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또 다른 각성자(4) (125/249)

 125화. 또 다른 각성자(4)

“가진 것 다 내놓고 사라진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도적인 주제에 제대로 된 갑주를 걸친 자가 앞으로 나서 용병들에게 말했다. 일개 도적이라곤 볼 수 없을 만큼 목소리에 쓸데없이 위엄이 있었다.

 용병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치의 발언은 통행세를 받고 적당히 물러나 줄 생각이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전력 차가 압도적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까.

“알겠습니다. 다만.”

 용병 무리의 대장 격인 존재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상황이 글렀으니 최소한 의뢰라도 달성하기 위해서.

“마차 안의 아가씨만은 봐주시길 바랍니다. 저희들이 가진 재물은 물론, 마차와 말까지 모두 내어드리겠습니다.”

“불가하다.”

 그러나 전직 기사로 추정되는 도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즈음 자신을 따라 도적이 된 병사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성욕이 너무 쌓인 것이다.

 애초에 이 일행을 습격한 이유가 마차에 탑승한 여인의 미색이 곱다는 정보를 입수한 수하들의 청원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 용병이 내건 조건을 들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기사였던 과거를 앞세워 지금까진 수하들의 욕구를 억눌러왔지만 이젠 한계였다.

 이 이상 수하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통제 자체가 힘들어질 우려가 있었다. 최근 그것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너희들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솔직히 정말로 미안한지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습관대로, 의례적으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것일 뿐.

 이 짓도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익숙해졌다. 이전엔 가슴을 쿡쿡 찌르던 죄책감이 요즈음은 상당히 옅어졌다. 아마 오늘 일선을 넘게 되면 자신의 죄책감은 더더욱 마모되리라.

 그는 짐짓 위압적인 목소리로 재차 선언했다.

“한 번만 다시 말하겠다.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고 가라. 마차 안의 여인도 포함해서.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다면 내 말을 따라야 할 것이다.”

“…….”

 카트란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래도 상대가 전직 기사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졌는데, 그것이 무참히 깨어졌다.

 하긴 최근엔 그치들도 도적질에 익숙해져서 기사로서의 자존감을 건드려도 별 반응이 없는 모양이더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듣긴 했다. 이렇게 그 실제 사례를 마주해야 할 줄은 몰랐지만.

‘어쩌지.’

 그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항복하지 않으면 몰살이다. 항복해도 의뢰 실패는 물론 가진 물건을 모두 잃게 된다.

 아니, 항복한다고 상대가 이쪽을 몰살시키지 않는다는 가정조차 없다. 상대가 이쪽을 그저 기만했을 뿐인지 어쩐지 이쪽이 무슨 수로 안다는 말인가.

 돈이 될 것들을 모두 수거해간다는 명제 아래 무기까지 모두 빼앗기면 최소한의 저항조차 불가능해진다. 설사 놈들이 정말로 놔 준다고 해도 근처 영지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그나마 목숨을 건지기 위해 구걸해야 하나, 아니면 최소한 발악이라도 해 보고 죽어야 하나.’

 어느 쪽이든 그다지 유쾌한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하다 보니 마음이 점점 후자 쪽으로 기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들이 그냥 놔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통행세만 받고 그만둘 생각이면 모르되, 이쪽이 모시는 아가씨까지 납치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저들도 머리가 있다면 이 아가씨를 되찾기 위해 부모가 추격자를 끌어들이거나 고용하는 경우를 고려하고 있을 터였다. 그 상황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목격자를 지우고 싶겠지.

“젠장.”

 옆에서 다른 용병들이 욕설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이리라. 정말이지 더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

 용병들이 각자 무기를 굳게 쥐었다. 갈 때 가더라도 억울해서 한 놈은 붙들고 죽여야겠다는 의지가 깃든 눈빛. 용병들과 도적들이 단체로 눈싸움을 벌였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군.”

“목숨은 더럽게 아깝수다. 다만 그쪽에게 당췌 목숨을 맡길 수가 있어야지.”

 대장 격인 용병이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그렇게 말했다. 어느새 존대를 거둔 상태였다.

“부, 부탁드려요. 제발 저를 지켜주세요.”

 마차 안쪽에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병들이 배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나마 안도하면서도 절망적인 상황에 겁먹은 듯한, 그런 기색이 전해져왔다.

“공격.”

 결국, 전직 기사 도적이 건조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뱉었다. 수하들이 들고 있던 창을 순차적으로 내질렀다.

‘귀찮게 됐군.’

 용병들의 짐작대로 도적들은 그들을 가만둘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말이 거짓인 것은 또 아니었다.

 허드렛일을 할 인력이 필요했다. 성욕과 관련된 불만뿐 아니라 그쪽 불만도 상당했다. 사실 이 자리엔 여인뿐 아니라 ‘노예’를 충당하러 온 것이기도 했다.

 제국에선 노예를 금지한다지만 애초에 이들은 도적이다. 법 바깥에서 사는 삶이 익숙해진 도적들은 이번 기회에 완전히 선을 넘을 작정이었다.

‘되도록 빠르게 정리해야지.’

 도적들의 공격을 용병들이 필사적으로 원진을 짠 채 막아냈다. 용병들의 대장 격인 사내와 카트란의 활약이 눈부셨다.

 그러나 기사 출신 도적들이 참전하면서 상황은 급속도로 기울었다. 용병들은 수세에 몰려 짓쳐 드는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이내 용병들이 한 사람씩 제압되어 결박당하기 시작했다. 도적들은 실력, 그리고 숫자의 우위를 앞세워 용병들을 차례차례 생포해 나갔다.

 촤악!

“크윽!”

 한 도적의 창격이 카트란의 어깻죽지를 스쳤다.

 깊게 베이진 않았지만 통증이 상당했다. 카트란이 이를 악물었다.

 * * *

 로엘은 카트리나의 와이번의 등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용병들과 도적들이 교전하는 장소에서 상당히 떨어진 나무 위쪽에 가볍게 착지했다.

‘마침 잘 됐군.’

 비밀이 많은 친구라기에 어떻게 하면 그것을 파헤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마침 상대가 위기 상황이었다. 로엘은 찬찬히 그것을 구경하기로 했다.

‘만일 정말로 힘이 있고 그것을 숨기고 있는 것이라면 저 상황에서까지 그것을 숨길 수는 없겠지.’

 가진 힘을 확인한 뒤에 접근할 생각이었다.

 알고서 접근하는 것과 모르고 접근하는 것은 다르다. 상대를 좀 더 수월히 끌어들이기 위해, 그리고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저자입니까?”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카트리나가 물었다. 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네요.”

 카트란은 확실히 나이에 비해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긴 했다. 그렇지만 카트리나의 시선으론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바로 옆에 로엘이라는 비교 대상이 있었으니까.

“일단 지켜보죠.”

 로엘이 눈을 빛내며 그렇게 말했다. 그가 가만히 용병들과 기사들의 전투를 응시했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로엘이 묘한 신음을 흘렸다. 상황이 예상과는 달리 너무 평범하게 흘러갔다.

 용병들은 차례차례 무력화되어갔다. 카트란과 대장 격인 용병이 끝까지 저항하고 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을 듯싶었다.

 중간에 카트란의 실력이 갑자기 확 늘어나긴 했다.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능의 힘을 비장의 수로 숨겨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뿐. 그 정도로는 도적들을 물리칠 수준이 되지 못했다. 잠깐 우세를 점하다가 이내 몇 명의 도적이 더 달라붙자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도적들은 쓰러진 용병들을 짓밟고 지나가 마차 문을 열었다. 안쪽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여인을 기절시키고 어깨에 짊어졌다.

‘사실 정말로 별 볼 일 없는 녀석인 건가? 아니면 아직까지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힘을 감추고 있는 건가.’

 후자라면 정말로 실망스러울 듯했다. 그건 신중한 게 아니라 그냥 우유부단한 겁쟁이였다. 가진 힘을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쓰길 망설이는 부류라면 결정적일 때 도움이 되질 않는다.

 이내 대장 격인 용병이 제압되었다. 목에 칼이 닿은 채 무릎 꿇려진 용병이 이를 갈았다.

 그냥 두면 노예로 쓰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도적들은 용병을 기절시키고 손발의 힘줄을 잘라냈다.

 남은 사람은 오직 카트란 하나.

‘자, 이제 주위에 보는 눈은 모두 사라졌다. 어떻게 나올 테냐.’

 로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해서 카트란을 지켜봤다. 상황에 변화가 일어나길 기대하며.

 * * *

“크윽!”

 다섯 도적의 합격에 카트란이 신음을 내뱉었다. 세 사람도 벅찬데 다섯 사람의 합공을 받아내자니 눈이 핑핑 돌아갔다.

 중심에 선 기사급 도적이 그의 공격을 받아내면 다른 도적들이 공격을 내지르는 식이었다. 도저히 수가 나질 않았다.

 용병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감추고 있던 3할의 실력, 어릴 적에 각성한 이능인 ‘자기암시’는 이미 사용해 버렸다. 정신적인 리미트가 풀린 그의 육신은 한계를 넘어선 움직임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밀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수적 열세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뭐야. 아직도 못 끝냈냐.”

“시끄러. 이 녀석, 의외로 실력이 있어서 귀찮단 말이다.”

“빨리 끝내라. 눈 벌게진 놈들이 많다.”

 다른 도적들은 살아남은 용병들을 묶어서 말 등 위에 싣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기절한 여인을 욕정 어린 눈빛으로 힐끗힐끗 돌아보는 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하압!”

 기사급 도적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검에는 완연한 검기가 맺혀 있었다. 일개 도적의 공격이라고 여기기 힘든, 강력한 검격.

 카앙!

 카트란이 휘청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에 다른 도적이 눈을 빛내며 옆구리를 노리고 창을 찔러왔다.

 가까스로 몸을 뒤틀어 검을 피해내니 곧바로 기사급 도적의 발차기가 복부로 날아들었다. 그것마저 피해낼 수는 없어 직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커헉!”

 입에서 선혈을 뿜어내며 뒤로 날아간 카트란이 뒤쪽의 바위에 처박혔다. 도적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안 돼!’

 카트란은 흐려지려는 의식을 붙들려 했지만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이미 한계를 맞이한 그의 육신은 그의 정신을 강제로 어둠 속에 잠기게 만들었다.

“그 녀석은 이능의 힘까지 가지고 있어서 도저히 노예로는 못 써먹겠다. 그냥 죽여.”

“그러지.”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죽어! 이렇게 죽을 수는……!’

 도적들 중 한 사람이 검을 치켜들고 이쪽으로 턱턱 걸어왔다. 카트란이 의식이 가물가물한 와중에도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잘 가라.”

 도적이 카트란에게 검을 겨눴다. 검 끝이 정확히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카트란은 흐릿한 눈으로 도적의 얼굴을 응시하다, 이내 혼절하고 말았다.

 * * *

 로엘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로 일반인이었을 줄이야.’

 그는 ‘우연’이라는 요소를 그다지 신봉하지 않았다.

 카트란은 여러 거대 조직들을 홀로 무너뜨린 것일지도 모르는, 그에 더불어 자신과 같은 15살 소년인 인물. 그런데 정말로 그저 ‘우연’이 겹치고 겹쳐 그런 이력을 지니게 된 인물이었을 줄이야.

 그가 의식을 놓아버리는 장면까지 직접 보고 나니 확실해졌다. 저 소년은 애초에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힘을 숨기기 위해 목숨을 버릴 리는 없을 테니.

‘시간만 버렸군.’

 로엘은 혀를 차며 아공간에서 라이플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카트란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도적을 향해 조준했다.

 지금까진 카트란의 비밀을 풀기 위해 도적들을 그대로 뒀지만, 이젠 손을 써야 할 때였다. 살짝 화풀이를 하려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옆에서 카트리나가 마찬가지로 라이플을 조준했다. 도적들을 통솔하는 두 기사 출신 도적 중 나머지 한 사람을 겨냥했다.

 * * *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카트란은 힘겹게 눈을 떴다. 방금 전 혼절했던 바위에 기댄 그대로 정신을 되찾았다.

 정신이 되돌아온 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황홀할 정도로 잘생긴 동년배의 소년이었다. 그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직후 퍼뜩 정신이 든 카트란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서 기절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린 것이다.

 그가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으윽.”

 도적에게 걷어차인 배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카트란이 저도 모르게 배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그것을 억지로 참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

 도적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다들 참혹한 시신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반사적으로 카트란의 고개가 다시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소년에게로 돌아갔다.

 어렵지 않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눈앞의 소년이 도적들을 전부 척살해 버린 장본인이리라.

 카트란은 곧바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상대의 복장, 그리고 느껴지는 기품으로 미뤄보아 상당히 지체가 높을 것이라 짐작되었다. 그래서 동년배로 보임에도 존칭을 사용했다.

“…….”

 그러나 상대에게선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카트란이 의아한 마음으로 살짝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카트란의 생명의 은인이자, 방금까지 카트란을 지켜보고 있던 인물, 로엘은- 

“……?”

 굉장히 애매한, 혹은 미묘하게 당혹스러워하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