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대화(1)
대련이 마무리되고 부상을 포션으로 완치시킨 뒤, 일행은 다시 숙소로 복귀했다.
백작가 일행도 볼일을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난데없는 바엘른 마탑주의 등장에 그들이 혼돈에 빠진 것도 잠시, 이후엔 서로 소개를 마치고 친분을 쌓는 시간을 가졌다.
백작은 혹여 실례를 저지르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로카인을 대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막상 로카인은 르우벤과의 교섭이 원하는 대로 풀린 덕분에 애초부터 기분이 좋은 상태였지만.
그 와중에, 로엘은 르우벤을 한쪽 방으로 따로 끌고 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레인이 그것을 구경했다.
“그러니까, 미래에 일어날 큼지막한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으면 전부 알려달라고?”
“그래. 대가는 충분히 지급할게. 레인이라면 모를까 내겐 여러모로 유용할 것 같으니.”
이를테면 특정 국가에 대흉년이 든다고 가정해보자. 레인은 딱히 그로부터 무언가 이득을 뽑아낼 수 없겠지만 로엘은 다르다. 압도적인 자금력을 바탕으로 대량의 식량을 미리 준비해두면 되니까.
로엘에게는 이미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세력이 있다. 무력적인 측면이 조금 부족한 면이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충분히 보강될 터다. 주어진 정보를 이용해 이익을 뽑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좋아.”
르우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가 알고 있는 미래의 큰 사건이라고 해 봐야 몇 안 된다.
유적에 관련한 지식은 그가 그만큼 열정을 쏟았던 분야인 만큼 많이 알고 있었던 것뿐이다. 프레퍼에 관한 것은 소속되어 있었던 용병대와의 충돌이 잦았기에 잘 알고 있었던 것이고.
대신 몇 안 되는 만큼 전부 거대한 사안이다. 그만한 사안이 아니었다면 그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큰 사안인 만큼 그가 손댈 수 없는 영역의 일이기도 하고.
“일단 ‘인재’에 관한 정보는 대부분 내가 사용해야 할 테니 그건 제외한다? 나로서도 회유하기 불가능하다 생각되는 몇몇만 빼고.”
“그래.”
“그럼, 일단 가까운 시일 내에 일어나는 일부터. 뭐가 있더라…….”
르우벤이 테이블에 놓인 비스킷을 와작와작 씹으며 고민했다. 떠오르는 것은 여러 가지 있는데 순서대로 정리하자니 머리가 아팠다.
“내년 봄 즈음엔 봉인되어 있던 대영웅 ‘하르넴’의 유적이 드러나게 된다만. 그건 이후에 이야기하기로 할게. 그때엔 너희에게 도움을 구할 생각이니까.”
“하르넴? 최악의 흑마검사를 물리쳤다는?”
“어.”
“그건 꽤 기대되는데. 또 다른 건 없어?”
르우벤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거기서 반년 뒤엔 벨리아 남부에서 기본의 현자와 프레퍼 사이에 충돌이 벌어져. 프레퍼의 간부 하나와 벨리아 왕국에 존재하는 조직 거점들이 통째로 쓸려나가지.”
“기본의 현자? 들어본 적 없는데.”
“그럴 수밖에. 그가 전면에 나서는 건 그때가 처음이니까. 공식적으로 세계에 대현자 한 사람이 더 추가된 사건이라 기억하고 있지.”
“대현자?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대현자의 칭호를 얻었다는 건가?”
“어. 일단 도저히 내가 끌어들일 깜냥이 안 되는 인간이라서 말해주는 거야. 네가 네 세력을 보다 거대하게 키우면 어쩌면 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좋아. 더 없어?”
말하면서 르우벤이 비스킷이 있는 쪽으로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비스킷은 이미 모두 사라진 뒤였다. 그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뭐야. 벌써 다 떨어졌어?”
“…….”
“네가 다 먹었냐?”
“새로 가져다 둘게.”
“당연히 그래야지.”
레인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로엘이 그 뒷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 녀석, 정말 성격 많이 죽였네.”
“저게 성격이 죽은 거라고?”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
로엘이 피식 하고 웃었다. 그리곤 다시 앞서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재촉했다.
“그러고 보니 2년 뒤 6월 중순 즈음에 메르타 왕국에 수재(水災)가 일어날 거야. 유적을 가장한 트랩이 작동되는 바람에 전국적으로 장마가 쏟아진다나.”
간혹 유적 중엔 제작자가 침입자를 엿 먹이기 위해 생활공간 대신 트랩을 장치해 놓은 것이 있다. 과거에도 괴짜, 혹은 심사가 꼬인 인물은 당연히 존재했으니까.
그런데 그 더미트랩이 초고대 시대에 터졌다면 괜찮은데, 현대에 터지게 되면 그야말로 재앙이 일어난다. 그 시대의 마법은 현대의 것에 비할 바가 아니기에.
“그게 또 하필 왕국 차원에서 파견한 탐사대가 트랩을 발동시킨 거라서 왕족, 귀족들이 욕을 엄청 처먹었지. 원래부터 썩은 놈들이긴 했지만.”
“메르타 왕국은 애초에 장마가 웬만해선 내리지 않는 나라지. 농작물 피해가 컸겠군.”
“어. 거의 전멸했다고 들었어. 그냥 전국적으로 홍수가 일어난 수준이라고 보면 돼. 그 와중에도 세금은 그대로 거둬가는 바람에 아사하는 자들이 속출했고, 전염병까지 번졌고.”
“괜찮은 정보군.”
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한 이익을 뽑아낼 수 있을 듯싶었다. 돈도 벌고 메르타 왕실에 빚도 지우고. 덤으로 민초들을 구제할 수도 있으니 일석삼조다.
“그리고 4년 뒤에 노러츠 왕국의 도시 하나가 반파되는 일이 벌어졌었지, 아마.”
“전쟁이라도 일어난 건가? 아니면 반란?”
노러츠는 회귀 전 르우벤이 속했던 용병대를 괴멸시킨 왕국이자, 플뢰비르 영지가 속한 부패했기로 유명한 왕국이었다.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왕국.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러나 르우벤은 고개를 저었다. 추측이 빗나가자 로엘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마룡이야.”
“?”
“먼 옛날 봉인된 마룡이 봉인을 깨고 대학살을 벌인 거라고.”
“······.”
“봉인을 수호하는 가문에 변고가 일어난 모양이더라고. 혹시 프레퍼에서 일을 벌인 건 아닌가 의심하고 있어.”
“그럴지도. 그런 짓을 벌임으로써 이득을 얻는 단체라면 그 조직 정도겠지.”
“그래도 그 가문이 봉인이 깨지기 직전에 그 사실을 알리긴 한 모양이더라고. 봉화로. 그럼에도 막을 방법이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모양이지만.”
“마룡이 그렇게나 강한가?”
“어. 설사 검존이라 해도 놈을 어쩌지 못할걸? 강한 건 둘째치고, 독을 다루는 녀석이라 인간으로선 상대하기 벅차지.”
“······.”
“그나마 도시가 반파된 정도로 그친 것도 근방을 순회하던 ‘성녀’가 나타나 정화시켜버린 덕분이라고 하더라고. 마기에 오염된 탓에 상성상 성녀가 소멸시키기 용이한 녀석이었던 거지.”
“그 마룡이 나타났다는 지역. 자세히 알려줘. 이후에 어쩌면 써먹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로엘은 그렇게 말하며 아공간에서 지도를 하나 꺼내 들었다. 노러츠 왕국 전역이 표기된 지도였다.
“너 이건 어디서 구했냐. 이 정도 수준의 지도는 국가에서 유출을 통제할 텐데.”
“회귀까지 했으면서도 아직 세상을 모르는구나. 세상에 돈과 세력으로 안 되는 건 없단다. 이렇게나 부패한 나라에서 이것도 못 구해서야 말이 안 되지.”
“…….”
르우벤이 짜게 식은, 그러나 동시에 부러운 기색이 담긴 눈으로 로엘을 응시했다. 로엘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내 르우벤이 마룡의 봉인 장소, 그리고 피해를 입은 도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러자 로엘이 뭔가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얼굴이야?”
“뭔가 좀 이상한데.”
“뭐가?”
“내가 마룡에 대해서 자세히는 몰라도 대략적인 건 알거든. 마(魔)에 잠식되어 이성을 상실하고 파괴본능만 남은 존재. 맞지?”
“그렇지.”
“그런데, 네가 말한 마룡에게 피해를 입은 도시는 마룡의 봉인지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위치에 존재하는 도시지.”
“그런가?”
“지도를 봐. 마룡의 봉인지인 갈메아르 영지에서 보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시는 블뤼벨이 아닌 바르디아야.”
“듣고 보니 확실히 이상하네.”
“이성을 잃고 파괴본능만 남은 흉포한 마수가 굳이 가장 가까운 도시를 지나쳐 두 번째로 가까이에 위치한 도시를 향했지. 이게 우연일까.”
“…….”
“이 이상은 너도 뭔가 더 알지는 못하는 모양이네.”
“어. 마룡에 대한 이야기는 단편적인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 다라서. 아는 거라곤 블뤼벨이 반파되었다는 것뿐이야.”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 정보가 부족해.”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러지. 그럼 또 다른 정보도 있을까?”
르우벤이 찻잔을 들어 올려 한차례 목을 축였다. 로엘은 그가 입을 열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이건 좀 애매한 내용인데.”
“?”
“6년 후에, 제국에서 대참사가 일어나. 정확히는, 프레퍼가 대참사를 일으키지.”
“참사?”
로엘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프레퍼로 인한 참사라니, 지금의 제국이 다른 국가에 비해 프레퍼로 인한 피해를 거의 받고 있지 않음을 생각하면 괴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게 이번엔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를 모르겠다.”
“무슨 소리야?”
“원래 내가 알기로 이 시기의 제국은 최고로 혼란한 시기였어야 해. 황제로 등극한 게 너무 어린 소년이었던 탓에 섭정부터 시작해서 온갖 부정부패가 다 일어났었지. 프레퍼가 날뛴 건 물론이고.”
“……설마.”
“전대 황제가 지병으로 급사한 탓에 얼떨결에 등극하게 된 어린 황제. 심지어 어린 황제는 몸이 빈약하기까지 했지. 그래서 온갖 간신배가 득세했고. 이게 내가 아는 원래의 역사야.”
“현 황제의 위명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일이네.”
제위에 오르자마자 간신배를 비롯한 제국을 좀먹는 모든 귀족들을 숙청하기 시작한 ‘철혈의 황제’. 그 젊은 황제와 르우벤이 말한 ‘병약한 어린 황제’는 전혀 매치가 되질 않았다.
“혼란이 가라앉은 건 어린 황제가 병사하고 다음 황제가 즉위한 뒤의 일이야. 새로운 황제는 유능했지만, 그즈음의 제국은 완전히 썩어있었기에 재정비에 많은 시간이 들었지.”
“프레퍼를 쓸어버린 인물이라고 했던가.”
“어. 참사의 원인이 그들이라는 걸 알게 된 뒤로 막대한 병력을 결집시키더니 일거에 쓸어버렸지. 우리 용병대로 한 손 보탰고. 아무튼 결단성이 대단한 인간이었어.”
르우벤이 턱을 괴고 덧붙여 중얼거렸다.
“마침 전대 황제와 나이도 같아서 두 사람이 많이 비교되었었지. 무능한 황제와 유능한 황제. 호사가들이 좋아하는 단골 소재였거든.”
“…….”
“이야기를 돌려서, 문제는 이거야. 제국의 역사가 바뀌었어. 지금의 제국에선 프레퍼가 전혀 힘을 쓰고 있지 못하지.”
“…….”
“그동안엔 왜 그런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레인과 대면하고 나서 그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게 됐다.”
“황제, 혹은 황제의 측근 중 하나가 각성자일 가능성.”
“그래, 그거.”
또 다른 각성자가 존재할 가능성. 심지어 각성자가 황제일지도 모른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정보였다. 로엘이 손등으로 턱을 괴고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르우벤은 살짝 굳은 로엘의 표정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본래라면 프레퍼가 언령 마법사를 대거 동원해 세뇌시킨 귀족들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지. 당시 워낙 문제투성이였던 황실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알테라를 내주고.”
“알테라라면, 교육과 문화의 도시인 그 알테라를 말하는 건가?”
“어. 도시 내 거주하던 이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당했지. 상상이 안 가지?”
제국은 다른 국가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카데미’ 제도를 운용하는 유일한 나라다. 그렇기에 수많은 아카데미가 밀집되어있는 교육과 문화의 도시, 알테라는 어떤 의미에선 제국을 상징하는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알테라를 반란군 따위에게 점령당했다니. 그야말로 제국이 어디까지 떨어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로엘이 침음을 흘렸다.
“그 당시 제국 황실이 얼마나 개무시를 당했느냐면, 무려 알테라 침공에 프레퍼의 주 전력이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을 정도였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그렇게까지 추락한 제국을 겨우 몇 년 만에 복구시킨 다음 황제가 정말로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말이 되는군.”
“어. 조금 잔혹한 면이 있긴 했지만 대단한 자였어.”
프레퍼가 제국에서 활동하면서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은, 차기 황제의 유능함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 때문에 통째로 쓸려나가는 결말을 맞이했고.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야. 지금의 제국은 그때와는 달라. 그렇다면 ‘반란군의 알테라 시 침공’은 아예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