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정비(3)
“검가라.”
“솔직히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감도 잡지 못하겠다만, 일단은 그렇게 목표를 세웠다.”
“좋아. 구체적인 방안은 내가 제시할게.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해.”
“…….”
“우선 지금은 자기 개발에 좀 더 힘을 써둬. 다른 이들의 위에 서는 자가 되기 위한 준비는 생각보다 녹록지 않을 거다.”
“그래.”
“그리고 이왕이면 목표를 좀 더 크게 잡도록 해. 그냥 검가 정도로는 안 돼.”
“?”
“수십의 마왕에 대적하기 위한 세력이잖아. 그럼 일개 검가 정도론 부족하지. 대륙제일검가(大陸第一劍家)정도 되지 않고서야.”
레인은 잠시 눈을 껌뻑이며 로엘을 응시했다. 그러다 이내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좋아. 재미있겠네.”
로엘이 큭큭 하고 웃었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
“자,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계속 이야기하기로 하고. 너희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
“너희 두 사람 모두, 제국으로 망명했으면 한다.”
“뭐?”
“되물을 것 없어. 말 그대로의 의미이니까.”
“왜?”
레인도, 르우벤도 약간 불편한 기색으로 로엘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사안이었다.
“모르지 않을 텐데. 내가 목표로 하는 건…….”
“그래. 용병대지.”
르우벤이 눈을 가늘게 만들며 말했다. 그러자 로엘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했다.
르우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대륙 최강, 최고의 용병대. 그리고 그 용병대는,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을’ 예정이라는 것.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용병대가 특정 국가에 귀속되는 순간, 그들의 움직임에는 수많은 제약이 생겨난다. 앞으로 전 대륙을 피로 물들일 마족의 군대를 상대하는 데에 있어선 더더욱.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전생에 왕국의 배신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동료들을 잃었다. 소속된 용병대가 전멸당했다.
그런 그가 이번 생에도 특정 국가에 소속될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턱이 없었다.
제국이 노러츠처럼 썩어빠진 나라도 아니고, 황실의 각성자가 미래를 아는 만큼 이쪽을 제대로 후원해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안다.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적인 문제는, 때론 실리적인 부분을 초월하곤 한다. 아니, 대부분의 인간은 그 감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로엘과 같은 유형의 인간이 아닌 한.
“반드시 해야 하는 건가? 망명을?”
로엘의 제의가 탐탁지 않은 것은 레인도 마찬가지.
그는 르우벤 만큼이나 제국으로의 망명에 부정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애초에 ‘검가’를 세우기 위해선 특정 국가에 소속되어야 하니까. 르우벤과는 경우가 달랐다.
남의 아래에 드는 것을 싫어하는 성정을 지닌 레인이지만, 지난 시간 동안 여러모로 성향에 변화가 있었다.
적어도 이젠 필요한 만큼 자신을 낮출 줄도 알게 된 그였다. 지금의 그는, 제국에 소속된다는 것 정도로는 딱히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하슨 백작령에 거주하며 영지에 알게 모르게 정을 붙여왔다. 레이나와 셀린을 제자로 들였고, 백작가 인사들과 안면을 텄으며, 고아원 아이들과 친분을 쌓아왔다.
딱히 토우런트 왕국에 소속감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검가를 세우게 된다면 그것은 왕국 내에서 이뤄질 일일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긴 했다.
“너희들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대충 알 것 같다만.”
로엘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뒤 재차 두 사람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우선 이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지. 너희가 그렇게 이것저것 재가면서 성장을 도모해도 좋을 정도로 상황이 여유롭지가 않아.”
“……?”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동원된 마왕이 총 몇이라고 생각해?”
“글쎄?”
“정확히 스물이다. 일흔두 명의 마왕 중 스물. 그중 제국이 끝내 제거하는 데 성공한 마왕은 아홉이고.”
“……!”
레인과 르우벤 두 사람 모두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대륙 최강국인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동원된 마족군의 전력이 전체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제국은 그 군대의 절반도 어찌하지 못했고.
“너희가 각자의 방식으로 알아서 성장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어느 세월에?”
“…….”
“르우벤 네가 속한 용병대가 마왕과 충돌했던 게 정확히 네가 30살이 된 해였다고 했었지.”
“그렇지.”
“그럼, 단순하게 놈들이 대륙을 침공하는 시점이 15년 후라고 잡고 이야기하자. 그 시간 내에 가능하겠어? 계획한 모든 것을 이루는 게?”
로엘의 물음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한 자질을 기르는 일부터 대륙 전역에 영향력을 끼치는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그것을 안정화시키는 일까지.
‘그때’가 오기 전까지 그 모두를 제대로 끝마쳐 둬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있어, 같은 각성자인 바르바젠의 후원을 기대할 수 있는 제국의 지원은 크나큰 도움이 된다.
각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는 잘 알겠다. 그렇지만 그것을 적당히 굽히는 것으로 훨씬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면, 그래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들의 역량이라면 황실의 지원 없이도 그 모든 것을 결국 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뿐이다. 두 사람이 각자 다른 국가에서 바닥부터 필요한 것을 쌓아 올려 가며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결국 제국의 지원을 받아 가며 성장하는 것에 비해 효율성이 낮은 방안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손해는 결국 끝까지 손해로 남게 된다. 한정된 시간 내에 최대한 전력을 비축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
레인과 르우벤이 침묵한 가운데, 로엘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도 있지.”
“뭔데?”
“바르바젠은, 대륙통합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뭣?!”
“현 대륙엔 암군(暗君)이 너무 많아.”
르우벤이 놀란 목소리를 흘리건 말건, 로엘은 곧바로 설명에 돌입했다.
“국가 상층부가 썩었기로 유명한 노러츠와 메르타는 말할 것도 없지. 그 외에도 수많은 국가의 수뇌부가 미쳐 돌아가고 있고.”
맞는 말이었다. 그나마 토우런트 왕국을 비롯한 몇몇 왕국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현시대의 대륙엔 유난히 상층부가 썩은 국가가 많았다.
“그래서, 그런 국가들을 미리 정리해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바르바젠 루엘 카이엔’이 가지고 있다는 건가?”
“그냥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정도가 아니야.”
로엘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그 정도의 이유로 그가 대륙통합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추상적인 이유만으로 전직 황제가 그만한 대계를 계획했을 리가 없다.
차라리 대륙통합 전쟁으로 인해 스러질 전력을 온존하고 각 국가를 적절히 다독여서 제대로 전쟁을 수행하게 만든다. 그것이 오히려 낫지 않겠느냐.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바르바젠은, 이미 전생에 그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마족과의 전쟁을 수행했던 경험이 있거든.”
그리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적보다 무서운 것은 통제되지 않는 아군이라고 했던가. 바르바젠 루엘 카이엔은 그 격언을 아주 제대로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을 각성한 바르바젠은 이렇게 생각했다. 설사 대륙의 전체적인 전력이 어느 정도 감소하게 될지라도, 지휘 체계를 일원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그편이 오히려 이득이라고.
[물론 대륙통합이 정말로 가능할지, 최소한의 손실로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솔직히 가능성이 그리 높지도 않다.]
[그러나, 대륙통합 전쟁을 계획한 것은 애초에 가능성이 높아서가 아니다. 그것이 해야 하는 일이기에 계획한 것이지.]
바르바젠은 그렇게 말했다.
“참고로 마족의 대륙 침공은 이번이 세 번째라더군. 첫 번째는 고대 마도시대에, 두 번째는 마도 문명 부흥기에. 그 시대들에 대해선 대략적인 기록만 남아있긴 하지만, 이것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로엘이 한 차례 숨을 골랐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두 시대 모두 현시대를 아득히 뛰어넘는 문명이 구축되어 있었던 시기라는 것. 대륙의 전체적인 전력을 놓고 보면, 부흥기 때만 해도 현시대의 몇 배는 되었을 거라는 것.”
“…….”
“그리고 두 시대 모두, 대륙은 통합되어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부흥기 땐 대륙이 마족의 손에 넘어가기 직전까지 몰렸었다는 것.”
“쉽게 말해서, 전력도 한참 부족한 현시대의 대륙이 마족의 군대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니, 최소한 대륙이 통합된 상태가 아니라면 말이 되질 않는다는 건가?”
“적어도 바르바젠은 그런 판단을 내린 모양이더군.”
“…….”
“솔직히 그의 의중을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하겠어. 그가 전생에 무슨 경험을 했는지는 나도 거의 모르니. 그렇지만 일단 확실한 것은.”
로엘이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우선, 황실의 각성자가 대륙통합 전쟁을 일으킬 계획이라는 것.”
그가 손가락 하나를 추가로 펼쳤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에 대응할 방법이 세 가지 있다는 것. 동조하거나, 방관하거나, 맞서 싸우거나.”
“…….”
레인과 르우벤이 숙고하는 표정을 지었다. 로엘은 가만히 앉아서 그들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 * *
레인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한차례 운공을 마치고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는데, 누군가 자신의 방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레인은 살짝 미간을 좁히며 몸을 일으켰다.
똑똑.
상대가 문을 두드렸다. 레인이 문을 열자 그곳에는-
“늦은 밤에 죄송해요.”
-일리나 필리언이 서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레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일리나가 이 시간에 자신을 찾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들어와.”
레인은 그녀를 방 안으로 들였다. 두 사람은 이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
일리나는 한 차례 심호흡했다. 그리곤 눈을 결연하게 빛내며 말했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세요.”
“싫어.”
레인은 즉답했다. 일말의 고민도 없는 답변에 일리나가 살짝 당황했다. 그러나 금세 신색을 회복했다.
“어째서인가요?”
“네겐 재능이 보이지 않으니까.”
크레틸 자작의 딸을 제자로 들이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이미 희대의 재능을 지닌 제자가 둘이나 있다 보니 굳이 평범한 재능을 지닌 제자를 들이고 싶지 않았다.
“제게 무예의 재능이 없다는 건 알아요.”
일리나는 살짝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애초에 재능이 있었다면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지도 않았을 터다. 자신에게 무예의 재능이 없음은 그녀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그렇지만 제가 배우고 싶은 것은 무예가 아니에요.”
그렇기에 그녀의 관심사는 애초부터 무예가 아니었다. 레인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럼?”
“의술이죠.”
“…….”
“필리언 자작가의 내전이 종결되었어요. 자작가로 복귀할 시기가 되었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전 그때 자작가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어차피 일리나에겐 가문에서 부여한 의무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병약한 육신 탓에 의무를 부과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리라.
그러니 가문에 복귀하지 않는다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이젠 가문의 주인이 된 그녀의 오라비가 살짝 서운해하겠지만 그뿐이다.
“제 호위를 위해 동행해주신 분들은 모두 돌려보낼 생각이에요. 그렇지만 저는 남아서 레인 님께 의술을 배우고 싶어요.”
“…….”
“부탁드려요. 절 제자로 받아주세요. 그렇게 해 주시면 이후의 삶은 레인 님을 위해 살겠어요.”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가장 많이 접해본 직종을 꼽으라면 단연 의원이었다. 의원이라는 직종은 일반적으로는 천하게 여겨지는 직업이지만, 그녀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레인의 의술은 특별했다. 그에게 직접 치료를 받아본 적 있는 그녀는 레인의 의술이 웬만한 성직자의 그것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은 그 결심이 확고해진 상태였다.
“…….”
레인이 가만히 일리나를 응시했다. 침묵의 시간이 몇 분이나 흘렀을까.
마침내 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리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가 싱그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