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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암흑상단(1) (127/249)

 127화. 암흑상단(1)

 로엘을 비밀통로를 이용해 황궁을 뒤로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암흑상단이라.’

 암흑상단.

 제국 전역에 뿌리를 내린, 통제되지 않는 어둠 중 하나.

 그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물건이라도 유통하는 이들이다. 무엇이든 판매하는 이들이다. 합법적인 물품은 물론이요, 각종 불법적인 물건이나 도난품, 심지어 인간까지.

 그들의 세력은 최근 상당히 커진 상태였다. 지난 5년간 제국에 끊임없이 피바람이 몰아치면서 그들의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

 정상적인 상단에 외면받는 몰락 귀족들에게 고가로 물건을 공급하고, 급하게 보급 물품을 충원해야 하는 반란군이나 제국군에게 접근해 시가의 몇 배에 달하는 금액으로 전쟁 물품을 제공하는 등.

 그들은 그동안 물 만난 고기처럼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들의 세력이 철혈의 군주가 군림한 이후로 그만큼이나 성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암흑상단을 통째로 치워버리라 이건가.’

 당연한 말이지만, 암흑상단은 황실에 있어 눈엣가시였다. 언제고 치워버려야 할 놈들.

 그 치워야 할 시기를, 바르바젠은 바로 지금으로 잡은 모양이었다. 슬슬 제국이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 당연한지도 몰랐다.

‘별다른 지원을 해 준 것도 아니고, 그냥 치워버리라고만 지시하다니.’

 암흑상단이 무슨 뒷골목 폭력조직도 아니고, 그냥 쓸어버리라는 말 한마디만 툭 던져놓다니 조금 너무하지 않은가.

‘내 역량을 시험해보겠다 그건가?’

 그럴 터였다. 그 본인이 능력을 입증해야 할 거라는 말을 굳이 서론으로 깔기도 했고.

‘이번 임무에서 얼마나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느냐. 그것에 따라 앞으로 바르바젠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어느 정도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 되겠군.’

 사실상 첫 임무라고 여기면 될 터였다. 첫인상을 결정지을.

 여기서 바르바젠에게 이쪽의 일도 무리 없이 소화해낼 수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행보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된다. 물론 반대의 경우에는 결과도 반대일 테고.

 어차피 제국의 어둠을 맡겠다고 나선 이상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긴 했다. 통제되지 않는 어둠을 치워버리는 것도 그 자리에 앉은 자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

 너무 갑작스럽게, 준비된 것 하나 없는 상황에 임무부터 떨어져서 그렇지.

‘이거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예전 생각나네.’

 그러고 보면 공방에 막 입문했던 그때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지금 상황은 그때와 비교해 스케일도, 리스크도 완전히 다르긴 하지만.

 로엘은 빙긋, 하고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었다.

 그저 심플하게. 제대로 된 ‘실적’만 되면 그만인 일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하려나.”

 로엘은 괜스레 통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우선 마탑으로 되돌아온 로엘은 찬찬히 계획을 정리했다.

‘다른 각성자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건 일단 보류하는 게 좋겠지.’

 레인과 르우벤 두 사람에게 ‘이쪽 일’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는 것은 조금 꺼려졌다.

 이번 일은 상대에게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 보여야 하는, 일종의 시험. 그 시험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로엘 본인이어야 했다. 레인과 르우벤은 시험에 동원하기엔 너무 튀는 이들이었다.

 현재 로엘이 제공한 숙소에서 치료받고 있는 카트란의 경우엔 그 자신의 힘을 자각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애초에 논외였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초강자가 근처에 있으니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암흑상단에 대한 정보야 엠페러 아이즈에 요청하면 그만이니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문제는 단순 사회악이라고 규정하기엔 이미 너무 거대한 그 조직을 얼마나 신속하게 정리할 수 있느냐 하는 것.

 단순 구축이 문제가 아니다. 바르바젠은 따로 기한을 정해주지 않았지만, 그것은 여유를 가지고 움직이라는 의미가 아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하라는 의미다.

 당연한 일이었다. 암흑상단을 쓸어버리는 때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그들로 인한 손해가 누적되니까.

‘이래저래 난이도가 높군.’

 로엘은 우선 해야 할 일을 순서대로 정리하기로 했다. 그가 종이와 펜을 꺼내 들고 무언가를 끼적이기 시작했다.

‘우선 그녀를 찾아가 도움을 구하고.’

 1번 리스트에 글자가 채워졌다.

‘엠페러 아이즈에 찾아가 정보를 취합하고.’

 2번 리스트에도 글자가 채워졌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전투팀을 전부 불러 모으고.’

 리스트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로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움직여야 할 때였다.

 * * *

“제국에서 활동하는 암흑상단의 총수는 총 셋. 그중 둘이 현자에 나머지 하나가 검성이라.”

“이야기는 들었어. 암흑상단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개 암흑조직 수뇌부에 초인급 전력만 셋이라니. 굉장하군요. 프레퍼에 비할 바는 아닌 것 같지만.”

“당연한 일이야. 그 정도 전력도 없이 제국에서 그만큼이나 활동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그것도 그렇네요.”

 담담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는 로엘을 라일리아가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로엘은 그 기색을 느꼈지만, 시선을 자료에 고정한 채로 자기 할 일에만 열중했다.

“규모가 커도 너무 큰데.”

 놈들도 바보가 아니다. 제국이 이젠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지금 시점에서 상단에 갑작스럽게 큰 타격이 가해지면 놈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숙청 문제를 일단락 지은 황제가 이젠 내실을 다지려 한다고.

 그렇게 되면 놈들이 황제의 의지에 맞서 싸우려 할까? 아니, 그렇지 않을 터다.

 일시적으로 사업을 거두고 잠적, 혹은 해외로 도피해 있다가 적당히 관심이 멀어지면 슬그머니 되돌아오려 하겠지. 정 여의치 않으면 타국에서 아예 새로 시작하던가.

 뻔한 결말이었다. 이런 부분은 지구나 이쪽 세계나 똑같을 터이니.

 그런 상황은 곤란했다. 그러니 놈들이 대비할 틈을 주지 않고 한 번에 쓸어버려야 했다.

 문제는, 단번에 쓸어버리기엔 규모가 커도 너무 크다는 것.

‘역시 수뇌부를 먼저 친 다음 혼란에 빠진 하부 조직들을 처리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데.’

 가장 이상적인 해결 방법은 이것이었다. 수뇌부를 먼저 치는 것.

 그럴 수만 있다면 남은 일은 문제도 아니었다. 명령 체계가 무너진 점조직 하부 세력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놈들이 부정적인 방법으로 축적한 재화를 환수하는 일쯤이야.

 그러나 암흑상단 수뇌부의 위치만큼은 엠페러 아이즈의 정보력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놈들은 누가 뒷세계 실세 아니랄까 봐 수시로 거점을 바꿔 치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그 본인들의 경지도 초인에 육박하다 보니 행적을 좇는 게 쉬운 일도 아니었다. 거기다 본디 우르르 몰려다니는 놈들도 아니었고.

“결론은 하나인가.”

“좋은 생각이 있는가 보네?”

“예.”

“어떤 계획인지 물어도 될까?”

“간단합니다. 산에 사는 짐승들을 직접 쫓아다니면서 사냥하기 힘들다면…….”

“?”

“덫을 놓고 미끼로 유인해야지요.”

 * * *

 상업 도시 코테른.

 케이프 백작령의 중심에 위치한 도시. 영지의 주인인 케이프 백작이 도시의 시장직까지 역임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암흑상단 내에서 나름 입지 높은 중간 간부가 운영하는 지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 로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트리나의 와이번을 타고.

[조직 내에서 적당히 발언력이 높은 간부가 관리하는 사업장? 코테른 시에 위치한 사업장 즈음이 적당하려나.]

 물론 엠페러 아이즈의 정보를 바탕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몇 가지 사전준비를 마친 뒤 바로 날아왔다.

“저기로군요.”

“그럼, 전 사전에 계획한 대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인들은 암흑상단의 지부라고 하면 퀴퀴한 지하실을 연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암흑상단 지부는 의외로 제대로 된 건물이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것이 암흑상단이 관리하는 건물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렇지.

 미리 만남을 주선해 둔 상태였다. 로엘은 배낭을 메고 가면을 착용한 채 위장용 가게인 1층의 고급 주점으로 들어섰다. 카트리나는 바깥에 대기시켜둔 채로.

 주점의 점원에게 암호를 전달하자 이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2층에 들어서자 일단의 무리가 로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엘은 일행의 중심에 놓인, 고급스러운 의자에 홀로 앉아있는 여인에게 용건을 꺼냈다. 딱 봐도 그녀가 일행의 장으로 보였기에.

“미리 주문을 해뒀을 텐데, 물건은 전부 준비됐나요?”

“그야 물론.”

 여인은 한 손에 담뱃대를 든 채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검은색 일색의 선정적인 가죽옷에 풍성한 곱슬머리. 상당히 퇴폐적인 느낌이 드는, 어떻게든 미인의 영역에는 들어갈 법한 인물이었다.

 조금 과할 정도로 떡칠 된 화장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나이가 좀 있는 모양인지 얼굴의 주름살을 가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였다.

‘역시 나름 간부라서 그런가. 초일류는 되는군. 허리춤에 메인 단검을 주로 사용하는 건가?’

 로엘은 속으로 적당히 견적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서 좋군요.”

“돈만 제대로 지불한다면야. 우리가 구하지 못할 물건은 없지.”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곤 입에서 연기를 뿜어내길 한 차례.

“그런데, 가면은 좀 벗는 게 어때? 아무리 도망자의 신분이라지만 우리에게까지 숨길 건 없잖아? 이왕이면 얼굴 좀 보고 이야기하자고.”

“그러지요.”

 참고로 로엘은 ‘사고를 저지르고 급히 해외로 도주하려는 도망자’라는 설정으로 놈들에게 접근한 상태였다. 가진 보물을 사용했다간 역추적 당할 우려가 있어 암흑상단을 통해 장물로 교환하려 하는.

 로엘이 천천히 얼굴에 쓴 가면을 벗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드러남에 따라, 주위 사람들의 눈이 커져 갔다.

“이 정도의 미남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여인이 그렇게 말하며 살짝 눈웃음을 쳤다. 어쩐지 위험한 느낌이 들게 하는 표정.

“감사합니다.”

 로엘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빙긋 미소 지으며 답했다.

“후후.”

 그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한 여인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나른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런데, 물건은 어디에 있나요?”

“저쪽에.”

 여인은 담뱃대로 뒤쪽에 위치한 문 하나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그 뒤쪽은 창고인 듯싶었다.

“그런데, 물량이 상당한데 어떻게 가져갈 생각이지? 혼자서 옮길 수는 없을 텐데?”

 여인의 물음.

 로엘은 이곳에 혼자서 찾아왔다. 대동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여인으로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사내가 저만한 분량의 물건을 혼자서 나를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긴 힘들었으니까.

“글쎄요.”

 로엘은 굳이 아공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모호한 대답을 했다.

“그래서, 지불할 돈은?”

“여기에 있습니다.”

 여인의 물음에 로엘이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입구를 벌려 보여주었다. 휘황찬란한 금화와 보석이 가득 담겨있었다.

“좋아. 그런데 말이지.”

“?”

“아무리 손님의 입장이라지만 혼자서 여길 찾아오다니, 조금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여인이 말하는 어조가 갑자기 확연하게 달랐다. 마치 위협하는 듯한, 낮은 목소리.

 로엘의 눈이 살짝 휘었다. ‘기대했던 반응’이 왔다.

 여인이 담뱃대를 툭툭 털었다. 그와 동시에 주위 벽면에 배치되어 있던 근육질의 장한들이 일제히 다가와 로엘을 포위하듯 늘어섰다.

“이건 무슨 상황인가요?”

“아니, 그렇잖아? 이만한 물량을 살 만큼 막대한 재력을 지닌 인물이 이렇게나 쉬운 녀석일 줄은 우리도 예상치 못했다고?”

“…….”

“심지어 슥삭해 버리더라도 아무런 탈이 없는 인물이니 우리 입장에선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호박이지. 이쪽 세계의 상단에 방문하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렸을 리도 없으니 더더욱.”

 여인의 입가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화장을 진하게 한 탓에 심하게 붉은 입술 사이로 비열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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