내며 물었다.
“그런데 레인 너, 헬튼 백작과 니에라 공작에게서 초대를 받았다며? 언제 찾아갈 거야?”
“글쎄. 귀찮은데. 굳이 가야 하나.”
“안 가면 너는 모르겠는데 하슨 백작님이 여러모로 시달릴걸?”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레인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 하슨 백작의 저택이니.
설사 레인이 제국으로 떠난다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그들이 레인과 만나고 싶다면 그와 접점이 있는 하슨 백작을 닦달해야 하니까.
“다녀와. 왕국의 실세들과 친분을 다질 기회인데 그걸 걷어차면 안 되지.”
로엘이 옆에서 부추겼다. 레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조금 천천히.”
그로부터 몇 시간이 흐른 뒤.
상업 도시 가르젠이 일행의 눈에 들어왔다. 근처 공터에 가뿐하게 내려선 그들은 성문을 통과해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통과하는 와중, 성문을 지키는 병사 하나가 밀리아의 뿔을 한 차례 흘겨보더니 다음으론 그녀의 몸을 평가하듯 음흉하게 쓸어보았다. 그리곤 뭔가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난 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 했다.
딱.
르우벤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병사가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앗 뜨거!”
“뭐야?!”
“웬 연기가…… 야! 투구 벗어!”
병사가 투구를 벗어 던지자 머리칼이 불타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불은 주위로 옮겨붙지 않고 병사의 머리칼에만 머물렀다.
“물! 물!”
“여기! 물이다!”
“어엇! 이 불, 물을 부어도 안 꺼져!”
“크아아악!”
병사들이 한참을 난리법석을 떤 뒤에야 불이 진화되었다. 그들이 꺼뜨린 것은 아니고, 불이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저 혼자서 꺼졌다.
머리칼이 홀랑 불타버린 병사가 민둥산을 손으로 쓸며 잠시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울상을 지었다. 그즈음엔 르우벤을 비롯한 일행이 모두 이미 성 내로 들어선 뒤였다.
“역시 토우런트 왕국민은 아인종을 대하는 태도에 차별이 배여 있네.”
“아무래도 그렇지.”
로엘과 르우벤이 가볍게 잡담을 나눴다. 졸지에 대머리가 된 사내에게 애도를 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로엘은 자신의 볼일을 보기 위해 일행과 따로 떨어져 움직이기로 했다. 남은 세 사람은 함께 노예시장으로 향했다.
로엘이 향하는 암흑시장의 경우 도시의 어둠에 잠겨 있었다. 불법적인 시장이기 때문. 당연히 일반인이 잘 모르는 장소에 꼭꼭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노예시장은 왕국에서 법적으로 인정한 시장. 시장인 주제에 상당히 널찍한 부지를 차지하는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대형 간판까지 달려 있었다. 레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시장이라고?”
“이전에는 시장이었어. 그게 규모가 커지다 보니 저렇게 된 거지. 사람들이 원래 부르던 명칭에 익숙해져 있는 탓에 그대로 노예시장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세 사람이 건물 내로 들어서자 정장을 쫙 빼입은 종업원이 다가와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량구매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특정 노예의 구입을 원하십니까?”
이곳에서 노예의 판매방식은 두 가지로 갈렸다. 노동력으로 쓸 노예를 대량 구매하는 방식, 그리고 그 이외의 용도로 사용할 노예를 따로 골라 구매하는 방식.
보통 일반인이 노예를 구매할 땐 노동력으로 사용할 노예를 하나둘 구매할 뿐이지만, 여기선 그런 식의 구매가 불가능했다. 애초에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상회였으니까.
르우벤이 레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대량구매 코너 쪽으로 갈 건데, 너는?”
“난 다른 쪽. 여기서 갈라지지.”
“오호.”
르우벤이 또다시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그쪽 코너에는 주로 여성 노예가 많았다. 이종족 노예도 극소수지만 있었고.
레인이 르우벤의 급소를 걷어차려 했다. 이번엔 르우벤도 미리 알아채고 훌쩍 피했다.
르우벤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종업원에겐 자신은 알아서 길을 찾을 테니 레인을 안내해줄 것을 부탁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종업원이 앞장서서 걸었다. 레인이 그 뒤를 따랐다.
이내 두 사람은 널찍한 응접실에 다다랐다. 노크하고 들어서니 배불뚝이 중년인이 레인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종업원이 자리를 벗어나자 중년인이 레인에게 물었다.
“어떤 노예를 원하십니까. 여성 노예의 경우엔 등급별로 품목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아인족 노예의 경우에는 원하시는 종족을 말씀해 주시면······.”
“아인족.”
“그렇습니까.”
중년인의 얼굴이 훤해졌다. 아인족 노예의 가격은 굉장히 높다. 상회에서 취급하는 노예 중 톱 클래스다.
“어떤 아인족을 원하십니까. 성별과 종족을 말해 주십시오.”
“전부 둘러보고 싶은데. 성별, 종족 상관없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일일이 살펴보겠다니 상당히 귀찮은 손님이었다. 성별을 특정하지 않았다는 점은 상당히 특이했고.
그러나 중년인은 그것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다.
거금을 지불해줄 손님이거늘 조금 귀찮게 하는 것쯤이야. 어차피 아인종 노예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부디 손님의 마음에 드는 노예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
레인은 중년인의 안내에 따라 아인종들이 ‘보관’된 방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고급 상품인 만큼 다들 깨끗한 안색에 좋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손목과 발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긴 했지만.
놀랍도록 아름다운 엘프족 여성도 있었고, 수염이 덥수룩한 드워프 중년인도 있었다. 원독 어린 눈빛을 던져오는 자도 있었고,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레인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그가 기대한 것은 아름다운 외견도, 특정 종족의 종족 특성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둘러봤을까.
“아직 마음에 드시는 품목은 없는 모양이군요. 이젠 당 상회에서 보유하고 있는 아인종 노예도 몇 남지 않았습니다만.”
중년인이 조금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레인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안내해줄 것을 턱짓으로 요구했다.
“…….”
또 다른 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 중앙에 앉아있는 노예가 시야에 들어왔다.
일단 성별은 여성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굉장히 어렸다. 대충 일곱 살 전후일까.
약간 덥수룩한 머리칼. 그리고 머리칼 위로 비죽 솟아오른 귀. 거기에 복슬복슬한 꼬리까지. 그 모두가 새하얬다.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던 소녀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레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공허함이 소녀의 눈에 담겨 있었다.
“!”
“이 여아는 대륙에 몇 없는 백랑(白狼)족입니다.”
‘놀랍군.’
옆에서 중년 상인이 무언가를 설명했지만, 레인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소녀의 눈동자에 담긴, 공허함에 감춰진 무시무시한 광기가 레인의 예민한 감각을 사정없이 자극해 왔기에.
레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