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미래(3)
자작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눈앞의 소년은 애초에 자신의 딸이 앓고 있는 병에 대해 정통하다. 증상만 듣고도 정확한 병명을 유추해낼 수 있을 정도로.
“…….”
그동안 그렇게나 찾아다니던 인물과 이렇게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최악의 형태로.
“다시 말하지. 네 딸이 앓고 있는 병, 내가 치료할 수 있어.”
“굳이 그 사실을 강조하는 건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겠지?”
“이해가 빨라서 좋네.”
자작이 이를 악물었다. 상대가 무엇을 요구하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치료비를 구하지 못한 것은 고사하고 아예 이렇게 사로잡히기까지 했으니.
“그렇게 노려보지 않았으면 하는데. 어차피 내가 아니면 네 딸을 구할 방법 따위 없으니까.”
“자부심이 상당하시군그래.”
자작이 조소했다. 이미 딸아이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이들을 마주한 적 있는 자작이다. 레인의 발언이 나이 어린 소년의 자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지. 받아들이겠다.”
“그러고 보니 넌 아직 모르나.”
생각보다 미적지근한 자작의 반응에 레인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자작은 아직 딸아이의 병을 치료하겠다고 찾아온 놈들이 그를 고용한 바이튼 자작과 한통속임을 모른다. 그놈들은 딸을 치료할 방법 따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구속된 자작이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수 있었을 리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언령(言令) 마법이 깨지면서 자신이 바이튼 자작가 측 마법사들에게 놀아났다는 사실까진 눈치챈 모양이지만.
자작에게 있어 레인은 딸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인물. 반면 ‘그들’은 확실하게 딸을 치료할 수 있는 무리로 비쳐 보였을 터였다.
말하자면, 그의 입장에선 최선이 아닌 차선을 택해야 하는 상황. 암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자작의 입장에선 입맛이 쓸 수밖에 없을 터였다. 다름 아닌 딸아이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너, 속고 있었다고.”
“놈들에게 놀아났다는 건 알고 있다.”
“아니, 전쟁 중에 말고. 그보다 이전부터.”
“뭐?”
“애초에 네 딸을 치료하겠다고 찾아온 놈들도 바이튼 자작가의 마법사 놈들과 한패니까. 참고로 네 저택에 머물고 있던 그자들은 이미 다 증발해버린 상태다.”
“?!”
“굳이 더 설명 안 해도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는 알아챘겠지?”
자작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제야 자신이 철저히 이용당했음을 눈치챘다. 일순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대체 왜?”
“뭘 그런 당연한 걸 가지고. 이용해 먹기 좋아 보여서 그랬겠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은 한 기억은 없다.”
“타인의 악의는 딱히 원한을 사야지만 받는 게 아니지.”
“…….”
자작이 한 차례 숨을 골랐다. 이전에 컨디션이 무너져 있던 때와는 달랐다.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렇다면 딸아이를 치료할 방법이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지.”
“하지만 그 녀석들은 내 눈앞에서 딸아이의 의식을 회복시키기까지 했다.”
“구음절맥 말기에 의식을 회복했다고?”
“그렇다.”
“뻔하네. 잠력을 격발시켰겠지. 지금쯤이면 그 반동으로 상세가 확 악화되었을 테고.”
자작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딸아이의 갑작스러운 병환 악화는 그 때문이었던가.
“내게 뭘 요구할 생각이지? 그리고 그놈들은 대체 뭐냐? 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한 번에 하나씩만 물어. 일단 내 요구는 간단해. 첫째, 놈들을 지워 버리는 데 힘을 보탤 것. 둘째, 이후 내가 세력을 만들 때 가능한 한 도움을 줄 것. 공증을 위해 하슨 백작가에 협력을 요청할 거다.”
이전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외면했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레인도 많이 달라졌다. 개인적인 측면이 극도로 강했던 성향에 상당한 변화가 일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는 데엔 혼자보다 여럿인 것이 낫다. 아직은 막연한 계획일 뿐이지만, 그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자는 명확한 목표가 생겨났다.
참고로 르우벤 또한 스스로의 무력 강화를 끝마친 후엔 예전 동료들, 그리고 미래에 이름을 떨치게 되는 강자들을 끌어모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공증인을 세우는 것 정도로 괜찮겠나?”
귀족 사회는 어느 측면으론 약육강식이다. 하슨 가가 공증인 역할을 해 줄 수는 있어도 그뿐. 무언가 일이 터졌을 때 주변에서 힘이 강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배 째고 싶으면 해 보던가.”
레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젠 경지도 올랐으니 꿇릴 게 없다. 하슨 가가 보복의 정당성만 보증해주면 나머진 힘으로 밀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놈들은 뭐냐고 했었지? 말하자면 초거대 암흑조직이다. 바이튼 자작도 그 일원이고.”
“암흑조직?”
“조직명은 ‘프레퍼(Prepper)’라더군. 아, 그러고 보니 바이튼 자작도 증발해버렸다고 했던가.”
이번에 르우벤은 놈들의 움직임을 미리 읽고 움직였다. 놈들의 입장에선 내부 기밀 누출이 의심되는 상황.
점조직은 정보 노출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바이튼 자작이 곧바로 자취를 감춘 건 그 때문일 터였다. 이 이상의 정보 노출은 없도록 하려는 것이겠지.
“놈들의 목적은 간단해. 이번 일의 경우엔 하슨 백작령과 바이튼 자작령 사이의 지역감정 격화. 그로 인한 전쟁의 연쇄였겠지.”
“……?”
“그놈들이 원하는 게 그거라고.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
레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신이 얻은 정보를 늘어놨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에게서 사념을 모은다고 하더군. 원한에 찬 사념을.”
“사념?”
“그렇게 인공적으로 마법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더라고. 사념을 가공해서 특정 인물에게 몰아넣는다고 했던가? 들어도 뭔 말인진 잘 모르겠다만.”
자작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마법이 세상에 존재한다니 믿기질 않았다. 아니 그보다도, 그런 마법이 존재한다고 실제로 사용하려고 드는 녀석이 있다니 그게 더 어이가 없었다.
“그게 무슨.”
“초고대 마도시대의 마법을 복원했다던가.”
레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작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내용도 있었다. 놈들의 최종 목적은 조직명 그대로 마왕의 대륙 침공을 대비하는 데에 있다는 것. 설명하기 힘들 것 같아 이 부분은 제쳐뒀다.
그들은 그때가 되면 어둠의 세계를 나서 당당히 빛의 세계를 활보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있다. 선악에 관계없이 강한 힘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웃기는 이야기다. 그러나 마냥 비웃을 수만도 없다. 이들의 생각이 의외로 틀리지만도 않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니까.
‘결국 그 시대를 맞이하지도 못한 모양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초거대 조직이다. 듣기로 제국과 충돌할 무렵엔 웬만한 국가 정도는 찍어 누를 정도의 성세를 자랑했다고 한다.
놈들의 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대해진다. 그러니 억제하기 위한 수단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기 위한 첫걸음으로 우선 크레틸 자작을 영입할 생각이었다.
판을 짜는 데엔 익숙하지 않은 레인이라도 르우벤과 자신이 당장 전면에 나서 놈들을 몰아붙여선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가진 정보를 아끼고 아꼈다가 일거에 몰아쳐야 했다.
그렇다고 그 이전까지 가만히 있을 수만도 없다. 대신해서 전면에 내세울 인물이 필요했다. 크레틸 자작은 그런 측면에서 완벽한 인물이었다.
조직에 원한을 품기에 충분한 동기가 있는 인물이다. 자작에게 배후가 있음을 조직으로서 알아채기 힘을 터. 르우벤의 정보를 제공해 놈들을 견제하는 말로 활용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인물이 없었다.
“뭐가 어쨌건. 듣고 싶은 말은 다 해 준 것 같고. 제안은 받아들인다고 했지?”
“그래.”
“좋아. 거래 성립.”
* * *
왕도로 향하는 백작가 행렬이 구성되었다. 구성 인원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백작 부부와 장녀인 레이나. 그리고 이들을 호위할 기사와 병사 다수. 그리고 스스로 지원해 참가한 레인. 그를 따라서 참가한 셀린과 르우벤.
애초에 르우벤이 백작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던 것은 레인 때문이다. 레인이 없는 동안 의미 없이 시간을 축내느니 함께 움직이는 것이 낫다 여겨 따라나섰다.
크레틸 자작 또한 일행에 포함되었다. 드디어 포로 취급을 벗어났다.
일부 기사들이 왕도에 도착하기 전까진 구속을 유지해둬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려를 표해왔지만, 백작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작과 레인 사이에 오간 거래의 내용을 전해 들었기 때문.
딸아이의 목숨이 걸린 이상 자작이 이쪽의 뒤통수를 치려 들 일은 없을 터였다. 지금은 언령 마법에 잠식되어있는 상태도 아니고.
그렇게, 총인원 50에 이르는 행렬이 왕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왕도에 도착하는 데엔 장장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소모되었다. 호위하는 병력이 상당했던 만큼 이동 와중에 소요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일행이 고급 여관 내 별채 하나를 통째로 빌려 짐을 풀고 있는 동안, 레인은 곧바로 크레틸 자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르우벤이 쫄래쫄래 따라나섰다.
저택에 다다르자 집사가 마중 나와 있었다. 먼저 도착한 크레틸 자작이 미리 일러둔 것이리라.
곧바로 두 소년을 안내하는 집사.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가 위치한 방에 다다를 수 있었다.
집사가 문을 열었다. 안쪽에 위치한 세 사람이 레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자작 부부 내외,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딸아이일 터였다.
레인은 방 안으로 들어서서 크레틸 자작과 눈인사를 주고받은 후, 곧바로 환자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곤 환자의 손목을 붙잡고 내력을 흘려 넣었다.
“심하네.”
진단해본 결과 그녀의 몸 상태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그야말로 언제 죽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수준이었다.
당장 겉모습만 봐도 심각했다. 피부는 창백한 것을 넘어 푸르게 보일 정도였고,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탓에 비쩍 말라 있었다.
“특히 잠력이 소진된 게 치명적이군. 보통은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회복되지만…….”
구음절맥 말기인 그녀가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겠지.
레인의 진단에 자작 부인이 일순 움찔했다.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자작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그녀였다.
참고로 자작을 우롱한 가짜 의원들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작 부인에게 희망의 말을 속삭이다가 일제히 사라져 버렸다. 굉장히 질이 나쁜 놈들이었다.
“치료할 수 있겠나?”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습니다. 곧바로 치료를 진행해야 하니 바깥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자작의 물음에 레인이 그렇게 답변했다. 이젠 상대가 적도, 포로도 아닌 데다 공적인 자리인 만큼 존대를 사용했다. 자작이 저도 모르게 살짝 표정을 찡그리고 말았다.
“부탁한다.”
자작은 긴말하지 않고 아내를 데리고 방 바깥으로 나섰다.
르우벤은 조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남았다. 실상은 구경하고 싶어서 핑계를 댄 것에 불과하지만.
“왜 굳이 내보낸 거야?”
“내 치료법은 이쪽 세계에선 영 생소하게 보이는 모양이라서. 자작은 몰라도 자작 부인이 봐서 좋을 게 없겠지.”
“아. 확실히. 처음 봤을 땐 나도 기겁했지.”
“지금부터 말 걸지 마. 건드리지도 말고. 집중해야 하니까.”
레인이 손짓하자 그림자에서 검은 줄기들이 뻗어 나왔다. 침대 옆에 놓인 탁자 위로 각각 크기가 다른 침들이 놓였다. 종이에 싸인 영약 두 개도.
세침 하나를 집어 들며 레인이 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곤 그것을 환자의 가슴팍에 꽂아 넣었다.
르우벤이 그 광경을 흥미로운 얼굴로 지켜보았다.
* * *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바깥에서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있던 자작이 움찔, 하고 반응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상당히 지친 모습의 레인이 방 바깥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자작 부인이 곧바로 그를 붙들고 다그치듯 물었다.
“딸아이는, 딸아이는 무사히 치료된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