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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결전(4) (105/249)
  •  105화. 결전(4)

    “아하하. 상황을 이해했다면 쓸데없이 도망치려 들지 않길 바라.”

    “…….”

    “음음.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이네. 상황 판단이 빨라서 마음에 드는데? 만약 도망치려 들었다면 팔다리를 뽑아버리려고 했는데.”

     섬뜩.

     분명 농담조로 하는 말이지만, 셀린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달아나려 했다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아하하하. 그렇게 긴장하지 마. 몇 가지만 물어보고 풀어줄 테니까.”

    “묻고 싶은 건 백작님이 숨어계신 장소겠지?”

    “오? 눈치도 빠르네. 더 마음에 드는데?”

     최악의 상황이었다. 셀린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말하지 않으면, 알지?”

     눈앞의 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재차 아이 특유의 밝은 웃음을 흘렸다. 천진난만한 웃음이 이렇게까지 두렵게 느껴질 수 있음을 셀린은 처음 알았다.

    “…….”

     셀린 본인은 백작이 숨어 있는 장소를 모른다. 아는 것은 등에 업혀 있는 레이나다.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 저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선 레이나를 팔아야만 했다.

    ‘그럴 순 없어.’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셀린은 한껏 긴장한 얼굴로 한 차례 고개를 저었다.

    “후회할 텐데~.”

    사내아이는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셀린은 곧바로 몸을 빼내려 했지만- 

    ‘읏.’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무언가의 기운에 억눌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선 채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손을 바라보는 것만이 가능했다.

     턱.

    “어?”

     그런데 그 순간, 아이의 손목이 허공에 고정됐다. 마치 누군가에게 붙들린 것처럼.

     이어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사람의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말 그대로 갑작스레 한 명의 소년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찾았다.”

     소년은 금을 녹인 듯한 금발에 연녹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온몸을 값비싸 보이는 장신구로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소년이었다. 그야말로 화려하기 짝이 없는 외양.

     보라색 머리칼의 사내아이는 가만히 자신의 손목과 갑작스레 등장한 상대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이내 사내아이는 명확히 상황을 인지하고 얼굴을 굳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목을 붙들렸다니, 믿기질 않았다.

     그리고,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사내아이는 당황하기보다 짜증을 내는 것을 택했다.

    “너 뭐야? 이거 안 놔? 죽여 버린다?”

     아이의 협박에 소년은 훗 하고 웃기만 할 뿐, 답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자들, 전부 죽이면 되겠습니까?”

    “!”

     아이가 소년을 향해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가느다란 미성이었다.

    “응. 저기 가장 화려한 로브를 입고 있는 녀석만 빼고. 정보는 뽑아내야지.”

    “알겠습니다.”

     셀린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예상대로 여인이었다. 다만, 인간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육감적인 몸매. 소년과 마찬가지로 온몸에 걸친 화려한 장신구들. 그리고- 

    ‘뿔?’

     머리 위에 돋아난, 살짝 굽어진 한 쌍의 뿔.

     그녀는 소년의 지시에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곤 주변을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두 자릿수에 달하는 숫자의 마법사들에게 포위된 자의 태도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얼굴.

    “큭.”

     곧이어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셀린의 고개가 재차 돌아갔다.

     사내아이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종족 여인에게 지시를 내린 소년이, 붙들고 있는 아이의 손목을 으스러뜨리려는 듯 강하게 움켜쥐었기 때문.

    “이야~ 오랜만이야.”

     금발 머리 소년은, 갑작스레 친근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보라색 머리칼 사내아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그거 알아? 내가 너 만나려고 대륙의 반을 횡단했어!”

    “무슨 헛소리야 대체?”

    “그런 게 있어.”

     소년의 몸에 걸쳐진 수많은 장신구가 일제히 빛을 뿜어냈다. 그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만나서 정말로 반갑다고. 이 새끼야.”

    “아하하. 영문 모를 새끼일세.”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내, 거대한 두 기파가 충돌해 사위를 휩쓰는 폭풍을 만들어냈다.

     * * *

     레인과 크레틸 자작. 두 사람의 전투는 한 시간이 넘게 계속해서 이어졌다.

     주로 레인이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자작이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간혹 레인이 예상치 못한 반격을 가하곤 했지만, 전체적인 전투 양상은 그렇게 흘러갔다.

     자작이 검격을 뿌리면 흘려내고.

     자작이 접근하려 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떨쳐내고.

     순간순간 위기가 닥치면 자작이 예상치 못한 방식, 혹은 무공으로 압박해 유유히 벗어나고.

     그러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는 듯싶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자작의 동요를 유도하고.

     자작의 스트레스가 늘어갔다. 레인으로선 한계까지 집중력을 짜내 전투에 임하고 있는 것이지만, 자작의 입장에선 쥐새끼도 이런 쥐새끼가 없다.

     그러나 레인의 전투방식은 어디까지나 편법. 애초부터 그와 크레틸 자작 사이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간극이 존재했다. 레인은 분명 분전했지만 단 한 번도 자작을 압도하지 못했다.

     자작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 오랜 시간 전투를 치렀음에도 여력이 충분히 남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편법은 언젠가 한계를 맞이하는 법.

     레인의 의외성 짙은 공격들을 수없이 맞받은 자작. 그가 점점 레인과의 전투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레인의 숨소리가 처음에 비해 상당히 거칠어졌다. 자작이 내지른 검격을 수없이 받아냈기에 그로 인한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레인이 큰 기술을 사용하기 직전에 자작이 먼저 그 흐름을 끊어버리는 빈도수가 늘어났다. 그로 인해 레인이 움직이는 범위가 점점 제한되기 시작했다.

     최상승의 경신법을 사용하고 있다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검호급 검사. 아무래도 자작의 움직임보다 속도의 절대치가 높을 수는 없었다.

     자작이 작정하고 차근차근 압박하니 레인의 움직임이 점점 제한되어갔다.

     무엇보다,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생겨났던 잔 상처. 그것이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그 숫자가 늘어났다.

     수많은 상처들로부터 전해지는 통증, 그리고 출혈로 인한 심리적 압박감이 상당했다. 그 모든 것들이 레인을 상당히 위축되게 만들었다.

    “하압!”

     자작이 급접근, 레인의 배후로 뒤돌아가 검격을 내질렀다.

     레인이 지체 않고 진각을 밟아 대지를 뒤흔들었다. 그에 자작이 일순 움찔했지만, 그가 휘두르는 검에는 일체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제는 레인의 대처방식에 상당히 익숙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레인 또한 잘 인지하고 있는 사실. 애초부터 레인은 자작의 중심을 뒤흔든다거나 하는 거창한 결과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자작이 그곳에 조금이라도 신경이 분산되면 그것으로 족했다. 중심의 흔들림을 최소화하기 위해 검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자작의 의식의 사각을 노릴 생각이었으니까.

     레인은 오히려 자작 쪽으로 뒷걸음질하며 재차 진각을 밟았다. 이번에는 대지가 아닌, 자작의 발등을 노리고 찍어 내렸다.

    “!”

     확실히 효과가 있었는지, 자작이 움찔하더니 발을 뒤로 뺐다. 그대로 따라붙으며 연속해서 진각, 진각, 진각.

    “쯧.”

     자작이 결국 몸을 빼냈다. 뒤로 크게 뛰어 물러났다.

     레인이 몸을 반 회전시키며 더욱 자작의 품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간격을 빼앗아 자작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갈퀴처럼 웅크린 손을 자작의 얼굴을 향해 내질렀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강기가 생성되어 마치 맹수의 발톱과 같은 형상을 이뤘다. 그것이 자작의 얼굴 바로 앞까지 접근했다.

    “어딜!”

     콰앙!

     그러나 타격을 입히진 못했다. 자작이 왼손 건틀릿으로 맞받아내 튕겨져 나왔다.

     공격 실패는 곧바로 반격으로 이어지기 마련. 레인은 몸을 빼내 거리를 벌렸다.

     자작의 추격을 어떻게든 뿌리치고 일단 최소한의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그 후에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숨소리가 거칠었다. 이마로부터 흘러내린 땀방울이 턱에서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누가 봐도 명백히 지쳐 있는 모습.

     온몸에 생겨난 크고 작은 상처들. 거기에 이제는 넝마라도 해도 좋을,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훼손된 무복. 산발이 된 머리칼에 피로가 가득한 눈동자.

     누가 봐도 레인의 몰골은 그리 좋지 못해 보였다. 그만큼 레인은 고전하고 있었다.

    “정말로 애먹이는군.”

     자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는 정말로 레인이 이 정도로 악착같이 견뎌낼 줄은 생각지 못했다.

     현재 두 사람이 위치한 곳은 귀족 거주구. 수없이 이동하면서 치러진 전투의 무대는 이미 오래전에 백작가 저택 바깥으로 옮겨진 지 오래였다.

     수없이 많은 귀족 저택들이 반파되거나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잘 닦인 대로는 이미 엉망으로 파헤쳐졌다. 이젠 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보기 흉한 모습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인명 피해는 없다는 것일까. 자작의 침입 소식을 전해 들은 내성 거주자들은 이미 대피를 완료한 상태였다. 그 덕분에 그만한 파괴행위가 벌어졌음에도 그에 말려들어 목숨을 잃은 이는 없었다.

     재산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지만.

    “하지만, 이젠 끝을 낼 때가 되었지.”

    “누구 맘대로.”

    “허세 부릴 것 없다. 이미 한계지 않나.”

     레인이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두 사람은 곧바로 다시 맞붙었다. 레인은 계속해서 밀려나고 밀려나 이내 외성과 내성을 이루는 경계, 즉 내성벽에 다다랐다.

     자작이 작정하고 연속해서 날리는 검강에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레인이 어떻게든 그것을 회피, 반격의 틈을 찾으려 분전했다.

     그러던 와중, 레인은 툭, 하고 등에 닿은 예상치 못한 장애물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물러나야 할 타이밍. 그런데 그 타이밍을 완전히 놓쳤다. 등 뒤에 쌓여 있는 성벽이었던 것의 잔해 때문에.

     애초부터 자작은 이것을 노린 것이었다. 레인을 노리는 척하면서 뒤쪽의 성벽을 무너뜨려 교묘히 퇴로를 틀어막은 것이다.

    “끝이다.”

     자작이 선언했다.

     단숨에 쏟아져 나오는 이십여 개에 이르는 검강. 레인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점하고 날아드는 마무리 일격.

     자작 또한 이 공격에 한 번에 쏟아부을 수 있는 모든 기운을 쏟아부었다. 검강의 숫자가 숫자인 만큼 시전 후 상당한 딜레이가 오겠지만 개의치 않았다.

    “윽.”

     레인이 신음을 흘렸다.

     물러나야 하건만 뒤쪽을 가로막고 있는 벽이 문제였다. 뚫고 나가자니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필시 뚫어내기 전에 자작이 날린 검강에 온몸이 난자되겠지.

     그것은 절망스럽기 그지없는, 그런 상황.

     레인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얼굴을 살짝 가렸다.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이 꼭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의 그것과도 같았다.

    “후우”

    자작이 숨을 골랐다.

    생각보다 너무 힘든 일전이었다. 시간에 쫓기고 있는 자작으로선 이 전투로 인해 날린 시간이 너무나도 뼈아팠다.

     그래도 이젠 끝이다. 이젠 헬튼 백작이 백작성에 도달하기 전에 백작가 저택으로 되돌아가 하슨 백작을 찾고 그를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

    ‘잘 가라.’

     솔직히 아까운 인재였다.

     저 나이에 저만한 실력을 쌓으려면, 대체 얼마나 압도적인 재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일까. 어려서부터 천재라는 타이틀을 달고 주변의 선망과 질시를 받아왔던 자작조차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의 재능이라면 왕국 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아도 좋을, 그런 수준. 차세대 검존 후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 싹을 자작 본인이 자른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죄스러웠다. 왕국의 입장에선, 아니, 존경해 마지않는 국왕 전하의 입장에선 인재 손실도 이런 인재 손실이 없을 테니.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분명 처음엔 죽일 생각까진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

     어디까지나 딸아이의 목숨이 최우선. 봐주면서 상대하자니 도대체 얼마나 더 시간을 낭비하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전력을 다해 상대할 수밖에.

     하다못해 천재의 최후를 확실히 눈에 담고자, 자작은 시선을 소년의 얼굴에 고정했다. 그 업을 제대로 지고자, 피하지 않고 마주하고자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맞섰다.

     소년은 그늘진 얼굴로 무언가를 중얼중얼거리고 있었다. 자작은 정말로 소년이 모든 것은 포기했다고, 그렇게 판단했다.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날아드는 이십여 개의 검강을 그 검은 눈동자로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작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했다.

     소년은 웃고 있었다.

     피에 젖은 얼굴로. 입이 찢어질 듯한 호선을 입가에 그리며.

     조금도 포기하지 않았음이 여실히 느껴지는, 악의와 살기, 투기와 귀기가 가득 찬 눈빛으로 전방을 응시하며.

     마치 이때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더없이 만족스러운 기색을 흘리며.

     소년이 손에 든 검을 양손으로 붙잡고 횡으로 길게 휘둘렀다.

     그리고 그 직후, 자작의 시야에 담긴 세계가 온통 백광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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