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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왕실 주최 파티(3) (121/249)

 121화. 왕실 주최 파티(3)

“체질상 냉기를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면 괜찮은 재능을 보일 거라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합니다만, 어찌 되었든 제 두 제자의 무재(武才)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구음절맥은 체질상 빙공에 적합하긴 했다. 그러나 자질이란 것은 상대적인 법. 레이나와 셀린이 지닌 압도적인 자질에 비교할 바는 절대 아니었다.

“너무하는군.”

 자작이 은인에게 차마 화는 내지 못하고 분을 삭일 때였다. 레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굳이 그 좋은 재능을 썩힐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방금 분명 딸아이에겐 재능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거야 무예에 관한 재능을 말한 거고, 다른 쪽의 재능 말입니다.”

“!”

“구음절맥을 타고난 이는 머리 쓰는 일에 있어 다른 이들과 비교해 압도적인 우월함을 보입니다. 그 좋은 재능 놔두고 무공을 가르쳐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 딸아이가 어린 나이에서부터 학문적인 성취가 굉장하긴 했다. 너무 병약했던 탓에 그것에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진 못했지만.

“차라리 어디 마탑에 집어넣으시는 게 나을 겁니다. 냉기 계열 마법을 익히게 하면 될 테지요.”

“그런가!”

“마탑에 연줄이 없다면 제가 다리를 놔 드릴 순 있습니다.”

“마탑과도 관계가 있었나?”

“네, 뭐. 바엘른 마탑과 조금.”

“바엘른 마탑?! 그 제국의 바엘른 마탑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넌 대체…….”

 자작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인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자작의 시선을 맞받았다.

 물론 로엘을 떠올리고 한 말이었다. 그를 통해서라면 마탑에 자리 하나 만드는 일쯤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실상 로엘에게도 굉장히 좋은 일일 터. 거리낄 것도 없었다.

 자작은 크게 실감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구음절맥을 타고난 이의 오성(悟性)은 일반인과 비교를 불허한다. 자작의 딸이 마법을 익히게 되면 짧은 시일 내에 강대한 전력이 되겠지.

 그런 그녀의 후원자로 로엘을 추천해두면 나머진 그가 알아서 할 터였다. 휘하로 끌어들이든 어쩌든. 그리고 그녀를 이용해 자작을 제어하는 일까지도.

“생각해 보겠다.”

“그렇게 하시죠.”

 자작은 숙고하는 모습으로 자리를 떠나갔다.

 그러자 다음으론 여러 귀족 영애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실 다들 진작부터 다가오고 싶었으나 워낙 거물들이 줄지어 선수를 치는 바람에 지금까지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파그렙 자작가의 여식입니다 엔리 파그렙입니다.”

“이렇게 멋진 분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

“괜찮으시다면, 저와 춤을 추시지 않겠습니까?”

 레이나가 살짝 불편한 얼굴을 했다. 물론 애인이 남들 눈에도 멋지게 보인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기분이 살짝 언짢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레인은 그런 그녀의 기분을 눈치챘다. 그래서 귀족 영애들의 춤 신청을 모조리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어서.”

 그가 레이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귀족 영애들이 아쉬워하는, 그러나 동시에 부러워하는 표정으로 그 장면을 응시했다.

“춤 좀 가르쳐 줬으면 하는데. 배운 적이 없어서.”

 레이나가 실소했다. 이 무슨 무드 없는 춤 신청이란 말인가.

“곤란한데요, 스승님. 이런 자리에서 춤도 제대로 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무시당할걸요?”

“다른 사람들 춤추는 모습 보고 대체로는 익혔어. 세세한 것만 알려주면 돼.”

“머릿속으로요? 그것도 여기 회장에 들어오고 난 뒤부터?”

“어.”

 레인은 다른 건 몰라도 몸 쓰는 일엔 자신이 있었다. 전신의 근육 하나하나를 전부 통제하는 것마저 가능했다. 춤동작을 따라 하는 것쯤이야 문제도 아니었다.

 레이나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레인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회장 가운데로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오, 저기 봐.”

“레이나 하슨이다.”

“이성의 춤 신청은 전부 거절하기로 유명한 그녀가…….”

 수많은 남성 귀족들이 탄식을 흘렸다. 사교계에 등장한 뒤 지금까지 그 어떤 이성과도 일정 이상 친분을 나누지 않았던 도도한 그녀인 만큼 파장이 적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태도에 의한 추문도 적지 않았다. 역시 그 동년배 이성 스승과 내밀한 관계이기에 태도가 쌀쌀맞다는 소문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대놓고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해버릴 줄이야. 다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지만 입맛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두 사람이 서로 굉장히 잘 어울리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선남선녀.

 추문은 한층 더 거세지겠지만, 거기에 앞으로는 은연중에 부러워하는 분위기가 섞여들게 되리라.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두 사람이 얼굴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밀착했다. 가슴팍에 느껴지는 뭉클한 감촉에, 코로 스며드는 은은한 향취에 레인이 옅게 미소 지었다.

 레인은 호언대로 처음 몇 번 시행착오를 겪더니 곧바로 능숙하게 레이나를 리드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간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 * *

 그 뒤론 별다른 일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파티가 후반부에 접어들자 국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50대 중반의 건장한 중년인이었다. 그 양옆으로 왕비와 왕자, 공주들이 자리 잡았다.

 국왕은 잠시간 레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레인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레인이 크레틸 자작을 제압했음을 보고받아 알고 있기에 잠시 관심을 준 것이리라.

 파티가 끝난 뒤엔 하슨 백작이 국왕에게 불려갔다. 그리고 나머지 일행은 숙소로 복귀했다.

 레인은 숙소로 되돌아오자마자 답답한 정장을 벗어 던지고 머리칼을 풀어헤쳤다. 금세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레인에게 레이나가 아쉬운 눈길을 던졌다.

 그렇게 수도에서의 일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 * *

 마탑으로 되돌아온 로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계약의 현자, 마르스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또 왜?”

 우웅!

 로엘은 대답 대신 곧바로 아공간에서 르우벤에게 받은 아티펙트를 꺼내 들었다. 마르스는 로엘에게 아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탑주님께 아공간을 받은 거냐?”

“그런 것보다, 이걸 좀 보시죠.”

“재수 없게 자꾸 말 돌리지 마라. 어린놈이.”

 마르스는 투덜대면서도 로엘이 건네는 물건을 받아들었다. 일단 그도 로엘이 뭘 보여주려는 것인지 궁금하긴 하던 차였다.

“이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스의 주름진 눈매가 확 하고 치떠졌다. 그리고 정확히 그 타이밍에 맞추어 로엘이 주름진 손으로부터 아티펙트를 휙 하고 채갔다.

 신체 능력은 일반인 수준인 마르스가 무공 수련자인 로엘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 있었을 턱이 없다. 마르스는 순식간에 텅텅 빈 자신의 손을 끔뻑이는 눈으로 내려다봤다.

“이놈! 그걸 이리 내놓지 못하겠느냐!”

“싫습니다.”

 로엘은 딱 잘라 말했다. 성질 더러운 노인네 희망 고문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동안 이쪽이 저 괴팍한 노인네에게 희망 고문당한 것이 얼마던가. 이 정도는 해도 무방하리라.

“이게 어떤 물건인지는 알아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알겠다. 도움을 주면 되는 거겠지? 네가 데려오는 자들과 너 사이에 계약을 맺어주면 된다고 했던가?”

 로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정도론 부족합니다.”

“?”

“제게 계약 마법을 전수해 주십시오.”

 그 말에 마르스가 격노했다.

“빌어먹을 자식! 내가 계약 마법을 복구하기 위해서 들인 세월이 얼마인 줄은 아느냐! 그걸 달랑 아티펙트 하나 들고 와서 날로 먹으려 들어?!”

“싫으면 거절하시면 됩니다.”

 로엘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아공간을 열었다. 그러자 또 다른 아티펙트 3개가 그 안에서 튀어나왔다.

 마르스는 로엘의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저 모두가 계약 마법과 관련한 아티펙트이리라.

“대체 그것들을 어디서 구한 것이냐!”

 그렇게 수소문하며 찾아다녔던 물건이 왜 하필 저 어린놈의 손에 들어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네 개나.

“얼마 전까진 적당한 조건이면 족했었는데, 요근래 제가 마르스 님께 섭섭함이 좀 많이 쌓였습니다. 요구 조건을 받아들여 주셔야겠습니다.”

 실상 정말로 마르스에게 굉장히 섭섭함이 쌓여 있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해야 협상이 용이해질 것이라 계산했기에 조금 짜게 말하고 있는 것일 뿐.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잖느냐!”

“옛 친우를 통해 소개받은 인맥에게서 빌려왔습니다.”

“빌려왔다?”

“예. 대신 제가 마르스 님께 계약 마법을 배워서 그가 필요로 하는 일에 사용해 주기로 했습니다. 물론 금전적인 보상은 따로 지불했습니다만.”

“내가 네게 마법을 전수할지 말지 무슨 수로 확신하고?”

“거절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아티펙트를 되돌려주는 수밖에. 이미 지불한 돈이야 좀 아깝지만, 그뿐입니다.”

“이 빌어먹을 자식.”

 마르스는 이를 갈았다. 이 돈 많은 놈이 그 정도 손해에 눈 하나 깜박할 리가 없다. 지금 눈앞의 소년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아쉬운 건 내가 아니다.]

 눈앞의 소년도 자신의 도움이 없으면 아쉽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정도가 이쪽과는 다르다. 이쪽은 저 아티펙트가 절박한 데 비해 저 녀석은 계약 마법이 절박할 정도로 필요하진 않으니.

 필시 저 돈 귀신은 계약 마법을 얻어내지 못하면 그냥 돈으로 땜빵하면 된다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완벽한 보안까진 무리더라도.

‘…….’

 저 돈에 환장한 공방지기에게 평생을 바쳐온 계약 마법을 전수하자니 마법사로서의 자존심이 걸렸다. 그것은 다른 이들에겐 몰라도 마르스 본인에겐 굉장히 중요한 가치였다.

 그렇지만 이대로 저 아티펙트를 분석할 기회를 놓치는 건 더더욱 곤란했다. 오랜 세월 진전 없이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고 있던 차에 한 줄기 광명이 내려왔는데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차라리 지금은 거절하고 저 녀석에게 아티펙트를 빌려줬다는 녀석의 소재를 찾는다면.’

“참고로 제 제안을 거절하고 아티펙트 제공자의 소재를 찾을 생각이시라면, 포기할 것을 권해드리고 싶군요.”

“…….”

“그자의 소재를 알아내긴 쉽지 않으실 겁니다. 저를 통해 알아내실 수도 없을 테고요. 그리고 알아낸다 해도 그는 마르스 님과의 협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당연한 말이지만, 르우벤에겐 마르스보다 로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게 더 이득이다. 로엘이 입김을 조금 불어 넣는 것만으로도 마르스는 르우벤과 마주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지리라.

‘귀신같은 놈.’

 마르스는 내심 혀를 찼다. 말도 꺼내지 않았건만 속을 전부 읽어내고 빠져나갈 구멍을 없애버리다니. 결국 그에게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좋다. 내가 졌다.”

 어쩔 수 없다.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아티펙트에 대한 갈망이 더욱 고팠다. 양자택일이 강요됐으니 한쪽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도 죽기 전엔 이쪽 분야의 끝을 봐야지.’

 마르스는 씁쓸한 얼굴로 자기 위안을 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로엘이 그제야 빙긋, 하고 웃는 얼굴을 했다. 마르스는 그 얼굴이 굉장히 얄밉다고 생각했다.

 * * *

 로엘은 단 일주일 만에 마르스가 복구한 계약 마법을 전부 전수받았다. 사실 전부 전수받았다 해봐야 마르스가 지금까지 복구한 계약 마법은 한 가지뿐이었지만.

“괴물 같은 놈.”

 그렇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마법을 습득한 것은 사실이었다. 마르스가 질린 표정을 지었을 정도였다.

 마르스가 그냥 좋게 좋게 가르쳐 준 것도 아니었다. 어떤 것은 누락해서 가르치기도 했고, 건성건성 가르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로엘은 그 압도적인 천재성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버렸다.

 도리어 그것을 핑계 삼아 로엘은 네 개의 아티펙트 중 세 개만을 지급하겠다고 선언해버렸다. 물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 직접 연구할 요량이었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마르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도 그 정도면 로엘이 많이 봐줬다고 할 수 있었다.

 로엘은 곧이어 지금껏 끌어모아 뒀던 용병들을 대상으로 계약 마법을 사용했다. 상대의 생사여탈권을 통째로 양도받는 주종 계약 마법을.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남에게 양도하는 것을 누가 쉽게 받아들이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지원자의 숫자는 충분했다. 돈의 힘은 위대했다.

 사실 애초에 이쪽 세계 사람들은 목숨의 가치를 지구인들보다 훨씬 낮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괜히 용병업계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아니었다. 문명 수준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계약상 주인이 될 이가 좋은 인물이길 바라며 도박하는 심정으로 몰려든 지원자는 상당히 많았다. 로엘은 그렇게 모인 지원자들 중 실력이 출중한 이들만을 따로 선별해 뒀었고.

 그런데 그 대열에 용병이 아닌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카트리나였다.

 일전에 플뢰비르 영지에서 함께 움직였던, 와이번을 길들인 테이머. 그녀가 결국 부친까지 설득하고 로엘의 휘하로 들어온 것이다.

 로엘은 총원 120명의 인원에게 지금껏 생산한 무구를 일일이 지급했다. 그가 직접 사용하는 무구들에 비해 성능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말도 안 되는 위력을 지닌 물건들이었다.

 10명씩 12개의 팀을 이루게 하고, 각 팀의 10명에겐 각각 다른 무구를 지급했다. 각각 다른 특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리고 각 팀에서 팀장을 한 명씩 뽑았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혹은 지휘 능력이 탁월한 자가 팀장으로 뽑혔다. 참고로 제1팀 팀장의 자리는 카트리나가 차지했다.

 120명의 인원은 지급된 무기에 익숙해지기 위한 한 달간의 수련을 거치는 거침으로써 로엘이 구상한 최정예 무력대로 거듭났다.

 레인에게서 타인에게 전수할 권리를 얻은 신투(神偸)의 보법과 금나수법 또한 전수했다. 지금 당장만 해도 강대한 전력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력한 전력으로 성장할 터였다.

 그렇게, 로엘 직속 무력 조직 ‘12사도’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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