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왕실 주최 파티(2)
“이, 이쪽이 잘못했소. 기운을 거둬 주시오.”
아르펜이 다급히 용서를 구했다. 이대로는 정말로 위험하다고 여긴 것이다. 상대가 평민이고 자신보다 나이도 어렸지만, 그는 반존대를 했다. 절로 말이 그렇게 나왔다.
“사과는 네가 아니라 네 뒤에 있는 아가씨께서 하셔야지.”
기세를 조금도 거두지 않은 채, 레인이 그렇게 말했다.
아르펜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저 쓸데없이 자존심만 센 여자가 제대로 된 사과 따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건방진 평민 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 너 따윈 아버지께서 마음만 먹으면!”
레인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가 내뿜는 기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쓸데없이 입을 놀린 마르실을 아르펜이 잠시 원망스러운 눈으로 돌아봤다.
“거기까지만 하지. 모처럼 파티 중인데 분위기가 너무 험악하구나.”
그런데 어디선가 청아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레인의 살기등등한 기운이 훅, 하고 자취를 감췄다. 정확히는 무형의 기운에 밀려 나간 것이었다.
레인이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시선으로 쫓았다.
“방해한 것은 미안하지만, 그래도 좋은 자리이지 않으냐. 가능하면 자중해 줬으면 싶구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곱게 틀어 올린 금발이 눈부셨다. 풍만한 가슴과 그럼에도 군살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몸매가 불균형한 매력을 뽐냈다.
다만, 레인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본래라면 진작 노화했어야 할 육신을 괴물 같은 육체 제어 능력으로 억지로 붙들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간파할 수 있었다.
‘그런가. 이 여인이…….’
“르뷔아나 후작가의 기사인 아르펜이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레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아르펜이 당황해서 급히 예를 취했다. 이어서 마르실, 레이나 또한 예를 취했다.
“레인이라고 합니다.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레인 또한 분위기에 맞춰 예를 표했다. 딱히 내세울 직함도, 작위도 없었기에 인사는 간결했다.
“그래. 만나서 반갑구나.”
왕국의 유일한 검존(劍尊). 재상인 케이트 공작과 더불어 국왕을 제외하면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인물.
니에라 필 빌헬름 공작.
그녀의 등장에 레이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르펜이 극도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르실이 그녀답지 않게 극도로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을 띠었다.
아름다운 여공작은 마르실에게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일단 내가 보기엔 먼저 잘못을 한 쪽은 그쪽인 듯싶은데. 좋게 사과하고 끝내는 게 어떻겠느냐?”
“하, 하오나.”
공작이 레인 측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자 마르실은 극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모욕을 당해놓고 조용히 넘어가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다고 왕국 최고 권력자의 제의를 거절할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 어떻게 생각하시오. 르뷔아나 후작.”
마르실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니에라 공작이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곳엔 어느새 르뷔아나 후작가의 가주인 바르덴 칼드 르뷔아나 후작이 서 있었다. 명문 귀족가 출신 초인이자, 왕국 최상위 권력자 중 한 사람인 창술사가.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공작 전하.”
후작은 아무런 주저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에 마르실이 경악했다.
“아버님!”
그녀는 항의 어린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르뷔아나 후작의 매서운 눈빛에 그것을 거두어야만 했다. 후작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무려 검성에게 무례를 저지른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일이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일반인이니 저 젊은 괴물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제대로 깨닫지도 못했겠지.
그렇지만 니에라 공작의 제안에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존감이 높은 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자존감에 분별력이 묻혀버려서야 되겠는가.
‘저택으로 돌아가면 근신이라도 시켜야 하겠군.’
후작이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낮게 혀를 찼다. 딸아이의 분별없는 처신 덕분에 이쪽이 적당히 숙이고 들어가야만 일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딸아이가 결례를 저질렀군. 제대로 사과하도록 지시하겠네.”
후작은 레인에게 그렇게 말하며 마르실에게 손짓했다. 마르실은 부들부들 떨며 마지못해 사과의 말을 뱉어냈다.
“부, 부적절한 발언으로 불쾌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이쪽이야말로 열이 올라 예의에 어긋난 발언을 했습니다.”
레인은 레이나가 옆에서 은근히 일러준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목소리에 진정성이라곤 조금도 담기지 않았지만.
‘쯧.’
레인의 입장에선 솔직히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결국 제대로 된 사과도 받아내지 못했을뿐더러, 레이나가 그동안 받아온 괴롭힘에 대한 보복도 제대로 이뤄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레인은 다소 퉁명스런 얼굴로 뒷말을 덧붙였다. 적어도 문제의 원인은 뿌리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또다시 제 제자가 이런 상황에 휘말려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면 그때는 이렇게 온건하게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니.”
어찌 보면, 아니, 그 누가 봐도 굉장히 무례한 발언. 주위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대체 어디서 그런 만용을 부릴 수 있는 자신감이 나오는 것일까.
다만 후작 본인은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그것을 허투루 들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상대는 검성이니까.
“그 말은, 후작가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라도 하겠다는 의미인가?”
“못할 것도 없습니다.”
레인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담백한 반응에 일부러 도발을 걸어본 후작이 되려 흠칫, 하고 놀랐다.
‘전면전을 원한다면야.’
레인이 도발적인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물론 지금 시점의 레인이 혼자서 후작가를 상대하긴 무리였다. 후작이 가진 세력은 단승 귀족인 크레틸 자작에 비할 바가 아니니까.
그러나 르우벤과 로엘에게 도움을 구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후에 로엘에게 바가지를 좀 긁히게 되겠지만, 적어도 두 사람이 도움을 주지 않을 리는 없을 테고.
“…….”
후작은 침음을 흘렸다. 그는 초인의 영역에 이른 무인이지만, 동시에 노회한 정치꾼이기도 했다. 눈앞의 소년이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정도는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소년의 무모함을 헐뜯고 비웃겠지만, 그는 마냥 그럴 수가 없었다. 그 감에 근거를 더 하는 것이 상대의 비상식적으로 높은 경지였다.
“그 부분에 대해선 딸아이에게 확실히 주지시키도록 하지.”
결국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후작을 응시했다. 마르실이 약간 원망 어린 눈을 했다.
솔직히 후작이라고 기분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가, 그것도 평민이 이렇게 건방지게 나오는데 어찌 기분이 좋을까.
그렇지만, 감정을 배제하고 행해야 하는 것이 정치였다. 상대는 이쪽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게 가능한 최소한의 ‘격’은 갖춘 인물이니 그에 맞춰 대응하는 것이 옳았다.
사실 딸아이와의 갈등이라는 사소한 이유 따위로 눈앞의 소년과 불화를 맺기엔 수지가 맞질 않기도 했다. 저 나이에 저 경지라면, 차후에 검존 이상의 경지에 오를 가능성이 굉장히 높지 않겠는가.
“그 대신 후작가에 어떠한 유감도 남겨두지 않길 바라네.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되긴 했지만, 실상 우리 후작가는 자네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으니.”
자존심을 약간 죽이는 대신 실리를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노련한 대응에 레인이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일이 일단락되었다. 후작은 마르실과 아르펜을 이끌고 자리를 벗어났다.
후작으로부터 쓴소리를 들었는지 마르실이 멀리서 원독 어린 눈길을 던져왔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굉장히 재미있는 녀석이로구나.”
그런 와중, 니에라 공작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레인에게 말을 붙였다.
“그 나이에 그 경지인 것도 놀라운데, 성격도 상당하지 않느냐.”
“…….”
어린 나이에 실력에 취해 자만에 물들었다 말하고 싶은 것일까. 레인이 미간을 살짝 모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조금 과하다 할 수 있는 행동거지가 언뜻 보면 자만에서 비롯된 것 같은데, 또 자세히 보면 그렇지만도 않으니.”
“……?”
“오히려 선천적인 성격을 후천적으로 많이 죽여 온 것만 같아. 언뜻 상대의 기분을 배려하지 않고 무례를 범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선’을 넘지는 않고.”
‘이 자…….’
레인이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 니에라 공작은 정확히 핵심을 짚고 있었다. 역시 왕국 최고 권력자인 만큼 단순히 무력 수준만 높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다. 나중에 한 번 따로 시간을 내서 날 찾아와줬으면 하는데, 그래 주겠느냐? 그쪽의 제자 아가씨도 함께.”
레이나는 니에라 공작의 제안에 크게 놀랐다. 저 여공작이 타인을 자신의 거처로 초대하는 일은 웬만해선 없었다. 그만큼 레인의 진경에 놀랐고, 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리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공작 전하.”
레이나가 옆구리를 살짝 찌르며 전해준 말을 레인이 그대로 답습했다. 공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벗어났다.
“다시 보게 되어 반갑군.”
공작이 자리를 뜨자마자 곧바로 기회를 보고 있던 헬튼 백작이 다가왔다. 레인이 파티에 참석하도록 만든 장본인.
“못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새 굉장한 진전을 이룬 듯싶군그래.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크레틸 자작과의 일전에서 깨달음을 좀 얻었습니다.”
“왕국에 그야말로 초신성이 등장했군. 언제 대련 한 번 하지. 기대하고 있겠네.”
“알겠습니다.”
대련이라면 레인도 환영하는 바였다. 레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주로 헬튼 백작이 크레틸 자작을 어떻게 쓰러뜨렸냐는 질문을 하면 레인이 적당히 대답하는 식이었다.
헬튼 백작이 떠나가고 다음으로 찾아온 이는 크레틸 자작이었다.
“너도 참 대단하군. 성격이 드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왕실 주최 파티 회장에서 곧바로 트러블을 일으킬 줄이야.”
“얼굴색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레인은 여전히 자작을 공대했다. 공적인 자리이니만큼 구설수에 오를 행동은 자제하는 것이다. 그런 것치곤 르뷔아나 후작가와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갈등을 일으키긴 했지만.
“덕분에. 딸아이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주치의의 소견대로라면 앞으로 보름 이내에 의식을 찾을 테지.”
“잘 됐군요.”
“아내도 굉장히 기뻐하고 있다. 딸아이를 간병하느라 이 자리에 오진 못했지만, 감사 인사를 전해달라더군.”
“…….”
“이 자리에 널 찾아온 것은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다.”
“?”
“넌 딸아이의 증상이 ‘병’이 아니라고 했지. 정확히는 ‘체질’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체질이기에 완벽한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언젠가 재발할 거라고도 했고.”
“정확히는 발병이 아닙니다. 따님에게 있어선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생리현상일 뿐. 그게 몸에 해롭다는 게 문제입니다만.”
“그렇기에 체내의 냉기를 조절하기 위한 후천적인 수련에 힘써야 하고.”
“예. 치료를 통해 체질이 어느 정도 개선되었으니 앞으로는 그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그래서 부탁하려는 거다. 넌 냉기를 다루는 무예를 습득하고 있어. 그렇지 않나?”
“…….”
이전에 자작과 맞부딪치면서, 레인은 북해빙궁의 무공을 몇 번이나 사용했었다. 자작이 언급한 무공은 바로 그것이었다.
“딸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한다. 그 아이가 자신의 체질을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도록.”
자작이 결연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어찌 보면 딸아이의 진로를 멋대로 결정하는 일이지만, 그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이렇게 하면 최소한 그녀가 다시 앓아눕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싫습니다.”
그리고 레인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자작의 부탁을 거절했다.
“어째서지? 네겐 이미 제자가 두 사람이나 있지 않나? 거기에 한 사람 더 추가된다 해도…….”
“따님에겐 그 둘과 같은 재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
레인은 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