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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서장 (101/249)
  •  101화. 서장

     크레틸 자작이 이번 영지전에 참여하게 된 것은 돈 때문, 정확히는 병약한 딸아이 때문이었다.

     시간을 되돌려, 딸아이의 치료를 장담한 정체불명의 무리가 막대한 금액을 요구했을 당시.

    “······그렇게 큰돈이 필요하다고?”

     자작은 크게 당황했다.

     그는 천생 무인이었다. 돈을 버는 방법 같은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혹자는 검성씩이나 되는 인물이면 뭘 해서든 돈 정도야 쉽게 벌지 않겠느냐고 말하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간단할까. 다스리는 영지가 있는 것도, 이끄는 상단이 있는 것도 아닌데. 거기에 시간제한까지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돈도 벌어본 사람이 잘 버는 법이다. 나라에서 지급하는 품위유지비만 가지고 생활을 꾸려온 자작은 그쪽 방면에 있어 영 젬병이었다.

     자작은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렀다. 방도를 찾았으니 어떻게든 해내면 될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주위에 발품을 팔아 무력을 요하는 일도 찾아보고, 그것으로도 안 되면 자존심을 죽이고 대귀족에게 손을 벌리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속에 능구렁이도 모자라 독사를 키우는 대귀족들에게 손을 벌리는 일만큼 리스크 높은 일도 없지만, 그래도 딸아이를 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어디인가.

     그런데 마침 그가 찾던 일이 떡하니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바이튼 자작가와 하슨 백작가 사이의 영지전이었다. 어떤 인물의 주선으로 바이튼 자작을 소개받게 된 것.

     자작은 뛸 듯이 기뻐했다. 하늘도 딸아이가 치료될 수 있도록 돕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바로 바이튼 자작과 계약을 맺고 영지전에 참여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했다. 승리만 하면 곧바로 딸을 치료하는 것이 가능했다.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패배한다고 해도 당장 딸이 죽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까지 급할 것은 없긴 했다. 그렇지만 부모 마음이란 것이 그럴 턱이 있나. 그는 정말로 자작군의 승리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이어진 전쟁에서 자작군은 대패했다. 심지어 크레틸 자작 본인도 적지 않은 부상을 입고 말았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아친다고 했던가. 자작이 한층 절박하게 만드는 소식이 전달되어 오기까지 했다.

     수도에 있는 자작 본인의 저택에서부터 날아온 전서구. 그 전서구가 전해온 소식이 자작의 평정심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말았다.

     적혀 있던 내용은 딸아이의 병세가 갑작스레 악화되었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소식. 주치의의 견해대로라면 딸의 목숨은 한 달도 남지 않았단다.

     자작은 일순 온 세상이 색을 잃은 듯한 착각을 느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떠나오기 전 주치의가 자신에게 전한 진단 결과.

    [아가씨의 병은 여전합니다. 치료는 무립니다만, 그래도 최대한 몸을 돌보는 데 힘쓰면 일 년 정도는 어떻게든 버티실 수 있을 겁니다.]

    [최대 일 년이라곤 했지만, 언제 갑작스레 악화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실정이긴 합니다.]

     딸아이의 병환이 이렇게 갑작스레 악화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물론 ‘언제 악화될지 모른다’는 진단을 잊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사람이란 게 보통 위와 같은 진단을 들으면 ‘1년’이라는 부분을 가장 집중해서 듣게 되는 법.

     1년은 막연히 조금 먼 미래라고 느껴졌다. 그러나 한 달은 정말로 너무나도 가깝게 느껴졌다. 자작은 치밀어 오르는 조바심에 좀먹히기 시작했다.

     자작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히 몰려버리고 말았다.

     오죽했으면 계약이고 전쟁이고 전부 때려치우고 수도로 되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귀족으로서의 평판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알면서도.

     그러나 귀족으로서 신용을 잃어버리게 되면 최후의 수단인 ‘대귀족에게 손 벌리기’조차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랬다간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터. 전장을 제멋대로 이탈할 수는 없었다.

     막사에 배치된 침상 위에 누워 몸을 회복하는 기간 내내 자작은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를 헤엄치느라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이 자작을 찾아왔다.

     그들은 자작에게 찾아와 제안했다. 백작성을 침공할 것을.

     당연하게도 자작은 그들의 제안을 처음엔 거절하려 했다. 그렇다고 할까, 고려할 가치가 없는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했다. 백작성 기습은 이번 영지전의 취지에 전혀 걸맞지 않으니까.

     안 그래도 자국의 힘을 깎아 먹는 전쟁, 영지전이다. 타국과의 전쟁과는 다르다.

     영지의 주인이 목숨을 위협받아도 할 말 없는 수준의 전쟁으로 인정받으려면 웬만한 명분 가지고는 안 된다. 그리고 이번 전쟁의 명분은 겨우 소규모 광산에 불과했고.

     물론 백작을 없앤다면 일단 전쟁의 승리는 바이튼 자작가에 돌아간다. 딸아이를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크레틸 자작 본인은 귀족 사회에서 몰매를 맞게 된다. 최소한의 암묵적인 룰조차 따르지 않는 자는 어느 세계에서나 배척받는 법.

     바이튼 자작이야 크레틸 자작이 제멋대로 폭주했다고 하면 그만이니 아무래도 좋겠지. 혐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큰 피해는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크레틸 자작의 입장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자작은 누굴 병신 취급하냐며 로브인들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이어진 그들의 설득은 자작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다. 단순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작의 심금을 울렸다. 어쩐 일인지 급격히 마음이 그들의 말을 따르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들의 말은 굉장히 상투적이었다. 모든 것은 딸을 위해서라는 둥. 지지부진한 전쟁에 붙들려 있기엔 시간이 부족하지 않냐는 둥. 욕 좀 먹는 게 자식을 잃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둥.

     솔직히 지나가던 개가 코웃음을 칠 설득이었다. 언변이 굉장히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허점도 굉장히 많았다. 그럼에도, 자작은 흔들렸다.

     그것은 절대 자연스러운 감정 변화가 아니었다. 당시 극도로 육신과 정신이 피폐해져 있었던 자작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크흐.’

     사내, 그러니까 크레틸 자작에게 제안을 건네러 온 이들의 선두에 선 화려한 로브를 걸친 마법사는 징그러운 웃음을 흘렸다.

    ‘될지도 모르겠다. 이만한 인물을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게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사내는 뛰어난 실력을 지닌 언령 마법사. 그의 발언에는 타인의 심층 심리를 강제하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우선 목적을 명확하게 설정하도록. 다른 모든 것에 앞서 ‘하슨 백작 살해’를 우선하도록. 그것이 딸아이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착각하도록.’

     사내는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 자작의 심층 심리를 조작해 나갔다. 상대가 초인이니만큼 어느 부분에서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주의에 주의를 기울였다.

     언령 마법은 만능이 아니었다. 상대의 심리를 멋대로 조종하는 게 가능한 힘이 아니었다. 상대의 감정을, 판단력을 비틀어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게 가능한 힘일 뿐.

    ‘다음으론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야 한다. 위화감을 느끼고 스스로 언령 마법을 깨부수지 못하도록.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특정 감정을 증폭시켜서 다른 감정을 뒤덮어 버리는 건데.’

     대화를 이어가며 로브인은 자작의 감정 한 가지를 살살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 감정은 바로, ‘죄책감’.

    ‘이자의 판단력을 흐릴 감정이라면 죄책감이 적격이지.’

     인간의 판단력을 흐리는 데 효과적인 감정은 여러 가지 있었다. 분노, 슬픔, 질투, 애정 등등. 그리고 그 중 크레틸 자작에게 가장 효과적인 감정은 죄책감일 것이라고, 로브인은 판단했다.

     크레틸 자작은 기사 출신 검성.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으니까.

    ‘백작성을 침공해 들어가면 그가 느낄 죄책감이 보통이 아니겠지. 그걸 이용한다.’

     로브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그의 경험상, 소위 '기사도'란 것에 심취해 있는 인물치고 이 방식이 통하지 않는 자가 드물었다.

     혹시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으로 하슨 백작령에 피해를 끼치고 있는 현 상황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좋다.”

     결국 자작은 그의 설득에 넘어갔다. 살짝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화려한 로브를 걸친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재차 징그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후, 자작이 머무는 막사를 나선 사내는 광소했다.

    “크하하하! 이렇게 쉽다니! 하늘이 돕는구나!”

     어떻게 틈이 보이면 손을 써 볼까 했는데 그야말로 천운이 따랐다. 원래라면 이런 잡기가 통할 상대가 아니건만.

    “고맙구나! 헬튼 백작!”

     안 그래도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기 위해 사전에 공작을 펼쳐뒀었다. 그런데 결행일이 되니 아예 육체까지 만신창이가 되어 있지 않은가. 이게 하늘이 돕는 것이 아니고 뭔가.

     그는 자신에게 배정된 막사로 돌아간 후 상관에게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서신엔 아주 간단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성공했습니다. 백작성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백작가 측에서 가장 우려했던, 그러나 그럴 일은 없을 거라 낙관했던 사태가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최악의 형태로.

     안 그래도 이 전쟁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가 난센스인 초인이, 판을 뒤엎어버릴 생각으로 가득한 조커로 돌변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크레틸 자작은 절박했다. 딸아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선 반드시 전쟁에 승리해야만 했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가 목적한 바는 단순하고도 명확했다. 그것은, ‘하슨 백작 살해’. 바이튼 자작을 제외한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원하지 않는 전쟁의 종결 형태.

     전쟁의 명분은 광산의 소유권 주장. 겨우 그 정도로 시작된 전쟁이었다. 국왕으로부터 정식으로 작위를 인정받은 영주의 목숨이 걸릴 정도의 사안은 절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하슨 백작이 목숨을 잃게 되면 이어지는 결말은 그리 좋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백작가는 잠시 혼란을 겪겠지만 이내 제자리를 찾을 터였다. 후계자에게 작위를 계승시킴으로써.

     영주가 죽는다고 백작령이 자작령에 넘어가거나 하진 않는다. 애초에 광산의 소유권 분쟁일 뿐인 전쟁이니까.

     그렇게 안정을 찾은 백작가가 후에 바이튼 자작가를 어떻게 대할지는 뻔했다. 이어지는 것은 전쟁의 연쇄뿐이다. 국가나 국왕으로선 절대 달갑지 않을.

     그러나, 그럼에도, 크레틸 자작은 하슨 백작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영지전을 승리로 이끌어 치료비를 제공받기 위해.

     본인의 육체 제어 능력, 그리고 아낌없이 사용한 포션으로 완전히 제 컨디션을 찾은 자작.

     그가 아군 진영을 몰래 빠져나왔다. 계획을 말해 봐야 자작가 측 인사들은 분명 반대할 터. 혼자서 강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려 초인의 탈주다. 아니, 총지휘관의 탈주다. 분명 자작군 진영에 상당한 혼란이 일게 될 터였다. 그러나 크레틸 자작은 개의치 않았다.

     모든 것은 딸아이를 위해서. 지금도 사경을 헤매고 있을 그 안타까운 소녀를 위해서.

     자작은 며칠에 걸쳐 인적이 없는 길을 골라 조심스레 이동했다. 헬튼 백작이 상황을 인지하고 추격해 오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준비물 하나 없이 최소한의 식량만을 챙겨 이동한 탓에 체력이 상당히 축났지만, 자작은 개의치 않았다. 계획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을 테니.

     그리고 도달했다. 하슨 백작령의 중심지, 백작성에.

    “도착했군.”

     영지전이 벌어져 경계가 강화된 것일까.

     성문의 경계가 상당히 강화되어 있었다. 그래도 실제 전선은 이곳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탓인지 아예 봉쇄되어 있지는 않았다.

     물론 검성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수준의 경계는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애초에 검성의 참전 자체가 난센스인 전쟁이었다. 일개 시골 영지인 하슨 백작가 자체의 힘만으로는 대비한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존재가 바로 ‘초인’.

     배치된 인력은 그저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비상사태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총사령관인 크레틸 자작을 대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전력이 한참 부족할 수밖에.

     솔직히 백작가가 안이한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크레틸 자작이 ‘상식적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가정하에 병력을 배치한 것이니까.

     그 누가 바이튼가에 고용됐을 뿐인 자작이 극단적인 선택을 내릴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을까.

     특히나 기사 출신이라 국왕의 심기를 거스를 법한 행동은 웬만해선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그 자작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두 가문 사이의 자존심 싸움’ 정도로 주변인들에게 여겨지고 있음을 모를 리가 없는 자작이.

     그러나 상식이 항상 옳지는 않은 법이다. 극히 드물긴 하지만 그것이 깨어질 때도 있는 법. 백작가는 그렇게 재앙을 맞이했다.

    “후우.”

     자작은 굳이 자신을 숨기지 않고 곧바로 성문 정면으로 향했다.

     어차피 저만큼 경계하고 있다면 아예 들키지 않을 수는 없다. 굳이 모습을 감추며 이동하기 위해 힘을 빼느니 차라리 대놓고 진격해 적대하는 이들을 분쇄할 생각이었다.

     다만 얼굴까지 가리는 투구는 착용했다. 이것으로 잠시나마 상대측에 혼란을 줄 수 있으리라.

    “누구냐!”

    “멈춰라! 신원을 대라!”

    “…….”

     당연한 수순으로 병사들이 제지했다. 크레틸 자작은 대답 대신 허리춤에 걸린 검을 뽑아 들었다.

    “어, 어?”

    “뭐야?”

     그 모습을 보고 ‘뭐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병사들. 그들은 다음 순간 경악했다. 자작이 눈 한 번 깜빡일 사이에 지근거리까지 접근해온 탓.

    “컥!”

    “크악!”

     두 병사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자작이 검면으로 복부를 후려쳐버린 것이었다.

     그 모습에 주위 다른 병사들이 기겁해 소리쳤다.

    “적습이다!”

     * * *

     대혼란이 일어났다.

     백작가는 적습을 해온 인원이 한 명뿐이라는 사실에 처음엔 상당히 안이한 대처를 했다. 그저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제압되었다는 정보를 토대로 다섯의 기사를 파견했을 뿐.

     순식간에 기사들이 제압되었다. 그리고 침입자가 ‘검성’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그때부터 백작성 내에 초비상이 걸렸다.

     전 병력이 동원되어 자작을 막아섰다. 일반 주민들은 전부 집 안으로 피난해 문을 닫아걸었다. 검성 한 사람의 습격은 수백 병력의 침공보다도 백작성 내 인물들을 당황케 만들었다.

     크레틸 자작은 묵묵히, 조금도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잘 닦인 대로에 뚜벅뚜벅 발소리를 울리며.

     가로막는 적들은 전부 쓰러뜨렸다. 그 누구도 그의 발걸음을 머뭇거리게조차 하지 못했다. 병사도, 용병도, 기사도.

     목숨을 잃은 이는 없었다. 자작이 힘을 조절한 탓. 되도록 목숨을 잃지 않도록 온정을 베푸는 자작이었다.

     자작은 스스로가 굉장히 경우 없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최소한의 암묵적인 룰조차 어기면서까지 승리를 갈구하고 있음을.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의 아집에 의한 피해자들이다. 그러니 최소한 목숨은 잃지 않도록 조절하자.’ 라고.

     그것은, 어찌 보면 위선. 그리고 모순이 가득 찬 감정.

     이미 전장에서 백작가 측 병력을 수없이 베었던 자작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작은 자비 아닌 자비를 베풀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불안정한 정신 상태 탓이었다. 그의 감정 상태는 굉장히 들쭉날쭉했다.

     이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낄 거라면 차라리 다른 길을 택하면 될 텐데, 그 간단한 판단조차 현재의 자작에겐 불가능했다.

     그런데 의외로 내성 성문 앞에서 그의 발걸음이 잠시 멈춰졌다. 그를 가로막은 상대는 병사도, 기사도 아닌 일반 영지 주민들이었다.

     주민들은 밀집해 모여 성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슨 백작은 귀족 중 드물게 영지민들을 위하는 인물. 상당히 인기가 좋았다.

     아무리 딸아이의 목숨 때문에 이성이 살짝 마비된 자작이라지만 이들을 쓰러뜨리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그 정도로 떨어지진 않았다.

     적어도 전쟁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일반 백성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할 수는 없었다. ‘죄책감’이 비상식적으로 증폭된 지금은 더더욱.

     그래서 자작은 힘을 조금 낭비했다. 영지민들을 뚫고 지나가지 않고 그 옆, 성벽을 부수고 지나갔다.

     콰아아아아아앙!

     바윗덩어리를 쌓아 만든 두꺼운 성벽 한쪽을 통째로 부숴버리고 지나가는 자작. 암만 그라도 상당한 힘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힘을 들인 만큼 그 효과가 곧바로 드러났다.

    “으으.”

    “저게 무슨.”

     영지민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정말로 무의미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들은 더 이상 어떻게 그를 막아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결국 슬금슬금 자리를 이탈해 달아났다.

    “후우.”

     자작이 한 차례 숨을 고르고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영지민들이 달아나면서도 자신을 힐끗힐끗 돌아보는 것을 무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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