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각성자 vs 각성자(2)
“그 기억을 각성했다는 때가 혹시 10년 전 여름인가?”
“뭐?”
“정확한 날짜를 말하자면 7월 19일. 아닌가?”
“!”
소년의 표정은 그 어떤 것보다도 확실한 대답이 되어주었다. 레인은 저도 모르게 미묘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나와 로엘 말고도 또 있었단 말이군. 각성자가.”
소년의 눈이 경악으로 한껏 치떠졌다. 그렇게, 두 각성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 * *
영지전이 끝났다. 결과는 하슨 백작가의 압승.
자작군은 크레틸 자작이 생포된 후 전의를 잃고 지리멸렬했다. 헬튼 백작이 건재한 상황에서 크레틸 자작의 부재는 치명적이었으니까. 당연히 전장의 판도가 기울 수밖에 없었다.
자작군은 퇴각하는 대신 재빠르게 백기를 내걸어 항복을 선언했다. 헬튼 백작이 날뛰기라도 하면 퇴각 중에 가중될 피해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으니 당연했다.
그 뒤로 많은 일이 일어났다. 그중에 큼지막한 것들을 간추리자면 이러했다.
1. 영지전이 종결되자마자 바이튼 자작이 증발했다.
2. 잡아들인 마법사들을 심문했다. 다른 이들에게선 그다지 대단한 정보를 얻지 못했지만, 예의 그 화려한 로브를 입은 인물에게선 몇몇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3. 크레틸 자작의 관리를 레인이 맡았다.
4. 왕도에 영지전의 결과를 보고했다. 그러자 얼마 후에 있을 왕가 주최 파티에 참석할 것을 지시받았다. 백작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5. 헬튼 백작이 영지를 떠나기 전에 크레틸 자작을 쓰러뜨린 레인을 만나려고 기를 썼지만, 귀찮은 일을 싫어하는 레인이 이래저래 피해 다닌 탓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전후 처리로 인해 백작가가 상당히 바빠졌다.
하슨 백작은 한 시간이 멀다 하고 계속해서 쌓여가는 각종 서류에 한숨을 내쉬었다.
헬튼 백작이야 초빙된 인물에 불과하니 전후 처리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수도로 복귀해 버렸다. 덕분에 부관들이 죽어났다.
백작령 내의 행정관들이 단체로 앓는 소리를 냈다. 영지의 중심인 영주가 그렇게나 바쁘게 업무를 보는데 아랫것들이 한가할 리가 없다.
그래도 바쁜 와중임에도 모두의 얼굴에는 활기가 돌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바이튼 자작이 도주해버린 덕분에 그쪽 영지를 뜯어 먹기도 수월했다. 성과가 생각 이상으로 클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리고, 백작가 가신들이 한참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 레인은 자신을 돌아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 * *
자작의 관리는 전적으로 레인의 몫이었다.
본래 검성쯤 되는 인물을 구속하려면 마나 동결 마법진이 중첩된 특수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 특수감옥에 쇠사슬 잔뜩 채워 집어넣지 않는 이상 순식간에 탈출해 버리는 것이 그들이었다.
그런데 백작가에는 그런 공간이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특수감옥은 있지만 검성을 가둘 정도로 강력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전략 거점과는 거리가 먼 시골 영지다. 대체 누가 검성을 사로잡는 상황을 상정하고 그런 공간을 제작하는데 돈을 퍼부을 생각을 하겠는가.
그래서 자작을 구속할 수단이 있다고 장담한 레인에게 그의 관리가 일임되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작을 구속할 수단은 역시 한 가지였다. 내력을 실은 비침을 찔러 넣어 육신의 움직임을 강탈하는 것.
일단 자원하긴 했지만 레인으로선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일정 시간이 지날 때마다 비침에 주입한 내력을 보충하기 위해 자작을 찾아가야만 했으니까.
그 때문에 자작이 구속된 장소는 감옥이 아니었다. 레인이 머무르고 있는 별관 3층의 빈 방중 하나였다. 안전하게 자작을 구속해두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의 뒷수습이 마무리된 날, 레인은 여느 때처럼 자작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의 손에 쇠침이 다발로 들려 있었다.
자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뭐지?”
이미 자작의 몸에는 수많은 침이 박혀있는 상태였다. 굳이 새로운 침들을 가져올 이유가 없었다.
“시간이 아까워서. 아예 한 일주일 정도 풀리지 않도록 해두려고.”
왠지 굉장히 불길한 기분이 든 자작이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나 레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작업에 착수했다.
10분 뒤.
“…….”
자작은 뭐라 말은 못 하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작을 돌보기 위해 배치된 사용인이 벽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어깨를 떨며 웃었다.
“이 정도면 일주일은 어떻게 되겠지.”
“아무리 패장이라지만, 이건 조금 너무한 것 아닌가?”
자작이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성의 위엄 따위는 온데간데없는 모습.
그는 고슴도치가 형님이라 부를 수준의 모습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빽빽하게 꽂힌 침들로 인해 살가죽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
자작의 항변 아닌 항변을 가볍게 묵살한 레인이 방을 나섰다. 우스운 몰골이 된 자작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참다 사레가 들렸는지, 사용인이 격렬하게 기침을 내뱉었다.
레인은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문 앞에 미리 준비해뒀던 팻말을 매달았다.
[접근 금지].
실로 간단한 글귀만이 적힌 팻말.
레인은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 가구들을 전부 구석으로 치웠다. 일부는 문 앞에다 둬서 입구를 막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리고, 방의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눈을 감고 의식을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이번 자작과의 결전은 의외로 소득이 많았다. 가진 모든 것을 한계까지 쥐어짜 내 임한 전투가 지금까지 느껴왔던 불편한 감각을 상당히 완화시켜 주었다.
현생의 육체와 전생의 기억이 충돌해 생겨난 간극. 그것이 상당히 좁혀진 것이다.
이젠 정말로 한 걸음만이 남았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두고 명상에만 돌입할 예정이었다.
부상자를 수습하고 레이나를 돌보는 등 여러 가지 일이 있어 지금까진 미뤄뒀었다. 그러나 이젠 더 미뤄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간단한 마른 음식과 물은 구비해 두었다. 그 외 최소한의 생활 물품들도.
레인은 작정하고 주변을 잊고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 몰두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이틀이 지나가고, 사흘이 지나갔다.
사흘간 단 한 번도 바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레인을 걱정한 레이나가 몇 번이고 방문 앞을 서성였다. 가끔 셀린까지 찾아와서 닫힌 문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돌아가곤 했다.
나흘이 지나가고, 닷새가 지나가고, 엿새가 지나갔다.
아직 영지를 떠나지 않은 적룡대 대원들도 저마다 한 번씩은 문 앞을 기웃거렸다. 레이나가 걱정 가득한 모습으로 그랬던 것과는 달리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 와중에 플레이나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아예 방문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려고 했다. 그것을 다른 적룡대원들이 뜯어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그리고, 레인이 제 방에 틀어박힌 지 딱 일주일이 되는 날.
크레틸 자작을 돌보던 사용인으로부터 레인이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언급했음을 전해 들은 일행이 옹기종기 모여 방문 앞을 서성이고 있던 때였다.
방 안쪽으로부터 막대한 기파가 터져 나와 일행을 덮쳤다. 그 웅혼한 파장에 초일류의 대열에 든 이들조차 순간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딱히 위협적인 기운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둑이 터지면서 쏟아져 나온 물을 연상시키는 기운이었다.
일행 모두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들의 고개가 빠르게 레인의 방문 쪽으로 돌아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안에서 레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쩐지 외모가 한층 더 물이 올라 있었다.
“스승님.”
가장 먼저 레이나가 말을 걸었다. 반가운 감정을 듬뿍 담아 밝게 웃는 얼굴로.
“레이나.”
레인 또한 레이나를 발견하고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 미소가 너무나도 눈부셔서, 레이나는 물론이요 좌중의 인물 전원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살짝 붉혔다.
“방금 그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플레이나가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입을 열었다. 방금 전 터져 나왔던 압도적인 기파. 그것은 분명……
“맞습니다.”
“!”
레인이 지금까지 풀어두었던 머리를 가만히 틀어 올리며 말했다.
“벽을 넘었습니다.”
* * *
그 뒤, 레인은 또 다른 각성자 ‘르우벤’과 대면했다. 그는 이전의 화려하기 짝이 없던 모습이 아닌 적당히 수수한 평상복 차림이었다.
“그러니까, 네 경우엔 전생의 기억을 각성한 게 아니란 말이지.”
“그래.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너희들을 환생자라 한다면, 나는 회귀자라고 할 수 있겠지.”
르우벤은 각성자이되 레인이나 로엘과는 또 다른 케이스였다. 말하자면, 그는 미래에서 현재로 되돌아온 존재.
“나 이외에 각성자가 존재한단 것을 알았을 땐 정말 당황했어.”
“동감이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에게 공감했다.
“더군다나 각성자가 한 명 더 있다니.”
“그 녀석은 지금 제국에 있지. 그러고 보면 나는 예상했었어야 했나. 두 명이 있으니 세 명, 네 명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어쩐지. 이상하게 기억과 현실이 다른 일이 많더라니, 그게 다른 각성자들이 미래를 바꾼 탓이었나.”
두 사람은 서로 똑같은 각성자라는 사실 때문인지 금세 말을 터놓게 되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어색함은 그리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막 친해졌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친근감’이라기보다는 ‘동질감’에 가까운 감각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친근감이 형성되기엔 두 사람이 만난 시간이 너무 짧았다.
각설하고.
“대화는 이쯤 하기로 하고.”
“?”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음? 뭘?”
레인이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르우벤이 곧바로 따라서 일어났다.
레인이 르우벤을 바라보며 사나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의아한 기색이던 르우벤 또한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레인을 마주 바라보며 씩 하고 웃었다.
“어쩐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은데.”
“그런가?”
“잘됐네. 마침 나도 궁금하던 차거든.”
“그렇다니 다행이군.”
“실력 좀 보자 이거지?”
“그래. 한번 보자고. 나 이외의 각성자는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 * *
두 사람은 백작성에서 적당히 떨어진 구릉지대에 자리를 잡고 대치했다.
한쪽은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내면을 관조했다. 반면 다른 쪽은 적당히 준비체조로 몸을 풀었다.
구경꾼도 있었다.
르우벤의 동료이자 노예, 용인족(龍人族) 여성 밀리아.
레인의 제자이자 연인, 레이나 하슨.
마찬가지로 레인의 제자이자 다크엘프, 셀린.
그리고 적룡대원 전원.
구경꾼들의 외견 레벨이 하나같이 높았다. 르우벤이 구경꾼 측을 힐끗 곁눈질하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거, 힘 좀 써야겠는데? 언제 또 이만한 관객들 앞에서 잘난 모습을 보일 기회가 오겠어?”
그러자 마침 기운을 갈무리하고 눈을 뜬 레인이 말을 받았다.
“그거 다행이군. 기대하고 있거든. 정말로.”
“기대해도 좋을 거야.”
르우벤이 훗, 하고 웃었다.
“흑아, 검.”
레인의 부름에 그림자가 잠시 일렁이는가 싶더니, 이내 검 한 자루가 스르륵 하고 밀려 올라왔다. 검은 줄기에 휘감긴 검이 레인의 손에 탁 하고 잡혔다.
이내 검에 감겨 있던 줄기들이 스르륵 풀려나며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광경에 르우벤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그게. 정령?”
그림자 속에 검을 보관한다니 굉장히 특이한 능력이었다. 딱 보니 정령인 것 같긴 한데, 저런 정령이 존재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번에 흑아는 큰 폭으로 성장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능력을 얻었다. 새롭게 개화한 능력은, ‘보관’.
이전엔 물질을 먹어 치우는 것만이 가능했다면, 현재는 물질을 삼켜뒀다가 다시 내뱉는 것이 가능해졌다. 일종의 아공간이 된 것이다.
본래의 능력인 물리력이야 당연히 강화되었다. 식사량도 상당히 늘어났지만.
“일단 나도 준비를 해 볼까?”
르우벤은 의문을 뒤로하고 관객들을 둘러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가 손가락을 탁 하고 튕기며 중얼거렸다.
“인벤토리 툴(Inventory Tool)."
르우벤의 등 뒤로 간이 수납 선반이 무수히 출현했다. 갑작스러운 선반의 향연에 밀리아 이외의 모두가 놀란 눈을 했다.
칸칸마다 수납되어있는 것은-
“아티펙트?”
그 모두가 아티펙트. 방대하다고 말해도 좋을 분량의 아티펙트가 눈을 어지럽히자 레이나가 저도 모르게 당황한 목소리를 흘렸다.
르우벤이 재차 손가락을 탁 튀기며 말했다.
“장착(Equip).”
그와 동시에 스스로 선반에서 날아와 르우벤에게 장착되는 일부 아티펙트들. 그 숫자만 해도 수십 개. 이내 르우벤은 레인과 처음으로 대면했던 때의 화려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무언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왜, 놀랐어?”
레인의 반응을 확인한 르우벤이 쿡쿡 하고 웃었다.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한데.”
“…….”
두 사람은 이내 서로를 마주 보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구경꾼들이 잡담했다.
“어떻게 될까?”
“아무래도 레인이 이기지 않겠어? 무려 검성인데.”
“그런가.”
적룡대원들이 레인의 승리를 점쳤다. 그러자 곧바로 르우벤의 동료 용인족, 밀리아가 반박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저분에 비한다면 분명 제 주인님의 경지는 일천하다고 할 수 있을 테지만, 저로선 도저히 제 주인님이 패배하시는 모습이 상상되질 않습니다.”
그녀의 발언에는 묘한 확신이 어려 있었다. 정말로 르우벤이 밀릴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 그런 얼굴.
“그런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셀린이 그녀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크레틸 자작에게 정면으로 맞서던 레인의 뒷모습. 그 당시 머릿속에 강렬하게 못 박혔던 그 뒷모습이 지금도 잊히질 않았다.
“도저히 사부가 질 거란 생각이 들질 않네요.”
그 말에 담긴 것은 밀리아의 그것과 같은, 일종의 확신. 그것을 곧바로 알아챈 밀리아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한참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플레이나가 중얼거렸다.
“시작한다.”
두 각성자가 컨디션 점검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