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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결전(1 (102/249)

 102화. 결전(1)

 크레틸 자작이 내성을 지나 백작 저택에 다다랐다.

 마지막 보루인 만큼 현재 백작성 내에 존재하는 전 병력이 밀집되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작은 그들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 중 백작이 있는가를 확인하려고 한 것이다.

‘없군.’

 혹시나 자신을 설득, 혹은 회유하기 위해 나와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런 편리한 상황은 없었다. 하긴 백작이 바보는 아닐 테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이제부터 상당히 귀찮아지겠군.’

 아마 백작이 백작성을 뒤로하고 도망친 것은 아닐 터였다. 그는 영주씩이나 되는 인물. ‘검성’이 어떤 존재인지 모를 리 없을 테니.

 괴물 같은 범위를 자랑하는 감각에 압도적인 육체 능력. 그 모든 것을 갖춘 검성에게서 일반인인 백작이 도망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쓸데없이 도주를 위해 힘을 쏟느니 웬만한 영주라면 다들 보유하고 있을 기척 차단 마법진이 깔린 비밀의 방에 숨어드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분명 백작 또한 그것을 알겠지.

“후우.”

 요는, 백작과의 숨바꼭질이다.

 자작의 침입은 곧 본대, 즉 헬튼 백작이 이끌고 있는 백작군에도 전해진다. 아마 긴급 사안인 만큼 백작성에서도 이미 전서구를 띄웠을 터였다.

 자작이야 모습을 감추고 이동하기 위해 며칠씩이나 걸려서 백작성에 당도했지만, 헬튼 백작은 그렇지 않을 터. 자작을 따라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백작령 특유의 잘 닦인 도로를 감안하면 그가 여기까지 쫓아오는 데에는 채 반나절이 걸리지 않을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준마로 쉬지 않고 달려도 이틀은 걸리는 거리지만, 상대는 검성이니까.

 그러니, 시간 싸움이다. 눈앞의 병력을 빠르게 정리하고 어딘가에 숨어 있을 백작을 찾아 제거한 뒤 백작성을 빠져나가야 했다.

 모든 것을 혼자서 해내야 하는 만큼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크레틸 자작!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지켜야 할 도의가 있는 법입니다!”

 기사들 중 하나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크레틸 자작의 얼굴이 약간 흐려졌다. 그러나 오래잖아 갈등을 떨쳐냈다.

 모든 것은 딸아이를 위해서.

“미안하지만.”

 크레틸 자작은 우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게도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말한 자작이 검을 겨눴다. 이내 찬란한 푸른빛을 뿌리는 검강이 검 위에 덧씌워졌다.

“윽.”

“크윽!”

 자작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전원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잘 알았다. 자신들로선 저 괴물을 막을 수 없음을. 그저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것을.

 기사들이 검을 으스러지도록 그려 쥐었다. 병사들이 창대를 꽉 붙들었다.

 개죽음을 당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만, 그렇더라도 막아설 수밖에 없었다.

 모시는 주군을 위해. 자신이 죽더라도 가족들을 돌봐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어진 영주의 안위를 위해.

“쳐라!”

 일행을 지휘하는 기사가 소리쳤다.

“으아아!”

“와아아아아!”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기사들이 그 사이사이에 섞여 자작의 뒤를 노렸다.

“정말로 너희들에겐 미안하게 생각한다. 모든 것은 내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다. 원망해도 좋다.”

 자작은 음울하게 말하며 몰려드는 병력을 향해 검을 겨눴다.

 이내, 압도적인 기파가 사위를 휩쓸었다.

 * * *

“끄으으으.”

“크으윽.”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

 살아남은 이들이 여기저기서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그들이 살아남은 것은 온전히 자작이 자비를 베푼 덕분.

 이번에도 자작은 막아선 자들의 목숨만은 빼앗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낭비한 힘이 상당했다.

 기습작전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선택임을 알면서도 자작은 그렇게 행동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이놈! 안 된다!”

“백작님만큼은 절대!”

 병사들이 비통한 신음을 내질렀다. 자작은 내심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것을 속으로 삼켰다. 걸음을 내디뎌 병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진 피에 절은 공간을 뒤로했다.

 그가 대저택을 쭉 둘러보았다. 지금부터가 본방. 저택 내 어딘가에 숨어 있을 백작을 찾아 제거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을 제 시간 내에 해내지 못하면 헬튼 백작이 찾아와 훼방을 놓는다. 그렇게 되면 다음은 없다. 두 번째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크레틸 자작은 대략 30분간 저택 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서재, 연무장, 창고 등등. 비밀의 공간이 있을 법한 장소를 찾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역시 쉽게 발견할 순 없는 건가.”

 자작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쉽게 발견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쪽도 그냥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자작은 30분 동안 돌아다니며 비밀 공간을 수색하는 동시에, 저택의 모든 사용인들을 한 창고에 몰아넣어 두었다.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던 모종의 일을 행하기 위해서.

“나오지 않겠다면.”

 그가 주위를 한차례 돌아보았다. 현재 위치한 곳은 고풍스러운 멋이 가득한 백작가의 정원.

“통째로 날려주지.”

 자작의 손에 들린 검에 검강이 생성되었다. 검 위에 생성된 또 다른 검의 형상.

 그리고 그 검강이 한층 더 압축되어 다시 검의 형상을 잃었다. 명확한 형태를 가졌던 기운이 검 위에서 일렁이는 형상으로 바뀌었다.

 겉보기엔 그냥 검기의 발현인 듯싶지만, 그 본질은 전혀 다르다.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검강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검기의 압축체가 검강이라면, 자작이 지금 생성한 것은 검강의 압축체. 무형검(無形劍).

 실전에서는 그다지 쓰기 힘든 기술이다. 기술을 쓰기 위해 들여야 할 시간이 상당하니까. 그렇지만 지금 자작이 목적하고 있는 바는 인간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었다.

“후우.”

 자작이 자세를 잡았다. 다리를 살짝 벌리고 팔을 뒤로 당겼다. 방향은 정원과 이어진 백작가 저택 본관 쪽. 즉, 영주 내외의 거처.

“흐읍!”

 상단 베기.

 직후, 대폭발이 일어났다.

 콰과과과과광!!!

 무려 검강의 압축체다. 한계 이상으로 뭉쳐진 힘의 덩어리는, 검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압도적인 출력을 자랑하는 재앙이 되었다.

 한계 이상까지 압축해 뒀던 에너지의 덩어리. 그 에너지를 압축하던 힘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당연하게도 반작용이 따른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 일개 개인이, 그것도 검사가 일으켰다고는 믿기지 않는 대파괴.

 일격으로 거대한 본관의 3분의 1이 통째로 날아갔다.

 자작과 본관 사이에 위치한 정원이 통째로 뒤집혀 사방으로 흙더미가 비산했다. 잘게 부서진 흙가루가 퍼져나가 자욱한 먼지구름을 만들어냈다.

 참담하기 짝이 없는 파괴의 현장.

“후우.”

 그 파괴를 일으킨 장본인인 자작은 지체하지 않고 또다시 검 위에 검강을 덧씌웠다. 그리고, 압축.

“몇 번만 더 하면 찾아낼 수 있겠지.”

 대피처가 숨겨진 장소를 찾기 힘들다면 찾지 않으면 된다. 그 대신, 아예 숨겨져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리면 된다.

 그것이 ‘숨겨져’ 있을 수 있는 것은, 건물이건 지형지물이건 무언가 엄폐물이 존재할 때나 가능한 법이다.

 그것은 계획이라고도 부르기 민망한 원초적인 문제 해결 방법(무력). 그것이 가능한 것이 ‘검성’. 터무니없는 힘의 폭력을 구현화한 것만 같은 개인.

“?”

 카앙!

 자작이 검 위에 또다시 무형검을 생성하고 있는 그때, 먼지구름을 뚫고 하나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자작이 하던 일을 멈추고 가볍게 검을 휘둘러 화살을 걷어냈다.

 곧바로 먼지구름을 뚫고 쇄도해 오는 금발 벽안의 미인. 손에 들린 검에 검강이 덧씌워져 있었다.

 자작이 한순간에 자세를 고쳐 잡고 검격을 걷어냈다. 그리고, 반격.

“음?”

 검격을 날리던 자작이 움찔하며 검을 거둬 왼쪽으로 휘둘렀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화살. 어떤 방법을 쓴 것인지 화살에 오라가 덧씌워져 있는 데다 막대한 회전력까지 실려 있었다. 파괴력만으로 따진다면 검강에도 그리 뒤지지 않았다.

 경시할 수 없는 위력의 공격이라 안전하게 걷어내기로 했다. 금발 벽안의 습격자, 레이나는 그사이에 안전하게 거리를 벌렸다.

“…….”

 크레틸 자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습격자를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낸 초일류 검사라니.

 이내 먼지구름이 가라앉고 그 너머에 있던 궁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상당 부분이 날아간 지붕 위에서 시위를 당기고 있는, 건강미 넘치는 피부를 지닌 흑발 흑안의 미소녀.

 그녀가 활시위에 얹은 화살을 꼬아서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자작은 방금 전 화살을 날렸던 이가 그녀임을 확신했다.

“너희는 누구지?”

 자작이 물었다.

“당신을 막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되돌아온 단순명료한 대답.

“그렇다면 너흰 내 적이겠군.”

 자작이 표정을 굳히고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 * *

 시간을 되돌려, 자작의 습격이 성내의 인물들에게 알려졌던 때.

 레이나와 셀린은 한참 연무장에서 함께 수련하던 중이었다. 스승이 내린 지시를 따라서.

 수련에 한창 열중하고 있던 탓에 그녀들은 검성의 기습에 관한 내용을 다른 이들보다 늦게 전해 들었다.

 두 여인은 다급히 대피했다.

 사실 레이나의 경우엔 백작 부부, 그리고 형제들과 함께 대피 시설에 들어갔어야 했다. 그런데 수련 때문에 정보를 늦게 전달받아 그 타이밍을 놓쳤다.

 사실 중간까지만 해도 침입자가 검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주변인들의 대처가 안이했던 탓도 컸다.

 그래도 그녀는 도망치는 것이 가능했다. 그녀는 검호급에 이른 초일류 검사였다. 거기에 레인에게 전수받은 경신법이 있었다.

 실제로 백작 또한 그녀의 실력을 믿었기에 무리해가며 그녀를 함께 대피시키려고 들지 않은 것이었다. 아니었다면 그가 그리 쉽게 그녀의 신원 확보를 포기하진 않았을 터였다.

 셀린 또한 초일류의 경지는 아니지만, 궁술과 상성이 높은 최상위의 경신법을 익혔다. 레이나와 함께 달아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일단 두 여인은 함께 자작의 감각 범위 밖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자작이 저택 내부를 탐색하는 시점에 맞춰 다시 되돌아왔다. 생존자를 구출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은 온갖 파괴의 현장을 마주하게 되었다. 한쪽이 통째로 무너져 내린 내성벽부터 시작해서 온갖 건물들이 반파되어 있었으니까.

 그 시점에서, 레이나의 이성은 반쯤 무너졌다. 친분을 적잖이 쌓아온 가문의 기사들이, 병사들이 수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두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흥분한 그녀는 그 사실까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까득.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이를 갈더니 이내 신형을 움직였다. 그 방향은 크레틸 자작이 위치한 장소.

“안 돼요.”

 당연히 셀린이 만류했다. 그러자 레이나는 ‘그저 먼 거리에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하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녀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셀린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시야에 비쳐 들어오는 파괴의 현장. 여기서 레이나의 이성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크레틸 자작이 백작가 내의 사용인들을 모아서 한쪽 창고에 몰아넣었음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크레틸 자작의 대범위 공격에 수많은 인명 피해가 일어났을 것이라 착각했다.

 동시에 방금 전 목격한, 수없이 널브러져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가 착각한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으아아아!”

 그녀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자작을 습격해 버린 뒤였다. 셀린이 혀를 차며 그녀를 지원했다.

 물론 오해가 없었더라도 레이나는 자작을 막아설 수밖에 없는 입장이긴 했다. 자작의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딱 봐도 분명했으니까.

 그가 하슨 백작을 생포하려는 게 아니라 살해하려 하고 있음은 그가 무형검으로 무차별 파괴를 벌인 시점에서 확실히 드러났으니까.

 그렇게, 두 소녀와 자작의 대치 상황이 이루어졌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레이나가 물었다.

 그녀로선 자작의 지나친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적이긴 하지만, 그래 봐야 ‘영입된’ 인물 아니었던가. 그는 그저 용병일 뿐, 딱히 백작가에 원한을 가진 것도 아닐 텐데.

 대체 굳이 이렇게까지 일을 벌여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하슨 백작의 성정상 그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작과 원한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도 희박하건만.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다.”

 자작이 고개를 내저으며 간결하게 답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이유. 그에겐 그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하더라도 서슴없이 감수할 만큼의 절박한 사유.

 동시에 다른 이들의 희생을 강요해야만 하는, 제멋대로라고 평가받아도 어쩔 수 없는 이야기. 적어도 자작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어떤 변명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작은 레이나의 질문에 제대로 답해주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레이나는 그 대답을 납득하지 못했다. 자작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알지 못하는 그녀로선 납득할 수 없을 수밖에.

 결국 맞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

 시간에 쫓기는 것은 자작 쪽이다. 선공은 그가 취했다.

 단번에 날아드는 네 개의 검강. 그것을, 레이나가 필사적으로 보법을 활용해 피해냈다. 그런 그녀를 곧바로 따라붙는 자작.

 셀린이 겨누고 있던 활을 내쏘았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첫 번째에는 한 개. 두 번째에는 두 개. 세 번째에는 세 개. 네 번째에는 네 개의 화살을.

 각각 다른 방향, 다른 각도, 다른 위력으로 내쏘아진 화살들이 향한 끝에는 항상 자작이 존재했다. 모든 화살이 자작을 노리고 날아들어 자작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쯧.”

 자작이 혀를 차며 조금 물러났다. 바닥에 푹푹 소리를 내며 박혀 드는 화살들.

“하압!”

 그 타이밍에 맞춰 레이나가 검강을 뿌렸다. 자작이 그것을 똑같이 검강이 덧씌워진 검으로 걷어냈다.

 곧바로 레이나가 경신법을 이용해 급접근. 자작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마치-

‘그때의 그 녀석 같은데?’

 두 사람의 검이 맞붙어 불똥을 튀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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