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결전(5)
시간을 되돌려, 레인이 제자들을 대피시키고 자작과 대치했던 그때.
레인은 자작에게 블러프(bluff)를 걸었다. 헬튼 백작의 이름을 팔아서.
기실 그에게 원군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헬튼 백작에겐 자작이 백작성에 침입할 것임을 알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자작은 레인의 허세를 진실로 받아들였다. 분명 최전선에 있었던 레인 본인이 이 자리에 나타났으니까. 그리고 그가 그 상황에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고 여겼으니까.
거기서, 인식의 차이로 인한 첫 번째 간극이 생겨났다. 그 간극은, 자작이 조바심을 내도록 만들었다.
두 번째 간극은 전투 중에 레인이 만들어냈다.
레인은 자작의 수많은 검격을 웬만해선 흘려 넘김으로써 체력 소모를 최소화해왔다. 무당의 비기, 이화접목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초상승의 기예였다.
그러나 겉모습만큼은 그렇지 않은 척 지친 모습을 가장했다. 호흡을 일부러 거칠게. 움직임은 일부러 조금씩 둔하게.
이 움직임이 포석이 되어 두 번째 인식의 차이, 즉 간극을 만들어냈다. 이 간극은, 자작의 판단력을 조금 앗아갔다.
세 번째, 그러니까 마지막 간극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마지막의 그 모습으로 만들어냈다.
자작이 마음 놓고 최후의 일격을 날릴 수 있도록. 그 뒷일을 걱정치 않고 필살의 일격을 쏟아낼 수 있도록.
동시에, 계속해서 준비해왔던 ‘그것’을 터뜨릴 준비를 마쳤다.
자작을 속인 이 연기가 마지막 포석이 되어 또다시 간극을 만들어냈다. 그 간극은, 자작의 경계심을 낮췄다.
각각의 간극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말로 아슬아슬한 줄타기와도 같았다.
너무나도 미약하기에 얼마든지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그런 간극. 이를테면 자작이 조금이라도 눈치채는 순간 순식간에 없어져 버릴, 그런 것.
그러나 최종적으로 레인이 억지로 만들어낸 그 간극들은 지금 이 순간 거칠게 비집어 열려져 ‘균열’이 되었다. 모든 간극이 모여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냈다.
과도하게 힘을 소모한 데다 지원군의 도착을 경계하고 있는 자작이 어떻게든 결착을 짓기 위해 무리한 공격을 날렸다. 예상보다 길게 이어진 결전으로 인해 초조함에 짓눌려 오판을 내리고 말았다.
그렇게, 크레틸 자작이라는 거대한 성을 무너뜨릴 준비가 갖춰졌다.
* * *
한계까지 검에 불어 넣어진 내력이, 결국 검을 무너뜨린다.
막대한 내력의 주입에 검이 비명을 지르며 쩍쩍 갈라져 나간다.
레인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군.”
그리고, 정말로 검에 한계가 찾아온 그 순간.
검 위에 순백색 검광이 덧씌워졌다. 혼원공으로 형성시킨, 난폭하기 그지없는 성질의 검강.
그것을, 전방에서 날아들고 있는 다수의 검강을 향해서-
“파검(破劍).”
폭사시켰다.
쩌저적!
수백 조각으로 갈라진 검의 파편 하나하나에 검강이 깃들어 전방으로 쏘아져 나간다. 압도적인 출력을 자랑하는 수백 개의 검강.
크기는 작지만, 하나하나가 검강이다. 자작이 날린 검강의 위력은 분명 레인의 것을 상회했지만, 수의 논리가 힘의 논리를 덮어버렸다.
혼신의 일격이 이십여 개의 검강을 모두 분쇄하고 그대로 자작을 향해 날아들었다.
“억?!”
자작이 경악한 얼굴로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 공격 범위 밖으로 몸을 날렸다. 다행히 파편들에 덧씌워진 검강은 그 하나하나의 크기 자체는 작았기에 피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자작이 몸을 날린 곳에는 이미 레인이 위치해 있었다.
억지스러운 움직임에 자세가 무너진 자작의 상체 갑주 위로 한 차례 빠르게 왕복하는 정권.
쩌엉!
“커억!”
아니, 침투경(浸透勁).
자작의 등이 확 하고 굽어졌다. 갑주 안쪽으로 직접 파고드는 경력에 타격을 입어 각혈했다. 그 등 위쪽으로 레인이 팔꿈치 내려찍기를 먹였다.
콰직!
“크악!”
자작이 무의식중에 갑주 위에 기막을 두르고 있긴 했지만, 그 강도는 현저히 약했다.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충격을 받은 몸뚱이가 바닥에 충돌했다가 반동으로 튀어 올랐다. 레인이 지체 않고 연격을 날렸다.
자작이 신형을 회복할 틈을 주지 않고 주먹질, 발길질, 팔꿈치 공격에 어깨치기, 무릎 차기, 심지어 박치기까지.
연격. 연격. 연격. 연격. 연격.
기회는 단 한 번. 모든 것을 쏟아내 자작에게 회생 불능의 타격을 입혀야만 했다.
딜레이가 긴 강격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았다. 자작에게 한 차례 큰 피해를 입히고 마는 것이 목적이 아니니까. 이번에 완전히 끝내야 하니까. 공격이 끊기는 일은 절대 없어야 했다.
자작이 억지로라도 신형을 바로잡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레인이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일보를 내디뎠다.
퉁.
발끝으로부터 원형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파장. 자작이 신형을 휘청거렸다. 다시 레인의 연격이 이어졌다.
자작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신형을 붙잡으려고 하자, 또다시 일보.
퉁.
둔중한 소음과 함께 또다시 휘청이는 자작의 신형.
레인은 절대 자작이 신형을 회복하도록 두지 않았다. 끝없이 중심을 무너뜨리고, 끝없는 연격을 오롯이 몸으로 받아낼 것을 강요했다.
그것은,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모든 보법이 가진 공통 목적, ‘빠른 이동’이라는 대전제가 배제된, 중원에서 가장 이질적인 보법.
오로지 만마의 주인인 천마(天魔)에게 만인을 무릎 꿇리기 위해 창시된, 그런 보법이 바로 천마군림보.
일보(一步)에 주변 모든 이들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이보(二步)에 주위 모든 이의 중심을 강탈하며, 삼보(三步)에 만인을 무릎 꿇린다는 지배자의 발걸음.
이미 신체의 균형을 완전히 레인에게 빼앗긴 자작으로선 이 절세의 보법을 이겨내고 신형을 회복할 방법이 없었다.
쾅! 쾅! 쾅! 쾅! 쾅! 쾅!
중심을 빼앗긴 자작이 계속해서 공격을 허용하는 사이, 자작이 갑주에 두른 기막이 점점 더 옅어지기 시작했다.
자작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온몸을 내달리는 격통도 격통이지만, 그보다도 지금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수없이 단련한 육감이 알려주고 있었다. 죽음에 한 발짝 다가섰다고.
연속된 두드림에 무너져 가는 철옹성. 균열이 그 크기를 불려 점점 범위를 더해갔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 필패임을 인지한 자작이 비명에 가까운 포효를 내뱉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력으로 귀를 보호하며 계속해서 공격을 날리는 레인. 음파에 실린 오라로 인해 온몸에 상처가 늘어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시 한번 바닥에 충돌했다가 반동으로 튀어 오른 자작이 마구잡이로 신형을 뒤틀었다. 아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제한된 상황에서도 억지로 움직여 반항했다.
자작이 휘두른 팔꿈치가 요행히 레인의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만전의 상태였다면 코웃음을 쳤을 형편없는 공격. 그러나 자작과 마찬가지로 한계 상황에 내몰린 레인에겐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콰드득.
절대 물러날 수 없다. 절대 틈을 내어줄 수 없다.
레인은 되려 팔꿈치를 양팔로 휘감아 몸으로 받아냈다. 갈비뼈가 몇 대 부서져 격통이 몰려왔다. 입으로 한 차례 피를 토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억지로 고통을 삼키며 손에 붙들린 팔을 뒤틀었다. 이 정도의 고통 따위에 겨우 잡아낸 기회를 놓치게 되면 다음은 없다.
우드드득.
“크아아아악!”
끔찍한 소음과 비명이 뒤따랐다.
계속해서 천마군림보. 레인은 절대 자작이 신형을 바로잡게 두지 않았다.
자작이 신형을 바로잡게 되면 컨디션을 되찾는 것은 순식간이다. 절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기막을 분쇄하기 위해 쉼 없이 연격을 퍼부었다. 자작이 얼굴까지 가리는 투구를 사용하고 있는 탓에 정공법으로 기막을 뚫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오른손에는 빙궁의 빙백신장을.
왼손에는 태양궁(太陽宮)의 열양신장(熱陽神掌)을.
극음과 극양의 기운이 번갈아서 철옹성을 두드렸다. 점차 범위를 불려가는 균열. 균열이 결국 벽면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이익!”
자세를 회복하진 못했지만, 어떻게든 신체 내 오라에 대한 통제력을 조금이나마 회복한 자작이 손끝으로 오라를 발출하려고 했다.
바닥에 충격을 줘 그 반동으로 튀어 오를 계획.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기만 하면 신형을 회복할 수 있다. 신형을 회복하기만 하면 다시 절대적인 우위에 서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러나 그 기색을 느낀 레인이 자작의 의도를 원천 봉쇄했다.
그가 머리를 고정하는 데 사용하고 있던 대침 하나를 뽑아 손에 쥐었다. 머리칼 일부가 힘을 잃고 흘러내렸다.
그가 곧바로 대침에 내력을 듬뿍 주입해 내리찍었다.
푸욱!
자작의 손바닥이 꿰뚫렸다. 딜레이를 줄이기 위해 강기를 덧씌우지도 못했지만, 발출 직전 기막이 옅어진 찰나의 틈을 정확하게 노린 결과.
“크아아악!”
생살을 꿰뚫리는 고통에 자작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는 초인. 고통을 감내하는 것 정도는 익숙했다. 억지로라도 원래 의도한 대로 오라를 방출하기 위해 힘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 무슨!”
자작이 혼란에 빠졌다. 레인이 특수한 방법으로 아예 오라를 동결시켜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로선 당황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동결 범위는 대침이 박힌 오른손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을 만큼.
“후읍.”
계속해서 연격. 레인은 쉬지 않고 다음 행동을 이어갔다.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리곤 곧바로 신형을 휘돌아 떨어져 내리며 진각을 밟았다.
쿠웅!
대지가 막대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반동으로 자작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바닥에 내려선 레인이 재차 살짝 몸을 띄웠다. 신형을 한 바퀴 휘돌며 회전차기. 자작을 등에서부터 꿰뚫듯이 올려 찼다.
“커어억!”
하늘 높이 떠오르는 자작. 레인이 곧바로 그림자에서 솟아오른 검은 줄기를 발판삼아 연속해서 도약, 추격했다.
자작보다 약간 높은 위치를 점하고 함께 떨어져 내리는 레인. 양쪽 다리를 자작의 팔에 걸어 마운트 자세를 취하고, 양손으로 끝없이 주먹질을 퍼부었다.
텅! 텅! 텅! 텅! 텅! 텅! 텅! 텅!
자작이 장착한 판금 갑옷 상의와 투구가 쉼 없이 금속음을 토해냈다.
양손에 실린 극양지기와 극음지기. 번갈아 내지르는 주먹에 팍팍 깎여나가는 자작의 기막.
대지에 충돌하기 직전에 마운트 자세를 푼 레인이 자작의 얼굴을 덥석 붙잡았다. 자작의 동공이 투구 안에서 한껏 커졌다.
그대로, 내려찍기.
콰아아아아아아앙!
막대한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고 주변 경광을 통째로 뒤엎었다.
머리부터 바닥에 처박힌 자작이 재차 비명을 내질렀다. 레인이 공중제비를 돌아 본인에게 전해진 반동을 떨쳐냈다.
바닥에 내려서고, 곧바로 진각.
작정하고 쏟아부은 내력이 겉으로 표출되어 형상을 이뤘다. 다리를 타고 나선형으로 휘감아 올라온 백광이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그것을 자작의 복부로 직격시켰다.
쾅!
몇 번째일지 모르는 비명을 내뱉으며, 자작이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연속해서 진각, 진각, 진각.
깎여나가는 기막도 기막이지만, 충격파가 조금씩 체내로 침투에 장기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자작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렸다.
철옹성 한편이 무너져 생겨난 구멍. 그 구멍이 그 크기를 점점 불려 나간다.
레인의 그림자로부터 뻗어 나온 검은 줄기가 자작의 신형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물론 중심을 회복하진 못하도록 어정쩡한 자세로.
레인이 자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는 끝낼 때가 됐지.”
바로 몇 분 전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자작의 얼굴이 한 층 더 일그러졌다. 동시에 레인의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자작의 복부에 작렬했다.
반동으로 뒤로 날아가는 자작. 그러나 검은 줄기가 마치 레슬링 경기장처럼 자작의 신형을 받아내더니 그 육신을 다시 앞으로 튕겨냈다.
콰득!
재차 복부에 일격.
가속도가 붙어 더욱 빠르게 튕겨 나간 자작이 검은 줄기의 반동으로 금세 되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얼굴에 꽂히는 주먹.
팔을 구부려 힘의 방향을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이번엔 뒤로 튕겨 나가지 않고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자작의 신형. 주먹이 얼굴에 꽂힌 그대로 자작이 바닥에 처박혔다.
콰아아아앙!
그리고 그때를 기점으로 자작의 몸을 보호하던 기막이 완전히 소멸했다.
결국 크기를 불려 나간 구멍이 성벽을 통째로 무너뜨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레인과 자작 사이에는 그 경지의 차이로부터 빚어지는 압도적인 격차가 존재했다.
심지어 자작은 동공 수련자. 빈틈을 찌른다거나, 틈을 파고든다거나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레인이 이전에 실감한 대로, 정도(正道)를 걷는 자작은 그야말로 완전체라고 보아도 좋았다.
그래서, 레인은 간극을 만들어냈다. 그것도 무공적인 측면보다 정신적인 측면에 기대서.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불확실성이 압도적으로 높은 방향을 택해서.
그렇게나 힘을 낭비한 주제에 혹시 모를 헬튼 백작의 난입을 경계해 최소한의 여력은 남겨두고자 하는 자작의 이율배반적인 마음을 교묘히 이용했다.
시간을 길게 끌어 자작의 평상심이 무너지도록 유도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게 움직임으로서 조바심을 극대화시켰다.
그 외에도 쉴 새 없는 도발을 통해 자작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이용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벌어진 간극은 결국 균열이 되었다. 그리고 그 균열은, 천천히 그 크기를 불려 벽 전체를 뒤덮었다.
균열은 벽을 일부 무너뜨려 조그마한 구멍을 냈다. 그리고 그 구멍이 연속적으로 늘어나 결국 벽을 통째로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다.
그 벽 너머에는, 자작을 통째로 집어삼킬 나락이.
레인의 손이 자작의 가슴 위쪽에 얹어졌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탈력 상태에 빠진 자작의 흉부에 강렬한 충격이 가해졌다.
“아, 안……!”
크드드드득.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자작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후.”
상대를 완전히 제압했음을 확인한 레인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가진 모든 것을 쏟아냈다. 그야말로 혈투라고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그런 격전 직후다. 레인 또한 굉장히 지쳤다.
레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승자의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