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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결전(2) (103/249)

 103화. 결전(2)

 크레틸 자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움직임은 ‘그’와 닮았다. 이전에 백작과 전투를 치르는 와중 난입했던 그 소년과. 그때의 소년과 같은, 예측을 넘어선 움직임.

 자작이 일단 차분하게 검격을 걷어내고 빈틈을 노려 찌르기를 날렸다. 의외성이 있다지만 절대적인 우위는 이쪽에 있었다. 문제는 없었다.

 쉬익!

 그리고 그 타이밍에 귀신같이 날아드는 화살. 자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것을 걷어내기 위해 검로를 틀었다. 그 사이에 레이나가 거리를 벌렸다.

‘까다롭다.’

 자작이 속으로 살짝 감탄했다.

 보아하니 저쪽의 궁수는 초일류에도 이르지 못한 그저 그런 실력자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초일류 검사와 조합되니 웬만한 초일류 무인 두세 사람의 합공보다도 까다로웠다.

 이런 시골 영지에 이만한 인재들이 있다니, 의외였다.

‘하지만.’

 그렇지만 그뿐. 이쪽을 억누를 수준을 되지 못한다. 쓰러뜨리는 것도 시간문제다. 자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작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시간을 들이면 보다 안정되게, 체력 소모를 최소화하면서 제압할 수 있겠지만, 이젠 슬슬 자작도 조급했다. 조금은 무리하더라도 빠르게 제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레이나와 셀린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레이나는 초일류의 경지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셀린은 애초에 초일류의 대열에도 들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역량 차이가 너무 컸다.

 그나마 두 여인이 어떻게든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의외성’이라는 요인 덕분. 그러나 초반에 의외성을 앞세워 약간의 타격조차 입히지 못한 시점에서 그녀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자작이 검강을 마구 흩뿌리기 시작했다. 시간에 쫓기는 자작인 만큼 단기 결전으로 몰고 갈 작정이었다.

“윽.”

 레이나의 움직임이 위축되었다. 일부는 회피하고 일부는 검강을 씌운 검으로 걷어냈다.

 그렇지만, 애초에 같은 검강이라도 검호의 검강과 검성의 검강이 같은 위력일 리가 없다. 당연히 밀려났다. 출력이 압도적으로 부족했다.

 밀려난 레이나를 추격해 옆으로 돌아가 검격을 뿌리려는 자작. 어김없이 셀린이 화살로 지원하려고 했다.

 드드드득.

 대궁이 부러질 듯 휘었다. 꼬아 쥔 활줄에서 미약한 소음이 새어 나왔다.

 자작이 레이나가 셀린과 자신 사이 일직선상에 위치되도록 교묘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괴물 같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궁술이다. 그런 일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최상위 무공. 셀린은 화살을 쥔 손가락에 미묘한 힘 조절을 가하며 자작의 움직임에 시선을 집중했다.

“윽!”

 그런데 그 순간. 등골을 타고 올라온 섬뜩한 감각.

 타이밍을 재며 자작을 관찰하던 셀린이 저도 모르게 몸을 굳히고 말았다. 자작이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갑자기 시선을 이쪽으로 향해온 것이다.

 오싹!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맹렬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셀린이 곧바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직후, 검강의 폭격이 방금까지 셀린이 위치했던 자리에 떨어져 내렸다.

 콰콰콰콰쾅!

 아무리 검성이라지만 이렇게나 떨어진 거리에까지 검강을 유지시켜 떨어뜨릴 줄은 몰랐다.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셀린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자작은 결국 레이나를 완전히 몰아넣는 데에 성공했다.

 죽음에 한 발짝 다가섰다 돌아온 충격으로 셀린의 반응이 한 박자 늦어졌다. 그녀가 아차 싶어 다시 활시위를 걸었을 땐, 이미 레이나가 자작의 검격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하는 상황에까지 몰려 있었다.

 쾅!

 레이나의 검에 실린 검강과 자작의 검에 실린 검강이 맞부딪쳐 폭음을 자아냈다.

“컥!”

 레이나가 각혈하며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힘의 차이는 명백. 그녀는 이 일격으로 단번에 의식을 잃고 말았다.

“레이나 아가씨!”

 셀린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연신 활시위를 놓았다. 가진 화살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자작이 기절한 레이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그러나 이제 전위(레이나)를 잃은 후위(셀린)의 공격은 자작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다. 자작은 가볍게 검을 털어내는 듯한 간단한 동작만으로 모든 공격을 차단했다.

 셀린이 입술을 깨물며 연속해서 화살을 내쏘았다.

“음?”

 자작이 쓰러진 레이나를 바라보며 눈에 이채를 발했다.

“레이나.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 것도 같고.”

 거기까지 중얼거린 자작이 우뚝 멈췄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그래, 분명 하슨 백작가 장녀의 이름이 레이나였지.’

 그때를 기점으로 셀린의 화살도 모두 떨어졌다. 셀린은 더 이상 상대를 막을 수단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본관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녀가 곧바로 레이나가 쓰러져 있는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빠르게 레이나의 신형을 확보해서 도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셀린보다 자작이 한발 빨랐다. 자작은 순식간에 신형을 이동, 레이나의 앞에 도달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백작가의 장녀라면, 분명 하슨 백작이 위치한 비밀 공간이 어디인지 알고 있을 터.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백작의 심중을 뒤흔들 협박 재료로 사용할 수 있을 테지.”

 자작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레이나의 팔뚝으로 향했다. 셀린이 필사적으로 레이나를 향해 달려갔지만, 너무 거리가 멀었다.

 자작은 되도록 백작가 인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백작의 혈육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이번 작전의 성패가 자체가 갈릴지도 모르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딸아이의 목숨이 걸렸다. 작전 성공률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단을 손에 넣었는데도 활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자작은 여차하면 고문이라도 해서 정보를 뽑아낼 생각을 굳혔다.

“윽?!”

 그 순간, 자작의 머리를 향해 한 자루의 창이 날아들었다. 강기는 물론이요, 회전력까지 듬뿍 실린 묵직한 일격이.

 카드드드드득!

 갑작스런 기습에 자작이 급히 검을 들어 공격을 받아냈다. 그가 길게 족적을 남기며 뒤로 밀려났다.

 창은 자작을 한참 밀어내고서야 회전을 멈추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 쏜살같이 날아드는 검은 인영. 가속도 듬뿍 실린 발길질이 자작의 검과 거칠게 충돌했다.

 콰과과곽!

 자작의 신형이 재차 크게 밀려났다. 그리고, 검은 인영은 그 반동을 이용해 반대 방향에 공중제비를 돌아 착지했다.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 수실로 특이한 문양을 수놓은 알 수 없는 양식의 옷차림. 더군다나 밤갈색 머리칼을 틀어 올려 대침으로 고정시켜 놓았다. 정말로 특이한 외견을 한 소년이었다.

“…….”

 자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상대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그는, 분명 이전에 자작과 백작의 일전에 끼어들어 자작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그 소년이었다.

“커헉. 허억. 허억.”

 소년이 거칠어 숨을 몰아쉬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상당히 무리를 한 것으로 보였다.

 자작이 그를 경계하는 사이에 셀린이 레이나의 신형을 확보했다. 그리고 소년은 아주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자작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마치 자작으로부터 두 여인을 보호하듯.

“후우. 후우.”

 소년의 호흡은 이내 안정을 찾아갔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르게.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전신으로부터 막대한 기파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자작이 저도 모르게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피부로 전해진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파. 그 어떤 기운보다 끈끈하고, 어둡고, 끔찍한, 그런 기운이 주위를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연신 피부를 자극하는 농밀한 ‘악의’에 자작은 저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상당히 기분 나쁜 기운이었다.

 만인에게 두려움을, 복종을, 경외를 강요하는 기운. 그 어떤 기운보다 폭력적이고 압도적이며 잔인한 기운.

 천마기(天魔氣).

 그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기운은, 보다 상위의 경지인 자작마저도 순간적으로 압도할 정도의 박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작의 앞을 막아선 소년, 레인은 가만히 자작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후, 빌어먹을.”

 그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싫은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니까.”

 * * *

 레인은 가라앉은 눈으로 자작을 훑어보았다.

‘막을 수 있으려나.’

 이전에도 느꼈지만, 실력 차가 너무 심하게 나는 상대다. 그나마 전에는 헬튼 백작이라도 있었건만, 지금은 꼼짝없이 정면으로 맞서야 할 판이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지만.’

 여기까지 쉬지 않고 내달려오느라 상당한 내력을 낭비했다. 컨디션도 약간 무너졌고.

 그렇지만 내력이야 넘쳐나니 상관없었다. 체력 소모는 내력을 운용해 최소화했으니 그리 크게 문제 될 정도는 아니었고.

 컨디션의 경우엔 그렇게까지 심하게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레인은 그런 것에 익숙하기도 했다.

‘역시 역량 차를 극복하기가 힘들 것 같은데.’

 그러나 역시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 상대와 자신과의 격차였다.

 그래도 물러날 수는 없다. 등 뒤에 제자들이 있으니. 지금 자신이 막지 않으면 누가 이 자를 막겠는가.

“후우.”

 레인이 한 차례 심호흡했다. 쓸데없이 크게 긴장했다. 조금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가 다시 상대에게 집중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봐서 그런지 아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느껴졌다.

‘어라.’

 자작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있긴 하지만 레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실상 자작은 백작성까지 몰래 이동해 오느라 상당한 체력을 축냈다. 앞길을 가로막는 병력을 정리하느라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했다. 쓸데없는 죄책감으로 자비를 베푼답시고 스스로 힘을 상당히 낭비하기까지 했다.

 무형검을 발출하느라 오라를 낭비했다. 자신을 가로막는 레이나와 셀린을 빠르게 처리할 생각으로 또다시 힘을 낭비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안 그래도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이곳까지 오며 계속해서 접한 ‘여러 방해 요소들’로 인한 ‘조급함’이 더해졌다.

 그 모든 요인들이 합쳐져 자작의 컨디션을 무너뜨렸다. 아직 그렇게 심한 수준은 아니지만- 

‘파고들 틈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레인이 순식간에 견적을 내리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

“응. 사부.”

 바로 뒤쪽에 위치한 셀린이 자작의 눈치를 보느라 움찔거리며 답했다.

“레이나를 데리고 여길 벗어나.”

“하지만.”

 셀린이 우물쭈물했다. 레인의 말에 자작의 분위기가 험악해진 탓이다. 그 강렬한 기파가 심신을 옥죄어 왔다. 마음먹은 대로 몸이 움직여 주질 않았다.

 레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며 셀린 대신 기파를 맞받았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그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사부는 어쩌고?”

“자작을 막아야지.”

 예상했던 간결한 대답. 셀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위험해. 내가 가세할게.”

“레이나의 안전이 우선이야. 전투 능력이 없어진 인물을 보호해가며 싸우는 형국이 되면 1 대 1 싸움만도 못해. 데리고 물러나.”

“하지만 상대는 검성이야! 지난번과는 달라! 아무리 사부라도 무리라고!”

 셀린이 우려 가득한 외침을 내뱉었다. 레인이 후우, 하고 한 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셀린.”

 움찔.

 섬뜩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 셀린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레인은 시선을 자작에게 고정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레이나를 데리고 이 자리를 벗어나. 방해된다.”

“…….”

 셀린이 잠깐 고개 숙인 채 갈등했다. 그러다 결국 스승의 말에 따라 신형을 날렸다.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그냥 보내줄 것 같으냐!”

 곧바로 자작이 노호성과 함께 신형을 날렸다.

“보내야 할 거야.”

 그와 동시에 레인이 자작에게 접근했다. 자작이 끌어올리고 있는 힘이 임계점에 이르기 전에 팔꿈치를 툭 하고 두드렸다.

“?!”

 무슨 이유인지 곧바로 흩어져 버리는 오라. 자작이 일순 움찔, 하고 반응했다.

“비켜라!”

 그가 곧바로 공격 대상을 레인으로 변경했다. 한순간에 강기가 실린 왼쪽 건틀릿.

 자작이 주먹을 그려 쥔 채 내질렀다.

 그것을 손등으로 받아내 흘려내는 레인. 곧바로 한 걸음 더 전진했다. 그리곤 자작의 품에 파고들어 그 배 위에 주먹을 가져다 댔다.

“두 번이나 당할 줄 아느냐!”

 이전에 이미 한 차례 당해본 기술이다. 자작이 곧바로 대응했다. 레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을 거두고 곧바로 훌쩍 뒤로 물러났다.

 한순간에 신형을 반 회전시킨 후 어깨 돌진을 해오는 자작. 감히 맞받을 수 없는 위력.

 레인은 뒤쪽으로 물러나는 반동을 이용했다. 어깨를 손으로 받아내 최대한 충격을 줄여냈다.

 콰앙!

 튕겨 나간 레인이 공중제비를 돌아 가볍게 착지했다. 그리곤 재차 셀린을 쫓으려는 자작에게 검강을 사출했다. 자작이 귀찮은 얼굴로 그것을 걷어내고 반격을 날렸다.

“하압!”

 레인과 똑같이 검강을 사출하는 자작. 그러나 레인이 사출한 검강과는 그 개수가 달랐다.

 피하긴 쉽겠지만, 제자가 물러날 시간을 벌어야 했다. 레인은 그것을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검에 난폭한 검기가 덧씌워졌다. 눈을 멀게 할 듯 백열하는 검강이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흉폭한 기세가 줄기줄기 뻗어 나갔다.

 레인이 그것을 크게 휘둘렀다. 한 차례, 두 차례, 세 차례.

 콰드드드득! 콰드드드드드득!

“큽.”

 일단 막아낼 수는 있었다. 힘에서 크게 밀린 탓에 바닥에 길게 족적을 남기며 뒤쪽으로 주르르 밀려났지만.

 그래도 별다른 피해는 입지 않았다. 레인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며 검을 한 차례 휘둘러 여파를 털어냈다. 파고들 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이 더해졌다.

 자작이 짜증스런 얼굴로 멀어지고 있는 셀린 쪽을 노려보았다. 다 잡은 고기를 놓쳤으니 심정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선을 목격한 레인이 불쾌한 감정 가득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저 둘에게서 신경 꺼. 죽여 버리기 전에.”

“주제에 누굴 죽인다는 거지? 애송이.”

 자작이 비웃음으로 답했다. 그 또한 예상치 못한 시간 낭비에 기분이 상당히 가라앉은 상태. 레인의 도발에 그대로 도발로 대응했다.

 서로를 노려보는 차가운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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