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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각성자 vs 각성자(1) (107/249)
  •  107. 각성자 vs 각성자(1)

     의식을 잃었던 자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초인의 반열에 든 육신이 의식의 각성을 재촉한 탓이었다.

    “…….”

     자작이 눈을 떴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린 뒤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몸뚱이. 갑옷은 이미 벗겨진 뒤였다.

     차디찬 바위에 등을 기댄 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온몸에 빼곡하게 꽂힌 조그마한 쇠침들 때문인 듯싶었다.

     무너져 내린 성벽의 잔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소년의 얼굴이 자작의 시야에 들어왔다. 자작 본인을 쓰러뜨린 바로 그 소년의 얼굴이.

     자작이 저도 모르게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진 건가.”

     그 목소리에 반응한 레인이 감겨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곤 자작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신이 들었나?”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이야.”

     자작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레인이 같잖다는 듯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패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자만이 지나쳤던 모양이군.”

    “단순히 힘의 우위만 놓고 보면 댁이 나보다 윗줄이긴 하지. 경지부터가 다르니까.”

    “그 정도 실력 차임에도 패배한 나를 비웃을 테냐?”

     레인이 핫, 하고 웃었다. 그리곤 자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분명 네가 나보다 강한 건 사실이지. 아마 맞붙으면 백 번 중에 아흔아홉 번은 내가 패배하지 않을까.”

    “……?”

     자작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미 승리했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가창 처음, 첫 번째 싸움만큼은 반드시 내가 이긴다.”

     자작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말하자면, 자신은 이길 싸움을 이겼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비웃을 소지가 어디에 있느냐고.

     굉장히 건방진 발언이었다. 스스로 말해놓고도 창피하지 않으냐고 비웃어도 할 말 없는 발언.

     그런데 그것이 소년의 자신감 가득한 표정과 맞물리니 상당히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자작은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애초에 싸움에 임하는 각오부터가 달랐군. 내가 진 것도 당연한가.”

     자작은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영지전도, 자신도, 그리고 딸아이도. 아예 사로잡혀 버렸으니 영지전의 승패와 관계없이 딸아이의 치료는 불가능해졌다.

    “끝나버렸군. 모든 게.”

    “그래. 끝났지.”

     레인이 자작의 말을 맞받았다.

     크레틸 자작이 사로잡혀 버린 이상 바이튼 자작군에 미래는 없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길은 오로지 항복, 혹은 회군뿐.

     그런데 자작이 레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나는 몰라도 네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당장 백작 저택으로 되돌아가 보는 것이 좋을 거다.”

    “뭐?”

     레인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되물었다. 어쩐지 맹렬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부추긴 이들이 있지 않았냐고 물었지? 네 생각대로다. 내게 백작성 침입을 권한 이들이 있다.”

     쿵 하고, 레인의 가슴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 타이밍에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분명…….

    “그들 중 일부가 나와 동행했다. 혹시라도 헬튼 백작이 이쪽의 계획을 눈치채고 예상보다 일찍 백작성에 도달했을 때를 위한 대비책으로써.”

    “……!”

    “만일 헬튼 백작이 나타나면, 내가 그를 백작가 저택 밖으로 유인, 그리고 그들이 대신 하슨 백작을 찾아내 살해하기로 되어 있었지. 내가 백작가 저택에서 멀어진 지금쯤이면 한창 움직이고 있겠군.”

    “젠장!”

     레인이 쿵, 하고 발을 굴러 곧바로 자리를 박찼다. 마치 탄환처럼 쏘아진 신형이 일직선으로 백작가 저택을 향해 날아갔다.

    “후.”

     자작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사실 자작이 마법사들의 존재에 대한 것을 레인에게 말해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백작성 침공을 부추긴 로브인들이 지금부터 얼마나 활약하든 이제 자작이 끝장이라는 사실은 변함없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자작이 레인에게 그들의 움직임을 알려 줄 이유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지 않을 이유라면 차고 넘치지만.

     어찌 보면 상대는 딸아이의 목숨을 구할 수단을 빼앗아 간 원수다. 자작으로선 그가 정보를 늦게 접해 그사이에 소중한 사람을 잃기라도 해야 수지가 맞는다.

     그렇지만 자작은 정보를 줘 버렸다.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별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사실 레인이 자작의 몸을 구속하는 과정에서 언령 마법이 깨져 생긴 심경의 변화이기도 했으나, 자작은 그것까진 알지 못했다. 아직 마법의 효과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모든 진실을 깨닫지는 못하고 있는 자작이었다.

    ‘쓸데없이 분위기를 탔군. 나답지 않게.’

     이제 막 성인의 대열에 다가가고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인 소년이다. 그런데 겨우 그 나이밖에 되지 않는 소년에게 상당히 물들었나 보다. 그 짧은 사이에.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소년이 보여준 것.

     그 소녀들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선 영웅적인 행동.

     전투 내내 자작을 똑바로 응시하던 집념 가득한 눈빛.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맹렬한 기세로 불태우던, 상대가 질려버릴 정도의 승부욕.

     그것에 저도 모르게 감화되어버린 건지도 몰랐다. 자작은 실없이 피식, 하고 웃었다.

     자작은 이젠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레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말했다.

    “너는 잃지 마라.”

     * * *

     레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일까.

     자작을 부추긴 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미 한 차례 예상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자작을 부추길법한 자들. 이를테면 그 로브인들. 그들이 자작을 뒤따라왔을 가능성을 미리 염두에 뒀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레인은 굉장할 정도의 상황 판단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범위가 상당히 한정적이었다. 그의 ‘직감’은 가히 놀라운 수준이었으나, 자기 자신이 아닌 주변 사람에게 그것을 적용하는 데엔 미숙했다.

     2년 전 파르엘을 노리던 암살자들과의 전투에서도 그것이 드러난 바가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고 만 것이다. 이번엔 더욱 좋지 못한 형태로.

     아마 하슨 백작은 괜찮을 터였다. 백작이야 은신처에 꼭꼭 숨어 있을 테고, 먼저 그가 있는 곳을 찾아 한동안 탐색을 (가장한 파괴행위를) 벌였어야 할 자작이 한참 일찍 퇴장해버렸으니까.

     문제는 레이나와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셀린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작과의 일전으로 심히 지친 상태였다.

     두 제자의 목숨이 위험했다. 특히 레이나의 경우엔 비밀 공간의 위치를 알고 있는 중요 인물이니 더더욱. 레인은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고 신형을 이동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신속하게 움직여 단숨에 부유층 거주지를 주파, 곧바로 백작가 저택으로 진입했다. 제발, 제발, 하고 마음속으로 기원하며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달려 나갔다.

    “아.”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정말로 다행하게도, 무사한 기색의 셀린과 정신을 잃은 채 그녀에게 안겨 있는 레이나를.

     그리고 그녀들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십여 명에 이르는 로브인들도.

     쓰러져 있는 로브인들의 중심에는 본 적 없는 소년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인족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있었다. 로브인들은 그들에게 제압된 듯싶었다.

     그러고 보니 소년의 발밑에 다른 로브인들에 비해 유난히 화려한 로브를 입은 녀석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 차림새로 봐서 중간 간부쯤 되는 걸까.

     어찌 됐든 두 제자는 무사했다. 아마 저 소년은 이쪽의 아군일 터. 레인은 이미 종료된 상황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사부!”

     레인을 발견한 셀린이 반가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

    “후우.”

     레인이 숨을 고르며 그들이 위치한 공터에 내려섰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풀어진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다행이다.”

     그것은 정말로 안도했으며 동시에 기뻐하는, 그런 표정.

     혈투로 엉망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우월함을 과시하는 외모. 그것이 미소와 맞물리자 그 파괴력이 가히 압도적이었다.

    “으아.”

     로브인들의 중심에 서 있던 소년이 주춤, 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

     그리고, 레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셀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홱 하고 돌리고 말았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한 사부였다. 그럼에도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가 얼마나 성격이 꼬인 작자인지 잘 아는 셀린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그 갭(gap)에 누구보다도 당황하고 말았다.

     보면 알 수 있었다. 저 인간이 저렇게까지 안도하는 표정을 지은 것은 분명 레이나와 자신이 무사한 것을 확인했기 때문일 터.

     그랬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은 이유엔 셀린 본인이 무사하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셀린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심장이 쿵쾅쿵쾅 제멋대로 뛰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거늘, 도저히 제어가 되질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 억지로 말을 쥐어짜 냈다.

    “사, 사부도 무, 무사해서 다행이네.”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어버렸지만.

     레인은 다시 한 차례 숨을 골랐다. 제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요동쳤던 감정을 가만히 정리했다.

    ‘나답지 않게 정도 이상으로 흥분했군.’

     레이나와 셀린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이미 변을 당했을지라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감정이 격앙됐다. 이렇게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만큼.

    ‘확실히 현생의 나는 전생의 나와는 다른가.’

     지금 그것을 확실히 자각했다.

     전생의 자신에겐 소중한 존재가 없었다. 한때는 있었지만 모두 잃고 말았다.

     그러나 현재의 그에겐 소중한 존재들이 확실히 존재했다. 그것을 자각한 것만으로도, 레인은 모호했던 전생과 현생 사이의 경계가 명확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라.’

     레인의 그림자가 조금 크게 일렁였다. 레인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채고 살짝 눈을 치켜떴다.

    “성장했구나, 흑아.”

     그의 감정에 영향을 받은 암흑정령이 이 순간 성장했다. 심지어 성장 폭이 상당이 컸다. 흑아와 심령으로 연결된 레인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분위기를 깨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이럴 시간이 없어. 빨리 대피해.”

    “……?”

     그런 와중, 아까 전 확인했던 소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적은 아니라고 판단하긴 했지만, 혹시 모른다. 레인이 경계심을 살짝 끌어올리며 소년을 돌아보았다.

     그야말로 화려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금을 녹인 듯한 금발 머리에 에메랄드 같은 연녹색 눈동자.

     양 손목에는 팔찌를, 발목에는 발찌를. 총합 12개에 이르는 숫자였다.

     귀에는 귀걸이. 양쪽을 합쳐서 총 여섯 개에 달했다. 극도로 화려한 것부터 조금은 수수한 것까지 다양했다.

     열 개의 손가락 모두에 반지를 하나씩 착용했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반지 하나하나가 고급스러웠다.

     착용하고 있는 의복도, 심지어 몸 곳곳에 새겨진 문신마저도 화려했다.

    “이야기는 들었어. 크레틸 자작이 지금 백작성 내에 있다지. 지금까지 네가 그를 억누르고 있었고.”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것 때문에 ‘그’를 놓치고 말았다. 어린아이의 탈을 뒤집어쓴 빌어먹을 늙은이를. ‘조직’의 최고 간부 중 하나인 만큼 반드시 잡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니까. 몰랐으면 모르되 알게 된 이상 검성의 난입을 대비한 최소한의 여력은 남겨둬야 했다.

     그게 빈틈이 되어 상대의 도주를 허용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굉장히 아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젠 내가 맡을게. 보아하니 이젠 한계에 다다른 것 같은데. 너는 저 둘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있어.”

    “…….”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다. 레인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그러고 보니 크레틸 자작은 어디에 있어?”

    “쓰러뜨렸지.”

    “우선 그가 속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겠지. 언령 마법에 당한 것인지도 모르니 그에 대한 준비도 좀 해두고. 그러고도 듣지 않는다면 그땐 무력을 동원해야겠…… 뭐?!”

    “쓰러뜨렸다고.”

     그 말에 모두가 놀랐다. 하도 만신창이가 된 모습이라 겨우 몸을 빼내 달아난 줄로만 알았거늘.

     소년뿐만 아니라 셀린마저 놀랐다. 레인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상대는 그보다 더했으니까.

    “그러니까, 크레틸 자작을 제압했다고? 네가?”

    “어.”

    “저기, 미안한데. 이름과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좀 알려줄 수 있을까?”

    “레인이다. 나이는 15살.”

    “나와 동갑? 그런데 크레틸 자작을 쓰러뜨렸다고?”

     소년이 혼란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중얼거렸다.

     15살에 불과한 소년이 ‘검성’을 쓰러뜨렸다는 말에 상당히 동요한 모양이었다. 레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어진 소년의 중얼거림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렇게 납득했을 터였다.

    “15살에 검성을 쓰러뜨릴 정도의 실력자? 거기에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

    “그만한 인재가 유명세를 타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금발 소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중얼거렸다.

     이상한 점은 더 있었다. 기억대로라면 크레틸 자작은 백작성을 침공하지 않아야 했다.

     분명 초인에 걸맞은 정신력을 지닌 자작은 놈들의 공작에 훌륭히 저항해냈었을 터였다. 되레 수작을 부리려고 든 마법사들이 봉변을 당했고.

     기억대로라면, 그가 폭주하는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어야 했다. 딸아이가 목숨을 잃고 완전히 정신이 무너진 후에야 놈들에게 이용당했을 터.

     분명 왕도 인근 영지에서 대참사를 일으켰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소년의 머릿속에 있는 크레틸 자작에 대한 정보는 그러했다.

    “?”

    “아무리 기억을 각성한 후의 내 행동이 미래를 변화시킨다지만, 인과 관계가 비틀려도 너무 비틀린 것 아닌가? 애초에 이 근방에서 움직인 지는 얼마 되지도 않았고. 나비효과라기엔 지나친데.”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조그마한 목소리가 레인에겐 천둥소리보다도 크게 들렸다. 아니, 각인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방금, 뭐라고 했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내 개인적인 사정이라서.”

     소년이 레인을 한 번 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레인은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전율했다. 그 모습에서 자신과 로엘의 그것과 같은 느낌이 났기 때문이다.

     레인과 로엘은 딱히 그들이 각성했다는 것을 공들여 숨기지 않는다. 가진 바 능력은 숨길지라도. 그야, 어차피 누구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각성에 관한 사실을 누군가 듣는다고 해도 대충 별것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타인의 혼잣말 따위에 깊게 관심 가지려 들지 않으니까.

     그런데 눈앞에 서 있는 소년에게서 동류의 느낌이 났다. 똑같은 제반 여건으로 인한 똑같은 행동양식. 다른 이들은 몰라도 레인만큼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기억을 각성했다고?

    “아, 그건…….”

    “이봐.”

     레인의 목소리가 착 하고 가라앉았다. 갑자기 일변한 그의 분위기에 소년이 흠칫, 하고 반응했다.

    “그 기억을 각성했다는 때가 혹시 10년 전 여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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