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각성자 vs 각성자 vs 각성자(1)
자작의 딸을 치료한 레인은 숙소로 복귀했다.
숙소로 되돌아온 레인은 각종 무기, 침을 비롯한 소지품들을 하나하나 손질했다. 여행의 여독도 풀 겸 느긋한 시간을 가졌다.
옆에 앉은 르우벤이 심심한지 말을 걸어왔다.
“잘 치료되어서 다행이네.”
“이걸로 자작은 완전히 끌어들였다고 봐도 좋겠지.”
레인은 치료 결과를 보고하자 크게 기뻐하던 자작 부인을 떠올렸다. 그녀를 애틋한 눈으로 응시하던 자작 또한. 웬만해선 자작이 이쪽에 섭섭하게 구는 일은 없으리라.
“그보다, 편지는 확실히 전송된 거겠지?”
“어. 그런데 이제 와서 묻는 것도 조금 그렇지만, 정말로 괜찮은 거야? 확실히 네 말마따나 마탑으로 직접 전송시키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지만…….”
“소요가 좀 일어나겠지.”
레인이 피식, 하고 웃었다.
일인전승의 공간 마법. 그 마법을 다루는 이가 탑주로 있는 곳에 공간 마법으로 물건을 배송한다니. 분명히 트러블이 일어나리라.
“그 녀석이라면 분명 지금쯤 이 정도는 문제없을 정도의 입지를 쌓아뒀을 테니 문제는 없을 거다. 아마.”
레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르우벤이 큭큭 웃었다. 두 사람 다 그런 일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생각대로 마탑에선 소요가 일어났다. 로엘을 곤란하게 만드는 형태로.
* * *
“왔군.”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탑주님.”
로엘은 로카인의 호출로 최상층 휴게실을 찾았다. 로카인과 엘리제 두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로엘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로카인이 손에 들린 편지 봉투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네 앞으로 온 편지다.”
“레인 녀석이 보낸 건가요?”
“그래. 봉투에 그 녀석의 이름이 적혀 있더군.”
“그런데 그게 왜…….”
그 편지가 왜 문제가 되느냐는 질문을 하려던 로엘이 멈칫했다. 애초에 자신에게 편지가 왔는데 로카인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상황부터가 이상했다.
“배달되어 온 게 아니다. 전송되어 온 거지. 난데없이 마탑 1층에 편지가 소환되서 여러 사람이 당황했다더구나.”
“전송?”
“공간 마법으로 말이다.”
“!”
로엘은 일순 동요한 얼굴을 내보이고 말았다. 공간 마법으로 전송되어온 편지. 심지어 발신인이 레인이라니.
쉽게 말해 공간 마법의 유출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유출시킨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편지의 수신인인 자신이고.
“먼저 편지의 내용을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읽고 나서 내용을 알려다오. 생전 처음 보는 문자라 알아볼 수가 없더군.”
로엘은 지금 자신이 당황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사실 로카인 또한 아직까진 미약한 의심만을 흘리고 있는 정도였다.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그가 애초에 공간 마법을 익힐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워낙 천재인 녀석이라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 있을 뿐이었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확률. 참고로 엘리제의 생각도 대동소이했다.
‘대체 이 녀석은 뭘 하고 다녔기에 공간 마법을.’
로엘은 내심 황당한 기분에 휩싸였다. 정말로 유출시켰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레인 이 녀석은 지금껏 뭘 했기에 공간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일까.
로엘이 편지를 쭉 읽어 내려갔다. 이미 먼저 편지에 손을 댄 흔적이 있었다. 공간 마법의 유출이 의심되는 비상사태인 만큼 로카인도 마냥 예의를 차릴 수는 없었던 것이리라.
‘중원어로군.’
로카인이 읽을 수 없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편지에 쓰인 내용은 중원어로 적혀 있었다. 로엘과 레인이 아니라면 세상의 그 누구도 읽을 수 없는 문자였다.
참고로 중원어는 과거에 레인에게서 배웠다. 서로만이 아는 언어를 공유해두면 이후에 유용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레인이 지구의 언어를 익히길 극도로 귀찮아해서 대신 로엘이 중원어를 익혔다.
‘어라.’
대충 중반부까지 읽었을까. 로엘의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지금까지 주고받은 편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내용이 담긴 편지였다.
‘그런 일이 있었나. 거기에 또 다른 각성자라.’
이내 편지를 모두 읽은 로엘이 잠시 상념에 잠겼다. 워낙 많은 정보가 담긴 편지라 잠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로엘은 혀를 찼다.
‘빠르게 정보를 전해주려는 생각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바엘른 마탑에 공간 계열 아티펙트로 물건을 보낼 생각을 한 거냐. 너무하는군.’
레인도 분명 소요가 일어날 것임을 알았을 터. 그럼에도 그 특유의 성격상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리라.
‘그래도 다행이군. 설명하긴 쉽겠어.’
로엘은 표정을 풀었다. 오해를 푸는 건 어렵지 않을 듯했다. 각성자에 관한 내용은 말할 수 없겠지만, 그 이외의 이야기는 딱히 숨길 것이 없었다.
“이 편지는 공간 계열 아티펙트를 이용해 전송한 거라고 하네요.”
“뭐라고 했느냐. 공간 계열 아티펙트?”
“네.”
“그런 게 있단 말이냐!”
로카인은 그답지 않게 흥분해서 소리쳤다.
공간 계열 아티펙트는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관련 유적을 공략한 초대 바엘른 마탑주조차 구경도 하지 못한 물건이다.
관련 아티펙트를 연구함으로써 그 마법 자체를 발전시키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비주류 마법인 공간 계열 마법이 담긴 아티펙트라면 그 가치가 천금을 주어도 모자랄 정도로 높다 할 수 있었다.
“사실 공간 마법 관련 유적은 2개였다고 하네요. 초대 탑주께서 발굴한 유적 하나, 그리고 아티펙트 몇 점을 보관해뒀던 유적 하나. 레인이 그 유적을 발굴한 인물과 친구가 된 것 같군요.”
로카인과 엘리제의 눈이 동시에 번뜩였다.
“지금 레인은 어디에 있느냐. 내 직접 찾아가 봐야겠다.”
“나도 가겠어. 이전에 그가 토우런트 왕국 하슨 백작령에 있다고 했었지?”
순식간에 뒤바뀐 두 사람의 태도에 로엘이 피식, 하고 웃었다. 방금 전까지의 무거운 분위기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어지간히 몸이 달은 모양이었다.
이쪽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는 눈곱만큼도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순식간에 들킬 거짓말을 해서 뭘 하겠냐마는.
“아무튼 죄송하게 됐습니다. 레인 녀석 때문에 쓸데없는 의심을 사게 만들었네요.”
의심을 산 것은 로엘뿐이 아니다. 로카인과 엘리제 또한 여러모로 의심을 사고 있을 터였다. 외부로 공간 마법을 유출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다른 이들은 이번 일을 그냥 엘리제가 수련 중에 실수 좀 한 것이려니 하고 생각하겠지만, 마탑의 중역을 차지한 이들의 눈에도 그렇게 비치진 않을 터였다. 그들은 공간 마법에 대해 잘 아니까.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감사합니다.”
로엘은 그 문제는 더 따지지 않겠다는 로카인의 의사에 감사를 표했다. 수십 년간 절대적인 입지를 다져온 로카인이라면 어렵잖게 소요를 가라앉힐 터였다.
“그리고 지금 레인은 하슨 백작령에 없는 모양입니다. 일이 있어 수도로 불려갔다더군요. 그쪽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아티펙트의 소유자라는 그 친구도 아직 함께 있는 모양입니다.”
“잘 됐군. 오랜만에 그 녀석 얼굴이나 한번 보러 가자꾸나.”
로카인이 헛헛, 하고 웃었다.
로엘과 로카인 두 사람은 다음 날 곧바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러나 엘리제는 요즘 중요한 시기라서 결국 함께 가진 못하게 되었다. 로카인이 그렇게 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대신 의외의 인물이 따라붙었다. 칼비오였다.
로엘이 레인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느라 상단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마주친 칼비오가 선물에 관심을 가졌다. 사실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물품이었다.
준비하는 물건의 용도를 묻기에 내일 찾아갈 옛 친우에게 선물할 물건이라 했더니 그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로엘은 평소의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그것을 흘려 넘겼다.
그러다 그에게서 동행하면 안 되느냐는 요청을 받았다. 로엘은 칼비오가 왜 그러는지 의아했지만, 딱히 안 될 이유는 없어서 승낙했다.
그렇게, 세 사람이 공간을 넘어 토우런트 왕국으로 향했다.
* * *
로엘은 일행을 이끌고 하슨 백작가 인물들이 머물고 있다는 여관으로 향했다. 편지에 적힌 여관 이름을 주위에 묻고 다니며 잠시 이동한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얼굴 보겠네.”
새삼 묘한 느낌이 들었다. 거의 가족과도 같았던 친구와의 재회를 앞두고 있어서일까.
어쩐지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질 않았다. 무려 2년 만의 재회인 만큼 평범하게 말 붙이는 것조차 어색하지는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었다.
그를 아는 다른 이들이 들었다면 헛웃음을 터뜨렸을 생각이었다. 매끄러운 혀를 가졌기로 유명한 로엘이 이런 걱정을 다 하다니.
“뭘 하느냐? 들어가지 않고.”
“예.”
로엘은 로카인의 재촉에 여관 안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곧바로 뛰쳐나온 점원에게 별실에 묵고 있는 백작가 일행을 찾아가 자신들의 방문을 소식을 전달해줄 것을 요청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점원이 아닌 두 사람이 나타났다. 상대측에서 알아서 찾아온 것이다. 로엘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오랜만이다. 레인.”
“오랜만이군. 로엘.”
“반갑다.”
“그래.”
2년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눴다. 어색함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로엘의 걱정은 그저 괜한 기우였을 뿐이었다.
“잘 지냈냐?”
“수련 좀 하면서 그럭저럭. 너는?”
“이 몸께선 돈방석, 아니 황금 방석 위에 앉으셨지.”
“편지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지. 어지간히 해 먹은 모양이더군.”
“그보다, 너 기도가 이전과는 완전히 딴판인데? 전체적인 역량이 높아졌다기보단 아예 탈피했다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거냐?”
“어. 얼마 전에 경지가 올랐지.”
레인의 발언에 로카인이 크게 놀랐다. 오히려 로엘 쪽이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로카인은 자신은 보이지도 않냐며 투덜대려던 것도 잊고 표정을 굳혔다. 그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에 레인이 어떤 경지에 다다라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현재 다다랐다는 경지가 어떤 것인지도 쉽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로카인은 규격 외의 천재라는 것은 눈앞의 소년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말았다.
뒤쪽에선 칼비오가 묘한 눈길로 레인을 살폈다.
사실 칼비오가 로엘과 동행한 것은 가끔씩 그가 언급하던 ‘괴물 같은 친구’를 직접 견식하기 위해서였다. 무려 로엘씩이나 되는 인간이 ‘괴물’이라 표현한 상대가 누구인지 의문이었던 것이다.
‘보기만 해선 잘 모르겠군.’
칼비오의 시선으로 봤을 때, 레인은 확실한 무투가였다. 그리고 무투가는 마법사와 달리 수련 시간과 경지가 비례하는 정도가 크다는 것이 상식.
레인이라는 인물이 ‘마법사’인 로엘과 동갑이라는 것을 놓고 봤을 때, 그가 과연 현재도 ‘괴물’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인물일지는 의문이었다. 과연 그가 로엘에 비할 만한 인재일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쪽은?”
“편지에 언급했던 녀석이다. 아티펙트 콜렉터지.”
레인은 의도적으로 ‘각성자’라는 말을 생략했다. 그 부분은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그렇군. 반갑습니다. 르우벤 씨.”
“동갑인데 그렇게 존대할 것 없어. 편하게 말해.”
“그러지.”
르우벤이 특유의 너스레를 떨자 로엘은 곧바로 그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르우벤은 이어서 뒤쪽에 선 로카인에게 깊숙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탑주님.”
“만나서 반갑네.”
로카인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이곳을 찾아온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소년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이 일순 번뜩였다.
“이쪽은 내 파벌 소속원이야. 인사해.”
“칼비오 펠트만입니다. 반갑습니다.”
“레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뭐야. 언제 그렇게 평범하게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거야?”
로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반쯤 놀리려는 의도가 들어간 과장스러운 얼굴이었다. 레인이 혀를 찼다.
“여전히 보모같이 구는구나, 너는.”
칼비오는 이렇게 다양한 얼굴을 선보이는 로엘은 처음 보았기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자리를 옮기시죠. 숙소에 가서 편하게 앉아 이야기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로엘이 로카인을 돌아보며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곧바로 자리를 옮겨 별채 1층에 놓인 원형 테이블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