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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결전(3) (104/249)

 104화. 결전(3)

“후우.”

 레인이 목을 꺾으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자작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일을 벌인 거지?”

“너도 다른 놈들과 똑같은 질문을 하는군. 안 됐지만 알려줄 마음은 없다. 그것은 오롯이 내 개인적인 사정. 그 업은 내가 짊어진다.”

“지랄. 네 개인적인 사정 따위 내가 알 바 아냐. 문제가 되는 건 네가 ‘그 녀석들’과 한 편에 서서 행동하고 있다는 거지.”

“무슨 말이지?”

“이번 백작가 습격, 정말로 너 혼자서 생각하고 결정한 일인 거냐?”

“뭐?”

“혹시 이 돌발행동을 제안했다거나, 은연중에 귀띔해 주었다거나. 그런 인물이 주변에 전혀 없었냐는 뜻이다.”

“……영문 모를 말로 시간을 끄는군. 대답해 줄 생각은 없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다면 나를 쓰러뜨려라. 불가능하겠지만.”

 레인은 잠시간 자작의 눈을 들여다보다 픽 하고 웃었다.

“상당히 초조해 하고 있군.”

 자작의 저도 모르게 살짝 눈가를 꿈틀했다.

“걱정되나? 분명 전선에 있던 내가 이곳까지 와 있어서? 곧 헬튼 백작도 이곳에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

“정곡을 찌른 모양이군.”

“너……!”

“안심해도 좋아. 지금 당장 헬튼 백작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테니. 하지만, 그리 여유롭지도 않을 거다.”

 레인은 핫, 하고 웃었다.

“너도 눈치챘겠지만, 내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건 네 계획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모종의 이유로 백작에게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 좀 늦어지긴 했다만.”

“…….”

“그래도 지금쯤이면 이쪽으로 맹렬히 달려오고 있을 테지. 적어도 네 생각보다는 훨씬 일찍 도달할 거다.”

 자작의 이마에 골이 파였다.

“네 목적을 달성하고 싶다면 최대한 빠르게 날 쓰러뜨려야 할 거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사람이 격렬하게 맞붙었다.

 * * *

 격돌.

 자작이 곧바로 레인에게 달려들었다. 시간이 아쉬운 쪽은 자작이지 레인이 아니다. 당연히 그가 선공을 취할 수밖에.

 첫 일격은 검성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기예. 다수의 검강 발출. 초승달 모양의 검강 십여 개가 단숨에 레인에게 날아들었다.

 맞받는 것은 현재의 레인으로선 힘들었다. 그 사실은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방금 전에야 제자들이 피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억지로 받아냈지만 이번에도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회피에 주력했다.

 흔들거리듯 움직이는 신형. 발걸음 소리조차 나지 않는 유령 같은 움직임으로 모든 검강을 회피해냈다. 중원 유수 암살 문파 유령문(幽靈門)의 독문 보법, 유령보(幽靈步).

 아무래도 아슬아슬했는지 뺨에 가느다란 실선이 그어졌다. 그래도 별로 대단찮은 생채기에 불과했다. 레인은 개의치 않고 움직였다.

 자작이 곧바로 추격, 공격해왔다. 세상을 둘로 쪼갤 듯 강맹한 상단 베기.

 카카카카칵!

 레인이 검을 맞대고 절묘한 중심 조절을 통해 상대의 검을 끌어들였다가 부드럽게 뒤로 밀어냈다. 그것으로 완벽하게 공세를 흘려내고 곧바로 몸을 뺐다.

 안 그래도 실력 격차가 큰 판국이다. 제자리에서 자작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 쉼 없이 움직이고 또 움직여야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레인이 가능한 최고 속도로 끊임없이 신형을 이동시켰다. 자작이 추격하며 연신 검격을 날렸다.

 이동. 이동. 이동.

 추격. 추격. 추격.

 목을 노리고 쓸어오는 횡 베기를 검면으로 흘려냈다. 거북한 마찰음과 함께 검이 불똥을 튀기며 비껴갔다.

“전에도 느꼈었지만 짜증 날 정도로 요령이 좋은 녀석이구나.”

 자작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쓸데없이 말이 많아.”

 레인이 내뱉으며 뒤쪽으로 몸을 뺐다. 동시에 검강 발출.

“그 입은 반드시 잘라내 주마.”

 자작이 가볍게 검강을 걷어내고 추격하며 말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추격전.

 레인이 끊임없이 뒤로, 좌우로, 갈지(之)자로 움직이며 공격을 회피했다. 그러면서 간간이 반격을 날렸다.

 자작이 성난 맹수처럼 몰아쳤다. 아무래도 계속해서 움직이며 전투를 치르다 보니 저택 곳곳이 교전의 여파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쥐새끼 같은 녀석!”

 자작이 급가속, 신형을 날려 레인의 좌측에서 검을 휘둘렀다. 상체를 급격하게 뒤로 젖혀 공격을 피하는 레인.

 곧바로 검을 회수한 자작. 땅을 짚고 제비를 넘어 거리를 벌리려 드는 레인에게 단번에 십여 개의 검강을 발출했다. 자세가 불안정한 틈을 타 타격을 입히겠다는 자작의 의도가 엿보이는 공격.

 신형을 바로 세울 틈이 없어진 레인이 연속해서 몸을 굴려 제비를 넘었다. 그것을 노렸는지 곧바로 따라붙는 자작.

 레인은 검강을 피해내자마자 엎드린 자세로 몸을 고정했다. 바닥에 길게 네 줄기 흔적을 남기며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잡았다.

 양팔과 구부린 다리로 몸을 지탱해 들어 올린, 마치 짐승과도 같은 자세.

“크르르르!”

 레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입이 마치 짐승의 그것과 같이 한껏 벌어졌다. 한계까지 뒤로 젖힌 머리로 막대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대포효.

“커허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내력이 가득 담긴 음파가 전방을 휩쓸었다.

“크윽!”

 추격하던 자작이 일순 신형을 멈추고 온몸에 기막을 둘러 충격파를 견뎌냈다. 음파에 실린 기운이 어찌나 강렬한지, 음파가 퍼진 파장의 형태로 대지가 마구 패여 나갔다.

 쾅!

 직후 레인이 양팔로 바닥을 강하게 후려쳐 그 반동으로 튀어 올라 몸을 뺐다. 흡사 짐승과도 같은 움직임.

“놓칠 것 같으냐!”

 추격하며 검강을 발출하는 자작. 레인이 그것을 공중에서 신형을 뒤틀어 피해냈다. 급격한 방향 전환.

 실상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그림자로부터 뻗어 나온 검은 줄기를 발판으로 사용한 덕분에 그것이 가능했다.

“정말로 귀찮게 하는구나!”

 연속해서 날아드는 검강. 아직 레인의 신형은 허공에 뜬 채였다.

“쯧.”

 대부분은 몸을 뒤틀어 피해낼 수 있었다. 그러지 못한 것은 검면으로 흘려냈다.

 흘려내는 방식은 이화접목(移花接木). 무당(武當)의 자랑인 이 기술은, 그것이 설사 내력의 압축체인 검강일지라도 흐름을 뒤틀어버리는 것이 가능했다.

 레인의 검에 덧씌워진 검강이 상대가 날려 보낸 검강을 받아냈다. 힘으로 맞부딪치지 않고 포용하듯 부드럽게.

 태극의 묘리에 따라 검이 길(道)을 인도하고, 그 인도에 따라 방향이 뒤틀려진 검강이 레인을 비껴 지나갔다. 심지어, 그중 두 개는 자작에게 되돌아 날아가기까지 했다.

“이 무슨 웃기지도 않는!”

 자작이 갑작스레 되돌아온 자신의 공격을 걷어내며 황당하다는 듯 내뱉었다.

“시끄럽기는.”

 레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곤 지금까지 물러나던 모습이 무색하게 자작을 향해 질주해 들어갔다.

 자작이 갑작스런 접근에 움찔했다가 횡으로 검을 휘둘러왔다. 레인이 그것을 피해 슬라이딩. 급격한 접근으로 오히려 검의 간격에서 벗어났다.

“흥!”

 간격이 급격히 줄었음에도 자작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래 봐야 자세가 무너진 상태 아닌가.

 자작이 견제를 위해 다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가 내리찍었다. 물론 오라가 듬뿍 실린 강렬한 일격이었다.

 콰앙!

 그것을 몸을 뒤틀어 피해낸 레인이 오히려 관절기로 맞받았다. 피해냈음에도 그 풍압에 옆구리에 타격을 받았다. 무복이 찢겨나가고 그 안쪽 피부에 피멍이 생겨났다.

 급격하게 몸을 꺾어 자작의 다리를 휘감고 그대로 무게를 싣는 레인. 제대로 뒤틀 작정으로 내력을 순환시켜 신체 무게를 배가시켰다. 천근추(千斤錘).

 자작이 갑작스레 다리에 가해진 묵직한 감각에 일순 신형을 휘청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재차 진각을 밟아 신형을 바로 세우는 자작.

 텅!

 진각으로 인해 생겨난 막대한 충격파로 인해 뒤로 튕겨 나온 레인. 그가 어떻게든 신형을 바로잡으려고 하는데, 자작의 팔꿈치가 날아들었다.

 아직 검의 간격이 닿기에는 어정쩡한 거리. 그렇기에 자작은 타격기로 피해를 입힐 생각이었다.

 레인이 일장을 내질러 그것을 맞받았다.

 쩌엉!

 레인이 마치 탄환처럼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타격이 극심한지 입가에서 선혈을 흩뿌렸다.

 자작은 제자리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본래는 곧바로 추격해 끝장을 내려 했지만, 팔꿈치에서부터 갑작스레 냉기가 올라와 그것을 억누르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자작은 모르겠지만, 레인이 다급하게 내질렀던 일장은 중원 새외사세(塞外四勢) 중 하나인 북해빙궁(北海氷宮)의 것. 역대 빙궁주(氷宮主)의 독문 무공, 빙백신장(氷白神掌).

 북해의 지배자로 이름 높은 빙궁주의 상징과도 같은 이 장법은, 맞받은 적의 혈도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든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공능.

 그러나 힘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 레인의 공격으론 자작의 혈도를 상하게 하는 것까진 무리였다. 고작 자작이 그 기운을 억눌러 소멸시킬 때까지 시간을 벌었을 뿐.

 그러나 그것이면 충분했다. 자작과의 거리를 벌리고 자세를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정말 짜증 나는 전투방식이군그래.”

 자작이 짓씹듯이 내뱉었다. 시간에 쫓기는 그로선 굉장히 화가 치미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뭐야. 이렇게 나 하나 어쩌지 못하는 주제에 어디 가서 초인이라는 타이틀, 내걸 수나 있겠어?”

 레인이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슥슥 닦아냈다.

“좀 더 힘내보라고.”

 그가 이를 갈고 있는 자작을 조롱하듯이 한 차례 핫, 하고 웃었다.

 * * *

 레인이 한참 자작과 전투를 치르고 있던 때.

 셀린은 겨우 정신을 차린 레이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백작 저택 부지 내에 위치하는 비밀 공간으로.

 비밀 공간은 의외로 창고 구역에 위치해 있었다. 본관을 첫 목표물로 잡은 자작은 헛다리를 짚은 셈이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아가씨?”

 셀린이 등에 업힌 레이나에게 물었다.

“괜찮아.”

“괜찮은 것치곤 목소리에 힘이 없으네요. 얼른 가서 치료하는 게 좋겠어요.”

“셀린. 스승님은 무사하실까?”

“사부라면 분명 괜찮을 거예요. 괴물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지금은 아가씨 몸을 추스를 생각부터 하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셀린 또한 굉장히 걱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가 상대니까.

“이제 여기서 어디로 가면…….”

 흠칫.

 레이나에게 길을 묻던 셀린이 갑작스레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뒤를 밟는 자들이 있어요.”

“뭐?”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레이나는 느끼지 못했다. 조심스레 기척을 죽인 채 쫓아오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감각에 걸려든 불쾌한 기척에 셀린이 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의도로 접근하고 있는 이들은 아니라는 결론밖에 내려지지 않았다.

 현재 셀린에겐 이렇다 할 무기가 없다. 활은 있지만, 화살이 전부 떨어졌다. 활만을 이용해 적을 상대하는 방법도 분명 배우긴 했지만 그건 그야말로 곁가지로밖에 익히지 않았다.

 심지어 등에는 환자가 업혀있기까지. 도저히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벗어나야 해.’

 저들의 목적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분명 자신들을 따라 하슨 백작을 찾아내려는 것이리라. 이대로 비밀 공간으로 향할 수는 없었다.

“아가씨. 바로 벗어날게요. 되도록 꽉 붙잡으세요.”

 끄덕.

 어느 정도는 상황을 유추한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은 곧바로 땅을 박찼다.

“쯧.”

“들켰나?”

 은신 마법으로 자신의 기척을 죽이고 있던 마법사들이 혀를 차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곧바로 뒤쪽에서 따라오던 동료 마법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백작이 있는 곳을 캐내야 한다. 생포해라.”

 마법사들의 리더로 보이는 화려한 로브를 걸친 사내가 명령했다.

‘이미 포위된 상태였나.’

 사방팔방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셀린이 이를 악물었다.

 은신 마법을 익힌 마법사들이 신호해 표적의 위치를 알리면 동료 마법사들이 멀리서부터 그 주변을 둘러싸는 식으로 포위망을 형성한 모양이었다. 초감각을 지닌 상대를 상대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큰일이다.’

 붙잡혔다간 끝장이다. 그렇지만 이 자리를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결국 그녀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최대한 기동성을 살려 상대를 교란하고 자리를 벗어나는 것. 가장 정석적이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법.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며 지면에 닿은 오른발에 한층 더 힘을 실었을 때였다.

“아하하. 어디 가?”

“!!”

 갑작스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우뚝, 하고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놀란 것은 레이나도 마찬가지인 모양. 그녀가 딱딱하게 굳었음이 셀린의 등으로 전해져 왔다.

 목소리는 어린아이의 그것이었지만 셀린은 조금도 상대를 경시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분명 목소리는 지근거리에서 들려오건만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질 않고 있으니.

“오셨습니까.”

 화려한 로브를 걸친 사내가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주위 다른 로브인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셀린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상대를 자극하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안녕?”

 그곳에는 빙글빙글 웃고 있는 귀여운 외견의 사내아이가 있었다. 대충 봐도 열 살이 채 안 되어 보였다. 짧게 자른 보랏빛 머리칼에 일견 섬뜩하게까지 느껴지는 붉은 눈동자를 지닌 소년이었다.

“······.”

 마주한 순간, 셀린은 질려버리고 말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소년의 어려 보이는 외견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기감으로 전해져오는 정보가 그것을 싫을 만큼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방금까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마치 과시하듯 사내아이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는 압도적인 존재감. 셀린이 느끼기에 그것은- 

‘최소 크레틸 자작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이다.’

 이런 괴물에게서 어떻게 벗어난단 말인가.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였음을 깨달은 셀린의 얼굴이 하얗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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